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 박진이
발 하나 들어 있지 않은 난전의 신발들
맨발보다 더 시려 보이는 저 표준의 사이즈들은
몇 번을 신어보고 몇 번을 돌아서 보고
몇 번을 벗어두고 나서야
발의 온도를 이해할까
오늘도 얇은 먼지와 흰 눈에게 제 크기를 내어준다
겨울, 한기를 견디던 힘으로 발을 기다리는 일
진열이 아닌 나열의 추운 발
그러나 아무도 저 시린 발은 사지 않겠다는 듯
지나가는 걸음들은 빠르다
맞춤이 아니어서 주인이 없는 발
몇 켤레의 신발을 신어 본 후에야
제 발의 온도를 고를 수 있나
나열의 난전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내내
신발이 발을 믿지 못하는 것인지
발이 신발을 믿지 못하는 것인지
몇 켤레의 신발이 들렸다 놓였다 신겨졌다 벗겨졌다
뒤꿈치 똑똑 딛고 싶은 저녁 무렵
누가 나열의 난전에 놓인 신발을 사고 싶을까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유리 너머 진열의 신발들에 눈이 흘리는 날
퉁퉁 부은 저녁의 발에 난전의 신발 한 켤레를 신겨 보는데
그새, 벗어놓은 헌 신발도 좋다는 듯
흰 눈발 내려앉고 있다
[당선소감] 발 시린 심정으로 글을 썼습니다
결혼식장에 있었습니다. 신랑 신부의 퇴장에 맞춰 박수를 치던 중이었습니다. 당선을 알리는 기자님의 목소리가 박수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예식장을 나와 부산에서 수원의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자꾸만 히죽히죽 웃었습니다. 행복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동안 글을 쓰는 내내 발이 시린 심정이었습니다. 따뜻한 겨울이 될 것 같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무척이나 기뻐하실 겁니다. 매번 내가 쓴 시를 보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던 재경씨 고맙습니다. 그리고 정민아, 우석아 사랑한다.
부족한 글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영남일보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쓰겠습니다. 내 글감이 되어준 정자시장 난전의 신발들에게도 할 수 있다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난전의 신발 속으로 흰 눈발이 내려앉을 것입니다.
[심사평] 안정적인 호흡…자신의 목소리 자연스럽게 담아
우리가 마지막까지 주목한 작품은 ‘팔꿈치에 관한 단상’ ‘신발’ ‘유령위장’ ‘바람의 건축면적’ 등이다. 네 편 모두 장단점을 두루 가졌다.
본심의 작품 일부는 기성 시인의 영향이 두드러져 본인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점은 불만이다. 띄어쓰기와 맞춤법은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팔꿈치에 관한 단상’은 좋은 작품이다. 몸의 시학이란 발상은 우리 현대시의 성과이다. 화자는 팔꿈치를 관찰하고 팔꿈치라는 생을 주목한다. 팔꿈치에서 “나른한 졸음을 꺼”내는 발화는 오후의 햇빛을 거치면서 다시 팔꿈치에서 ‘둥글게 번지는 물결’을 만들다가, “사라지고 키우고 조준을 괴던 그곳에서 악단 하나를 해체해도 좋으리”라는 편안한 저녁의 팔꿈치에 도달한다. ‘신발’과 함께 우리가 오래 주저했던 작품임을 밝힌다.
‘신발’은 선악이 엇갈리는 작품이다. 신발이 맨발보다 더 슬픈 것은 “발 하나 들어 있지 않은 난전의 신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발과 비슷하기 때문에 ‘시린 발’의 다른 모습이다. 따라서 “벗어놓은 헌 신발도 좋다는 듯 / 흰 눈발 내려앉고 있”는 풍경은 가난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하지만 ‘신발’에는 눈에 거슬리는 불편이 있다. 예를 들어 “겨울, 한기를 견디던 힘으로 발을 기다리는 일 / 진열이 아닌 나열의 추운 발”이란 구절은 상투적 인식이다.
‘유령위장’은 독특하다. “이 위는 무엇으로 배가 부를까”에 귀를 기울이면서 “숟가락이 없는 밥”의 가난에 도착한다. “비어 있는 위가 둘인 미라를 발견한다면 / 고대 인류는 / 위장이 두 개라 추정하는 인류사를 새로 쓰겠지”라는 결론과 “배부르게 먹었던 기억은 다 위다”라는 진술에는 공감할 수 없다. 시적 미학이라는 점에서, 전략도 절차탁마도 부족하다.
‘바람의 건축면적’은 건축자재의 하나로 바람을 사용한 점이 놀라웠지만, 그뿐이었다.
박진이씨의 ‘신발’은 그런 점에서 순정적이고 게다가 안정적인 호흡을 얻었다.
유행하는 어법을 도외시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드러내었다는 점이 우리의 호감을 얻었다. 빛나는 구절이 상투성이란 단점을 껴안았다.
당선을 축하한다. 신춘문예 당선이 영예가 되려면, 앞으로 평생 시인으로 살면서, 시를 사유하고 시를 써야 할 것이다.
심사위원 이하석 시인, 송찬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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