나만의 일을 맘껏 하고 싶었다대부분의 샐러리맨들은 멋진 창업을 꿈꾼다. 하지만 막상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창업에 성공한 사람은 드물다. 남들 다 하는 음식점을 여는 게 고작인가 하면, 막상 직장경험을 살려 새 출발을 하지만 성공이 보장되는 게 아니다. <이코노미플러스>가 창업경영연구소와 함께 직장 경험을 바탕으로 창업한 3인의 도전기를 분석했다. 이들의 도전기를 보면 창업에서 우연한 성공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진 후 새 출발을 한 이들의 ‘현장’ 경험을 통해 어떻게 하면 실패의 가능성을 줄이고, 성공할 수 있는지 들여다본다.
벤처기업에서 온라인 사업을 담당했던 고모씨(38)는 지난해 회사를 관두고 부동산 관련 인터넷 포털업체를 창업했다. 하지만 결과는 쓰디쓴 실패로 끝났다. 자신의 온라인 사업에 대한 노하우와 부동산 중개업을 하던 친구의 경험을 합쳐 어느 정도 전문성을 확보했다고 자신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았던 것이다.
“회사 다니는데 지치고, 한계를 느껴 창업을 했어요. 시장조사도 하고, 1여 년의 준비기간도 거쳤죠. 온라인 사업 경험을 바탕으로 제법 멋진 부동산 포털을 만들어 막상 뚜껑을 열었지만 돈이 되지 않더라고요.”
그에게 남은 것은 3000만원에 달하는 빚과 원망스런 아내의 눈초리다. 그는 창업에 실패한 이후 재취업하기 위해 한 뭉치의 이력서를 들고 다니고 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고씨처럼 직장생활의 노하우를 이용해 창업을 하더라도 성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아무런 준비도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시도하게 되는 소자본 창업은 실패로 끝나기 일쑤다. 소자본 창업으로 가장 많이 하는 음식업의 경우 1년 안에 98%가 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30대 직장인의 경우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지만, 막상 회사를 관둬야 하는 상황에서는 ‘뭐든 창업을 하면 먹고는 살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나서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처럼 ‘나만의 경쟁력’이나 ‘나만의 무기’를 개발해 두지 않으면 치열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하지만 회사에 충성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과 전문성을 강화해 조직으로부터 독립하는 탈(脫)샐러리맨 유형의 직장인이 점차 늘고 있는 추세다.
직장에 과감히 사표를 내고 창업에 성공한 사람들은 어떨까. 이들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회사생활을 하면서 ‘과연 회사에 다니는 것만이 능사일까’란 회의가 들었다고 했다. 어차피 ‘사오정’, ‘오륙도’로 직장에서 내몰릴 바에야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창업을 해서 탄탄하게 자리를 잡자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는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직장생활의 경험과 노하우를 최대한 활용해 트렌드에 맞는 아이템으로 창업했다는 점이다. 또 전문성과 함께 차별화 된 경쟁력을 확보한 것도 비슷하다. 특히 이들은 창업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직장에서의 열정이 창업에 그대로 이어진다면서 직장생활에 최선을 다하라고 주문했다.
직장이나 현장에서 충분할 정도의 전문성을 쌓은 후에 홀로서기를 결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독립에 앞서 자기개발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와 효율적인 자기경영, 혁신적인 학습법을 통한 지식슥듭 등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직장 경험 최대한 살려야
먼저 이들은 직장의 경험과 지식을 최대한 활용했다. ‘돈’이 되는 유행 아이템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아이템을 선택한 것이다. 창업은 전쟁과 같다. 적성이나 성격, 경험과 지식을 반영해서 이겨 나갈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특히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의 아이템 선택은 일의 능률도 배가시키는 효과가 있다. 아무 경험도 없는 외지에 뛰어든 경우 전문성 부족과 운영 미숙으로 급기야 폐업의 위기에 몰리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준비해 차별화된 나만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샐러리맨에서 창업가로의 변신은 일생일대의 중대한 결정이다.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고 오랫동안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아이템이 동일한 프랜차이즈 가맹점일지라도 서비스나 마케팅을 어떻게 차별화하느냐에 따라 매출이 큰 차이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장 경험을 활용하더라도 트렌드에 부합하는 아이템을 찾아야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활용한 창업 아이템을 선정하더라도 트렌드에 부합하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창업은 소비자에게 상품을 판매해 수익을 극대화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소비 트렌드를 파악하고, 트렌드에 부합하면서 소비자의 니즈에 맞는 아이템을 선택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창업 아이템은 평소에 불편을 느껴왔던 것을 선택하는 편이 좋다고 말한다.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평소에 가졌던 불만은 곧 잠재고객들도 공통적으로 누군가 해결해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일 가능성 높기 때문이다.
