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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馬) / 정와연 

 

 

수선집 사내의 어깨에 말의 문신이 매어져 있다

길길이 날뛰던 방향 쪽으로 고삐를 묶어둔 듯

말 한 마리 매여 있다

팔뚝에 힘을 줄 때마다

아직도 말의 뒷발이 온 몸을 뛰어다닌다

고삐를 풀고 나갈 곳을 찾고 있다는 듯 연신 땀을 흘린다

저 날리는 갈기를, 콧김을, 이빨 드러내는

투레질을 굵은 팔뚝에 가둬두고 있다는 것을

저 사내 알기나 할까

어쩌면 질풍노도의 시절에 스스로 마구간을 짓고

지독한 결심으로 고삐를 매어두었을지도 모른다

 

말은 복종하는 발굽과 항거하는 발굽이 다르다

앞발을 굽힐 때 뒷발은 더 빡세게 버티는 법이다

 

어느 뒷골목의 시간들을 붙잡아

사내의 안쪽을 향하게 단단히 묶었으나

꿈틀거리는 역마살이란 언제까지 갇혀 있을 발굽이 아니다

비좁은 마방에서 수년 째 구두를 깁는 일이

자못 수상하기까지 하다

닳고 닳은 뒤축을 깁는 일과

말의 박차를 박는 일에 우연(偶然)이 있다면 그것은 다 길의 파본이다

 

발굽을 갈아 끼울 때마다 사내는

박차고 나가려는 팔뚝의 불뚝한 말을 오래 쓰다듬듯 주무른다

이제야 말 한 마리를 다룰 줄 안다는 듯

말과 주인이 따로 없다는 듯이

 

 

 

 

네팔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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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젊은 정신으로 세상을 보겠습니다”

 

젊은 시를 공경하며 사는 일이 그리 편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잘 타일러 멀리 보내버렸습니다.

 

왜 나이를 먹어갈수록 우둔해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가장 믿는 것은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그 우둔함을 믿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정하고 갈 뿐입니다. 젊은 정신으로 사물을 보겠습니다.

 

꿈을 현실로 바꿔놓은 전화 한 통은 실로 꿈을 꾸는 듯했습니다. 떨리고 겁이 났습니다. 몸을 흔들어 정신을 차려봅니다.

 

이토록 멋진 장을 열어주신 영남일보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아직 많이 부족한 저의 글을 뽑아주신 이하석 선생님, 송재학 선생님께 진심어린 큰절 올립니다.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해 걸어가겠습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숭의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님과 여러 선생님 감사합니다. 등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며 버팀목이 되어준 남편, 시 쓰는 엄마가 자랑스럽다는 세 딸, 음악활동에 열중인 아들(나무)의 원대한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모두 모두 사랑합니다. 끝으로 이 기쁨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심사평] “명쾌한 논리와 탁월한 언어감각 자신만의 ‘감각의 통점’ 짚어내”

 

장유정씨의 ‘나무 옮겨 심는 법’, 정와연씨의 ‘말’, 김묘숙씨의 ‘편자꽃’, 이인숙씨의 ‘모자이크’ 등이 우리가 마지막까지 읽은 작품들이다.

 

본심에 올라온 수십 편의 시들은 그 내부에서 서로가 서로를 카피한 혐의가 있다. 원본은 사라지고 카피본들의 베껴쓰기가 다반사로 이루어진 세간의 형편과 다르지 않다. 수사와 기교가 일정한 수준을 유지했다는 점은 위안이지만, 카피의 스펙트럼이 광범위하기에 이번 심사는 곤혹스러운 체험이다.

 

본심의 작품들은 대체로 비슷한 감각의 폴더를 공유했다. 어떤 책의 감동이 블로그를 통해 흔적처럼 남겨지고, 이후 같은 책을 읽은 사람은 앞선 사람의 블로그를 거치면서 비슷한 감정을 공유한다.

 

음악도 영화도 같은 폴더라는 소비패턴을 반복한다. 그것은 또한 감각에서조차 트렌드를 생산한다. 즉, 문화의 접점이 개별적이지 않다는 비효율성을 생산한다. 문학의 본질이 사유의 진보와 확장이라는 점에서 문학은 필사적으로 개별이자 개성적이어야 한다. 숭고미가 있다면 추악한 아름다움이라는 대구(對句)의 필연성이 문학의 범주다.

 

문학은 대상과의 적절한 타협이 아니다. 필경사가 철필로 새겨가는 심정으로 처절하게 모든 것들의 바닥까지 내려가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저잣거리에 널리 유통 중인 수월한 감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만이 가진 ‘감각의 통점’을 짚어내는 것이 문학이다.

 

장황해졌지만 그런 점에서 정와연씨의 ‘말’은 다소간 독보적이다. 게다가 명쾌한 논리성과 우월한 언어 감각에 기대고 있다. 당선작 ‘말’은 구두수선공의 어깨 문신에 주목한 작품이다.

 

문신 속의 말(馬)은 수선공의 내면과 수작하면서 수선공이라는 개별적 삶의 문어체를 획득한다. “닳고 닳은 뒤축을 깁는 일”과 “말의 박차를 박는 일에 우연이 있다”는 두 갈래 상상력을 길의 파본이라 파악하는 삶의 성찰성에 우리는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그의 다른 작품 ‘의태 계절’과 ‘샌들의 감정’에서도 독특한 감각이 드러난다. 그 두 작품은 ‘말’보다 더 풍요로운 문학 생태를 드러낸다.

 

신춘문예 당선이 일희일비가 아니라 행복한 감정이 되려면, 오랜 훗날에도 진정성을 유지하는 시인이어야 할 것이다.

 

심사위원 이하석, 송재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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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꽃 / 조영민

 

 

꽃이 문을 꽝 닫고 떠나 버린 나무 그늘 아래서

이제 보지 못할 풍경이, 빠금히 닫힌다

보고도 보지 못할 한 시절이 또 오는 것일까

닫히면서 열리는 게 너무 많을 때

몸의 쪽문을 다 열어 놓는다

바람이 몰려와 모서리마다 그늘의 알을 낳는다

온통 혈관이고 살인 축축한 짚벼늘이 느껴져

아주 오랫동안 지나간 것들의 무늬가 잡힐 듯한데…

 

꽃 진 그늘에는 누가 내 이름을 목쉬게 부르다가

지나간 것 같아

꿈이나 사경을 헤맬 때 정확히 들었을 법한 그 소리가

왜 전생처럼 떠오르는 것일까

 

그늘은 폐가다 그것은 새집이나 마찬가지

나는 폐가의 건축자재로 이뤄졌다

태양이 구슬처럼 구르는 정오. 꽃그늘에 앉으면

뒤돌아서 누가 부르는 것 같아

부르다 부르지 못하면 냄새로 바뀐다는데

뒤돌아서 자꾸만 누가 부르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나무를 꼭 껴안아 보는데

나무에선 언젠가 맡았던 냄새가 난다

 

 

 

 

사라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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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온갖 소재들, 詩로 화려하게 꽃피울 터”

 

날마다 출근하려면 정지용 시인의 생가 앞에서 차를 탑니다. 이곳으로 이사온 지 일 년 반이 넘어갑니다. 그동안, 나의 창으로 눈발이 날렸고 비도 내렸습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꿀벌이 무수히 다녀갔습니다. 벚꽃의 환한 빛이 너무나 좋아, 나에게 유실된 것들을 찾아갈 때가 많았습니다.

