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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이유 / 김유경

 

 

이 섬에선 사람이 죽으면 바람에 묻는다
그건 섬의 풍토병 같은 내력이어서 여자는
바다로 떠나 돌아오지 않는 아비의 아이를
박주가리 씨앗처럼 품은 채 바람에 묻혔다
은행나무가 여자의 무덤이며 묘비명이었다
남은 여자들이 제 주검을 보듯
길게 울다 돌아갔다, 섬에서 여자가 죽으면
살아서 뜨겁고 애달팠던 곳이 먼저 젖는다
바람은 젖어 있는 것부터 시나브로 말린다
소금에 간이 밴 깊이를 모두 말려
눈물의 뿌리가 마른 우물처럼 바닥을 드러내면
영혼을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이 바람의 법이다
하루 두 번 물마루 끝이 어물어물 붉어지고
꼭 쥐고 있던 바람의 손아귀가 스르르 풀리면
섬은 귀를 열고 듣는다,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돌아오지 않는 아비들의 빈 배가 웅웅 우는 소리를
죽은 여자는 그 소리에 기대어 바람 몰래
혼자서 아이를 키운다, 뭉텅뭉텅 사라지는 몸에서
눈동자는 빛을 잃고, 머리칼은 제멋대로 자라나온다
아이를 품은 움 같이 보드라운 궁륭, 그 곳에선
바다 밑바닥에서만 나는 해초 내음이 나날이 짙어졌다
마침내 바람이 여자를 온전히 데려갈 때
죽은 여자는 아이를 은행나무 잎 속에 묻어두고
떠난다, 홀로 누워 있었던 자리에
노란 은행잎이 수북수북 쌓인다, 가을 한 철 내내
바람의 장례가 제 열매 다 익도록 잎을 물들이지 않는
은행나무의 사랑 같은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바람이 먼 바다 부표를 향해 치솟아 올라 길을 잡고
여자의 푸른빛 인광은 그리운 바다를 향해
따뜻하게 흘러간다, 아이는 그 바다 어디쯤에서
돌아오지 못한 제 아비를 그대로 빼닮았지만
섬도 바람도 그 아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당선소감] '서른 전 등단' 만용이 현실로스스로에 모진 시인될 것

 

종종,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 아닌 '견디고 있다'고 느끼는 때가 있었다. 모두들 떠들썩하게 즐거운 때, 도저히 그 속에 섞여들 수 없었던 때도 있었다. 그런 막막함 속에서, 나는 줄곧 '쓴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왔다. 그것은 희박하지만 여일하게 빛을 발하는 밤하늘의 별 같은 것이었다.

애초부터 빈약하고 어수룩한 내 글이 삶의 방편이 되리라는 위험한 상상은 하지 않았다. 때문에 '쓴다는 것'으로 되돌아오기까지,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다. 2010년 여름부터 시작된 나의 글쓰기는 다른 쪽으로 난 두 갈래 길을 합쳐 하나로 만드는 무모한 작업이었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읽기를 게을리 했다. 기사를 쓴다는 명목으로 쓰기를 소홀히 했다. 앞서 간 이들의 빼어난 문장을 교묘하게 훔쳐와 내 것인 양 우쭐대기도 했다. 이 과분한 자리를 빌려 깊이깊이 고개 숙여 반성한다. 앞으로 다가올 새날은, 나만의 고유한 빛깔을 지닌 살뜰한 문장들이 정수리 위로 벼락처럼 쏟아지는 날들이길 바라본다.

'시'라는 하나의 완결된 세계로 철부지를 이끌어주신 정일근 교수님, 글 쓰며 동고동락한 경남대 청년작가아카데미 친구들, 맹랑한 후배 너그럽게 품어주시는 경남신문사 식구들께 이 영광을 돌린다. 애틋한 나의 가족과 친지들, '부족함'을 '가능성'으로 보아주신 심사위원님들, '서른 전에 등단하겠다'는 만용을 패기로 여겨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그리고 전심으로 감사드린다.

한 문장 겨우 쓰고 쉽게 두 문장을 지우는, 스스로에게 야박하고 모진 시인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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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형식 뒤흔든 신인다운 패기 돋보여

 

파악된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상식으로 굳어져 최초의 경이를 상실해버린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삶과 사물에 대한 실감을 끌어올 수 있을까.

예심과 본심을 겸한 1차 심사를 거쳐 오른 작품들은 시 장르 고유의 구심점을 향한 몰입과 그로부터의 탈주로 크게 구별되었다. 서정성에 충실하였으나 새로운 모험의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 작품들 그리고 과잉된 탈주의지로 설명적인 산문투들이 먼저 제외되었다. 조립은 잘 되었으나 맥이 빠져 시적 울림에 실패한 작품들 또한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최종심에 오른 것은 박다닌, 최희명, 김유경 세 사람의 응모작이다. 우선, 박다닌은 소외된 삶을 조명하는 따듯한 시선에 호감이 갔으나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하는 고리가 작위적으로 다가왔다.

심사위원들은 최희명과 김유경의 작품을 들고 팽팽한 긴장 속에 심사를 이어갔다. 최희명은 '고려인 집성촌'이라는 무거운 오브제를 절제된 감각으로 구조화하는 솜씨가 녹록잖았다. 견고한 형식미 또한 높은 점수를 받았으나 오히려 그 형식미가 시상의 확장을 방해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주제를 삶의 구체성 속에서 길어올리는 김유경의 시는 시상을 끌고 가는 기량에 있어서나 시어를 낯설게 만드는 방식에서 단연 돋보였다. 넘치는 수사의 욕망에 절제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으나 서사를 내장한 이미지들의 날렵함이 그 흠을 오히려 더 빛나게 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의 고른 수준도 신뢰감을 주었고, 무엇보다 시 너머에 대한 지향을 통해 고정된 형식을 뒤흔드는 신인다운 패기가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장고 끝에 김유경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데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았다. 이 새로운 시인이 시 장르만의 특장을 고집스럽게 파고들어 가면서도 그 너머를 사유할 수 있는 무서운 신인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심사위원 허만하, 최영철, 손택수(이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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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진 벽지 / 성명남

 

 

독거노인이 사는 벽 귀퉁이에

어린 재규어 한 마리 숨어 산다

우거진 풀숲 사이로 자세를 낮춘

짐승의 매화무늬가 보인 건

열대우림 같은 우기가 시작된 며칠 뒤였다

지직거리는 TV속 동물의 왕국에선

재규어가 강물 속에 꼬리를 담그고

살랑살랑 흔들어 물고기를 잡는다

노인은 자신의 퇴화된 꼬리를 자꾸 만져보다

돌아누우며 TV를 꺼버렸다

그칠 줄 모르고 비가 내렸다

하루가 다르게 짐승의 영역은 확대 되어갔다

영역을 표시하는 그 채취만으로

목덜미를 물린 듯 노인은 불안에 사로잡혔다

짐승이 다 자랐을 때 닥칠지도 모를

치명적 위험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이다

점점 몸집을 불린 수컷 재규어가

몸이 근질거릴 때마다 혀로 제 몸을 핥는다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기세다

범람한 강물이 골목을 덮쳤을 때

노인의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맹수가 펄쩍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평원을 가로질러 노인을 물고 사라졌다

도배장이가 벽지를 쫙 뜯어내자

그 속에 무성한 열대밀림이 펼쳐졌다

 

 

 

 

귀가 자라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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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상상 속에서 꿈꾸던 일이 뜻밖에 현실로

 

낯선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응모한 작품이 당선되었다는 전화기 속의 목소리가 하늘의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꿈만 같아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깜짝 놀라고 벅차오릅니다. 심장이 아직도 쾅쾅 뛰고 있습니다. 상상 속에서 꿈꾸던 일들이 현실로 이어져 기쁩니다.