창업이후 떠날 직장이라고 하더라도 활용할 여지는 많다. 경험이 풍부한 직장 상사는 조언자가 될 수 있다. 또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의 명성을 지렛대로 삼아 보다 많은 고객을 유혹하는 전략도 중요하다.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과 비슷한 종류의 회사를 창업한다면 지금의 고용주를 미래의 사업파트너로 만들어 불필요한 경쟁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과도한 투자와 지나친 수익성 기대는 금물이다. 초보 창업을 하면서 처음부터 높은 매출, 많은 이익을 목표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친 수익성 기대는 과도한 투자를 초래할 수 있다. ‘조금씩 갚으면 되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는 무리한 투자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 안정적인 투자와 성급한 기대를 버리고 가벼운 창업으로 출발하는 것이 좋다.
또 전문가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건강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은 비교적 규칙적이라 건강관리를 할 수 있지만, 창업을 하면 그렇지 못하다.
이상헌 창업경영연구소 소장은 “즐겁게 일하려는 마음과 다양한 경험을 쌓으려는 자세로 일해야 한다”며 “수익에 대해 지나친 욕심을 부린다면 건강도 잃고 사업도 망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직장인 창업 시 유의해야 하는 5계명
1. 직장의 경험과 지식을 활용하라.
2. 철저하게 준비해 차별화 된 나만의 경쟁력을 확보하라.
3. 트렌드에 부합하는 아이템을 찾아라.
4. 지나친 수익성 기대는 금물이다.
5. 즐거운 마음으로, 건강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
월급쟁이 편집인에서 오너 출판인으로 변신
“50~60대에도 내가 원하는 책 만들고 싶었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 주택가. 지하철역에서 걸어 족히 20분은 걸리는 외진 곳에 ‘인문·사회과학의 대중화’라는 기치를 내건 출판사 ‘휴머니스트’가 있다. 마당 한쪽 감나무에는 빨간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 편안하고 자유스러운 사무실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일부러 조용한 주택가를 택했어요. 요즘같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좀 느긋하게 살아보자는 거죠. 특히 작가들이 지하철역에서 걸어오는 동안 생각을 많이 하라는 의미에서 안성맞춤인 사무실입니다.”
김학원(42) 대표는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기획물로 베스트셀러를 기록해 출판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불린다. 김 대표는 운동권 출신으로 전노련(전국노동단체연합) 기관지 <노동 전선> 등의 일로 출판계와 인연을 맺었다. 노동 현장과 감옥에서 1980년대를 지낸 그는 1992년 도서출판 새길에서 편집주간을 맡았으며, 1994년 푸른숲으로 옮겨 2000년 그만둘 때까지 월급쟁이 편집인이었다. 그때까지 그가 만든 책은 모두 280여 종. 180여 종이 인문·사회과학 분야 관련 기획물이었다.
인문교양서 기획에 대한 남다른 능력으로 그는 출판업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편집인이었다는 것이 출판업계의 평가다. 그는 기획과 시각화, 그리고 마케팅에 따라 인문학 분야도 베스트셀러 시장이 항상 열려 있다고 말했다.
특히 인문서라고 해서 그래픽과 일러스트 수준이 뒤떨어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가 만든 ‘살아 있는 과학교과서’와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는 세계 7개국에 수출되면서, 그래픽과 일러스트 수준이 세계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인문·사회과학서가 ‘돈’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5년 전 기획해 만든 책들이 한 번에 몇 만 부가 팔리지는 않았지만, 요즘도 꾸준히 팔리고 있습니다.”
