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나무의 문'이 다른 신문사 신춘문예에 중복 투고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습니다. '동일한 원고를 타사 신춘문예에 중복 투고하면 심사에서 제외되며, 사후 확인될 경우 무효 처리됩니다. 작품의 표절이 밝혀질 경우에도 당선이 취소됩니다'라는 본사 신춘문예 응모 요강에 따라 해당 작품의 당선을 취소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리며 해량 바랍니다.
몇 층의 구름이 바람을 몰고 간다 그 몇 층 사이 긴 장마와 연기가 접혀 있을 것 같다 바람이 층 사이에 머무르는 種들이 많다 發芽라는 말 옆에 온갖 씨앗을 묻어 둔다 여름, 후드득 소리 나는 것들을 씨앗이라고 말해본다
나는 조용히 입 열고 씨앗을 뱉어낸 최초의 울음이었다
오래된 떡갈나무 창고 옆에 나뭇가지 같은 방 하나 들였다 나무에 걸린 바람을 들여놓고 싶었다 지붕이 비었을 때엔 빗소리가 크다 빈 아궁이에 솔가지 불을 밀어 넣으면 물이 날아올랐다 물기를 머금고 사는 것들이 방안을 채울 줄 알았다 아궁이 옆에서 뜨거운 울음의 족보를 본다
실어 온 씨앗으로 바람은 키 작은 뽕나무를 키웠다 초여름, 초록이 타고 푸른 연기가 날아오르고 까만 오디가 달렸다
문을 세웠더니 바깥이 들어와 빈 방이 되었다 바람의 어느 층이 키운 나무들은 흰 연기를 품고 있다 어제는 나무의 안쪽이 자라고 오늘 나무의 바깥이 자랐다
나무는 어디가 문일까
문을 열어 놓은 나무들 마다 초록의 연기가 다 빠져나가고 있다
김후인 시인 1952년 경남 통영 출생. 삼육대학교 졸업. 재림문인협회 회원.
[당선소감]
어머니 밥 짓던 밥 불 생각나
나무의 문이 만들어준 빈 방에 첫 불을 넣으면서 그 옛날 어머니 밥 짓던 밥 불이 생각납니다. 젖은 불 연기에 짓던 눈물. 그 연기는 그리움이겠지요. 제게는 일찍 떠난 것들이 많습니다. 그 상실들이 시로 와서, 오래 같이 살다보면 아랫목 같은 문장 하나 남을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 빈자리가 깨워준 서툰 글밭이 자칫 묵정밭이 될 뻔 했지만 이런 지경까지 넓히게 해주신 박해람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경운서당 학우들, 그리고 하엽이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제 시 한 편을 쓸 때마다 빈방 새로 들이는 각오로 첫 불을 넣고 두려운 불길도 손에 익혀야겠지요. 찬바람이 불지만 제게는 씨앗을 생각하게 하는 봄날입니다. 미숙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부산일보사에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제게 글 쓰는 마음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늘 격려해주신 재림문협 회원님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등기 심부름을 자주 시켜도 참고 기다려준 남편, 아들, 딸, 그리고 방해꾼이면서 따로 글감도 주는 정후에게 사랑한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발아(發芽)라는 말 옆에 시의 씨앗을 틔우고 묻습니다.
[심사평]
치밀한 문맥·팽팽한 거리 믿음직
세상은 갈수록 미궁이지만 시를 읽는 일은 여전히 즐겁다. 우리 앞에 놓인 한 아름의 희망들이 온 세상을 새롭게 밝힐 것이란 기대를 갖게 했다. 응모 편수는 예년과 비슷했으나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향상된 수준이었다. 고만고만하게 다듬어진 시들이 주류를 이루던 예년과는 달리 수작과 태작의 경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는 강습 등을 통해 만들어진 시가 아닌 자생적인 시 쓰기가 회복되고 있는 조짐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우리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박길숙의 '적도에서 온 남자' 외 2편과 김후인의 '나무의 문' 외 4편이었다. 박길숙의 시들은 발랄한 감각과 자유분방한 보폭이 흥미로웠다. 시의 큰 덕목인 새로움의 추구에는 부합하지만 완성도가 다소 떨어지는 편이었다. 반면 김후인의 시들은 단단하고 치밀한 문맥, 팽팽한 거리두기가 믿음직스러웠다. 그동안 연마한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보내온 다섯 편 중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아도 좋을 만큼 수준도 골랐다. 빈틈을 보이지 않는 견고한 윤곽이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시의 힘은 숨 쉴 여백을 만들며 출렁거릴 때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오랜 숙의 끝에 우리는 박길숙의 시들이 좀 더 숙성되는 과정을 거치기를 바라며 김후인의 '나무의 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가장 작고 낮게 발언하면서도 가장 높고 멀리 퍼져가는 시의 위대한 과업을 성실히 수행하리라 믿는다. - (정진규 시인)
잘 못 꾼 꿈이 지워진 거예요 마음이 시끄럽네요 쮸릿, 쮸릿, 칫, 칫 물이 끓고 있나요?