 

시를 쓰는 일은 즐거운 고통이었습니다. 가족과 일과 시쓰기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균형을 맞추며 제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새로 사온 시집에서 좋은 시를 만나면 자꾸 꿈이 커갔습니다.

 

꿈은 꾸기만 해도 행복한데 이루면 더 행복하다는 걸 알려주신 '국제신문'과 부족한 제 시에 날개를 달아주신 심사위원 문정희 시인님, 최영철 시인님, 박남준 시인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시의 은유를 알게 해주신 존경하는 정일근 시인님께도 감사드립니다. 함께 공부한 이팝시 동인 문우들, 삽량문학회 식구들, 오랫동안 묵묵히 지켜봐 준 사랑하는 남편과 든든한 아들 휘성이와 첫 번째 독자로 지목되어 기꺼이 작품평을 해준 딸 슬아. 그리고 공부방 꼬마친구들에게도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노력하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새해도 모든 분들이 시를 읽으며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심사평] 절제의 미학과 따뜻한 응시로 잘 표현

 

늦게 담은 동치미는 익지 않았고 이곳저곳 지인들의 집에서 보내온 김장김치도 아직 맛이 들지 않았다. 먼저 먹으려고 냉장고에 넣지 않고 밖에 내놓은 김치 역시 설익었다. 먹기에 마땅치 않다.

 

금방 담은 김치는 배추의 고소하고 싱싱한 맛과 양념이 잘 어우러져 있어서 그 싱그러움으로 먹을 수 있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면 그 맛을 잃게 된다. 양념이 고루 배고 익어서 맛이 든 김치가 밥상에 오를 수 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몇 포기 남아있지 않은 묵은 김치를 꺼낸다. 역시 이 맛이야. 시를 쓰는 일도 그렇다. 한껏 기교를 부리며 은유와 비유로 멋을 부린 시들이 막 버무린 김치와 같다면 오래 묵어 양념들이 고루 배고 맛이 든 김치, 그러나 배추의 처음 싱싱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아삭아삭거리는 김장김치는 온몸으로 밀어올린 울림이 있는 시, 깊은 맛이 있는 좋은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최종심으로 올라온 두 작품은 '얼룩진 벽지'와 '보도블록'이었다. 그러나 '보도블록'은 신선한 시선이 돋보였음에도 이를 받쳐줄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 않았다. 당선작으로 뽑은 '얼룩진 벽지'는 김치와 같았다. 푸른 배추의 싱싱함을 가진 잘 익은 김장김치와 같은 시. 긴장감을 잃지 않고 절제의 미학과 '동거'와 같은 다른 시에서 보여준 깊고 따뜻한 응시를 가진 이 시를 놓고 심사위원들은 즐겁게 당선작에 올려놓았다.

 

처마 끝에 걸린 곶감들이 잘 마르고 있다. 곶감은 제 몸의 수분을 햇빛과 바람 앞에 알몸으로 온통 내놓고 말라갔을 때 그 속에 비로소 떫은맛이 변하여 달고 붉은 속살을 갖게 된다.

 

이제 파도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새로운 시인이 헤쳐 나갈 험난한 여정에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시인 김수영의 시 한 구절이다. 온몸으로 밀고 가는 시인정신으로 나는 그 표현을 읽었다. 적어도 시를 쓴다면 이 정도의 자세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목숨을 걸어보는 정도 말이다.

 

심사위원 문정희 최영철 박남준(이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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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 김지혜

 

 

들판의 지표면이 자라는 철

유목의 봄, 민들레가 피었다
민들레의 다른 말은 유목
들판을 옮겨 다니다 툭, 터진 꽃씨는
허공을 떠돌다 바람 잠잠한 곳에 천막을 친다
아주 가벼운 것들의 이름이 뭉쳐있는 어느 代
날아오르는 초록을 단단히 잡고 있는 한 채의 게르
꿈이 잠을 다독거린다.


떠도는 혈통들은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어느 종족의 소통 방식 같은 천막과 작은 구릉의 여우소리를 데려와 아이를 달래는 밤
끓는 수태차의 온기는 어느 후각을 대접하고 있다.


들판의 화로(火爐)다.
노란 한 철을 천천히 태워 흰 꽃대를 만들고 한 몸에서 몇 개의
계절을 섞을 수 있는 경지
지난 가을 날아간 불씨들이
들판 여기저기에서 살아나고 있다.


천막의 종족들은 가끔 빗줄기를 말려 국수를 말아 먹기도 한다.
바닥에 귀 기울이면 땅 속 깊숙이 모래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초원의 목마름이란 자기 소리를 감추는 속성이 있어 깊은 말굽 소리를 받아 낸 자리마다 바람이 귀를 접고 쉰다.


이른 가을 천막을 걷어 어느 허공의 들판으로 날아갈 봄.

 

 

 

 

 

[당선소감] 짐승 배설물이 내뿜던 난로의 온기가 준 선물

 

당선통보를 받고 예전 벌판의 집에서 느꼈던 온기가 생각났습니다.

 

딱딱하게 마른 짐승의 배설물이 내 뿜던 난로의 그 온기.

 

맨 처음 짐승의 뱃속에서 쏟아졌을 때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을 그런 배설이라면 지금 나의 이 지난한 배설도 그와 같은 ()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늦은 걸음입니다. 뒤처진 걸음입니다. 그래도 간혹, 뒤를 살피는 업이 천직이 될 수도 있다는 용기를 내어 봅니다. 척후병의 막중함으로 詩作(시작)에 임하겠습니다. 안도의 한 숨이 얼마나 방심하는 순간인지를 다시 한 번 되뇌이면서 잠시만 기뻐하겠습니다.