 

지용생가 곁에서의 삶은 행복했습니다. 옥천 구읍의 상점 간판들은 온통 지용의 시들이 적혀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면 그 시구에 감흥을 받았습니다. 이곳은 작은 시(詩)의 대도시입니다. 지병 같은 나의 불행이 치료를 받았습니다.

 

나에게 시를 쓰는 것은 꿀벌과 같습니다. 저 벚꽃의 환한 빛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가만있으면 벚꽃도 얼마나 많은 말을 하는지… 어느 때는 갓 출판된 시리즈물 같은 꽃잎을, 한 장 한 장 번역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돌아보면 시의 소재들이 자신도 번역해 달라 아우성입니다.

 

계속해서 벚꽃의 환한 빛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 영남일보와 부족한 저에게 용기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이 감사합니다. 아울러, 수원에 계시는 어머니, 그리고 봉화에 계시는 장모님, 나의 사랑 이길현, 금쪽같은 다녕 동하 이준이, 저를 아는 모든 이에게 감사합니다.

 

뒤늦게 배운 시인 만큼, 앞으로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화려하게 피워보고 싶습니다. 시의 쓴 맛, 단맛을 조금 겪어 보았으니 이제 길을 가는데 외롭지 않겠습니다. 길을 가다 꼭 한번 시 나라의 번화가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심사평] “활기찬 이미지 직조·신선한 묘사 뛰어나”

 

예심을 거쳐 올라온 이가 8명이었다. 전반적으로 과도한 수사와 진정성이 얕은 말놀음에 빠져 있어서 심사위원들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으나, 이를 압축해들어가 마지막까지 논의된 몇 편의 작품에 이르러서야 그러한 의구심이 떨쳐지는 듯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이유진의 ‘내 침대엔 가끔 토끼가 자요’ 외 몇 편과 조영민의 ‘목련꽃’ 등 수편, 그리고 염민기의 ‘이식’ 등을 놓고 저울질을 했다. 그 결과 쉽게 ‘목련꽃’이 당선작으로 선택됐다. 다른 작품에 비해 아주 개성적이어서 단연 돋보인다는 평을 들었다. 함께 보낸 다른 작품의 수준도 고르게 느껴졌다. ‘이식’ 등은 새로운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의 과도한 학대로 메시지가 애매하다는 점에서, ‘내 침대엔 가끔 토끼가 자요’ 등 몇 편은 작품은 아주 개성적인 데다 일정 수준을 고르게 유지하고 있어 돋보였으나 주제를 부각하는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제외됐다.

 

‘목련꽃’은 제목의 소박함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아주 짜임새 있는 이미지의 구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늘은 폐가다 그것은 새집이나 마찬가지/ 나는 폐가의 건축자재로 이뤄졌다’와 같은 단연 돋보이는 구절들로 유장하게 짜나가는 솜씨가 아주 뛰어났다. 묘사도 정확하고 신선하다. 이미지의 직조 솜씨도 꾀죄죄하지 않고 상상력의 구사도 아주 활기에 차 있으면서도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꽃과 나무, 그늘과 밝음을 얽어 짜면서 ‘몸의 쪽문을 다 열어 놓는’ 그 고요한 시선이 눈부시다. 다만 이 시와 함께 보내온 그의 작품들의 미세한 부분에서 드러나는 겉멋과 자의적 이미지들이 걷어내졌으면 더 좋았으리라.

 

대성을 기대한다.

 

- 심사위원 문인수, 이하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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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흔한 꽃 / 변희수

 

 

갈 데까지 갔다는 말을
안녕이란 말 대신 쓰고 싶어질 때
쓰레기통 옆 구두 한 켤레
말랑한 기억의 밑창을 덧대고 있다
달릴수록 뒷걸음 치는 배경 박음질 해나가듯
나란히 하나의 길을 꿰고 갔을 텐데
서로 다른 기울기를 가진 한 짝
축을 둥글게 깎고 고르는 순간
길은 저마다 제 발에 꼭 맞는 문수로
열려 있었을 것이지만 떠날 때는
모두, 안개를 배경으로 걸었을 것이다
가파른 직선 혹은 곡선의 에움길을
밀어 넣을 때마다 팽팽하게 긴장하던 구둣볼
끈을 고쳐 매고도
매듭 없이
결의만 다지던 저녁이 온 것처럼
코끝을 돌려놓고 자도
늘 잘 못 든 길처럼 헛갈리는 아침
이정표 없는 허방에도 덜컹, 꽃피는 길 있었는지
밑창에 찍힌 발가락 모양이 꾹꾹 눌러놓은
압화처럼 선명하게 피어 있다
어느 고대국가의 지층에 새겨진 족적처럼
누구나, 뒤축이 닿는 순간 스스로의 삶을
탁본하게 되는 것이므로
몫의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놓고
서늘하게 빠져나간 맨발
얼룩도 꽃의 흔적을 닮을 수 있는지
헐렁한 구두 속의 여백이 꽉 찬다

 

 

 

거기서부터 사랑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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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문 밖 지천인 詩의 몸들, 찾아나설 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좋다는 듯, 모월 모일 일요일 오전 열시는 맑고 고요하다.

 

오랜만에 들른 옛집, 아흔에 접어든 아버지의 숨소리도 깃털처럼 가볍다. 나는 지금 애벌레처럼 잠든 아버지 옆에서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할머니의 필사본 가사집을 들여다보고 있다. 낡고 바랜 책갈피를 넘길 때마다 바스라질 것 같던 초서체의 글씨들이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다. 흘림체 글씨들이 어찌나 단정한지 풀어져 있던 마음들이 다 숙연해진다. 한 세기도 더 지난 어떤 열정이 내 피돌기 속으로 주저 없이 걸어들어 옴을 느낀다.

 

돌아보니 투고를 끝내고 소홀했다 싶었던 며칠이 후딱 지나갔다. 왜 그런지 다시금 목이 말라온다. 문 밖을 나서면 과수원이 있고 과수원을 지나면 동네 어귀에 자그만 예배당이 있다.

 

꿈결일까, 동짓달 카랑한 하늘을 가르고 내 귓가에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종소리가 댕댕거린다. 어떤 통보를 내가 받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감출 수 없는 설렘에 문을 나선다. 우듬지마다 목마른 새를 기다리는 몇 알의 사과에 눈물이 핑 돈다. 내 시가 딱 저랬으면 좋겠다. 잎사귀들이 푸르게 태질 하는 시간을 지나 눈먼 새까지 달게 목을 축이고 갈 수 있는 그런 나무였으면 싶다.

 

늘 변함없는 미소로 잔잔한 격려를 보태주신 영남대 이기철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청도까지 오르던 먼 길이 오늘에 이르렀음을 잘 안다. 그리고 내 망설임에 참 언어의 결을 환하게 열어 보여주신 경주대 손진은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끓어오르던 시어들을 담금질하던 교수님의 열정이 미흡한 내 시의 깊은 뿌리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늘 따뜻했던 경주대, 영남대 사회교육원 문창반 문우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인 나의 남편과 가족에게도 고마운 마음 전한다.