머릿속을 지우개로 박박 지웠더니 보글보글 구름이 생겼어요 요리에 앞서 별표 3개라는 걸 잊지 마세요 너무 많이 문지르면 검게 비구름이 된다는 걸 알아야 해요 그럼 한쪽으로 쓸어버려야 하죠 쓸려나간 구름은 어디선가는 필요로 하거든요 아픈 배 문지르던 엄마의 손길로 잘못 디딘 첫발을 지워봐요 뒷걸음질치며 구름이 송골송골 피어날 테니까요
일단은 지나가는 뜬구름 낚아채 통째로 집어넣어야만 해요 낚아챌 때는 빠른 감각, 두꺼비 혀의 본능이 중요해요 토끼 기린 강아지 오빠 엄마 물고기 할머니 얼굴로 수시로 변하거든요 강아지가 싫으면 절대로 피해야 하니까요 오빠와 엄마를 요리하고 싶으면 적절할 때 낚아서 납득시킬만한 꺼리가 필요해요 잘못하면 당신이 설득 당할 테니까요 할머니에겐 안개구름 한 소반 선물해 봐요 그럼 그 속에 감춰진 추억을 하나하나 따내며 끄덕끄덕 하시겠죠 그리고는 겹겹이 포개진 뭉게구름 동강동강 썰어야 해요 구름의 남쪽, 비늘구름 잡아 당겨 살점만 떠 넣고요 다시 제 위치에 걸어놓아야 해요 요리는 늘어놓고 하면 곤란해요 제 살점을 잃은 구름은 몇 초 지나지 않아 다른 형상으로 변해 떠나가버려요
하악, 그새 악어가 입 딱 벌리고 급 하강하는 줄 알았어요! 간이 철렁했죠 긴 꼬리를 끌며 지나간 뒤에 간을 보니 싱거워요 소금을 좀 더 넣어야겠네요
요리를 하다 보면 알게 되죠 구름을 절대 새총으로 쏘아 잡으면 안 돼요 조리법에 어긋나는 일이죠 빗맞기라도 하면 냄비에 구멍이 나요 조루처럼 빵빵 뚫린 구멍으로 빗줄기가 쏟아질테니까요 조리법에 의하면 그 총탄자국은 밤에만 보인다지요 그것은 인간들이 쏘아댄 빗나간 꿈이에요, 별들의 실체라고도 해요
요리가 다 됐나요? 새털구름이 하늘 가득 웃자라 피었어요 여러 빛깔로 아롱진 꽃구름이 피었어요 배추흰나비가 노루귀 꽃잎에 앉았어요 지나가던 바람 배추흰나비 날개깃에 머무네요
요리는 다 되었나요, 꽃구름?
[당선소감] 시는 내 운명의 굴레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가 생각난다. 필립은 장애인으로서, 고아라는 환경으로, 예술적 고뇌 때문에, 여성에 대한 집념 등 운명적으로 쓰인 굴레를 힘겹게 극복해간다.
내 삶도 어찌보면 필립과 닮아 있다. 어린 날 부모님을 여의고 우리 가족은 폭탄 맞은 듯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 파편 조각은 어느 수집가에 의해 귀하게 쓰임을 받았고 그 배려로 내 삶은 훈훈하게 생기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필립과 같은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조금 늦게 시를 접했다. 시는 오랫동안 내 삶의 밤하늘이었고 별이었고 꿈이었다. 이런 내게 날아든 당선 소식은 내 생의 어떤 소식보다 날 기쁘고 두렵게 했다. 운명처럼 조이던 굴레가 어쩐지 그리 무겁고 힘겹게 여겨지지 않았다. 이제 나는 내 운명의 굴레보다 더 나를 옥죌 시의 굴레를 기껍게 쓰려 하기 때문이다.
