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가상현실 / 김영무

 

 

암선고를 받은 순간부터

(암은 언제나 진단이 아니라 선고다)

너의 세상은 환해진다

컴퓨터 화면 위를 떠도는 창문처럼

기억들이 날아다닌다

원시의 잠재의식도 살아나서

뚜벅뚜벅 걸어오고, 저 우주에 있는 너의 미래의

별똥들이 쏟아진다

어둠은 추방되고, 명암도 무늬도 사라진,

두께도 깊이도 무게도 지워진,

노숙과 밥굶기와 편안한 잠과 따뜻한 한끼의

경계가 무너지고, 모든 칸막이가 허물어진

환하디 환한 나라

시간의 뿌리와 공간의 돌쩌귀가

뽑혀나간 너의 현실은 안과 밖 따로 없이

무한복제로 자가증식하는

, 디지털 테크놀로지 최첨단

암세포들의 세상

지독한 오염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미국자리공, 황소개구리, 실지렁이, 거머리가 못 되어

시름시름 힘을 잃고 약자로 전락한 어느 순간부터

경쟁력 없는 자 솎아버리는 구조조정의

덫에 걸린 너의 삶은

순백색 빛의 나라, 가상현실

 

 

 

가상현실

 

nefing.com

 

 

창작과비평사가 주관하는 제3회 백석(白石)문학상 수상작에 김영무(57·사진) 서울대 영문과 교수의 시집 가상현실(문학동네·2001)이 선정됐다. 신경림 시인 등 심시위원은 이 시집이 삶의 경의로움을 감동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근대문명의 위기를 밝게 통찰한 작품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김영무의 가상현실은 몇 겹의 '가상현실'의 코드를 가지고 있는 다층적 텍스트이다. 암의 은유도 사회 현실의 코드, 역사의 코드, 종교의 코드, 제국주의적 코드 등 여러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는 다의성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질병을 이만큼 은유화시켜 역사, 사회, 문화적 맥락으로 확산시켜 다의성을 획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시인의 개인적 질병의 텍스트가 사회, 역사, 정치, 문화적 질병의 텍스트로 확산되어 몇 겹의 은유로 해석될 수 있는 점이 이 시집의 탁월한 아름다움이라 하겠다.

 

상금은 1000만원이며, 시상식은 1130일 오후 6시 서울 한국프레스센터 20층에서 열린다.

 

'국내 문학상 > 백석문학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5회 백석문학상 / 박영근  (0) 2011.08.18
제4회 백석문학상 / 신대철  (0) 2011.08.18
제2회 백석문학상 / 최영철  (0) 2011.08.18
제1회 백석문학상 / 이상국  (0) 2011.08.02
백석문학상이란?  (0) 2011.02.06
728x90

 

 

일광욕하는 가구 / 최영철

 

 

지난 홍수에 젖은 세간들이

골목 양지에 앉아 햇할을 쬐고 있다

그러지 않았으면 햇볕 볼 일 한 번도 없었을

늙은 몸뚱이들이 쭈글쭈글해진 배를 말리고 있다

긁히고 눅눅해진 피부

등이 굽은 문짝 사이로 구멍 뚫린 퇴행성 관절이

삐걱거리며 엎드린다

그 사이 당신도 많이 상했군

진한 햇살 쪽으로 서로 몸을 디밀다가

몰라보게 야윈 어깨를 알아보고 알은체한다

살 델라 조심해, 몸을 뒤집어주며

작년만 해도 팽팽하던 의자의 발목이 절룩거린다

풀죽고 곰팡이 슨 허섭쓰레기,

버리기도 힘들었던 가난들이

아랫도리 털 때마다 먼지로 풀풀 달아난다

여기까지 오게 한 음지의 근육들

탈탈 털어 말린 얼굴들이 햇살에 쨍쨍해진다

 

 

 

일광욕하는 가구

 

nefing.com

 

 

백석문학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창작과비평사가 주관하는 제2회 백석문학상에 최영철(崔泳喆·44)씨의 근작 시집 일광욕하는 가구[문학과지성사]가 선정됐다. 경남 창녕 출신으로 1986년 등단한 최씨는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5권의 시집을 상재했고,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이 시집은 살아남은 것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대한 의지의 노래이다. 시인은 평범한 일상과 사물들 가운데서 생명에 대한 의지를 끌어내어 먼지를 털어내고,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게 반짝이는가를 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여기 담긴 시들에는 회복기 환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시선에 어린 감탄과 따뜻함, 그리고 생동감에 대한 외경이 가득 담겨 있다. 그리고 시인은 이 의지의 노래를 잠언조로 되풀이하지 않고 싱싱한 이미지와 따뜻한 유머 속에 풀어 섞음으로써 찬탄할 만한 힘을 불어넣었다.