그가 인문교양서적 출판에 집중하는 것은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에서 출발한다. 비즈니스와 취미 등 실용서 등 당장 필요한 책을 만드는 것보다 미래의 지혜로 삼을 수 있는 책을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대적 환경이 그렇잖아요. 편견과 쏠림의 경험도 갖고 있지만 다양한 소통의 방법을 가진 것은 장점이죠. 우리 세대의 열린 사고를 다음 세대에 넘겨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5년간 휴머니스트가 내놓은 책은 200여 종. 대표적인 것으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등이 꼽힌다. 2011년까지 1000종의 교양서적을 만든다는 것이 김 대표의 계획이다.
“밀리언셀러를 만들겠다는 욕심은 오히려 독자를 잃게 만듭니다. 100만 부의 책을 팔기 보다는 1000명의 독자를 만날 수 있는 책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휴머니스트는 설립 이후 지금까지 매년 2배씩 성장했다. 지난해에는 책의 양과 질 면에서 가장 두르러 진 활동을 한 출판사로 뽑히기도 했다.
한때 그는 평생 월급쟁이 편집자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내에서 편집자로서는 거의 최고 연봉을 받았던 그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창업은 생각지도 않았다.
“40대를 앞두고 주위를 둘러보니 50~60대 편집자는 아무도 없는 겁니다. 40대가 되면 모두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보통이었죠. 문득 50~60대를 그려봤습니다. 내가 원하는 책을 만들며 살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월급쟁이를 해서는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평생 책을 만들 수 있는 길은 출판사를 차리는 것이었어요.”
그는 마지막 도전이라고 생각하고 사표를 던졌다. 회사 동료와 주변 지인들은 모두 그를 말렸다. 그는 사표를 던진 지 이틀 만에 가족들과 함께 해외여행을 떠나 버렸다. 주변의 만류에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정처 없이 떠난 해외여행은 5개월이나 지속됐다. 이 5개월간이 그에겐 소중한 재충전의 시간이 됐다. 그는 여행을 하면서 제대로 된 출판사를 만들어 보자고 다짐했다.
“편집인 생활을 그만두니까 오히려 예전보다 큰 생각을 할 수 있더라고요. 바닥에서부터 시작해보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경험이라는 자산이 있었으니까 자신 있었죠.”
37평 아파트를 팔아 24평 전세로 옮겨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다. 사무실은 따로 둘 형편이 되지 않아 아는 선배가 있는 출판사에 책상 하나를 빌려 시작했다. 간혹 잘나가던 편집자들이 회사를 따로 차리면서 휘황찬란한 사무실을 만드는데 자금의 절반을 소진하는 것을 봐 왔기 때문이다.
“어떤 출판사를 만들어야 할까 하고 고민을 많이 했죠. 돈을 벌기보다는 가치 있는 삶을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책을 만들자고 결심했죠. 그때 5년, 10년 후의 도서목록까지 정했어요.”
경력 있는 후배들도 모으기 시작했다. 이들과는 사장과 편집자, 직원이라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모두 편집주간이라는 수평적인 관계로 설정했다. 직원들이 아니라 동업자였던 셈이다. 휴머니스트는 지금도 편집주간들이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각자 책을 맡아 진행하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발로 뛰며 시장조사”
5개월간 그야말로 발로 뛰는 시장조사가 이뤄졌다. 전국의 모든 서점을 돌아다니며 담당자들을 만나고 어떤 책이 필요한지 분석했다. 이러한 시장조사를 통해 나온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대안 교과서였다. 중·고교생을 위한 제대로 된 교양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과서라는 것이 공통적인 질문에 공통적인 답변만 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문제풀이 암기식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기초학문의 개념과 함께 창의적인 사고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교과서를 만들기로 했다.
“당시 대기업들이 출판에 수십억원씩 투자할 때였죠. 하지만 휴머니스트는 그 정도의 자본력은 없었습니다. 전문가로서의 경험과 알고 있는 저자들을 통해 튼실한 책을 만드는 것이 가장 큰 경쟁력이었죠. 특히 10여 년간의 편집자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수많은 저자들이 밑거름이 됐습니다.”