시에 참신한 상상과 메타포의 날개를 달아주신 중앙대 예술대학원 김영남 선생님, 서투른 날갯짓을 소중하게 보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부산일보사에도 감사드립니다. 감사할 분은 많으나 가슴으로 인사를 대신합니다. 별뫼 친구들, 정동진 회원님들과도 이 기쁨 밤새도록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심사평] 상상력 증폭시키는 힘과 감각
시 부문 투고자들 중에서 본격적인 논의 대상으로 압축된 것은 강가영, 김승원, 최류, 김경덕, 심명수 등이었다. 이 다섯 사람의 작품은 각각 개성적인 목소리와 일정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졌다.
강가영의 섬세한 조형력, 김승원의 현실에 밀착한 시선과 절제된 표현, 최류의 독특한 존재론적 사유 등은 모두 소중한 것이었지만, 당선작이 되기에는 다소 인상이 약했다.
마지막으로 김경덕의 '포쇄도'와 심명수의 '쇠유리새 구름을 요리하다'를 두고 적지 않게 고심했다. 김경덕의 시가 고전적 기품을 지니면서도 언어를 탄력있게 운용할 줄 알고 시의 묘미를 만들어내는 솜씨를 보여준다면, 심명수의 시는 착상이 재미있고 상상력을 증폭시켜 나가는 힘과 감각을 지니고 있다. 이 대조적인 세계 중에서 심사위원들은 결국 좀더 젊고 신선한 목소리를 선택했다. 심명수의 투고작 10편이 두루 고른 수준을 보여주고 있어서 더욱 믿음이 갔다.
당선작인 '쇠유리새 구름을 요리하다'는 상상력의 요리법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다채로운 이미지들의 변주를 보여준다. 이런 분출이 다소 소란스럽고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자유로운 이탈과 생성의 순간은 즐거운 몽상으로 독자를 이끌어간다. "낚아챌 때는 빠른 감각, 두꺼비 혀의 본능이 중요해요"라는 구절처럼 감각의 촉수가 예민하고 날렵한 이 신인이 앞으로 차려낼 풍성한 시의 밥상을 기대한다.
초등학교 때 나는 자주 옆길로 빠졌다. 실개천을 끼고 있는 쓰레기하치장에서 병뚜껑, 깨진 그릇, 털 뽑힌 인형, 몽당연필 보석 같은 소꿉놀이에 정신 팔려 학교를 가지 않거나 지각을 하기 일쑤였다. 지금 그렇다. 철없고 맹목적이던 어린 시절처럼 이른 밤 시와 지내다 보면 어느새 아이들 등교시간이 부산스러웠다. 써 놓은 시가 잘 있는지 시간마다 만지작거렸다. 만지다 보면 상처 나고 스쳐간 모든 것들이 눈물 나게 하였고 꿈틀거리게 하였다.
문을 두드릴 땐 몰랐으나 들어선다 생각하니 앞이 캄캄합니다. 한 발짝도 걷기 힘든 늪이거나, 하늘마저 보이지 않는 정글에 빠질까 두렵습니다. 시 한 편 내밀 곳 없이 혼자 걸어왔듯이 아프며, 아물며 헤쳐 가도록 하겠습니다. 내세울 것도, 재주도, 능력도 없습니다. 속살 끌어안느라 칼바람에 시퍼렇게 멍든 배춧잎 같은 시를 쓰고 싶습니다.
