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복숭아의 시간 / 유혜영
연한 것들은
껍질로 벗겨지는 시간을 나긋나긋 받아들인다
거친 숨을 헐떡이며 쫓아오는 산그늘도
집나간 아버지의 흉흉한 소문들도
어머니가 감싸 안으면
까라져 버린 거품인양 사라졌다
어느 쪽으로 돌아누워도 배기지 않는
아이 업은 등처럼 말랑거리던 어머니
복숭아벌레처럼 들어앉아 단물을 쪽쪽 빨던 나
어깃장이 꽃뱀같이 똬리를 트는 날에는
어디로 튀어나갈지 모르는 나의 안녕이
낙과의 꿈을 키우며 독한 생각 하나를 삼켰다
아, 그때는 왜
과육처럼 차오르는 아득함이 그렇게 많았는지
뭉클뭉클
내안 깊은 곳에 어머니의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어머니보다 늙은 복숭아나무에게서 듣는다
짓물러터진 가계를 단단하게 품은 씨 하나가
끈질긴 힘줄로 나를 끌어당겼다는 것을
그게 바로 나의 깔끄러움을 뒤집어쓴
어머니였다는 것을
〔최우수상〕시는 한 그루 복숭아나무 1) / 정수경
같은 자리에서 발을 자주 접질렸다
복숭아나무 아래였던 것 같다
발목은 부어오르고
말을 하듯이 쓰고 싶은데
복숭아뼈처럼
문장은 같은 곳에서 자주 부어올랐다
전정 적화 적과를 거쳐야
복숭아는 실해진다고 누군가는 말하지만
솎아 내기에 서투른
부어 오른 발목은 봉지 속에서 여물어 가고
햇살을 먹고
완성되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가 아름다운가
떨궈내지 못하는 한 그루 복숭아나무는
위태롭게 여름날을 보내고
습작을 하고
많이 흔들릴수록 맛은 깊어지고
많이 지울수록 문장은 끈적였다
복숭아는 단물을 머금었다 나는 완성되지 못했다
봉지를 따는 날 아름다운 발목을 봤다
어색한 시는 딱 한번 접질렸다
아마도 복숭아나무 아래였던 것 같다
1)시는 한그루 나무 : 김혜순의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용
〔우수상〕황도가 빛나는 밤 / 이가인
하늘의 채도가 낮아진 저녁
방 안에 회색 물감을 끼얹은 듯
시야가 흐려진다 약사는 야맹증 약을 주었고
엄마는 황도 하나를 내밀었다
어둠 속 뭉툭한 달 하나가 빛난다
손안에 쥐면 문드러질 듯
여린 살결의 달을 입안에 넣어보는 밤
엄마의 온도가 혀끝에서 뭉그러지며
노을 진 하늘색으로 녹아든다
밤마다 나는 여러 겹의 눈꺼풀을 가진다
나방처럼 불빛을 찾아 헤매지만
보이지 않는 빛, 손에 밴 냄새를 쫓는다
접시 위 여러 겹으로 쌓인 껍질은
엄마가 말 대신 두고 간 여러 개의 혀
하나의 혓바닥으로 빛을 발음하기엔 역부족,
껍질을 씹어본다 침과 섞인 황도는
미지근한 온도로 입안을 어루만지고
부풀어 오른 뺨이 복숭아의 살결을 닮아가는 중이다
입안의 채도를 가늠해본다
엄마의 온기가 느껴지는 복숭아 향은
갈 곳 잃은 혀의 중심을 찾는 황도면*
눈을 뜨면 여전히 우주 한가운데에 선 듯
태양의 궤도를 알려주는 황도와
보이지 않는 혀끝의 온도로
빛을 느끼게 하는 엄마의 손길이 있다
뜨거운 목젖 너머의 우주로
해와 달이 넘어가는 노란빛의 밤
방 안의 채도가 올라가고 있다
* 천구(天球)상의 태양의 궤도.