그의 대안 교과서는 교사, 학부모, 학생 등 100여명에 대한 3년간의 인터뷰와 조사를 거친 후 만들어졌다. 이를 위해 매년 2억원이라는 거액 투자됐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철저한 준비없는 기획은 망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수년간의 준비 끝에 내놓은 책들이 호평을 받으면서 휴머니스트는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휴머니스트는 설립 3년 만에 업계 50위에 들어서더니, 올해에는 20위권 안에 들었다. 내년에는 10위권 진입도 예상될 정도로 급성장하고 있다. 창업 첫해에는 한 푼의 월급도 가져가지 못했지만 요즘 그의 연봉은 8000만원 정도. 창업하기 전 억대 연봉에 미치지 못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회는 없다.
이러한 성공 요인으로 김 대표의 독특한 영업방식이 꼽힌다. 서점에는 적게 공급하는 것이 원칙이다. 적게 공급하다 보니 반품율도 낮다. 대안 교과서나 교양서적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서점보다는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등 학교 영업을 강하게 추진하고 있다. 영업 일선에는 김 대표가 직접 나선다. 책을 만든 사람이 영업을 가장 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서점 공급 가격율을 70%로 유지한 것도 주효했다.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55~60%의 가격으로 공급하는 것에 비하면 높은 수준이다.
“창업 첫해 대형서점과 공급 가격을 놓고 줄다리기를 했죠. 그 서점은 책을 받아주지 않으면서 제가 손을 들기를 바랬어요. 하지만 끝까지 버텼죠. 휴머니스트의 책이 방송을 타면서 그 서점이 먼저 손을 들었습니다.”
너무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도 양질의 책을 만드는데 한 몫을 했다. 그는 잘 팔리는 책만 찍어내려고 했으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성공가도를 달려온 김 대표도 요즘은 위기를 느낀다. 바로 인터넷과 영상 미디어와 경쟁해야 하는 활자매체의 근본적인 위기감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위기를 출판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로 보고 있다.
“인터넷이나 영상 미디어와 벌이는 경쟁은 결국 콘텐츠에서 판가름 날 겁니다. 튼실한 기초 교양 콘텐츠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종이책의 경쟁력입니다. 이러한 콘텐츠를 어떤 방식으로 재가공해 독자들에게 보여줄 것인가가 문제죠.”
김 대표는 요즘 종이에서 분리한 콘텐츠를 홈네트워크와 모바일, 오디오와 그래픽 영상을 결합해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한편 그는 기업의 CEO들에게 경영·경제서적외에도 철학이나 역사 서적에도 관심을 가지기를 바랬다. 당장의 트렌드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3~5년 후의 시류를 읽기 위해서는 역사와 철학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윤정 피알게이트 사장
홍보대행사 근무 3년만인 28세에 창업
“내 방식대로 일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홍보가 뭔지도 몰랐어요. 창업요? 몰랐으니까 했죠. 알았으면 하지 못했을 거예요. 하고 싶은 것을 하자는 생각에 사표를 던지고 창업을 했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월급쟁이일 때가 가장 편했던 것 같아요.”
홍보대행사를 설립한 지 벌써 8년째. 이제는 홍보 전문가로 불리지만 강윤정(35) 사장이 홍보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우연이었다. 그는 대학 4년 때 나이키에서 홍보 담당자를 뽑는다는 말을 듣고 한번 응시해보기로 했다.
“사실 방송국 아나운서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공부도 하기 싫었고, 홍보가 뭔지 궁금하기도 해서 한번 도전해 봤죠. 하지만 보기 좋게 떨어졌어요. 그런데 나이키의 인사 담당자가 홍보대행사를 소개해 준 게 계기가 됐어요.”
광고 제작에는 관심이 있어 광고대상에 작품을 출품한 적이 있었던 강 사장은 단순히 기획에서부터 마무리까지 혼자서 할 수 있는 홍보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광고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도전하기에 너무 힘든 길이었어요. 그렇다고 홍보가 쉬운 건 아니었지만, 왠지 흥미가 끌렸어요.”