늘 가슴속에 계셨던 김창근 교수님 건강하십시오, 노원희 교수님. 마경덕 선생님, 이상윤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늦게나마 인연 맺은 '잡어' 동인의 최희철, 박진규, 김성환, 백진희, 최병문 님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 형, 같이 갑시다. '시담' 벗들에게 늦은 안부를 전한다. 해정, 혜정아, 너희들이 있어 내가 오래 살지 싶다. 애간장만 태운 딸을 아직도 가슴에 품고 계신 어머니 아버지, 시 쓰는 일에 몰두하는 아내가 보기 좋다는 남편, 강이, 산이, 가족 모두 사랑합니다. 재주 없는 저에게 귀한 자리를 펴 주신 부산일보사에 거듭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사랑해도 된다, 걸음해도 된다며 빗장 열어주신 심사위원님께 큰 절 올립니다. 열심히 사는 모습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심사평] 격조 높은 사랑 고백 그윽한 울림
따로 예심을 거치지 않고 심사위원 세 사람이 응모 작품 전체를 나누어 읽었다. 생각과 말의 균형이 일그러져 있거나, 유행을 추수하고 있거나, 겉멋에 치우쳐 있거나, 지나치게 수다스러운 작품들을 제외하고 일차적으로 서른 명 남짓을 추렸다. 이를 다섯 명으로 줄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서진 씨의 '물의 씨앗'은 어조가 활달하고 상상력의 전개가 볼 만했으나 관념을 구체화하는 데 미흡했다. 이와 반대로 이규 씨의 '해바라기 노란 열쇠'는 시가 대상의 구체적 형상화라는 점을 잘 알고 있지만 아버지의 부재와 관련해서 독자를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최정아 씨의 '그의 우화(羽化)'는 재기 넘치는 상상력과 감각으로 일상을 성찰하는 시인데, 그 상상력이 크게 확대되지 않아 아쉬웠다.
김승원 씨의 '다시, 봉천고개'와 조원 씨의 '담쟁이 넝쿨'은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능숙하게 끌고 가면서 일상적인 소재를 적절한 이미지와 결합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다만 김 씨의 작품은 일부 상투적인 표현을 노출하고 있어 아깝지만 뒤로 제쳐두기로 했다.
당선작 '담쟁이 넝쿨'은 담쟁이 넝쿨이라는 시적 대상에다 건강하고 격조 높은 사랑의 고백을 매우 탁월한 기법을 이용해 얹어놓았다. 이 시가 발산하는 그윽한 울림을 우리 모두의 것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함께 응모한 '시루 속 콩나물'의 대담한 상상력도 이 시인을 믿음직스럽게 만들었다. 축하드린다.
당신의 이름은 은주…, 최은주(崔恩主). 내가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언니의 가난한 끼니를 챙기며 자신의 젖을 짜 내밀던 스물 셋의 어미, 쌀가마니 쌓인 곳간을 보고 배 굶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 시집간 스물의 처녀, 쌀 사오라는 심부름으로 책가방을 사 쫓겨난 맹랑하던 고아 계집아이. 당신과 나의 심장이 하나로 포개져, 그 심장의 두근거림이 멀리까지 징검다리를 놓던 시절, 당신이 도곤도곤 울려 주던 심장의 장단에 맞춰 세상으로 나아갈 걸음을 놓던 조그마하던 아이가 당신을 불러도 될까요.
시인들의 시를 따라 적던 굳은살 하나면 족하다, 했던 나날들. 늘 열정을 열망하면서도 먹기 위해서 잠자릴 위해서 다른 곳에 있어야 해도, 늘 그것만 생각하고, 꿈꾸고, 원한다면, 한 줄의 글은 당신의 심장소리를 따라 놓이던 징검다리처럼 나를 다다르게 할 거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나의 구원은 당신의 이름을 불러 보는 것으로 족하기도 했습니다. 살아있는 발화로 나는 다른 얼굴을 가진 무수한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리운 나의… 은주 씨.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부산일보에 감사드리며, 강형철 교수님, 박상률 교수님, 또한 강연호 교수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심사평] 상투형 벗어난 신선한 가능성
뽑는이들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김중곤의 '소금밭의 기억', 조연미의 '예의' 두 편이다. '소금밭의 기억'은 녹록지 않은 시력으로 다져진 단단한 틀거지를 지녔다. 바닷물이 소금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이라는 다소 낯익은 글감에 대한 흔치 않은 상상적 투사가 돋보인다. 그러나 작품 세부까지 충분한 제어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열아홉 줄에 걸친 한 편 시 속에서 '하얀'이라는 수식어를 다섯 번이나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무엇인가를 응모자는 곰곰 헤아려 보아야 할 일이다
조연미의 '예의'는 '소금밭의 기억'에 견주어 단연 신선하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이 지닌 역량도 만만찮다. 사소한 일상을 결코 범상하지 않게 다듬어 내는 솜씨가 고르다. '예의'는 나와 타자의 만남이라는 주제를 따뜻하면서도 곡진하게 끌어 안은 작품이다. '창'과 '벽'으로 표현되고 있는 경계를 축으로 그 너머 세계와 합일을 꿈꾸는 상상적 줄거리는 가벼운 반어적 기슭까지 닿아 있다. 아직도 시가 우리 둘레에서 위안의 장소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본보기가 됨직한 작품이다. 게다가 '몸의 뜨거움으로/어느 귀퉁이의 빙하가 녹는지/창 너머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와 같은 빛나는 깨달음까지 얻고 있음에랴. 뽑는이들은 상투형을 벗어난 '예의'의 신선한 가능성에 훨씬 높은 점수를 주어 당선작으로 민다. 모름지기 오래 기억될 시인으로 거듭나기 바란다.