 

영광과 두려움을 함께 안겨준 영남일보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를 표하며 문 밖에 지천인 저 시의 몸들, 감히 찾아 나서라는 뜻 헤아릴 것을 약속한다.

 

 

 

아무 것도 아닌,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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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사물과 세계 적절히 통제, 시적긴장 부여"

 

예년에 비추어 특별히 뛰어나다 할 수 없는 올해의 응모작품들을 두고, 심사위원들이 숙고 끝에 마지막으로 간추려보았던 시편은 변희수, 황제윤, 권명호 제씨의 것이었다. 위의 세 분은 균제미가 고루 돋보이는 시적 성취들을 함께 선보이고 있었다.

권명호씨의 시는 생활의 이면들을 어느 정도 생생한 시화로 구체화시킬 줄 아는 응모자의 절제된 구상력을 엿보게 했다.

혈육의 애틋한 정을 일깨운 '아버지의 발등'과 같은 시가 일례일 것이다. 그러나 일상성을 뚫고 솟아오르는 이런 감동이 역설적으로 신인다운 상상력과 개성을 희석시키는 것이 아닐까 판단되었다.

황제윤씨의 시편에는 풍경을 해석하고 감싸 안는 시선의 깊이가 느껴졌다.

웅장하게 세워지는 대불보다 환하게 꽃피운 해당화의 생명력에 주목한 '꽃불'이나, 눈발들의 시각화로 차창 밖의 풍경을 문면 가득 흘러넘치게 한 '운주사, 덜컹거리는' 등은 응모자의 패기와 시적 자질을 충분히 읽어내게 하였다.

변희수씨는 전체적으로 사물과 세계를 적절히 통제해 시적 긴장을 부여할 줄 아는 응모자로 여겨졌다.

범상한 소재들로 삶의 미묘한 국면들을 저울질하고, 그만한 짜임새의 시로 격상시킨 것은 그의 수련이 어느 정도의 성취를 아우를 만한 수준에 이르지 않았을까 기대하게 하였다.

그런 기시감이 황제윤씨의 앞자리에 그를 내세우게 한 까닭이다.

심사위원들은 변희수씨의 응모작 중에서 '아주 흔한 꽃'이 고단하게 걸어온 삶의 내력을 행간과 행간 사이로 더욱 섬세하고 선명하게 부조(浮彫)해 보인다고 평가했다.

심사위원 이하석, 김명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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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화법 / 하기정

 

구름은 여태 제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어

형상은 당신 머릿속에나 있지

내가 만들 수 있는 건 물방울이 아니야, 보다 가볍지

당신의 어깨를 적실 수도

당신의 입가를 핥을 수도 있지

 

그러니 나를 구름이라 이름 짓는 건 아주 치명적이지

네가 구름이라고 부르는 것들, 네가

토끼, 라고 부르면 난 하마처럼 하품을 해 네가

고양이, 라고 부르면 난 호랑이처럼 포효하지 네가

의자, 라고 부른다면 금세 침대를 만들어 줄 수도 있어

만지면 폭삭 꺼지는 먼지버섯, 그러니 나를

버섯이라 불러도 좋아

형상은 당신 눈 속에나 있지

그러니S라인 B라인은 네 이름

 

무대가 아닌 곳에서만 춤을 출거야

내 음악은 내 귀로만 흘러들어 언제든지

다시 태어날 수 있어 나를

이해하려 시도한다면 그것은 서툰 오해

나를 만지려든다는 건 아주 절망적이야

롤러코스터를 생각한다면 모르지

추락은 오로지 빗물, 눈물

 

행여 구름을 담아서 팔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당신의 시선을 구부리는 일

악어, 라고 하면 도마뱀이 되어줄래?

고래, 라고 하면 돛단배가 되어줄래?

나에게 나를 너, 라고 불러줄래?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밤의 귀 낮의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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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더 부지런히 나아갈 터"

오리나무에 대한 기억이 있다. 유년의 뜰에 서 있던, 어쩌다 그 나무가 숲으로부터 멀리 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 나무에 고삐를 묶은 채 둘레를 빙빙 돌곤 했다. 심심해지면 그 오리나무의 체온은 얼마나 될까, 귀에 대고 재어 본 적이 있다. 보잘 것 없고 소용 없는 작은 열매를 연민했던 지난날로부터, 그 나무로부터 이제 아주 멀리 와 버렸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를 쓴다. '나'로부터 벗어나기를, 좀 멀리 떨어져 버리기 위해, 고삐를 좀 풀어버리기 위해. 하지만 나는 여전히 둘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나의 시어들은 육화된 말들이 아니라 휘발되는 말들이다. 언어들이 대립되어 저의 존재를 끊임없이 새롭게 피워내길 바랄 뿐이다. 그것은 물음의 형식이며 오래 전부터 풀지 못한 답이 없는 물음이어서 나의 '시쓰기'는 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언어이며 동정이며 연민이다.

웅크리고만 있던 나의 언어들을 세상 밖으로 소통의 길을 터 주신 김명인, 이하석 두 분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시의 자장 안으로 끌어주시고 중심 에너지가 되어 주시는 안도현 교수님께 감사라는 말 말고 뭐가 있을까, 역시 시의 언어가 아니고서는 드릴 말씀이 없다. 열정이 넘치는 우석대 대학원 문창과 교수님들께도 고개 숙여 인사드린다. 은사님이신 김혜원 선생님, 대학원생 문우들께도 고맙다는 말씀드린다.

샘물이 마르지 않으려면 퍼올리기를 게을리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에게, 더욱 간절해지기를.

 

 

 

 

[심사평] "수사의 굴레 벗어버리려는 시인 의지 돋보여"

 

예심에서 걸러진 스무 명, 100여편의 작품들은 그 나름대로 시의 미학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것은 '오르골' '살구알락나방 애벌레' '달의 족적' '몽골파오' 등을 응모한 네 분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거듭 논의된 여러 응모작의 중심에서 줄곧 거론되었던 것은 '몽골파오' 외 10여편을 함께 묶어 제출한 응모자의 시편이었다. 그의 응모 작품들은 그만큼 뛰어나 보였다. 그리하여 심사는 자연스럽게 이 응모자의 여러 시편 속에서 당선작 한 편을 골라내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의 응모작 중 어떤 작품은 말이 낭비되는 수다스러움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요즈음의 신인들에게서 흔히 읽히는 억지스러운 상상력이 살펴지지 않았다. 그의 시가 작위의 산물이 아니라, 가슴으로 익힌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는 개성적인 시의 문법뿐만 아니라 발견의 묘미도 함께 터득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 사로잡혀 호명되는 낯익은 사물들은 저마다의 자리에 새롭게 정돈되면서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인다.

이 응모자의 여러 시편 중에서 심사위원들이 합의해낸 당선작은 '구름의 화법'이었다.