 

새벽운동시간까지 깨어있는 나를 보며 잠 채근을 해주던 무뚝뚝한 남편과 가족의 둘레에 앉은 승준, 은경, 동현, 수연, 동준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딸만 낳아 평생을 죄인처럼 사셨던 어머님의 기쁨도 남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이 있기까지 시의 언저리부터 살펴주신 박해람 선생님, 목적지를 욕심내지 말고 잠시 쉴 수 있는 쉼을 욕심내라던 그 말씀 내내 새기겠습니다. 또 함께 구름밭을 경작하는 경운서당 문우들, 그대들이 내뿜는 내공 덕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또 서로를 보듬고 격려해주는 다울동인, 용인문학회 식구들, 첫걸음을 떼게 해 주신 이지엽 교수님 고맙습니다.

 

부족한 글을 당선이라는 축제의 자리에 앉혀주신 정희성, 강영환, 허정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누가 되지 않도록 시작의 각오를 올립니다. 국제신문의 선택에도 또한 누가 되지 않는 행동을 다짐 드립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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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삶을 응시하는 깊이와 고단한 삶 밝게보는 능력 탁월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의 심사는 예심 없이 271명이 보낸 전체 응모작을 심사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중에서 1차 심사를 통과한 작품은 총 27편이었다. 논의에 논의를 거쳐 최종심까지 오른 작품은 '벗어놓은 외출' '둥근 강' '폐기물집하장 가는 길' '비밀의 화원'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5편이었다. 이 중에서 '비밀의 화원''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를 놓고 심사위원들의 최종논의가 있었다.

 

'비밀의 화원'은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룬 시로서 작가의 현실인식이 돋보이는 시였다. 이주노동자를 형상화하는 데에 있어서 그들의 수난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는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고 조심스럽게 그들의 아픔에 다가가는 솜씨가 뛰어난 시였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가 오히려 이주노동자의 삶을 자기 아픔으로 여기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화자가 관찰자의 태도로 물러서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는 민들레의 씨앗이라는 미시적인 사물들에서 유목민들의 삶을 거시적으로 이끌어내는 발상이 참신한 시다. 민들레의 꽃말에서 유목을, 민들레 홀씨가 부푼 모양에서 유목민의 텐트인 게르를 연상하고, 이를 수태차, 말발굽 등으로 이어나가는 이미지가 자연스럽다. 이를 통해 유목민의 고단한 삶을 봄의 이미지를 살려 밝게 형상화하는 능력이 탁월한 점이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두 편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역량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응모작의 전반적인 수준에 있어 김지혜가 고르다는 점을 높이 사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를 당선작으로 하기로 했다. 당선을 축하하며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정희성 강영환 허정(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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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 / 박진규

 

 

달이 저 많은 사스레피나무 가는 가지마다
마른 솔잎들을 촘촘히 걸어놓았다 달빛인 양
지난 밤 바람에 우수수 쏟아진 그리움들
산책자들은 젖은 내면을 한 장씩 달빛에 태우며
만조처럼 차오른 심연으로 걸어들어간다
그러면 이곳이 너무 단조가락이어서 탈이라는 듯
동해남부선 기차가 한바탕 지나간다
누가 알았으랴, 그 때마다 묵정밭의 무들이
허연 목을 내밀고 실뿌리로 흙을 움켜쥐었다는 것을
해국(海菊)은 왜 가파른 해변 언덕에만 다닥다닥 피었는지
아찔한 각도에서 빚어지는 어떤 황홀을 막 지나온 듯
연보라색 꽃잎들은 성한 것이 없다
강풍주의보가 내려진 청사포 절벽을 떨며 기어갈 때
아슬아슬한 정착지를 떠나지 못한 무화과나무
잎을 몽땅 떨어뜨린 채 마지막 열매를 붙잡고 있다
그렇게 지쳐 다시 꽃 피는 것일까
누구나 문탠로드를 미끄덩하고 빠져나와 그믐처럼 시작한다

※ 문탠로드(Moontan Road)대한팔경의 하나인 해운대 달맞이언덕에서 달빛의 기운을 받으며 산책을 즐길수 있도록 조성된 2.2㎞의 산책로.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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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詩를 아는 사스레피나무가 준 선물"


강풍주의보가 내려진 어느날, 해운대 문탠로드에 갔습니다.


사스레피나무가 아주 많은 산책길이었는데 그 나뭇가지마다 마른 솔잎들이 거꾸로, 일렬로, 촘촘히, 걸려 있었습니다.


사스레피나무란 응당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그 풍경은 장관이었습니다. 그런 희한한 취미를 가진 나무가 어디에 있을까요.
뽑아주신 시는 정말 시를 아는 사스레피나무가 준 것이었습니다.


지난 2년여 동안 그랬습니다. 유난히 나무들이 저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두 발이 지상에 심긴 채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었던 저에게 나무들은 괜찮아, 괜찮아 하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더 이상 신발이 필요없는 요양원 병실에서 괴로운 투병을 하고 있는 당신이고서야 얼마나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 버짐 핀 과묵한 플라타너스처럼 무언의 세계에 갇힌 당신이고서야 얼마나 저에게 많은 말씀을 하시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젖은 장작 같았던 저에게 시의 불꽃을 피워준 이가 당신이기에 이 당선의 기쁨을 뜨거운 채로 드립니다. 그리고 널. 나의 첫 독자였던 경아, 나의 거의 전부를 알고 있는 아내이기에 앞뒤없는 신랄한 언어로 나의 중심을 흔들어 주어서 정말 고맙구나.


살갑지도, 냉철하지도 않은 제자를 언제나 바위처럼 기다려주시던 강남주 교수님, 문학동인 잡어의 동지들과도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날 것의 졸시에 환한 꽃다발을 심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국제신문사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삶의 깊이 응시하는 내면의 시선 미더워"

 

전체적으로 수준이 고르고 안정된 느낌이었다.


부산경남 지역보다 오히려 타 지역에서 응모한 시가 훨씬 많았다. 신춘문예만큼은 더 이상 중앙과 지역을 구분해서 차별화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종심에서 거론된 시는 모두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작품들이었다. 다만 언어적 기교나 시적 수사가 지나치게 정형화된 느낌이 들어 신인으로서의 시적 개성을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좀 서투른 감이 있더라도 확연히 눈에 띄는 작품을 찾을 수 없어서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박눈', '탁구치는 자전거', '나무의 온도', '뭉게구름을 확장하다',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를 두고 마지막까지 논의를 하였다.


심사위원들은 일정한 틀에 맞추어 패턴화된 시보다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이미지가 육화된 개성 있는 시를 찾는 데 주력했다.


낡고 진부한 서정에 갇힌 시보다는 풍경과 일상을 응시하는 내적 깊이가 시정신의 심화를 불러오는 작품을 주목하였다.

 

그 결과 고심 끝에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도 일정한 수준을 갖추었고, 삶의 깊이를 내면으로 응시하는 시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어서 미더웠다.


다만 응모 작품들 간에 시적 경향의 편차가 두드러진다는 점이 흠으로 지적되었다.