뽑는이들의 눈을 한참 머물게 했던 작품을 보내준 세 사람, 예컨대 '아버지의 침대'의 박금숙, '벽'의 박해술, 그리고 '102번을 타고'의 조해점과 같은 이에게도 격려를 보낸다. 머지않아 제 목소리를 내는 신인으로 즐겁게 만날 수 있으리라.
어느 날 갑자기시가 내게 온지 꼭 20년이 지났다. 시는 고향역의 대합실 벤치에 새우처럼 웅크리고 잠에 빠진 노숙자의 등을 타고 내게 왔다. 시에서는 모름지기 사람 냄새가 나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기 이전에 시는 이미 그 단서를 가지고 내게 온 것이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습작기의 내 의식을 지배해 온 것은 새우처럼 웅크린 노숙자의 그 등이었다. 그 시는 웅크렸던 등을 대고 잠 한 번 깊이 청할 수 있는 따뜻한 구들장이 되지 못한다. 다만, 나에게 있어 시는 남루한 생의 뜯어진 옷자락 사이로 언뜻 언뜻 내비치는 흰 살빛 같은 각성이 되었다.
20년 세월, 내 지각은 너무 느려터지고 아둔했던 것일까? 내게 주어진 단서는 자명한 것이었지만 내 앞에는 늘 왜곡과 착시의 갈림길이 가지를 뻗고 있었다. 내 시에서 한 조각 살빛의 각성이 읽히고 삶의 결이 잡힐 때까지 나는 얼마나 더 내 무딤을 벼려야 하는가?
내 습작기는 지금부터가 새로운 시작이다. 생의 치열한 연소 속에서 내 시의 담금질과 매질은 계속될 것이다. 시와 삶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호작용만이 내 시의 방법론임을 잘 알기에 내 범상한 일상을 탓하기에 앞서 나는 앞으로 낯설고 거친 풍경을 찾아 모험도 불사하는 생의 에너지를 키우는 쪽으로 관심을 집중할 것이다.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엎드려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빗나간 내 시의 안목을 바뤄 주시느라 노심초사 애쓰시고 심려가 많으신 박제천 선생님께 큰절 올린다.
직장 동료로서 늘 격려를 마지않았던 이영식, 황상순, 시인님 그리고 문학아카데미 시창작반 문우들과도 당선의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준 아내와 두 아이들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심사평] 역동적인 생명력 거대 물결 이뤄
장시간 600명에 가까운 이들의 시를 읽으면서도 지루한 줄 몰랐다. 문학의 위기나, 시의 죽음이니들 해도, 상당수의 투고작들이 저마다의 얼굴을 반듯하게 갖추고 있었고, 저마다의 매력적인 향기를 뿜고 있엇다. 전반적인 수준이 만족할 만 했다.
고른 수준을 보이는 이,앞으로의 창작 활동에 대한 신뢰감을 주는 이 등을 골라서 열다섯 명을 뽑았다. 모두 손색없는 작품들이었다.
그래도 어쩌랴,서정적 진정성이,언어적 숙련도와 개성의 깊이 등을 기준으로 다시 다섯명을 뽑았다. 모두 수작들이었다. 그러나 한 편의 당선작을 위해 다섯명의 흠을 잡아보기로 했다.