이 시는 표면적으로는 변화무쌍한 구름의 일상을 노래하고 있지만, 섬세하게 살펴보면 언어적 소비에 대한 반감을 바탕에 깔아놓는 등 시인의 상상력이 사물의 운신과 사유의 폭을 넓혀준다. 이는 수사의 굴레마저 벗어버리려는 시인의 의지가 시적 자유를 온축(蘊蓄)해 보인 경우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일상의 공간 안에서 응고되기를 거부하는 이 미정형의 시선은 독자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심사위원 김명인, 이하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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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공양 / 이경례

 

 

졸참나무가 제 몸통을 의탁해왔네

지난 태풍에 겨우 건진 살림살이지만

기와 불사를 생각하며 제 몸 선뜻 내 놓았다네

오래도록 산문의 입구를 지켜 온 졸참나무와

 

딱따구리, 한참을 골몰한 붉고 노란 머릴 조아리며

하피첩서霞帖書를 떠올리다, 마침내

졸참나무, 거친 한 생의 피륙에다

제가 살아온 산야의 사적비를 짜기로 했네

 

구족口足 화가가

붓을 입에 물고 넝쿨처럼 뻗어 오르는

푸른 영혼을 펼쳐내듯

한 땀 한 땀이 딱따구리 혼신의 필사

 

졸참나무 나이테에 누가 바늘을 올렸나

아득한 시간의 엘피판에서 흘러나오는

여든 아홉 암자의 일천성인 득도의 날들과

어느 날 산사의 소신공양燒身供養

 

졸참나무의 한 생이 받드는 허공 속으로

무거운 산 울대 오래 공명하는 딱따구리의 필력

노을치마인 듯 소슬히

산야가 제 온몸 펼쳐 품안에 보듬는 저녁이라네

 

 

 

[당선소감] "이제 막 '비밀의 문' 암호 찾아낸 듯"

 

무의미를 꿈꾸던 한때가 있었다. 부화하지 못한 말들이 슬어놓던 무덤을 세어보던 시린 새벽이 있었다. 까마득한 옛날이었던 것 같다. 어느새 푸른 길섶에 들어섰던 것일까. 새소리와 흔들리는 잎사귀 하나에도 움트는 우주가 보이기 시작했다. 가파르다 생각한 오르막들은 더 멀리 바라다볼 수 있는 생각 언저리에 나를 내려놓았다. 나를 돌려세우고야 비로소 다가오던 세상, 한 개의 돌을 움직이자 돌아가기 시작하는 비밀의 문처럼 이제 막 해독한 암호처럼 세상을 읽기 시작한다. 나의 영혼으로 빚은, 그대와 나눌 수 있는 단 하나의 소통방식.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여 주신 김명인·이하석 두 분 선생님께 큰 감사를 드린다. 내 작은 소리가 오래된 우물처럼 세상의 귓가에 더 웅숭하고 깊은 파문을 울릴 수 있도록매서운 시의 들판을 헤매는 날이 많아질 것이다. 한 영혼이라도 떨게 할 수 있는 언어를 빚는 날까지 끝없이 나를 담금질하겠다.

 

맵고 따뜻한 가르침으로 가능성의 끝간 데까지 이끌어주시는 경주대 손진은 교수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교수님으로 인해 시의 출렁거리는 넌출과 속 깊은 뿌리를 알게 되었다. 더 열심히 읽고 쓰는 불면의 날들로 그 은혜를 갚아 나가고자 한다. 동리목월문학관과 경주대 사회교육원의 소중한 인연, 내 시의 덩굴손을 더듬어 가면 오롯이 서 계시는 김성춘 선생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내 생의 소중한 분들께도 여전한 사랑을 보낸다. 나의 웃음은 늘 누군가의 울음위에 열린다는 무거움이 있다. 로써 그 누군가의 눈물을 닦을 수 있을까?

 

 

 

 

이유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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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투명하고 맑은 서정의 힘 돋보여"

 

예심을 거쳐온 20여분의 작품들을 숙독하면서, 올해의 응모작들이 시적 다양성이나 인식의 틀에서 선자(選者)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안타까웠다. 그러나 습작기의 신인들에게서 흔히 살펴지는 판에 박힌 수사나 장식적 언술, 뿌리 없는 상상력과 모호한 주제들, 리듬을 사상(捨象)시킨 줄글체의 중언부언들은 다소 걸러진 것 같아서 다행스러웠다. 마지막까지 선고(選考)의 대상이 된 작품들은 '무릎' '유리주의' '흔적' '나무의 공양' 등이었다.

 

'무릎'은 신체의 일부분을 일상의 틀 속에서 음미하면서 자성(自省)으로 이끌고 가는 노련함이 읽혔다. 시어의 경제를 실천하면서도 환상을 끌어안는 견고한 짜임새가 돋보인다. 또 다른 응모작 '둘레'도 이 응모자의 습작의 강도를 짐작하게 하는 작품이다.

 

'유리주의'는 대상으로 집중하는 시선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삶의 음영을 겹쳐놓는 시적 사유의 힘이 돋보인다. 그럼에도 상상력의 결을 좀더 활달하게 풀어헤쳐보였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만든다. 한 작품을 지탱해 줄여타의 시편이 없다는 것도 이 응모자의 한계라고 판단했다.

 

'흔적'은 당선을 두고 마지막까지 겨룬 작품이다. 이 응모자가 선택하는 깊이 있는 시어들은 주제를 끌고나가는 끈질긴 사유의 힘과 어울려 상당한 설득력과 무게를 차지해 보인다. 그럼에도 당선작의 뒷자리에 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딘가 익숙한 수사로 가로질러 오는 언술들이 잦았던 탓이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는 자신에게도 낯선 자리를 마련해주려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나무의 공양'은 오래 묵힌 소재를 활달하고 투명한 상상력으로 맑은 샘물처럼 산뜻하게 변주한 작품이다. 대상을 새롭게 부조하여 오롯이 완결된 한편의 서정으로 빚어내고 있어서 이 응모자의 숙련된 공력을 느끼게 한다. 시가 직선도 곡선도 아닌 얼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깨우친 결과이리라. 당선에는 다른 시편의 수준들도 함께 평가된 것임을 부언해둔다. 더욱 정진하길 당부한다.

 

심사위원 이하석(시인), 김명인(시인·고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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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 조혜정

 
 
처음 찍은 발자국이 길이 되는 때

말의 반죽은 말랑말랑 할 것이다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쏙독새는 온몸으로 쏙독새일 것이다


아랫도리를 겨우 가린 여자와 남자가 신석기의 한 화덕에 처음 올려놓았던 말. 발가벗은 말. 얼굴을 가린 말. 빵처럼 향기롭게 부풀어 오른 말. 넘치고 끓어오르는 말. 버캐 앉는 말. 빗살무늬 허공에 암각된 말.