이러한 점은 신인으로서 자신만의 개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어 당선작으로 뽑는 데 주저하지는 않았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최종심에서 안타깝게 떨어진 예비 시인들에게는 따뜻한 격려를 보낸다.
앞으로 시와 더불어 더욱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본심위원 정호승(시인) 최영철(시인) 하상일(문학평론가·동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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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 / 도미솔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됐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의 끝별 명왕성은
난쟁이행성 134340번이란
우주실업자 등록번호를 받았다
그때부터 다리를 절기 시작한 남편은
지구에서부터 점점 어두워져 갔다
명왕성은 남편의 별
그가 꿈꾸던 밤하늘의 유토피아
빛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별이 될 수 없어
수평선 같았던 한쪽 어깨가 기울어
그의 하늘과 별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꿈을 간직한 소년에서 마법이 풀린
꿈이 없는 중년이 되어버렸다
명왕성은 폐기된 인공위성처럼 떠돌고
남편의 관절은 17도 기울어진 채 고장이 났다
상처에 얼음주머니 대고 자는 불편한 잠은
불규칙한 삶의 공전궤도를 만들었다
이제 누구도 남편을 별이라 부르지 않는다
알비스럼 낙센에프정 니소론정
식사 후 늘 먹어야하는 남편의 알약들이
그를 따라 도는 작은 행성으로 남았다
남편을 기다리며 밝히는 가족의 불빛과
아랫목에 묻어둔 따뜻한 밥 한 그릇이
그의 태양계였으니, 늙은 아버지와
아내와 아들딸을 빛 밝은 곳에 앞세우고
그는 태양계에서 가장 먼 끝 추운 곳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노예처럼 일했을 뿐이다
절룩거리고 욱신거리는 관절로
남편은 점점 작아지며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도 난쟁이별로 변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가 돌아오는 길이 점점 멀어진다
그가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그 길을 작아진 그림자만이 따라오는데
남편은 그 그림자에 숨어 보이지 않는다
지구의 한 해가 명왕성에서는 248년
그 시간을 광속에 실어 보내고 나면
남편은 다시 별의 이름으로 돌아올 것이다
명왕성과 함께 돌아올 것이다

 

 

 

 

[당선소감] 어둠서만 숨쉬던 내 시에도 햇빛이

 

내 방에는 어둠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아침은 내 방을 찾아오지 않고 멀리서 보고 있습니다. 그 어둠이 무서워 전등 스위치를 찾는 꿈을 꿉니다. 그러나 스위치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끝이 없는 일은 나를 더욱 내 방에서 나갈 수 없는 외톨이로 만들고 있습니다.

 

오후가 저물어가는 시간 낯선 번호의 전화가 왔습니다. 갑자기 어둠이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내 안에서만 숨을 쉬었던 시에게도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다시는 무서운 꿈을 꾸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기쁩니다. 당선 소식을 자랑하고 싶어 여기 저기 전화를 겁니다. 햇빛도 덩달아 신이 나서 내 방안 구석구석 돌아다닙니다.

 

아침 햇빛이 베란다 가득 들어앉아 나를 보고 있습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햇빛이 따라옵니다. 환하게 비치는 내 몸을 봅니다. 내 몸은 반짝반짝 빛을 내며 서있습니다. 어둠에서만 숨을 쉰 내 언어들도 이 햇빛에서 고른 숨을 쉬게 할 수 있도록 기도를 합니다. 오랜 기도를 끝내고 나는 일어납니다.

 

먼저 부족한 시를 뽑아 주신 국제신문사와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 늦은 시 공부에도 늘 칭찬만 해주신 엄마에게도 이 소식을 전하며 묵묵히 나를 믿어주고 밤 늦도록 컴퓨터 앞에만 있는 나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주곤 했던 남편과 우리 아이들, 민지 양호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리고 시의 씨앗을 찾으러 같이 다녔던 조덕자, 이궁로, 유금오 시인에게도 마음 가득 고마움을 전합니다. 또 나를 위해 기도해주던 진영미 씨에게도 그동안 많이 고맙다는 말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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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긴 시를 장중하게 끌고 가는 저력 돋보여

 

경향 각지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보내온 많은 시들을 읽었습니다. 다양한 시의 형식과 더욱 다양한 주제들 앞에서 심사위원은 고심하면서 오랫동안 시를 읽었습니다.

 

그렇게 거르고 걸러 '꽃들이 타오르는 이유'(신원희), '꽃게와 발레리나'(박세랑), '장롱을 열어놓고'(박종인),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도미솔) 등 4편의 시를 최종심에 두고 또한 오랜 토론이 있었습니다.

 

'꽃들이 타오르는 이유'는 철학적인 깊이가 있는 좋은 시였는데 함께 보낸 다른 작품과 편차가 심해, '꽃게와 발레리나'는 발랄하고 감성적이어서 좋은 시였는데 그래서 너무 가볍다는 이유로 다음 기회로 넘겼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장롱을 열어두고'와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를 두고 두 분 다 표제작은 물론 함께 보내온 탄탄한 구성의 시들에서 오랫동안 시를 써온 분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장롱을 열어두고'는 맑은 서정과 부드러움이 빛나는 시였고,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는 시가 갖는 힘과 긴 시를 흔들리지 않고 장중하게 끌고 가는 저력이 돋보이는 시였습니다.

 

심사위원은 '장롱을 열어두고'가 가지고 있는 반복적 구성이 결점이 된다고 지적하면서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된 것과 우리 사회의 구조조정이란 문제를 서정적인 문체로 제시하며 '희망'이란 메시지를 선물하고 있는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를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결정했습니다.

 

특히 당선작과 같이 보낸 시들의 어떤 작품도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어 그런 신뢰가 당선자의 앞으로 활동에 큰 기대를 갖게 했습니다. 당선자 도미솔 씨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며 모든 응모자들에게 다음에도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다는 말을 전합니다.

 

본심 심사위원 : 천양희, 정일근, 문태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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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 / 이언지

가을, 입질이 시작되었다

만물이 보내는 연서가 속속 배달 중이다

온몸이 간지럽다

배롱나무 붉은 글씨는 화사체라고 하자

작살나무가 왜 작살났는지

내야수는 내야에만 있어야 하는지

계집들의 질문이 쏟아진다

작살나게 이쁜 열매가 미끼였다고

의혹은 무조건 부인하고 보는 거야

경자년이 정해년에게 속삭인다

낮은 음들이 질러대는 괴성에 밥숟갈을 놓친

귀들

은해사 자두가 맛있었다고 추억하는

입술을 덮친다

누가 빠앙 클랙슨을 누른다

-당신의 유방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테이프을 갈아끼우는 사이

농염의 판타지가 물컹 섞인다

비탈 진 무대에서 마지막 스텝을 밟는다

끼어들고 싶다 소리와 소리 사이

스텝과 스텝 사이, 소문과 소문 사이

납작하게 드러눕고 싶다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닌

죽은 나에게 말 걸고 싶다

거시기, 잠깐 뜸들이고 싶다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

노랑 소인이 찍힌 연서는

하룻밤만 지나면 사라질 것이다

사라져 도착할 것이다

소멸을 윙크하는 가을 프로젝트

데카당스도 이쯤이면 클래식이다

* 마농꽃 : 달래의 제주 방언, 샤프란

 

 

[당선소감] 시 쓰기란 마음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행위

잔뜩 찌푸린 하늘을 바라보며 태안 바닷가에서 방제 봉사를 하고 있는 아들녀석을 생각하고 있을 때 빗방울처럼 당선 축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다정히 만나는 시를 쓰고 싶었다. 깊어질 수만 있다면 기꺼이 아프고 싶었다. 내 행복은 고통 속에 있다는 걸 알기까지 참 많은 가을을 낭비했다.