김경미씨의 투고작들은 참신한 언어 감각이 돋보였다. 동시에 이 장점은 씨의 한계로 지적되기도 했다. 젊은 언어 감각이 언어적 경박성으로까지 치달아 버린 것이다.
김명희씨는 사물과 일체되는 물활론적 감수성으로 단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산문적인 서술을 지양하고 보다 응축된 표현을 해야 하겠다는 주문이 따랐다.
김영건씨는 지나친 노련함과 산문성으로 트집 잡혔다. 하지만 위트가 시적 재능의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그의 유쾌한 상상력은 돋보였다
정재영씨는 이들 중에서 가장 많은 시를 투고하였을 뿐 아니라 한결같이 높은 수준의 역작들을 보여주었다. 그중에서 당선작으로 정한 시 '붉고 향기로운 실탄'은 한마디로 역동적인 생명을 보여주는 시이다. 산문적인 서술로는 이룰 수 없는,말소리의 조직과 오감을 통해 서정을 주입하는 시이다. 불필요한 이인칭 청자,수사적 어법의 과용 등이 흠이 된다는 지적도 있긴 하였으나 이를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는 반대가 없었다.
한 편을 뽑는 일은 괴로웠다. 하지만 심사자 셋은 한동안 향기로운 시의 바디를 유영하고 나오는 달콤한 나른함을 나눌 수 있었다.
찾아와 주지 않는 행운을 사려고 꽃집에 갔다. 팔다리가 잘리고 몸통이 삭둑 잘린 행운들이 태연하게 옆구리에서 행운의 싹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뼈아픈 절망의 칼날이 몸통을 수천 번 지나가도 쑥쑥 자라나는 행운,싹은 자랄수록 비쌌다. 한번도 피워보지 못한 너무 큰 행운은 버거운 짐이었다. 행운을 누리고 싶은 간절함과 몇 장의 지폐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동안 행운은 서서히 시들어 갔다. 행운은 아무나 피워 올리는 게 아니었다. 꽃집을 나서며 행운을 꽃피우려던 가지 하나씩 잘라냈다. 머리를 자르고 팔다리를 잘라내고 나니 몸통만 남은 옆구리에서 뜻밖의 행운이 돋아나고 있었다.
시는 내 삶의 희망이며 절망이었다. 희망과 절망의 팽팽한 줄다리기에 지쳐 그만 줄을 놓아버리고 싶었을 때 걸려온 한 통의 전화,허탈감과 함께 포만감이 밀려들었다. 먼저 부족하고 모자라는 제게 희망의 줄을 잡게 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죽을 힘을 다 해 열심히 하겠습니다.
시의 뿌리를 내리게 해 주신 유병근 선생님,언제나 힘이 되어 주시는 이선희 선생님,고맙습니다. 시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는 문우들에게도 작은 희망이 되고 싶다. 끝으로 말없이 나를 믿어 준 가족에게 이 벅찬 마음을 함께하고 싶다.
[심사평] 거침없는 사색, 제 맵시 잘 갖춰
시들이 조금씩 어둡다. 시대가 어둡다고 시가 어두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밝히고,고통 속에서 희망을 읽어내는 변화의 징후를 시에서 엿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작품을 읽어 내렸다. 여섯 사람이 쓴 여섯 작품이 마지막까지 뽑는 이들의 손에 남았다. '기억에서 봄을 검색하다','몸빼','유마경변상도','없다,해돋이 광장에는','결혼기념일',그리고 '바뀐 신발'이 그것이다. 모두 남다른 수련 흔적과 작품 세공력을 숨기지 않은 작품이다. 게다가 주변의 구체적 일상에 충실하고자 한 점 또한 공통의 미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천종숙의 '바뀐 신발'을 당선작으로 미는 데에 뽑는 이들은 쉽게 동의했다. 신발은 흔한 글감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흔하지 않는 예각적 체험으로 되돌려 내는 눈매는 오랜 적공의 결과다. 첫 싯줄에서 마지막 싯줄까지 다소 둔탁하지만 거침없는 사색이 제 맵시를 잘 갖추었다. 함께 보낸 작품들의 수준이 가장 고른 점도 장점이었다. 세상이 변하지 않으면 시가 먼저 변해야 한다. 이제껏 이고 다닌 나이와 경력은 지금부터 잊어야 하리라. 신인으로서 보다 적극적인 모험의 세계로 즐겨 나아가기를 바란다.