처음 만난 노을을 허리띠처럼 차고 만 년 전 바람이 만 년 전 숲에서 불어온다 뒤돌아보는 여자의 열린 치맛단 아래 한번도 씻지 않은 말의 비린내 훅 끼쳐온다 여자가 후후 부풀린 불씨가 쏙독새 울음소리에 옮겨 붙는다 화덕 앞에 쪼그린 아이들 뜨겁게 반죽한새소리를 공깃돌처럼 굴리며 논다 진흙 같은 노을 속에 층층 켜켜 찍히는 손가락 자국들,


귀먹은 아이는 자꾸 흩어지는 소리를 뭉치고 굴린다

깊고 먼 어둠을 길어 올려 둥글게 반죽한다

천 개의 나뭇잎들이 천 개의 귀를 붙잡고

흔드는 소리, 목구멍 속에서 쏙독새 울음소리가

허공을 물고 터져나온다


바람이 석류나무 아래서 거친 숨결을 고르자

처음부터 거기 살고 있는, 아직도 증발하지 않은

침묵의 긁힌 알몸이 보인다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쏙독새는 온몸으로 쏙독새인

그 길이 보인다

 

 

 

 

[당선소감] 사라진 세상의 소리를 만난듯…

 

안팎으로 열리는 문만을 열어본 사람은 구름의 손잡이를 찾을 수 없다. 손잡이 없는 구름은 줄곧 나를 따라다녔다. 시(詩)는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길을 가르쳐주었지만 그가 말해준 빛나는 것들을 찾을 수 없었다. 목탁을 두드리는 것 같은 도마소리가 집집의 문밖으로 새어나오는 저녁이었다. 꿈에서 울다 깬 한밤중이면 이미 끝장난 세상의 다음날, 고요까지 다 사라졌는데 홀로 남아 소리를 애타게 기다리는 귀 같았다. 詩는 사라진 세상의 소리들을 하나씩 되살려 기억하는 꿈이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바람들이, 돌멩이들이 한순간의 기억만으로영원을 견딘다고 믿는다. 구름의 손잡이를 잠시 잡았다 놓친 것 같은 이 느낌만으로 시를 놓지 않고 길의 끝까지 갈 수 있길 바란다. 시와 반시 문예대학 강현국·구석본 선생님, 가르침을 주신 모든 선생님들과 시를 쓰며 만난 소중한 친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과 영남일보에 감사드린다. 부모님과 내 가족, 꿈에서 울다 깬 '한밤중'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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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작품 장점 찾으려 후속작까지 정독"
 
예심을 거쳐 넘어온 작품들의 수준은 비슷비슷했다. 거듭 읽어도 두드러진 작품이 보이지 않아 두 심사위원은 당선작을 결정하지 못한 채 숙고를 거듭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메타세콰이어' '유클리드 연대기' '구름 위의 문장들' '두부의 힘' '주왕산' '천 개의 붉은 방'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등이었다.

 

이 작품들은 나름대로의 장점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것으로 한 시인의 개성화에 이르기에는 부족한, 군데군데의 흠을 지니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들의 장점을 발견하는데 주력하며 후속 작품들까지 정독했다.

 

'메타세콰이어'는 발상이 신선하고 마지막 연이 진한 여운을 던진다는 미덕이 있으나 전체의 시가 지니는 언어들의 긴장감이 떨어지며 후속 작품들의 수준이 이 시를 받쳐주지 못한다는 결함이 지적되었다. '유클리드 연대기'는 일종, 이야기 시의 재미를 느끼게 한다. 최근에 유행하는 시의 흐름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 시는 편안하게 읽히기는 하나 언어의 긴장미가 떨어진다는 결함이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시 안에 탈자(脫字)가 있음도 주의를 요한다. '구름 위의 문장들'은 '붉은 호수'와 함께 최근 유행하는 시들을 많이 읽었거나 그런 습작의 훈련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가 일상성에서 일탈한 신선한 감수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이 결함으로 지적되었다. '주왕산'은 섬세한 감각의 미덕을 보이고 있다. 흔하지 않은 새 이름, 꽃 이름들이 불러일으키는 시적 아름다움도 돋보인다. 그러나 이런 류의 시가 갖는 공통적인 흠인 전달력과 무게의 약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두부의 힘'은 부드럽고 유려한 언어의 감각을 지니고 있어 음미할수록 시의 맛이 우러나는 작품이고 부분 부분 좋은 구절들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전반부가 서술적이고 긴장미가 떨어져 독자를 견인할 힘이 약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천개의 붉은 방'과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였다. '천 개의 붉은 방'은 강렬한 이미지와 생동하는 어휘들을 동원하고 있음이 장점이다. 형태상으로도 완성도가 높아 오랫동안 심사위원들을 숙고케 한 작품이다. 하지만 허두 부분의 신선함에 비해 중간 부분이 흐려져 있다. 거기 비해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는 허두부터 언어의 세련미가 돋보이고 참신한 상상력의 자장을 띠고 있다. 글을 쓰기 위한 정련의 과정을 말한 시인데 읽을수록 새로운 맛이 솟아난다. 그러나 후반부가 흐리고 기성 시인의 냄새를 풍기며 행을 좀더 압축할 필요가 있다. 심사위원은 이상의 작품들이 갖는 결함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운 작품으로 보이는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응모자 여러분의 문운을 빈다.

 

심사위원 이기철(시인·영남대 교수), 최동호(시인·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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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갈나무 약국 / 임수련(본명 임외자)

 


밤새 앓고 난 후엔
딱따구리구리 마요네즈 케챱은 맛있어
인도사이다 인도사이다,
콧노랠 흥얼대며 떡갈나무약국을 찾아가죠
솜털 가운을 걸친 새들
자잘한 열매 알약들과 이슬 드링크 들고
분주하고요 떡갈잎 의자에 앉아 깔깔대는 노란 햇살들
눈꼽 씻은 바람이 흔드는 나뭇가지 소파
꼬마전구 도토리알 켜져 있는 조제실 구석에선
약봉지 바스락대는 사슴벌레랑
무당벌레의 그루잠도 훔쳐볼 수 있어요

당신도 어디 아프신가요?
딱따구리구리 마요네즈 인도사이다,
콧노랠 흥얼거리며 향과 색과 소리들이 화답하는
떡갈나무 약국을 찾아가 보시죠
어린 살결처럼 싱싱한 푸른그늘 대기실에 앉아
깨알같이 쓰여진 마음의 처방전 읽고 있으면
어떤 상처도 아물게 한다는
까만 눈속에 당신을 태운 다람쥐 한 마리
지구보다 더 너른 나무의 세계로 안내해 드리고요
떡갈나무약국의 주인장 오색딱따구리와
구름트럭 끌고 약배달 온 빗방울의 경쾌한 대화도 들을 수 있죠

가끔 늦은 시간에 찾아가면 밤의 이마에 새겨진
따갑고 노란 눈동자들 등을 파고 들고
약국 처마의 기둥들이 굵어지는 걸 볼 수도 있는 곳
참 그곳엔 그 기둥들도 혼신으로 즙을 짜낸다는군요
마음이 푸석하게 부어올 땐, 딱따구리구리 마요네즈
케챱은 맛있어 인도사이다 인도사이다,
콧노랠 흥얼대며 떡갈나무약국을 찾아가봐요

 

 

 

 

[당선소감] "구석서 울던 詩 꺼내 줘 감사"

나에겐 깊고 푸른 골짜기가 있어요
많은 생각과 낱말들
촉루처럼 흩어져 있는.
어떤 힘에 끌려 난 그 골짜기로 가서 자주
뒹굴고 있는 뼈들을 바라보죠
푸른 이끼 깔고 앉아 성근 이빨 꾸욱 깨물고
동굴 같은 텅 빈 눈은 들고
힘줄과 살 입히고 생기 불어넣어* 달라며
눈물 뚝뚝 흘리는 캄캄한 촉루의 눈빛
몰랐어요, 나는
어떻게 하면 그들이 살아날 수 있는지
해골과 뼈들 서로 연락하여*
인디에나존스에서처럼 후두두 일어나 몸을 이루는지
내가 가슴 저린 짝사랑을 오래 앓으면 앓을수록
알 수 없는 바람이 일고 시내가 흘러
튀어오르는 봄꽃들처럼
각기 뼈를 맞추며 몸을 입고 걸어나오는 것인지