홍보대행사에 들어가 처음 한 일은 번역이었다. 한글에서 영어로,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면서 처음에는 홍보에 회의도 느꼈다. 실무에 들어서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작정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트레이닝 기간인 3개월이 지나니까 홍보를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실무를 몰랐으니까요. 힘들기도 해서 그만두고 싶었지만 이마저도 견디지 못하면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아 버틴 게 3년이었어요.”
강 사장은 3년간 홍보 일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야말로 밑바닥부터 훑고 다양한 기업을 담당하면서 노하우를 쌓았다. 열심히 매달린 덕분에 유능하다는 칭찬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더욱 완벽한 홍보를 해보고 싶었다.
홍보 업무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면서 새로운 도전의욕이 치솟아 오른 것이다. 좀 더 완성도 높은 홍보를 하고 싶었고, 자기만의 브랜드를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택한 길이 바로 창업이었다. 홍보업무를 밑바닥부터 체험하고 자신감과 열정 하나로 창업한 강 사장은 홍보업계의 당찬 여성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왕 일을 한다면 더 깊게 파고들어서 제대로 하고 싶었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 방식대로 할 수 있으면서, 성과는 같이 나눌 수 있는 좋은 회사를 만들고 싶었죠.”
28세의 나이로 창업을 할 때는 주변에서 말렸지만 그럴수록 도전의식은 더 커졌다. 무모하다느니 집안에서 밀어주고 있나 보다는 식으로 바라볼 때는 더 그랬다. ‘제까짓 게 하겠어?’라는 시선에 오히려 열정을 불태웠다. 주위의 만류에도 일단 밀어붙였다.
“주위에서 일을 하고 싶으면 그냥 프리랜서를 하라는 사람도 있었고, 그냥 회사에 다니면서 편하게 일하라는 사람도 있었어요. 당시 홍보대행사들이 난립하면서 시장도 만만치 않았는데 그냥 저질렀죠.”
열정만은 남달랐지만 사업은 쉽지 않았다. 인맥도 없어 그야말로 바닥부터 시작해야 했다. 편하게 일할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직장 다니면서 모은 돈으로 조그맣게 시작했기 때문에 사실 망해도 잃을 게 별로 없었어요. 크게 시작했다면 성공하기 위해 조급했을 거고, 그랬다면 더 힘들었을 겁니다. 하나씩 하나씩 하자고 다짐했죠.”
어린 나이의 여성이라는 점은 창업 초기 더욱 불리하게 작용했다. 강 사장은 어느 기업에 프레젠테이션을 하러 갔다가 ‘어린 여자애’라며 거들떠보지도 않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하고 있는데 면전에서 그냥 가라고 하더군요. 너무 어리다는 게 이유였죠. 나이와 외모로만 따지는 것에 너무 화가 났어요. 오히려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퇴짜를 주던 기업의 경쟁사를 클라이언트로 영입해 그 수모를 갚았어요. 예전보다 많이 줄었지만 요즘도 나이를 물어보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자신 있는 분야에 집중해야 성공”
처음에는 일회성 프로젝트로 일을 시작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실력이 검증 안 된 회사에 연간 계약으로 일감을 맡기는 회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고객이었던 명품의류업체의 일을 멋지게 성공하게 되면서 이를 장기 클라이언트 계약으로 성사시켰을 때가 가장 기뻤다고 한다. 이때부터 일 잘한다는 입소문이 번지면서 또 다른 장기 클라이언트 계약이 잇따랐다.
강 사장이 보유하고 있는 클라이언트는 현재 SK커뮤니케이션즈, 폴크스바겐, 대교 베텔스만, 유니레버 등 30여 개 사. 올해 매출만도 25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창업 첫 해 2개 정도의 장기 계약 기업을 통해 5000만원 매출을 올린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성장을 한 것이다.
피알게이트가 업계에서 단기간에 자리를 잡게 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강 사장은 단순 홍보로 승부를 걸지 않았다. 기업이나 상품의 마케팅 활동에 중점을 두고 그 흐름을 파악해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덧붙인 것이 적중했다.
“아는 분야에 집중한 것도 성공의 요인이 된 것 같습니다. IT 분야 등에서 돈을 많이 벌 수 있지만,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 없이 섣불리 나섰다가는 오히려 실패했을 겁니다. 잘 아는 분야인 소비재와 패션 등에 집중한 것이 적중했어요. 여기다 한번 한다면 밀어붙이는 저돌적인 성격도 한 몫 했을 거예요.”