베란다를 두들겨 대는 저 육중한 바람은 제 몸에 힘이 완전히 소진되어 버렸을 때 비로소,뒤를 한번 돌아본다는 그런 생각이 근래 들어 부쩍부쩍 떠오른다. 그것은 실명 전,아무 생각 없이 스치고 지나버렸던 그 아슴아슴한 사물들과 사소한 사건들이 요즈음,내 머릿속에서 다시금 환해지는 탓이리라!
사물들의 촉감,미세한 소리,그윽한 냄새,눈이 보일 때보다도 외려,요즘 더 예사롭지 않다. 시각 장애 이후,더욱 집중했던 시(詩) 창작은 사실,죽음의 유혹을 뿌리치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오늘 당선 소식은 새 생명 하나를 부여받은 셈이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더 멀고도 험하겠지만 한참 부족한 제 시(詩)를 뽑아주신 부산일보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리며 시(詩)와의 만남을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 보답의 길이라고 믿는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물심양면 힘 써 준 고마운 사람이 많다. 이 자리를 빌려 하해와 같은 감사를 드린다.
[심사평] 정진 가능성에 높은 점수
응모된 시들 중에서 1차로 20여편을 건져올리면서,우리 시의 현주소를 다시 확인했다. 예비 시인들의 관심이 서정시에 가 있다는 점,소재는 일상적 체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발랄하고 참신한 이미지는 내보이나 내면의 깊이가 없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응모 시의 전반에서 실험적인 요소를 찾는다는 것은 힘들었다. 이는 패기 있는 개성적인 시를 쉽게 만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 대신 잘 꾸며진 소품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1차로 걸러진 20여편은 시 공부를 한 흔적이 뚜렷이 드러나는 시편들이었다. 그러나 소품이 갖는 한계를 시적 응집력을 통해 극복하고,새로운 세계를 강렬하게 보여주는 작품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는 시적 정신을 토대로 자기만의 세계를 창출해 보려는 의욕보다는 시의 기교 습득에 너무 기울어져 있는 결과로 보였다.
이런 아쉬움 가운데서도 마지막까지 논의 대상이 된 작품은 '첩자''소라''항해'였다. 그런데 '첩자'는 너무 기계적인 구도와 시적 언어가,'소라'는 너무나 단정한 틀과 일상화된 이미지가,'항해'는 기성 시에 나타난 이미지의 원용이 각각 문제로 지적되었다. 힘들게 '항해'가 지닌 긍정적 세계 인식과 앞으로의 가능성을 믿어,이 작품을 가작으로 뽑았다. 정진을 빈다.
당선의 영광은 꿈속에까지 나타나 무언의 계시를 준다고 하던대, 나의 능력이 부족함을 잘 아시는 시(詩)의 신(神)은, 꿈속에서조차 '시인'이 되는 일체의 방법과 길을 가르쳐 주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알아서 찾아가라며….
어릴 적에 동네 친구들과 강에서 마구잡이로 익힌 것이 '헤엄'이라면,물장구부터 시작하여 호흡과 영법(泳法)을 제대로 배운 것은 '수영'일 것입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제 진짜(!) 시인의 길로 접어든 내게 주어진 몫은,거친 파도 속 실존의 바다에서 나만의 시법(詩法)으로 호흡과 힘 조절을 잘하면서,얼마나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느냐,하는 데 있습니다.
곁에서 늘 무언의 따끔한 격려를 아끼지 않은 아내와 따뜻한 시심의 '글가람',동심이 흠뻑 담긴 '글나라'와 부산아동문학협회,'꽃과 미늘' 등의 인정 넘치는 여러분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여러모로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두 분 심사위원님과 부산일보사에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형상성에서 오는 울림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눈물길 외 4편', '물 한 잔과 자전거 외 2편', '금성라디오 외 4편', '밤깎기 외 5편'이었다. 이 중 '금성 라디오'와 '밤깎기'는 그 상상력의 전개는 좋으나 형상성의 부족에서 오는 '얹기'의 결핍은 '울림'과 그로 인한, 정서와 사유의 '교환'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눈물길'과 '물 한 잔과 자전거'의 두 편이었다. 이 중 '물 한 잔과 자전거'의 언어는 맛깔스럽고 재기에 넘치나, 약간의 작위가 '교환'을 가로막고 있었으며 시의 '울림'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눈물길'은 형상성에서 오는 '울림'이 시 읽기를 유혹하고 있었고, 이 유혹은 감동으로 이어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구체적 삶의 경험에서 길어 올린 것이었으므로 더욱 강한 호소력을 지니고 '교환'을 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미덕 중의 또 하나는 그 감동의 수준이 시 5편을 골고루 흐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눈물길'을 당선작으로 하기에 심사위원들은 합의하였다. '재기'보다 '얹기'와 '교환'에서 오는 '형상성의 울림과 감동'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모든 이들, 정진을 바란다.