내 사랑, 詩는 촉루로 이루어져
늘 이렇듯 난 아픈 것인가요

* 성경 에스겔서 37장


내 시를 간섭하시고 영감과 문장력을 주시는
하나님께 이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구석진 곳에서 무릎 꿇고 울고 또 울던
제 시를 밝은 곳으로 이끌어내신 이기철, 최동호 두 분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낮은 자세로 언어와 삶을 공굴리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영혼이 맑아야만 올바른 시가 온다, 며
곁에서 제 부족한 인격과 시를 매질하시는
경주대학교 손진은 교수님께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오래 감성을 나누며 서로 격려해준 경주대학교 문창반 식구들,
한 소식 틔우기를 고대하고 고대한 방송대, 문예대 선후배들과
태중의 아기에게 시를 들려주며 딸이 시인 되기를 바라신 어머니께
저를 오랫동안 묵묵히 믿어준 남편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시를 아끼는 모든 분들과도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시를 아끼는 모든 분들과도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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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이야기시·노래시 조화 돋보여"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은 비교적 고른 수준을 보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작품의 다양성이 부족하고 불필요한 요설의 노출이 거슬리는 점이었다. 이는 아마도 신인들의 의욕 과잉이나 신춘문예의 흐름을 그릇 인식하고 있음에서 온 현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실험시, 현실고발시, 민중시의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았고 내면 의식과 삶에의 통찰을 노래한 시들이 많았다. 시의 풍토가 안정되어 가고 있다는 징조로 읽어도 될듯하다. 그런 가운데서 심사위원을 숙고하게 한 작품은 '칸나가 피는 가계부' '떡갈나무 약국' '먼지의 안쪽' '유방암을 앓는 여자' '치자나무의 마음' 등이었다. 이 작품들을 두고 두 심사위원은 비교적 오랜 대화를 나누어 마침내 '떡갈나무 약국'을 당선작으로 미는 데 합의했다.

 

 

'칸나가 피는 가계부'는 언어구사가 탐스럽고 현란하나 가끔은 우발적인 시행이 불필요하게 개입하고 있는 것이 흠이었지만 당선권으로밀어도 손색이 없는 작품으로 여겨진다. '먼지의 안쪽'은 생각의 깊이와 휴머니티라고 할 인간미를 지니고 있으나 관념시로 흐를 가능성이 결함으로 지적되었고 '유방암을 앓는 여자'는 요즘 유행하는 '몸담론'을 체현하고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있으나 소품(小品)이고 결말 처리에 모호함이 있었다.

 

'치자나무의 마음'은 사물에 대한 애정과 일종의 물활론적 사유가 담겨 있으나 지나치게 소박하고 평이함이 결함으로 지적되었다. 당선작인 '떡갈나무 약국'은 시어의 경쾌한 흐름과 발랄한 상상력이 시를 읽는 마음을 견인하는 힘이 있다. 이야기시와 노래시의 양면을 함께 지니며 비약적인 어휘와 에그조틱한 상상의 모험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아마도 가볍지 않은 감각적 훈련을 쌓은 듯하다.

 

당선자와 그 밖의 모든 응모자에게 문운 있기를 바란다.

 

심시위원 이기철(시인·영남대 교수), 최동호(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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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동 삽화 / 김성철  

 

 

천둥 번개가 치자 공장엔 정전이 찾아왔다
소나기의 망치질 소리가 시작되면
둥 번개가 치자 공장엔 정전이 찾아왔다
늙은 배선이 어김없이 누전 빙자한 어둠을 불렀다
여공들의 환한 치아가 깜빡깜빡 불 밝히고
재단사 김씨는 하늘위로 쌓아올려진
회색원단 눈길로 만지며 납품기일 손꼽는다
창틀 등지고 불어오는 바람
미싱 선반 위로 펼쳐진 꽃길타고 달려간다

손 맞잡은 여공들 바람의 허리춤을 잡고
꽃길 위로 걸어 들어간다
피지 못한 꽃들이며 줄기 오르지 못한 실밥들이
보푸라기 흔들며 반긴다
페달 밟는 미싱공 꽃들에게 먼저 수인사 건네자
웃자란실꽃들 서둘러 뿌리 걷으며
손에 핀 봉제선 위로 올라탄다
때 묻은 손목, 손목들
산수유열매처럼 붉게 흔들린다

재봉중인 꽃술이 실밥을 흔들었으나
접근금지를 알리는 도안선이 유난히 날을 세운다
작업반장의 기침소리와 함께 기지개 다시 피는 형광등
주파수 맞추는 고물전축, 후후 바람 불어 목청 가다듬고
여공들은 와 하며
공장안으로 퉁긴다
 
봉제동 수출공장
시동 거는 미싱들 서역 향한 길을 재촉한다
실크로드 사막의 모래처럼 날리는 보푸라기
 
봉제동 여공들은 실크로드를 걷고 있다

 

 

 

 

달이 기우는 비향

 

nefing.com

 

 

 

[당선소감] "같이 아파하지 못한 나를 원망"


삶은 배반이다. 영화같은 삶은 늘 현실도피중이거나 대인기피증이 심하다. 그 덕에 앓아누웠던 일 얼마나 많았던가?

 

한동안 부서진 것들만 눈에 들어왔다. 깨진 계단이 그랬고 녹슨 육교난간이 그랬고 어머니의 해진 보험가방 가죽도 그랬다. 닳아빠진 구두 뒷굽 속에 들어앉은 단단한 사내도, 문 닫힌 유곽 속에 핀 꽃도, 가슴 속에서 꽉 깨문 신음만 뱉고 답답해하기만 했다. 형상화되지 못한 것들이 꿈속에서 부유하고 난 늘 축축한 식은땀만 흘리다 깨곤 했다. 손을 뻗어 만지기만 할 뿐, 같이 아파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는 날. 그런 날들.

 

전화를 받은 게 바로 어머니께서 진통을 시작했던 날과 같았습니다. 당선통보를 받고 눈에 선하게 밟히는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아직도 낡은 보험가방을 들고 다니십니다. 서른 넘은 아들 녀석이란 게 매번 어머니 가방의 해진 가죽만 바라볼 뿐이지, 가방을 들어드리거나 새로운 가방을 만들어드리지도 못했습니다. 오늘의 이기쁨이 어머니께서 저를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인내하시던 진통을 조금은 덜어드렸을 거라 믿습니다. 또한 하나뿐인 누나와 자형, 그리고 사랑하는 조카 지은·지선에게도 이 기쁨을 전합니다.