자명한 인식이 상상력을 끌어당기는 바로 그 지점에 내 시가 있어야 함을 어렴풋이 안다. 묵묵히 바다의 얼굴을 닦고 있을 아이의 분주한 손길처럼 시쓰기란 마음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행위일 것이다. 끝없이 밀려드는 세상의 때를 닦아내는 일일 것이다.

하얀 흡착포에 묻어나던 시의 분비물을 빗방울이 와서 태워버린다. 늘 바깥보다 안이 추웠다. 그럴수록 시의 손발은 더욱 뜨거웠다. 눈만 높아 시집 못 간 노처녀같은 시에 면사포를 씌워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의 절을 올린다.

시를 익힐 무렵부터 기꺼이 시의 동료로 대해 주셨던 유병근 선생님, 늘 푸른 나무처럼 곁을 지켜주시는 부모님, 시인이 되기 전부터 시인으로 불러주었던 믿음직스러운 내 아들 혁, 흐린 날 함께 달을 찾아 다니던 당신, 당선 소식에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주시던 시의 동료들, 모두 모두 따뜻하고 고마운 인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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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탁월한 언어 솜씨와 거침없는 상상력의 힘

400여 명의 시 1800편을 읽으면서, 여전히 한국시의 지층은 흔들리지 않고 있음을 확인했다. 시인도 많지만 아직도 시인 지망생도 많음을 새삼 확인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시의 경향은 전반적으로 전통 서정시의 큰 흐름을 넘어서는 실험적 시도가 크게 보이지 않았다.

시의 수준은 상당히 평준화 되어가고 있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만큼 패기만만하면서도 신인으로서의 놀라운 역량을 엿보게 하는 발군의 작품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런 중에도 김진의 '달, 멈추다', 김미혜의 '몽유', 김정의 '숨 쉬는 고서점', 이언지의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 등은 최종 논의 대상 작품으로서 시를 읽는 즐거움을 맛보게 했다.

'달, 멈추다'는 설화적 이미지를 현재화하는 발상 자체는 살만 했지만, 그 현재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이미지화가 선명하게 부각되지 못한 한계가 보였다. 시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새로운 해석이란 점을 새삼 환기시켜 주었다. '몽유'는 예민한 감각을 통한 이미지화나 새벽의 분위기를 형상화하는 시선은 좋으나, 시어 선택에서 아직은 개성적인 자기 언어를 창출하는 힘이 모자랐다.

시인은 일상어를 자기 언어로 새롭게 전환시켜가는 힘을 스스로 내장하고 있어야 한다. '숨 쉬는 고서점'은 활달한 시적 상상력의 전개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그 상상력을 밑받침해줄 수 있는 이미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한계가 지적되었다.

이에 비해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는 우선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언어유희에 가까울 정도로 능수능란함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인간의 내밀한 욕망을 드러낼 듯하면서 감추며, 감출 듯하면서 드러내는 암시적이며 은유적인 시적 전개와 거침없이 펼쳐가는 상상력의 힘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이와 함께 다른 작품들이 보여주는 시적 수준도 앞으로의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역량을 보여주었기에 심사위원 전원은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정진을 빈다. 

- 심사위원 문정희·남송우·정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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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캡슐에 저장한 나쁜 이야기 하나 / 정태화

 

 

놋쇠숟가락 하나가 여닫이문 깊숙이 빠져 있었어 문고리 구멍에 꽂혀 타다닥 불꽃 튀어 오르는 길 척추脊椎를 느끼는 그림자가 일렁이는 달빛 파도에 쓸리며 흐느적거리고 있었어

 

사내들 깊은 밤 주막거리 화투짝 속살에 파묻혀 놀고 있는 동안 공산명월空山明月

밝은 달이 만삭滿朔의 몸 쏟아져 내리고 때때로 주인 버리고 오는 신발들이 보이는

시간

그 신발 뒷굽을 척척 빠져나온 발자국들

저희들끼리 우루루 나뭇잎 따라 구르다가

돌담장 호박넝쿨 아래로 숨어들어가 잠잠했어

 

이른 아침 백주에 궁둥이 까고 있는 호박덩이 몇몇에

어머니가 짚으로 엮은 똬리를 받쳐주다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오줌을 누셨어

그곳에 둥글고 하얀 어머니 궁둥이가 오래도록

내려앉아 있었어

 

밭두렁 무성한 잎새 바지 안에 잘 익은 오이들 매달려 있었지 이웃집 밭이랑에서

물오른 가지들이 불쑥불쑥 일어섰어 마음껏 부풀어 팽팽한 그것들과 함께 고추밭에

태양초 고추가 어찌 그리 뜨겁던지 퍼질러 앉은 밭고랑에

매끈매끈 고구마들이 얼굴 내밀고 있었어

저녁놀이 아궁이에서 왈칵 숯불을 뒤집어 놓을 때

어머니 볼 발그레 익어서 돌아오셨지

 

참 이쁘다 우리 어머니 태양초 고추 하나 머금은 듯 입술 붉은 어머니 고무신 탈

탈 털어낼 때쯤이면 명짧은 어머니의 사내가 내려놓은 울음들이 달려 나왔지

왈칵 기다림이 반가운 아이들

앞장세운 변성기의 아이 하나가

감나무 키 큰 그림자

사립문 밖 보내놓고 있었지

 

호롱불 밝혀야 어른어른 떠오르는 밥상

주춤주춤 아랫목이 내어놓은 보리밥 속에

언제 숨어들었나 고구마들 숨죽이고 있었지

등뼈를 쓰다듬는 어머니 능숙한 손길에

씨앗들 모두 빼앗기고 얌전해진

가지나물 오이냉채가 입맛을 당겼지

 

놋쇠숟가락으로 식구食口들이 밥을 먹고 있었어

 

 

 

 

내 사랑 물먹는 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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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바람이 물었습니다 왜 거기 있냐고"

 

지나가는 바람이 어린아이에게 묻습니다. 너는 왜 하필 그 곳에 쪼그리고 앉아 있니. 여기 이곳에 민들레가 보여서요. 호기심 많은 바람이 다시 묻습니다. 그래 그 동무와 지금 소꿉놀이 재미있니. 글쎄요? 그런데요 동무의 몸이 너무 가벼워 둥둥 떠오르려고 하는 것을 이렇게 말리고 있는데, 제 겨드랑이에 솜털이 막 솟아 올라오는지 자꾸 근지러워요. 이제는 지금 이 자리 떠나야 할 것 같아요 더 묻고 싶은 말은 없으세요.