 

'국내 문학상 > 백석문학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5회 백석문학상 / 박영근  (0) 2011.08.18
제4회 백석문학상 / 신대철  (0) 2011.08.18
제3회 백석문학상 / 김영무  (0) 2011.08.18
제1회 백석문학상 / 이상국  (0) 2011.08.02
백석문학상이란?  (0) 2011.02.06
728x90

 

 

집은 아직 따뜻하다 / 이상국

 

 

흐르는 물이 무얼 알랴

어성천이 큰 산 그림자 싣고

제 목소리 따라 양양 가는 길

부소치 다리 건너 함석집 기둥에

흰 문패 하나 눈물처럼 매달렸다

나무 이파리 같은 그리움을 덮고

입동 하늘의 별이 묵어갔을까

방구들마다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어둠을 입은 사람들 어른거리고

이 집 어른 세상 출입하던 갓이

비료포대 속에 들어 바람벽 높이 걸렸다

저 만리 물길 따라

해마다 연어들 돌아오는데

흐르는 물에 혼은 실어보내고 몸만 남아

사진액자 속 일가붙이들 데리고

아직 따뜻한 집

어느 시절엔들 슬픔이 없으랴만

늙은 가을볕 아래

오래 된 삶도 짚가리처럼 무너졌다

그래도 집은 문을 닫지 못하고

다리 건너오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nefing.com

 

 

강원도 양양에 가면 설악산과 이상국을 만난다. 이상국은 어쩌면 그리도 의연한 대청봉 같은지. 고향 떠나 서울 객지에서 사는 나 같은 소설가가 그를 보면, 언제나 위로를 받는다. 우리가 서구 사조에 의존하고 있을 때, 그는 양양의 논밭 고랑에서 한국인의 정신을 다지고 키우고 지켜내고 있었다. 그래서 이상국은, 나를 늘 부끄럽게 한다. - 이경자 (소설가)

 

이상국의 禪林院址에 가서는 전통적인 한시풍의 격조와 여유로움을 유감없이 발산하는 작품으로서, 이번 시집의 가장 빛나는 시편의 하나로 손꼽을 만하다. 어디 하나 부족함이 없는 비유의 능숙한 구사에 힘입어 밀도 높은 풍경이 재현되고 그런만큼 시의 육체성이 자연 도드라진다. 나는 당당한 산세의 위풍을 지닌 시를 참 오랜만에 만나 충만감에 빠져들었다.- 임규찬 (문학평론가)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것이다 / 황지우

 

 

초경을 막 지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 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인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 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거다

 

nefing.com

 

한 권의 시집을 위해 8년을 다듬어 온 황지우의 지독한 장인정신... 황지우의 장인적 태도야말로 90년대 이후의 '날림'의 글쓰기 속에서 문학을 살아남게 하는 마지막 힘이 될 것이다.- 이인성 (소설가)

 

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이 지난 319일 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위와 같이 선정되었습니다. 백석문학상은 백석(白石) 선생의 뛰어난 시적 업적을 기리고 그 순정한 문학 정신을 오늘에 이어받기 위해 자야(子夜, 본명 金英韓) 여사가 출연한 2억 원의 기금으로 199710월에 제정되었습니다. 최근 2년내에 출간된 뛰어난 시집에 주어지는 백석문학상이 우리 문단에 활력을 불어넣어 새로운 문학의 탄생을 촉진하는 중요한 제도로 자리잡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백석문학상이 갖는 이런 의미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 심사위원회도 문단의 비중 있는 시인, 평론가들로 구성하여 객관적이고 엄정한 평가를 기하였습니다.

 

심사위원회는 최종심에 올라온 이상국(李相國), 황지우(黃芝雨) 시집을 놓고 신중히 논의하던 끝에 두 시집 모두 80년대와 90년대의 양편향을 넘어서 시의 본래의 모습에 충실 하려는 진정한 문학적 고투가 담겨 있을뿐더러 시인이 선 자리는 각기 다르지만 더욱 깊은 사유로 안과 밖을 아우르는 시적 변용의 훌륭한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근래 보기 드문 뛰어난 시적 성취를 이루었다고 판단되어 공동수상으로 하는 데 흔쾌히 합의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제1회 공동수상의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하겠습니다.

 

상금은 1000만원. 첫 회인 이번은 공동수상 관계로 이상국, 황지우 시인에게 각각 500만원씩 지급됩니다. 시상은 1999423() 오후 630분 한국프레스센터 20층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할 예정입니다.

 

- 심사위원: 백낙청(문학평론가), 신경림(시인), 정현종(시인), 최원식(문학평론가), 황현산(문학평론가)

 

'국내 문학상 > 백석문학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5회 백석문학상 / 박영근  (0) 2011.08.18
제4회 백석문학상 / 신대철  (0) 2011.08.18
제3회 백석문학상 / 김영무  (0) 2011.08.18
제2회 백석문학상 / 최영철  (0) 2011.08.18
백석문학상이란?  (0) 2011.02.06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