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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감천, 그 골목 / 김은혜

 

 

푸른 지붕 잎맥을 채우고 돌아오는 밤

낡은 벽화에 그려진 비릿한 물고기 비늘

붉은 가로등 불빛에 몸을 뒤척인다

좁은 골목들이 엮여있는 회로 사이에서

먼지에 덮인 방은 홀로 주파수를 맞춘다

아버지는 달팽이관처럼 등짝 웅크린 채

무음이 되어가는 허공을 듣는다

듬성듬성 빈틈이 보이는 정수리 위로

반질하게 새어나온 하얀 안테나들

공중에 온기 없는 숨들이 공명하자,

아버지가 얼굴 위로 느슨한 현을 당긴다

오래된 악보를 삼켜낸 아버지는 그저

낮은 한숨 몇 개를 음표처럼 달싹인다

알 수 없는 기호처럼 아버지의 글자들이

단 한번도 표음되지 못한 채 바스라진다

몇 개의 귓불들이 어둠 속에 차가워지고

아버지가 휘어진 안테나를 달고 뒤척인다

낡아가는 뒤통수에 수신되는 작은 음파들

재생되지 못한 말들이 파동을 타고 온다

깊은 잠 속으로 들어간 아버지는 어디쯤에서

작은 귓불을 따뜻하게 기울이고 있을까

 

빗금이 쏟아지고 전류가 흐르는

새치가 번뜩이는 아버지의 둥그런 뒷모습

그 꼭대기 마다 파동처럼 바람이 분다

멀리, 가로등 번진 어두운 골목 아래

허공을 삼킨 물고기가 아가미를 뻐금거린다.

새벽이 한걸음 한걸음 걸어온다

 

 

 

 

[최우수상] 을숙도가 온다 / 최형만

 

모래가 쌓일수록 갈대도 길어지는 곳

갈밭 길을 걸으면 놀란 갈게들이 흩어진다

지나온 시간보다 밀려온 날이 많은 을숙도는

갯바람에 그을려도 검어질 줄 몰랐을까

남새밭 너머 불어온 바람에도 메밀꽃을 피운다

흐르는 강물의 소리로 계절을 말할 때마다

고니는 오래된 저녁을 날았는데

큰기러기는 뭉툭한 부리로 갯벌을 파해쳤다

새가 많고 물이 맑아 을숙,

얼핏 개흙을 읽어가는 이름이다

천삼백 리 물의 여정이 하구에서 끝날 때

철새는 해 질 녘 어느 하늘을 날았을까

낙조에 물든 날갯짓 따라 사각사각 흔들리는 을숙,

둘러보면 떠밀린 에덴처럼 멀리 있다

갯내가 좋아 갯메꽃을 피우는 사하의 밤에

철새가 물고 온 울음도 모래탑을 쌓는데

싱싱한 강바람에 얼굴을 돌려온 세월

은빛 물살을 낚아챈 붉은부리갈매기가 떠나면

나는 어디에서 붉어질 수 있을까

세모고랭이 피면 상처도 연꽃이어서 을숙,

팽팽하게 걸린 현수막에는 생태체험이 적혀있다

바람 부는 날에 혼잣말을 해도

젖은 땅을 빼곡하게 기억하는 언어들

물그림자 그림처럼 걸리면 을숙도가 온다

 

 

 

 

[우수상] 쥐섬 솥섬 고리섬의 시간 / 고훈실

 

 

그 섬의 안부를 물을 때마다

안개바람이 일었다

몰운대 어디메쯤 긴 목을 빼고

시간의 지층이 단애를 이룬 섬과 섬의

꼬리를 본다

손 내밀면 잡힐 듯 지근한 거리에

점점이 떠 있는 그리운 여우족(族)

글썽이고 반짝이는 바다에

주둥이를 담그고 해당화 눈빛으로

섬과 섬을 넘나든다

고기잡이 배들이 돌아올 때면

갈매기보다 먼저 파도를 탄주하는

삼도귀범의 푸른 여우

물속 산맥을 내질러 바다의 내장을

성글게 끊어 먹고

머리만 우뚝한 태초의 시간을 내민다

어제와 오늘의 경계에

갇히지 않는 여우, 수평선을 지나

닿을 수 없는 시간의 이음매가

자갈마당에 밀려온다

그 밤 여우가 삼킨 별들이

다대포 앞바다를 환하게 밝혔다

 

 

 

 

[가작] 고니와 새섬매자기* / 한승엽

 

 

누군가의 눈에는 보이고

누군가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것

초록의 꽃대가 낙동강 하굿둑에서 하늘거린다

수십 센티까지 자라고 자라

꽃들이 갈색으로 익어갈 무렵이면,

국경을 월담하듯 찬 공기 뚫으며

날갯죽지의 근육을 달랠 틈도 없는

고니가족들의 긴 울음소리 들려오고

고비마다 구름다리를 건너는 심정으로

긴 목과 납작한 부리를 앞세워

매순간 타고난 집중을 펼치며 날아오는데

금방이라도 잡힐 것처럼

산과 강줄기가 멈추지 않고 흐르더니

모래톱, 아늑한 모래톱이

수천만 개의 눈빛으로 반짝이며 일어서고

차가웠던 뺨이 환히 달아오를 때

저 한복판 끄트머리에서

더 환하게 물들어 있는 것들이 보이자

견딜 수 없는 허기에 정신이 없다가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자세로

아니 무리지어도 우아함을 지키기 위해서

사뿐히 내려앉고 있다

순간, 새섬매자기는 인연을 눈치 채고

꽝꽝 얼어붙는 혹한 속에서도

평화의 순례가 시작된 것을 알았을까,

무엇인가 춤추듯 흔들거리고 있었다.

 

*새섬매자기: 고니가 먹이로 즐겨 찾는 다년생 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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