 

세상을 향해 날아가는 마음들, 그들이 뿌리내려 걸어간, 걸어가고 있는 이야기들을 은밀히 이렇게 엿듣고 있다는 것은 내게 있어 희열이다. 알고 보면 사람도, 사람의 마음 그 열정도 한 알의 민들레 홀씨처럼 자갈밭 척박한 땅 가리지 않고 내려 마침내 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 때문에 나는 많이 눈물겹기도 하면서 또한 스스로 이해할 수 없이 기쁘기도 하다.

 

국제신문 신춘문예의 자리에 어느날 문득 날려와 뿌리내린 민들레 마음 하나의 꿈이 오랜 시간 참은 뒤 아하 그렇구나 무릎을 탁 치면서 마음껏 날아올라 어디론가 떠나가는 홀씨의 이름, 그 아이들이 세상을 향해 발음이 정확한 말을 걸어 갈 것이라고 믿기로 한다.

 

당선소식을 듣고 한참을 말없이 울먹였던 아내와 지금 막 옹알이를 시작한 딸에게 지금 한없이 행복한 마음을 전하면서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이 못난 아들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송두리째 헌납하시고도 눈물이셨던 어머니 그리고 내게 오직 하나밖에 없는 형과 동생, 나 때문에 영혼이 아팠던 수많은 그 분들에게 지금 가리늦게 '많이 죄송스러웠다'는 말 전하면서 고개를 숙입니다.

 

 

 

 

[심사평] 자연에서의 삶 개성 있고 건강하게 풀어

 

시대가 어려울수록 시는 빛나는 법이다. 예년에 비해 크게 늘어난 시를 읽으면 행복했다. 전국 각 지역에서, 외국에서, 고등학생과 노인들까지 다양한 작품이 투고됐으며 남성들의 투고가 많아져 신춘문예 여성화의 비율이 다소 주는 현상도 보였다. 그러나 신춘문예가 요구하는 신인의 패기와 개성,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보다는 잘 만들어진, 신춘문예의 새로운 전형을 이루는 시들이 많았다.

 

최종심에 '아버지, 꽃시를 심어요'(석지영·대구), '기차 떠나는 새벽'(이미정·울산), '스트랜딩 증후군'(김초영· 전남 순천), '무늬의 힘'(이현수·전북 진안), '권태'(김성순·울산) '타임캡술에 저장한 나쁜 이야기 하나'(정경화· 경남 함양)6편이 남았다.

 

'아버지 꽃시를''기차 떠나는 새벽'은 시적 성숙을 보여주었으나 시인의 힘이 부족해, '스트랜딩 증후군'은 신인의 힘을 가졌으나 시의 성숙이 부족해, '무늬의 힘'은 완벽한 시였으나 자신의 틀에 안주하고 있어 '권태''타임캡슐에'가 마지막 경합을 가졌다.

 

두 편의 시 모두 신인의 자격을 갖춘 시였다. '권태'는 물 흐르는 듯이 흘러가는 상상력이 빛났으며 '타임캡슐에'는 싱싱한 상상력이 가득했다.

 

심사위원들은 오랜 토론을 통해 '권태'가 시적 완성도가 더 높은 작품이나, 다소 산만하지만 좀 더 가능성을 보여주는 '타임캡슐에'를 당선작으로 정했다. 자연에서의 삶을 건강하게 풀어간 당선시는 시인이 오랜 시간 꾸준하게 독학으로 개성적인 습작을 해왔음을 짐작케 해주었다.

 

또한 남성적인 힘과 당당한 시적 스케일을 가지고 있어, 분명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좀더 깊어지는 용맹정진을 바란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나머지 분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최하림 정일근 최영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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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보를 짓다 / 이은규

 

 

그믐, 공명 쟁쟁한 방에 외할머니 앉아 있네요 오롯한 자태가 새색시처럼 아슴아슴 하네요 쉿, 그녀는 요즘하늘에 뜬 저것이 해이다냐 달이다냐, 세상이 가물가물 한다네요 오늘따라 총기까지 어린 눈빛, 오방색 반짇고리 옆에 끼고 앉아 환히 열린 그녀, 그 웃음자락에서 꽃술 향이 피어나기는 어찌 아니 피어날까요 시방 그녀는 한 땀 한 땀 시침질하며 의 조각보를 짓고 있네요 허공 속에 자투리로 남아있을 어제의 어제들 살살 달래며, 그 옆에서 달뜬 호명을 기다렸을, 아직 스러움이 서려 있는 오늘의 오늘들을 공들여 덧대네요 때마침 그믐에 걸린 구름이 얼씨구 몸을 푸는데, 세상에서 제일 바쁜 마고할멈 절씨구 밤 마실 나왔나 봐요 인기척도 없이 들어와선 그녀 옆에 척하니, 그 큰 궁둥이를 들이대더라고요 그러더니 공든 조각보가 어찌 곱지 않으랴, 조각보에 공이 깃들면 집안에 복인들 왜 안 실리랴, 이러구러 밉지 않은 훈수를 두네요 마치 깨진 기와조각으로 옹송옹송 살림 차리던 소꿉친구 모양새로 앉아서는 말이지요 마고할멈의 넓은 오지랖이야 천지가 다 아는 일, 그 말씀 받아 모신 그녀는 손끝을 더욱 맵차게 다독이네요 한때 치자빛으로 터지던 환희들이 어울렁, 석류잇속 같이 아린 화상의 점점들이 더울렁, 쪽빛 머금은 서늘한 기원들까지 어울렁더울렁 바삐 감침질 되네요 의 감칠맛을 더하던, 갖은 양념 같은 농지거리들도 착착 감기며 공글리기 되더니, 이내 그 들 어우러져 빛의 시나위 휘몰아치네요 드디어, 우주를 찢고 한 장의 조각보가 첫 숨을 탔네요 금방이라도 선율 고운 장단이 들썩이며 펄럭일 것 같네요 저만치 아직 조각보에 실리지 않은 시간들은 羽化登仙이라 적힌 만장을 펄럭이며 서있네요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마고 할멈, 다 빠져버린 이빨 설겅설겅한 잇바디 내보이며 방짜유기빛으로 쨍하게 웃고요 외할머니야 그 조각보를 가슴에 안고 어린애처럼 좋아라, 술렁술렁 일렁일렁 거리네요 마침 장지문 밖에서 그믐달이 막 玄牝之門으로 드는 때 말이지요

 

 

 

다정한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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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는 달게 받아야 할 고통이자 희열

추사의 '사난결(寫蘭訣)'에는 "인품이 고고특절 하여야 화품도 높아지는 것인데 세인이 공연히 형상만
같이하기에 애를 쓰거나 혹은 화법으로만 꾸려가려고 애쓰는 이들이 있다. 또 비록 9천 9백 99분까지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나 9천 9백 99분까지 갔다고 난이 되는 것이 아니요, 그 9천 9백 99분까지 간 나머지 1분이 가장 중요한 난관이니 이 난관을 돌파하고서야 비로소 난을 그린다 할 것이다"라는 크고 깊은 문장이 나온다.