그는 제품이나 기업별 담당자를 정할 때 그 분야를 가장 잘 아는 직원에게 일을 맡긴다. “좋아하는 것을 하게 해줘야 일을 잘하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에서다. 그래서 그의 직원중에는 경쟁사로 이직한 직원이 한 명도 없다.
그는 창업 이후 과실을 서로 나누는 좋은 회사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먼저 대기업이나 경쟁사 등 여러 회사들로부터 본받고 싶은 것을 최대한 수용해 ‘회사 매뉴얼 북’으로 만들었다. 기업 경영에 대한 노하우가 부족했기 때문에 잘 나가는 회사의 정책을 따른 것이었다.
“직원이 10명 정도일때는 거의 가족적인 분위기였죠. 그런데 20명이 넘게 되자 주먹구구식 경영으로는 조직력을 갖추기가 쉽지 않았어요.”
휴가나 상여금 지급 등 복지 부문은 삼성전자를 벤치마킹했다. 다른 홍보대행사에서 안식월을 시행하는 것을 보고 그것도 도입했다. 홍보대행이라는 일이 고객과 언론 사이에서 진을 빠지게 해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직원 100%가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일하기 편한 회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특히 아이를 둔 직원들을 위해 탄력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8년간의 경험을 통해 투명한 회사를 만들기 위한 나름대로의 경영 철학도 세웠다. 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 원칙에 어긋나는 접대와 뒷거래는 고객을 놓치더라도 하지 않는다는 강 사장의 고집은 창업 이래 계속 유지되고 있다.
강 사장은 내년을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해로 보고 있다. 그동안 소비재 중심의 홍보에서 이제 기업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로에 섰기 때문이다. 홍보대행 사업을 활용한 새로운 사업도 구상중이며, 해외 진출도 계획하고 있다.
“단순 홍보대행사가 아닌 명실상부한 종합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회사로 키울 겁니다. 세계에 대한민국을 알리는 홍보를 하는 것이 꿈이죠.”
이상인 e-붙임머리 대표
가발 하청업체 직원에서 가맹사업 대표로
“하청업체 깔보는 게 속상해 회사 차렸죠”
“e-붙임머리는 요즘과 같이 외모를 따지는 시대 트렌드를 잘 파악한 창업 아이템입니다. 개성에 따라 저렴한 가격으로 머리 길이를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어요."
‘올링’과 ‘티아라’라는 기술로 특허를 받아 붙임머리 대중화에 나서고 있는 이상인(39) e-붙임머리 사장은 붙임머리의 성장 가능성에 대해 자신감을 드러냈다. 붙임머리는 짧은 머리나 숱이 없는 머리, 손상이 심한 모발을 가진 고객들을 위해 붙이는 머리를 말한다.
e-붙임머리는 ‘외모 가꾸기’ 열풍으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외모에 신경 쓰는 고객들이 늘어나면서 착안한 것이다. 올링은 작은 고리를 이용해 인모(人毛)를 이어붙이는 기법으로 기존 붙임머리의 배김 현상을 크게 개선했다. 지금까지 미용실에서 실리콘을 이용해 시술하는 붙임머리보다 훨씬 가볍고 지속력도 우수했던 것. 기존의 실리콘 제품은 시술 시간도 길고 머리카락이 엉키거나 손상되는 부작용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고가의 가격이 가장 큰 단점이었다.
티아라는 특수 물질을 바른 테이프로 머리를 이어붙이는 기법으로 올링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제품이다. 티아라는 직접 머리를 쓸어 올려도 티가 안 날 정도로 정교하다. 이들 두 제품은 기존의 제품에 비해 훨씬 가볍고 정교한 데다 가격이 절반 이상 저렴해 비싼 가격 때문에 망설이던 수요자들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기존 미용실의 붙임머리 가격이 20만~70만원으로 고가인 데 반해 e-붙임머리는 5만원대로 가격이 저렴해 젊은 층의 수요가 폭발적이라는 설명이다.
e-붙임머리는 이 같은 올링과 티아라 기술을 발판으로 지난 2003년 본격적으로 붙임머리 시장에 뛰어들어 단숨에 업계 대표 브랜드로 뛰어올랐다. 이 회사는 특히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 협찬한 이후 주문이 쇄도하면서 성공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 사장은 1960년대부터 남자 가발 사업에 종사하던 처가에서 1993년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특허를 받은 기술도 남자 가발 사업을 하면서 터득한 것이다.