 

이 기쁨 함께 하고픈 사람들 더 많습니다. 산적 같은 석정, 가냘프고 억센 상웅, 아프리카 소사 태관, 눈 먼 안빈, 소설을 위해 불태우는 모군과 유민, 그리고 1기 안도현 선배님부터 23기 오희진까지 모든 원광문학회 선배님, 후배님들. 목포를 지키고 있는 벗 인석, 늘 곁에서 힘을 주는 일영·유미씨, 강연호 교수님, 이 자리를 빌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더욱더 열심히 쓰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그리고 저를 믿고 따라와 주는 공부방 사회선생님을 비롯한 모든 선생님들. 그리고 깨물어 보듬고 싶은 아이들. 효정 별 선필 성범 준형 정곤 성민 성현 은탁. 또한 마음속에 앉은 그녀에게도….

 

나에게서 떠난 모든 사람들, 아픔 줘서 감사합니다. 좀 더 많이 아파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못난 저에게 죽비를 내리쳐 주신 두 분의 심사위원께 엎드려 고합니다. 더욱더 노력해서 부끄럽지 않게 쓰겠습니다.

 

 

 

 

[심사평] "민중의 삶 진전된 감각으로 표현"

 

예심을 거쳐서 본심에 넘겨진 작품들은 대체로 상당기간 수련과 일정한 수준의 솜씨를 보여줬다. 아직도 시인 지망의 열정을 가진 높은 수준의 후보자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한국문학의 미래를 위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응모작들은 최근 시단의 흐름이 반영된 탓인지 전반적으로 크고 무거운 주제보다는 작고 가벼운 일상사를 소재로 한 미시적인 삶의 세계를 천착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짧고 기지가 번득이는 시, 밝고 건강한 시, 서구적 감성의 시 등이 눈에 띄었다.

마지막까지 당선작으로 검토의 대상이 된 것은 '페르세포네의 동굴' '소설(小雪) 일주일 후, 첫 눈' '봉제동 삽화' 등의 작품들이었다. '페르세포네의 동굴'은 신선한 신생의 감각이 두드러졌으며 '소설(小雪) 일주일 후, 첫 눈'은 깔끔하고 완결된 서정적 구조가 돋보였다. '봉제동 삽화'는 봉제공장 여공들의 건강한 삶의 풍경을 소재로 한 시로서 약간 익숙하긴 하지만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었다.

세 편의 작품은 각각의 장단점을 지니고 있어 우열을 가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검토한결과, '페르세포네의 동굴'은 현실에 대한 밀착감이 조금 부족했으며, '소설(小雪) 일주일 후, 첫 눈'은 전체구도의 시적 완결성에 비해 마지막 결말 처리에 있어서 내적 에너지가 약했다. 결과적으로 '봉제동 삽화'를 이의없이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는데, 그것은 이 시가 기존의 민중시와 달리 새롭게 진전된 감각을 긍정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민중시가 지닌 부정이나 분노의 감정을 벗어나서 "여공들의 환한 치아가 깜빡깜빡 불 밝히고" "웃자란 실꽃들 서둘러 뿌리 걷으며/ 손에 핀 봉제선 위로 올라탄다" "실크로드 사막의 모래처럼 날리는 보푸라기" 등의 사실적인 표현들은 노동현장에서의 삶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새롭게 표현해 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같이 응모한 '거미집'이나 '만물상' 등의 작품도 일정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점 또한 선자들의 결정에 참조사항이 됐다. 당선자가 새로운 민중시의 지평을 걸어나갈 것을 기대해 본다.

당선자에게는 아낌없는 축하의 박수를 보내드리고 아깝게 탈락된 많은 응모자들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드린다.

 

심사위원 신경림, 최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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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훌라 / 최해경

                                                                   

 

ㅡ 길모퉁이에서

누군가를 부르며

부르트며 바람이 거리를 휘감는다.

어둔 밤 얼룩처럼 드문드문 가로등이 번지고

막차를 기다리는 내 등 위에서

멀어져라 뒤돌아보지 마라

바람은 쉰 목소리로 다그치듯 나를 자꾸 떠민다.

그는 저 만치서 나를 향해 말없이 서  있을 것이다.

자울대다 눈을 거푸 치켜 뜨는 길 모퉁이 가게 불빛 사이로

밤은 더욱 자우룩 해지고

여전히 그의 눈빛은 차게 떨리겠지

스무 살 적, 객지에 나를 처음 떨구고

곧 목놓아 울 듯 그렁그렁 하던 그 눈빛이

내 가슴에 단단히 말뚝을 박고는

노작지근한 해질녘이면 어지러이 발길질을 해대곤 했었다.

어미 소의 말간 눈망울에 들이치던 석양빛처럼

빛의 눈물 자국 다 떠메고

차마 못다한 말 되새김질 하듯

그리움도 순하게 견뎌야 한다는 것

오랜 후에야 그 눈의 얼룩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한 여름 소낙비가 얼룩져 시린 겨울 강 핥는 여울이 되고

사랑은 얼룩져 돌이킬 수 없는 그러나

돌이킬 수 밖에 없는 괴물같이 눈부신 추억을 매달 듯

얼룩이 마냥 뼈아픈 얼룩만은 아니지.

이제서야 나는 나를 다둑여 준다.

언제나 되돌아보면

나의 짓무른 가슴의 얼룩, 아버지가

끝에 저기 서 있다.

세상 없어도.

 

*산스크리트명은 라훌라(Rahulla)이다. 장애로 의역되고 있다. 싯다르타가 생로병사의 고통을 목격하고 출가를 결심하여 돌아오던 길에 아들이 태어나 "라훌라(장애)가 생겼구나!"라고 통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당선 소감] "詩는 모든 사람 손을 잡아주는 일"

 

그토록 바라던 것이 언젠가는 온다는 말을 밤새워 되뇌이곤 했습니다. 시는 순결한 영혼에만 깃드는 축복이라 여겨져 저의 불순함에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 간절히 원하기도 했지만 감히 다가갈 수 없었던 그 시의 손을 처음 잡게 된 것 같아 설렙니다.

 

어렴풋이 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 시간들, 기억들, 풍경들에게 온 마음을 다해 손을 잡아주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손을 잡아주고 싶은 마음, 그 마음 꼭 붙들고 부지런히 쓰겠습니다.

 

당선 소식을 들었던 지난 22일이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외치는 소리를 듣고 크리스마스가 되려면 며칠이나 남은 터인데 왜 벌써부터 크리스마스라고 말할까 한참 생각하면서 몹시 웃다가 그 웃음 끝에 살짝이 눈가가 얼룩졌습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제가 무엇이나 되었을까 생각합니다. 한 짐이나 되는 그 무수한 눈물의 출처가 늘 저였기에 그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이제는 그 짐 부려두고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걸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할머니, 막내 고모, 오빠, 무엇이든 해주고픈 아우, 가족 모두에게도 아낌없는 사랑을 전합니다.

 

가볍게 내려와 손등에 스르르 녹아 스미는 하얀 눈 같은 시를 쓰라고 말씀해 주신 분이 계십니다. 학교에서 항상 애정어린 마음으로 가르쳐 주신 교수님들과 무한한 동경의 대상이었던 박경희 선생님, 김문주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와 친구해 준 사랑하는 친구들, 동기들, 선배 그리고 좋아하는 언니들에게도 고마움을 느낍니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제 손을 잡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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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익숙한 주제를 남다르게 펼쳐"

올해의 시 부문은 응모자의 양과 질에서 예년을 압도하였다. 최종심사로 넘겨진 20여 분의 시편들은 면면에서 저마다의 솜씨와 개성이 두드러졌다. 심사위원들은 숙고를 거듭한 끝에 조은수씨의 '통장정리' 외, 김상윤씨의 '달빛 충전소' 외, 이인주씨의 '모자를 쓴 사철나무' 외, 최해경씨의 '라훌라' 외 등을 마침내 선고 대상으로 압축시켰다.