화(畵)의 길과 시(詩)의 길은 일맥이며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추사가 "나머지 1분의 경지는 누구나 다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하자면 인력으로 되는 경지가 아니요, 그렇다고 인력 이외의 것도 아니라"고 한 그 1분의 경지는 내겐 먼 먼 미래의 이야기이다. 오히려 그 미래를 위해 이제 비로소 9천 9백 99분까지의 험한 행로가 눈앞에 준비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내게 시는 달게 받아 모실 고통이자 희열이고, 또 푸른 미래이다.

시인으로 살아가는 고통과 희열을 늘 몸소 보여주시는 고재종 선생님과 남도의 미풍으로 다가오는 광
주대 문창과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 천금같은 내 귀인께도 어여쁜 절 올리고 싶다. 아울러 가능성 하나만을 믿고 내 시가 세상 첫 숨을 타도록 도와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와 함께 부지런히 쓰겠다는 다짐을 올릴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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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토속의 기운 신선하게 느껴져
 

선자(選者)에게 넘겨진 시편들은 예심을 거쳐 온 작품이라서, 어느 정도의 시적 성취가 고루 엿보였다. 그러나 습작기의 신인들에게서 흔히 살펴지는 판에 박힌 수사나 장식적 언술에서는 모두들 비켜서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검토의 대상이 되었던 작품들은 이하정의 '합천 가는 길', 이인주의 '모자를 쓴 사철나무', 이은규의 '조각보를 짓다' 등 세 편이었다.

이하정의 시에서는 한 세대 전의 자옥했던 체험이 조밀하게 읽혀진다. 그러나 낡은 화폭을 대하는 듯한 느낌은 화자가 선택한 회상의 어조가 고루한 문맥 위에 얹혀있는 탓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인주의 응모작들이 보여주는 신선한 문체는 평가받을 만하였다. 시화의 선택이나 상상
력의 밀도 또한 감각적이었다. 그러나 시의 힘을 한데 모으려는 집중력에서는 신뢰가 떨어진다. 집중력은 작품을 관통해가려는 시적 긴장감의 바탕이자 일관성의 핵심인 것이다.

 이은규의 시편에서도 여러 결점들이 눈에 띄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선작으로 뽑힌 '조각보를 짓다' 역시
수다스러운 언사에 필적할 만한 감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더구나 '현빈지문(玄牝之門)'처럼 공연한 현학이 이 시에 무슨 보탬이 되었는지는 곰곰이 따져보아야 한다. 노자(老子)에 기댄 이 구절은 '만물을 낳게 하는 근원의 길'을 가리키지만, 그런 어사가 아니더라도 모성(母性)의 주술적 분위기를 감각적으로 살려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겹겹의 말에 감싸인 '마고(麻姑) 할미'와 같이 토속에의 생식적 기운이 이 시의 신화적 토대가 되어 작품의 일체감을 어느 정도 건사해내고 있다는 점에 심사위원들은 함께 공감하였다. 당선을 축하하며 거듭 정진하길 당부한다.

 

심사위원 김명인·오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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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필화(革筆畵)를 보며 / 이민아

 


맞춤주문한 전각(篆刻)을 품고 도장집을 나서는 길,
인사동 돌확 옆 낡은 좌판 위로 어스름한 새벽을 펼쳐놓은
노인을 향해, 다채로운 구두코가 나이테처럼 둘러서서
푸른 중절모를 쓴 혁화쟁이의 거친 손이 그려내는 혁필화를 본다
어느새 기념족자 신청 순서에 놓인 아버지 이름 석자,
닳고 닳아 유통기한을 넘긴 듯한 넓죽한 가죽 붓에
곤궁한 물감을 묻혀 그려내는 획을 낮은 포복으로 따라가다 보면,
순식간에, 생면부지의 한 사내가 길어올린 필생의 알리바이를
어떻게 알아챘는지, 쉼 없는 영사기처럼 거침없이 풀어내는
혁화쟁이의 은밀한 내간체가 설화처럼 피어나고, 환하게
어룽거리는 혁필화 한 장으로 남은 아버지, 두 손 가득 펄럭이는데
네모난 비단천 속, 피뢰침같은 철심이 박힌 지문의 파원(波圓) 위로
바스락, 굴참나무 거친 수피가 뗏목처럼 흐르다 멎고
저만큼 달아난 행서체 굴곡 따라 범람하는 푸른 바다,
서늘한 그늘 겹겹 장마 속에 깃들어 계신 아버지 용오름을 하며
빈한의 그림자를 도려내던 모진 칼바람을 듣는다
정자체로 양각한 옥돌전각을 아버지의 혁화와 번갈아 보며,
온전히 다 타버린 참숯처럼 더 이상 사그라들 것도 없던
옥탑방 가득 고인 내 아버지 시린 청년을 읽는다
장난감 블럭을 쌓아 안으로만 숨어들던 내 나이 미운 일곱 살
문득 주머니 속 깊이 넣어둔 전각 틀이 비좁다, 여기
가난의 골목 끝에 펼쳐진 혁필 한 장은 비로소 마주 앉은
탁란(托卵)의 깊은 둥지, 수척한 아버지 긴꼬리태양새되어
끝없는 비단길 위로 날아가는 에움길인지도 몰랐다

 

 

 

 

아왜나무 앞에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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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이땅의 모든 시인께 영원히 못갚을 말 빚"

 

꽃다운 기운이 감도는 방기(芳氣)마을에 세 들어 지낸 지 꼭 백일이 되었습니다. 석양이 겨울 잔디밭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던 오후 4시. 홀인원처럼 날아든 당선 소식에, 아무도 없는 8만평 잔디밭 한 가운데로 나가 눈물이 멈출 때까지 울었습니다. 호천통곡(呼天痛哭) 떨치고 일어나며, 깊고 오랜 애증의 뿌리인 사랑하는 가족과, 내 생에 마르지 않는 말의 곳간이 되어주시는 찬란한 어머니, 지치고 힘든 순간마다 자식보다 꼭 세 배는 더 아파하신 당신을 뜨겁게 불러봅니다.

시를 통해서 세상이 내게 말을 걸어왔던 것처럼, 통점(痛點)을 감추며 침묵하는 모두에게 먼저 말을 걸어보고 싶던 날들이었습니다. 더 깊고 낮게 가슴으로 불러보며, '그 곁에, 단 한 번이라도 스며들 수 있다면…'하는 간절함으로 미련하리만큼 글쓰기를 해 온 문청(文靑)에게 '등단'이라는 과분한 선물을 안겨주신 존경하는 심사위원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잡아주신 손의 온기 내내 잊지 않겠습니다. 오늘의 첫 마음 잃지 않고 거듭나는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그 길에 함께 할 국제신문사의 빛나는 발전을 충심으로 기원합니다.