“유명 남성 가발업체에 제품을 납품하던 하청업체였어요. 가격과 품질 면에서 우수했지만 하청업체라는 한계를 벗어나기는 어려웠죠. 특히 수금을 하러 가면 몇 배를 남겨 먹는장사를 하면서도 대금 지급을 안 하는 겁니다. 굉장히 힘든 시기였어요.”
그러다 높은 가격 때문에 붙임머리 시술을 망설이는 고객을 보고 붙임머리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다양한 헤어스타일에 대한 욕구가 커져 가는 데다 고객층이 다양해 성공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이후 2000년 초반부터 사업 구상과 함께 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창업을 한 것은 직장 생활을 한 지 10년 째인 2003년.
제품이 개발 되기 전까지 그는 중국에서 들여온 인모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처가 쪽의 남자 가발에 대한 노하우를 발판 삼아 기존 붙임머리 제품의 단점을 극복하는 데 집중했다.
먼저 작은 고리를 이용해 100% 인모를 이어붙이는 ‘올링’을 개발하고, 특수물질을 바른 테이프로 머리를 이어 붙이는 ‘티아라’는 최근 개발에 성공했다.
“티아라는 경기도 안산의 연구소를 거의 6개월 동안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만든 제품입니다. 열에 너무 강해서 제거가 어려워도 안 되고, 또 너무 약해서 스타일링 연출이 힘들어서도 안 되기 때문에 적당한 온도에 견딜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실험을 거듭했습니다.”
마케팅은 인터넷을 활용한 홍보에 중점을 뒀다. 신세대의 경우 붙임머리를 하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자주 한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문의는 인터넷을 통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속눈썹 시술 손님도 늘고 있다. 두꺼운 인조 눈썹이 무겁고 처진 느낌을 주는 것과 달리 얇고 부드러운 실크 천연모 눈썹을 사용해 고객들에게 인기가 높다는 것. 이 사장은 “얇고 부드러운 실크 천연모를 사용해 가벼운 느낌을 주는 점이 특징”이라며 “앞으로 숱이 적은 사람들을 위한 증모술에도 도전할 생각”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지난해 6월부터는 가맹점 사업을 시작해 붙임머리의 대중화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금까지 14개의 가맹점을 내줄 정도로 인기다. 중심 상권에 위치할 필요가 없어 임대료가 저렴한 데다 인건비와 재료비 등이 낮아 가맹점 수입이 월평균 400여만원에 이르고 있는 점이 가맹점주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여기에다 기술형 창업인 반면 자격증 제도가 없어 누구나 손쉽게 배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소자본으로 창업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이 사장은 가장 큰 장점으로 꼽았다. 창업시장에서 ‘소자본 창업’은 업종을 불문하고 최고 인기를 누리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소자본 창업은 창업비 부담이 적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줄일 수 있는데다 창업자의 노동력을 적극 활용할 수 있다.
“내년에는 해외 진출까지”
하지만 한정된 시장에서 수많은 창업자가 경쟁하게 되면 자생력을 갖추지 못한 소자본 창업자는 ‘제 살 깎기’식의 경쟁으로 성공이 쉽지 않다. 하지만 e-붙임머리의 경우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고 있다.
“붙임머리나 속눈썹 기술은 본사에서 제가 직접 교육을 실시합니다. 초보자도 2주간의 교육만 받으면 개점이 가능할 정도입니다. 현재 월 2만 개 수준인 시장은 향후 월 10만 개 수준으로 급성장할 겁니다. 충분한 자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해외 수출도 앞두고 있다. 일본에는 국내 시스템을 그대로 전수할 방침이다. 로열티만 2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캐나다 진출도 검토 중이다. e-붙임머리의 매출은 창업 초기 월 800만원 수준에서 현재 월 3~5억원 수준으로 급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