조은수씨의 장점은 일상이라는 거울 속에 가둬넣은 마음을 시의 세필(細筆)로 그려가는 섬세함인데, 오히려 그 점이 시를 소품이라는 너무 아담한 그릇에 담아버린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판단되었다.

김상윤씨의 시편에서는 시어의 정제를 실현하면서도 환상을 끌어안는 견고한 짜임새가 돋보였다. 그럼에도 생각의 결이나 매듭을 좀더 활달한 상상력으로 풀어헤쳤으면 한층 잘 읽히는 작품들을 선보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인주씨의 경우는 환상을 리듬으로 교직시켜 완결로 이끄는 사유의 힘이 매력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관찰과 묘사의 굴곡에 겹쳐드는 말의 파문이 편편마다 시의 파장으로 읽혀져서 응모 시 전체를 출렁거리게 하고 있다.

최해경씨는 시가 감싸 안아야 할 삶의 풍경과 음영을 표 나지않게 드러내면서도 포개진 환상을 읽게 만든다. 그러나 감동적인 것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시선의 투명성이 옅었더라면 그의 작품들 또한 익숙한 주제의 변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선자들은 마지막까지 이인주씨와 최해경씨의 시편들 사이에서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읽는 이에 따라서는 다소 산만하게 느껴질 '라훌라'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익숙한 주제라도 남다르게 펼쳐보려는 최씨의 노력이 이씨에게 거의 기울었던 저울추를 그의 편으로 끌어당긴 까닭이다.

심사위원 신경림.김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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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 박미숙

 

 

귀신 귀신 저 귀신들 바람에 놀아나는 노랑 분홍 하양 저고리 퀴신들 저고리 앞섶 연신 올라간다 젖가슴 눈부셔 팔은 마냥 하늘로만 쳐들고 뿌리뽑힌 하늘 젖꼭지 핥느라 눈도 코도 퍼렇다 바람이 분다 개울, 바람의 가랑이 사이로 머리를 푼다 바위틈 화들짝 놀란 가슴 또 하나 부풀어오른다 부풀어오른다 봄은 바람의 장난감 맑은 앞치마 서둘러 두른 봄비 안하무인 봄바람의 뺨을 때리고 연두빛 치마 끌어 당겨 꽃의 아랫도리를 감싼다 바람은 휘청거리는 다리를 끌어 모아 허둥지둥 새둥지로 숨어든다 빈 둥지 속 은밀한 미소를 사글사글 굴리며 볼 안 가득 휘파람을 모은다 봄은 귀신들의 천국 귀신들의 파장 무도회 귀신들의 저고리 갈가리 찢겨 휘파람 타고 논다 휘파람 소리에 파다닥 새가 날아간다 자전거가 날아간다 자동차가 날아간다 집이 둥실 떠오른다.





[당선소감]

 

시를 보내놓고는 집안에 들어앉아 소설책만 읽었다. 재미있었다. 내게 있어 고통이며 동시에 희열인 시를 잠시 잊으려는 방편이기도 했다. 그렇게 겨울잠을 자듯 엎드려 있다가 봄이 되면 그리운 친구를 만나듯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를 만나리라 마음먹었다.

당선전화를 받고는 한동안 꿈인가 싶었다. 그래서 기뻐해 줄 이들의 얼굴만 떠올린 채 선뜻 소식을 전할 수가 없었다.

진정되지 않는 마음으로 이리저리 서성대는데 하필이면 더러워진 창문이 눈에 띄었다. 아무 생각 없이 오래도록 창문을 닦았다. 가슴 한가득 푸르름이 안겨왔다.

하늘은 언제 보아도 시들지 않은 싱싱함으로 내게 다가온다. 살면서 덕지덕지 마치 제 살인 양 들러붙은 찌든 때를 벗고 원시의 동굴로 돌아가 하늘 닮은 시를 낳고 싶었다.

굳어만 가는 몸의 감각들을 끊임없이 깨워 시의 속살을 보여주신 작가콜로퀴엄의 박재열 교수님, 그리고 자신 없어 하는 내게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힘을 실어주신 박미영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이 크다.

오래오래 우정을 나누고 싶은 문우들, 나보다 더 좋아하며 축하해 주실 부모님, 그리고 사랑하는 희언이·희정이에게 오늘의 이 기쁨을 다 주고 싶다.

보일 듯 잡힐 듯 늘 저만큼에서 나를 유혹하는 시를 생각하면 나의 그물은 아직도 너무나 허술하기만 하다. 그런 내게 시의 문을 열어 용기를 주신 심사위원님과 영남일보에 보답하는 길은 좋은 시를 향한 끊임없는 열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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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최종심에 오른 열 한 분의 시편들은 그 나름대로의 장점과 단점이 살펴져서 쉽게 우열이 가름되지 않았다. 이들 응모 시의 전체적인 특징이라면 주제의 진지함과 습작의 깊이가 인상적이라는 것이며, 공통의 과제라면 수사적 과잉을 지적할 수 있겠다. 흔히 신춘문예 응모 시라면 남들보다 더 돋보이게 하려는 일념만으로 지나칠 정도로 수사와 기교에 매달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수사적 집착은 결국 장식일 뿐, 좋은 시란 꿰맨 자취도 그 흔적도 나타나지 않는 법이다.

선자(選者)들은 마지막까지 이여명·김희주·이호기·박지현·박미숙씨 등 여러 분의 작품 사이에서 고심을 거듭했다. 이여명씨의 ‘돌 속에는 거북이 살고 있다’는 석공예의 창조성을 묘파하는 활달한 시선과 화법이 느껴졌으나, 다른 응모 시들이 이 작품의 수준을 뒷받침하지 못하였다.

김희주 씨의 ‘파리’는 관찰과 묘사의 끈질김과 수월성을 엿보게 했으나, 역시 한 편만으로는 그의 시적 재능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박지현 씨의 ‘충주 박씨 종갓집’ 등은 설화의 안팎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너무 잡다한 이야기로 행간을 채워서, 그 다변함이 오히려 시의 보폭을 느리게 하고 말았다. 이호기 씨의 ‘끝물 꽃 어머니’ 등은 삶의 간절함을 담아내는 서정적 행간이 아름답게 읽혔다. 그러나 이씨 역시 수사적 과잉으로 시의 파장을 스스로 잠재우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박미숙씨의 응모 작품들은 대상을 집중시키고 고양시키는 시선이 발군이었다. 응모 시편의 고른 수준 또한 선자들을 안심시키기에 충분했다. 당선작으로 뽑힌 ‘봄’은 약동하는 새봄의 기운을 몸 속의 바람으로 불러내고, 그 위에 감각이 감지하는 리듬을 실어, 생명의 약동과 부푼 기대를 시의 탄력으로 제대로 살아나게 하였다. 이만한 기량이라면 앞으로의 작품들도 기다려진다.

- 심사위원 강은교·김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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