국어선생님에서 이제는 10년 지기(知己)가 되어 가슴으로 응원해 주시는 박진희 선생님, 우리들 모여 목요시를 열자던 문창 도반들, 부경대 문우들, 함께 했던 날들이 고맙다는 안부가 모자랍니다. 숱한 스침 속에서, 따스하게 말 건네는 한 권의 시집으로 남아 만남의 찰나를 허락해 주셨던 부산의, 이 땅의 모든 시인께는 온 밤을 지새우는 눈길로도 말의 빚 다 갚지 못할 테지요. 이 소중한 자리를 빌려, 가슴 속 심해의 마르지 않는 물길로 흐르고 계신 모교 국문과 교수님들께 '사람이 힘이 되는' 시의 진의를 탐미하며 부단한 길을 가보겠다는 겁 없는 다짐과 함께 존경을 전합니다.

 

 

 

 

활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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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섬세한 관찰력 돋보여

 

본심에 오른 24 편을 읽으면서 세계와 사물을 언어로 대치시키며 자기만의 작품으로 다듬어 가는 솜씨에 감탄했다. 최종적으로 남은 '혁필화를 보며' '철마 가는 길' '樹醫師(수의사)의 지구본' '고래의 새벽' 중에서 나름대로의 개성과 언어 구사능력 그리고 새로운 신인으로서의 참신함과 살아있는 패기를 읽을 수 있었다.

 

'혁필화를 보며''고래의 새벽'을 두고 논의를 거듭하다가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도 모두 일정한 수준에 이른 '혁필화를 보며'를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이런 가운데 '노래'는 매끄러운 비유와 함께 시적 성취감도 있었지만 신춘문예가 갖는 건강한 정서에서 다소 거리감이 있어 제외되었다. '철마가는 길'은 다소 안일한 접근으로 무게를 떨어뜨렸고 '樹醫師의 지구본'은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시어 사용이 다소 거칠고 시가 가져야하는 깊은 맛이 결여되어 감동을 반감시켰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고래의 새벽'은 적절한 비유와 참신성이 돋보이는 좋은 작품이었지만 사물을 객관적 대상으로 바라보기보다 긴장미 있는 이미지 창출이 아쉬웠다.

 

당선작 '혁필화를 보며'는 일상에서 건져올린 예사롭고 평범한 시적공간을 착실히 내면화하면서 대상을 바라보는 섬세한 관찰력이 돋보였고, 언어를 매만지는 손길에서 성실함을 읽을 수 있었다.

 

심사위원 김명인(시인) 오정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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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 최미경


벚꽃이 전쟁처럼 흩날리는 저녁
바그다드 도서관이 불에 탄다
길 위에 사람들은
낡은 책 안으로 사라져가고
죽음은,

검은 주머니 가득
모래 폭풍을 싣는다
어둠을 달리던 바람의 마차들
달빛아래 드러나는 폐허의 이빨들
희망도
절망도
깨진 꽃잎을 주워 담으며 중얼거린다

봄은,
학살이다

홀쭉해진 계절을 틈타
별빛도 마른 티그리스 강가
어린 소녀들의 물동이 안에서도
달은 자라고
포탄이 떨어진 자리마다
흰 꽃이 선다

 

 

 

저녁 7시에 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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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나는. 내 詩가 거짓인 줄 알았다 돌아보면 모두가 거짓말 같은 게 삶 아니던가 그래서 두려웠다 함부로 들뜨지도 또 함부로 슬프지도 않으려 했다 길을 걷는 동안,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나는. 나를 믿지 않았다

당선소식을 들은 날 저녁, 퇴근길 차안에서 싸구려 향수냄새가 나는 주유소 휴지에 코를 풀며 나는, 울었다. 차 창 밖으로 詩를 닮은 잎들이 詩를 닮은 사람들이 또 詩를 닮은 휴지통이 겨울 밤 안에 있었다. 왜 내 詩가 되었을까, 라는 물음은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아주 아주 긍정적이고 유머감각이 뛰어난 神이 너를 한번 믿어보라며 던져준 금화 한 닢이라고 나는, 생각하기로 한다. 내 삶이 금화 한 닢으로 통째로 바뀔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은 그냥 아무 생각 않고 고맙고 행복, 하고 싶다. 그리고. 그런 다음. 바람이 부는 쪽으로 詩를 쓰고 싶다.

내게 아버지 같았던 오 교수님, 사랑하는 남편과 J, 그리고 내 생애 가장 슬픈 이름인 엄마에게 기쁨을 전하고 싶다. 또 모자란 詩를 안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도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시라고 꼭. 꼭. 전하고 싶다.

 



[심사평]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7명의 91편이었다. 엄선에 엄선을 거듭한 것이었으므로 다들 일정 수준을 상회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난형난제에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바람에 실로 자웅을 결하기가 어려웠다. ‘소리도에서’‘옷 만드는 여자’ ‘누드’ ‘부활’ ‘사자가족’ ‘막차’‘아버지의 겨울’‘남산동 2가’‘도배를 하며’‘4월’ 등 10편이 남아 한판 겨루기를 계속하였다.

설왕설래 끝에서야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기 시작하였는데, 압축력이 약해 느슨해진 것, 너무 사변적이고 설명적인 것, 시적 변용에만 겉멋을 부린 것, 지나치게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것, 감상적인 색칠하기에 급급한 것, 가식적 위장술로 교묘히 포장한 것, 시류에 편승한 산문적 억지를 고집한 것 등의 이유를 들어 얻어낸 결과였다.

결국 마지막까지 남아 끝까지 일전을 겨룬 작품은 ‘아버지의 겨울’ ‘남산동 2가’‘4월’등 3편이었다.

‘아버지의 겨울’은 그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흠잡을 데 없는 완성도에다 기성 시인의 냄새가 너무 짙은 나머지 오히려 낡은 매너리즘을 자초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고 역으로 ‘남산동 2가’는 용기와 열기를 앞세운 젊은 혈기와 현실 재단적 안목은 대단했으나 그만큼 거칠고 미완적이라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러한 점까지 참작하여 작품 ‘4월’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당선작 ‘4월’은 다소 소품적인 데가 있으나 그만큼 군더더기가 없는 언어 구사 능력이 뛰어나고 행과 연 구분의 탄탄한 구성력과 참신성이 돋보이는 데다 공교롭게도 최종심에서 겨루다 탈락하게 된 두 작품의 장단점을 무리 없이 절충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 또한 크게 참작되었음은 물론이다. 서정의 본령과 시적 정공법을 지속적으로 살려 앞으로 좋은 작품 많이 써 주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김용택 김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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