'우리는 이전에 존재했던 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우리가 보는 것에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된다'- 세잔.
올해,시작노트 첫 페이지에 나는 그렇게 썼다. 날개가 있어 붙잡지 않으면 순간 날아간다던 시를 위해 끼적거린 일탈들,과연 새로웠던가 자숙해 본다.
이 나가고 금이 간 사금파리 같은 기억들을 나는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난생 처음 뭔가를 버리기 시작했을 때 마음에 빈자리 하나 둘 들어서고 그곳에 날아온 씨앗들,싹을 틔우곤 했다. 그 때마다 나는 내가 그 떡잎들에게 좋은 흙인가,햇빛인가,바람인가,그리고 마침 내리는 비였는가를 생각해야 했다.
문선일여(文仙一如),글을 쓰는 건 도를 닦는 것과 같다고 하신 선생님,졸시에 침묵으로 날개 달아주시던 선생님 정말 감사드린다. 시에 대한 온갖 수다를 받아준 가족들에게 고맙다 전한다. 당선되면 혈우라 소개하자던 많은 글 친구들 역시 소중하다. 하나하나 내 마음에 그 이름들 새기고 있음을 밝힌다.
새 길을 열어주신 부산일보사와 부족한 이름 불러주신 허만하,정호승 심사위원님께 좋은 시로 보답하겠다는 각오를 바친다.
어느 개울가에서 습지에 피는 아주 작은 꽃을 찍기 위해 축축한 바닥에 엎드려 각도를 맞추던 사진사처럼 내가 찾는 꽃,시와의 거리에 대해 늘 생각하겠다. 짝사랑만으로도 벅찼던 시 앞에서 나는 늘 설?다. 지금은 두려움일지도 모를 이 두근거림이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내 앞에 다가온 존재들이 거듭 새로워지기를 바라면서.
[심사평] 시의 기본 정신 가장 충실해
최종심에 오른 투고자는 6명이었다. '오리병아리'의 이태규,'형벌'의 유행두,'겨울 과메기'의 김기찬,'겨울 측면'의 탁명주,'가스통이 사는 동네'의 안여진,'돌 속의 길이 환하다'의 신정민이 바로 그들이다.
이 시들은 전체적으로 수준이 퍽 고른 편이었다. 특히 추상과 관념에서 벗어나 현실적 삶의 구체에 깊고 진솔하게 뿌리를 내린 시들이 많아 퍽 고무적이었으며 선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오리병아리'는 결말이 식상하다는 점에서,'겨울 과메기'는 평이한 묘사와 설명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겨울 측면'은 절박하거나 간절하지 않다는 점에서,'가스통이 사는 동네'는 체험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먼저 제외되었다.
결국 유행두와 신정민의 작품이 남게 되었는데, 이 두 사람의 작품은 어느 작품이 당선되어도 당선작으로서 손색이 없다 싶었다. 그러나 유행두의 '형벌'은 '지구 끝에서/아내가 붕어빵을 굽고 있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감각적인 참신성이 돋보였으나 내용보다 형식에 치중한 나머지 읽고 나서 허전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신정민은 고른 기법과 다양한 시야를 통해 축적된 시적 역량을 한꺼번에 보여주었다. '한 노인이 사물함 속으로 들어간다.' 등의 구절에서는 상상력을 현실적으로 구체화시키는 개성적 힘이 있었다.
특히 당선작으로 결정한 '돌 속의 길이 환하다'는 시는 결국 은유로 이루어진다는 시의 기본을 가장 충실히 지키고 이해하고 있는 시로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