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훌라 / 최해경
ㅡ 길모퉁이에서
누군가를 부르며
부르트며 바람이 거리를 휘감는다.
어둔 밤 얼룩처럼 드문드문 가로등이 번지고
막차를 기다리는 내 등 위에서
멀어져라 뒤돌아보지 마라
바람은 쉰 목소리로 다그치듯 나를 자꾸 떠민다.
그는 저 만치서 나를 향해 말없이 서 있을 것이다.
자울대다 눈을 거푸 치켜 뜨는 길 모퉁이 가게 불빛 사이로
밤은 더욱 자우룩 해지고
여전히 그의 눈빛은 차게 떨리겠지
스무 살 적, 객지에 나를 처음 떨구고
곧 목놓아 울 듯 그렁그렁 하던 그 눈빛이
내 가슴에 단단히 말뚝을 박고는
노작지근한 해질녘이면 어지러이 발길질을 해대곤 했었다.
어미 소의 말간 눈망울에 들이치던 석양빛처럼
빛의 눈물 자국 다 떠메고
차마 못다한 말 되새김질 하듯
그리움도 순하게 견뎌야 한다는 것
오랜 후에야 그 눈의 얼룩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한 여름 소낙비가 얼룩져 시린 겨울 강 핥는 여울이 되고
사랑은 얼룩져 돌이킬 수 없는 그러나
돌이킬 수 밖에 없는 괴물같이 눈부신 추억을 매달 듯
얼룩이 마냥 뼈아픈 얼룩만은 아니지.
이제서야 나는 나를 다둑여 준다.
언제나 되돌아보면
나의 짓무른 가슴의 얼룩, 아버지가
끝에 저기 서 있다.
세상 없어도.
*산스크리트명은 라훌라(Rahulla)이다. 장애로 의역되고 있다. 싯다르타가 생로병사의 고통을 목격하고 출가를 결심하여 돌아오던 길에 아들이 태어나 "라훌라(장애)가 생겼구나!"라고 통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당선 소감] "詩는 모든 사람 손을 잡아주는 일"
그토록 바라던 것이 언젠가는 온다는 말을 밤새워 되뇌이곤 했습니다. 시는 순결한 영혼에만 깃드는 축복이라 여겨져 저의 불순함에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 간절히 원하기도 했지만 감히 다가갈 수 없었던 그 시의 손을 처음 잡게 된 것 같아 설렙니다.
어렴풋이 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 시간들, 기억들, 풍경들에게 온 마음을 다해 손을 잡아주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손을 잡아주고 싶은 마음, 그 마음 꼭 붙들고 부지런히 쓰겠습니다.
당선 소식을 들었던 지난 22일이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외치는 소리를 듣고 크리스마스가 되려면 며칠이나 남은 터인데 왜 벌써부터 크리스마스라고 말할까 한참 생각하면서 몹시 웃다가 그 웃음 끝에 살짝이 눈가가 얼룩졌습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제가 무엇이나 되었을까 생각합니다. 한 짐이나 되는 그 무수한 눈물의 출처가 늘 저였기에 그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이제는 그 짐 부려두고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걸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할머니, 막내 고모, 오빠, 무엇이든 해주고픈 아우, 가족 모두에게도 아낌없는 사랑을 전합니다.
가볍게 내려와 손등에 스르르 녹아 스미는 하얀 눈 같은 시를 쓰라고 말씀해 주신 분이 계십니다. 학교에서 항상 애정어린 마음으로 가르쳐 주신 교수님들과 무한한 동경의 대상이었던 박경희 선생님, 김문주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와 친구해 준 사랑하는 친구들, 동기들, 선배 그리고 좋아하는 언니들에게도 고마움을 느낍니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제 손을 잡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애드픽 제휴 광고이며, 소정의 수수료를 지급 받을 수 있습니다.
[심사평] "익숙한 주제를 남다르게 펼쳐"
올해의 시 부문은 응모자의 양과 질에서 예년을 압도하였다. 최종심사로 넘겨진 20여 분의 시편들은 면면에서 저마다의 솜씨와 개성이 두드러졌다. 심사위원들은 숙고를 거듭한 끝에 조은수씨의 '통장정리' 외, 김상윤씨의 '달빛 충전소' 외, 이인주씨의 '모자를 쓴 사철나무' 외, 최해경씨의 '라훌라' 외 등을 마침내 선고 대상으로 압축시켰다.
조은수씨의 장점은 일상이라는 거울 속에 가둬넣은 마음을 시의 세필(細筆)로 그려가는 섬세함인데, 오히려 그 점이 시를 소품이라는 너무 아담한 그릇에 담아버린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판단되었다.
김상윤씨의 시편에서는 시어의 정제를 실현하면서도 환상을 끌어안는 견고한 짜임새가 돋보였다. 그럼에도 생각의 결이나 매듭을 좀더 활달한 상상력으로 풀어헤쳤으면 한층 잘 읽히는 작품들을 선보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인주씨의 경우는 환상을 리듬으로 교직시켜 완결로 이끄는 사유의 힘이 매력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관찰과 묘사의 굴곡에 겹쳐드는 말의 파문이 편편마다 시의 파장으로 읽혀져서 응모 시 전체를 출렁거리게 하고 있다.
최해경씨는 시가 감싸 안아야 할 삶의 풍경과 음영을 표 나지않게 드러내면서도 포개진 환상을 읽게 만든다. 그러나 감동적인 것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시선의 투명성이 옅었더라면 그의 작품들 또한 익숙한 주제의 변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선자들은 마지막까지 이인주씨와 최해경씨의 시편들 사이에서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읽는 이에 따라서는 다소 산만하게 느껴질 '라훌라'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익숙한 주제라도 남다르게 펼쳐보려는 최씨의 노력이 이씨에게 거의 기울었던 저울추를 그의 편으로 끌어당긴 까닭이다.
심사위원 신경림.김명인
'신춘문예 > 영남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8년 영남일보 문학상 / 조혜정 (0) | 2011.02.13 |
---|---|
2007년 영남일보 문학상 / 임수련 (0) | 2011.02.13 |
2006년 영남일보 문학상 / 김성철 (0) | 2011.02.12 |
2004년 영남일보 문학상 / 박미숙 (0) | 2011.02.12 |
2000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 이채운 (0) | 2011.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