〔우수상〕복숭아 / 조지원
이에 금이 갔다, 무언가를 베어물면 왈칵, 눈물이 나던 가을이었다
가난을 잘 아는 아이들은 나무를 타고 놀았다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내려다보던 세상,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떨어져나간 아픔이 보였다 반쯤 마른 나뭇잎이 우수수 쏟아져 내리고, 복숭아의 풋내처럼 푸르던 나의 침묵, 나무에 매달려있던 복숭아 하나를 땄다 채 다 익지 못한 슬픔이 손 안에 있었다
흔들리던 이가 빠지면 새가 날아온다고 믿었다 소란스럽던 새의 날갯짓보다, 새가 내려앉을 땅이 더 무서울 때가 있었다 가끔, 장판을 손톱으로 뜯으면 썩은 물이 올라왔다 지상도, 지하도 아닌 곳에서 우리는 빈손으로 창문을 두드렸다, 출구가 없는 사람들,
책상 위에 올려둔 복숭아에서 애벌레가 기어나왔다 단단한 벽을 갉아먹으면, 우리도 빛으로 나갈 수 있을까 구름 사이에 끼어있던 낮달 해도 아니고 달도 아니어서 갈 곳 잃은 푸른 빛 하나가 손바닥을 뒤덮고
크게 숨을 들이쉬면 어디선가 풋내가 났다 가난은 손에 쥐고 있을수록 그 향이 더 진하게 스며드는 것이어서, 손에서는 늘 복숭아 냄새가 났다 부러진 이빨 하나 쯤 가지고 사는 일이 부끄럽지 않을 때
베어 물 수 없는 슬픔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우수상〕여름, 도원桃園의 밤 / 김형미
두 뺨에서 불그스레 돋아나던 맹세는
복사꽃 지자 뿔뿔이 흩어졌다
허방을 짚듯, 봄이 되면
꽃물 번지는 산등성이 도원을 몇 번이고 찾았으나
나무는 그늘만 키우고 있었다
봄바람에 그댈 잃고 난 후
꽃이 피면 꽃문을 열고 들어가 묻곤 했다
저버릴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하여
대답 대신 능선 따라 고요만이 부풀어 올랐다
눈동자에 고인 슬픔이 달빛에 이우는 밤
세월에 씻긴 환부는 차츰 희미해졌지만
추억은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는다
허공의 하중을 견디는 일은 남은 자의 몫이었다
당신의 향기가 고인 한 덩이 별빛의 무게
모두가 떠난 뒤에도 남아있는 슬픔이
산 무릎에 기대어 기운 너머를 그릴 때에도
땅위에서 뭇별을 키우는 복숭아
그 쓸쓸하고 달콤한 맛을 한 입 베어 물면
상처 난 마음 기스락까지
하르르하르르 별빛 쏟아지는
여름, 도원의 밤이 천년의 꿈처럼 깊어간다
심사평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 28편(이름 없이 제목만 있는 작품)을 꼼꼼히 탐독했다. 모두 나름의 발화를 통해 시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고 있었다. 복숭아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여 대상과 풍경을 형상화하려는 노력이 놀라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작품들을 하나하나 내려놓았다. 1차적으로 복숭아와 관련된 단어와 이미지를 슬쩍 끼워 넣기만 한 작품을 제외시켰다. 예컨대 ‘복숭아’란 시어를 지우고 ‘자두’나 ‘사과’를 넣어도 별 의미 변화가 없거나 시의 맛이 그대로인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두 번째로 시적 상상이나 의인화가 작위적인 경우 제외시켰다. 상상이 단순히 동화적이거나 이야기성에 무게를 두고 펼쳐져서 피상적인 느낌을 갖게 했다. 시적 상상 자체에 비중을 두지 말고, 울림과 내밀함을 향해 상상이 움직여서 스며들게 해야 함을 기억하기 바란다.
세 번째로 설명적 진술을 길게 늘어놓는 경우 제외시켰다. 설명적 진술들은 단순히 상황 전달에만 급급해서 ‘진술서’를 읽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불필요한 진술은 읽는 사람을 따분하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다.
네 번째로 과거 회상식 구조를 도식적으로 드러낸 시들을 제외시켰다. 복숭아에 대한 기억이 실감나게 다가와야 하는데, 수필적 발상으로 애절한 사연을 쭉 나열한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다섯 번째로 식상한 묘사나 과도한 표현으로 작품이 가진 지배적 정서를 어색하게 한 경우 제외시켰다. 익숙한 표현은 싱싱하지 못한 과일과 같고, 과도한 표현은 맛만 잔뜩 부풀린 과일과 같다. 묘사보다 중요한 것은 시적 정황에 꼭 맞는 메시지를 구체화시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나치게 감상에 의존한 작품과 시적 사유가 겉도는 작품을 제외시켰다. 대상이 가진 겉의 속성과 더불어 안쪽의 속성을 내밀하게 읽어내지 못한 작품은 표피적인 슬픔, 표피적인 서러움, 표피적인 그리움 등과 같은 가벼운 느낌만을 전해준다.
최종적으로 남겨진 작품은 「복숭아의 시간」, 「시는 한 그루 복숭아나무」, 「황도가 빛나는 밤」 세 편이었다. 이 세 편은 모두 위에서 지적한 단점을 극복하여, 자신 만의 목소리로 제재인 복숭아를 미학적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고심과 고심 끝에 다음과 같은 이유로 1등, 2등, 3등을 가려냈다.
최우수상을 한 「시는 한 그루 복숭아나무」는 복숭아의 속성을 시창작의 과정 속에 녹여내는 솜씨가 탁월했다. 발상도 다른 작품에서 보지 못한 것이어서 신선했다. 그런데 기성 시인의 작품에서 제목을 인용한 점이 마음에 걸렸다. 유명한 시인의 작품에 기대지 말고 자신 만의 직관으로 제목을 썼더라면 이 작품을 1등으로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쉬움과 함께 어렵게 응모작을 내려놓았다.
우수상을 한 「황도가 빛나는 밤」은 색채이미지를 활용해 내면의 풍경을 감각적으로 그려낸 점이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연이 산만했고 작위적이었다. 채도 이미지 하나로 집약되게 하면서 마무리 하면 좋았을 텐데, 의지적으로 많은 이미지를 한꺼번에 쏟아 부어서 오히려 ‘울림’을 주지 못했다. 작품의 스케일이 커보이게 하려고 우주적 이미지를 끌어온 것이 정서를 반감 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최종 대상으로 선정된 「복숭아의 시간」은 ‘복숭아 = 어머니’라는 익숙한 패턴을 보여주는 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가진 아가페적 사랑을 미학적 완결성으로 빼어나게 극복하고 있어서 든든했다. 복숭아의 가진 특징을 구심력으로 하여 정서를 하나의 지점으로 끌어당기는 솜씨가 범상치 않았다. 어머니에 대한 인식이 타성에 빠지지 않도록 긴장을 늦추지 않은 상태에서, “짓물러터진 가계를 단단하게 품은 씨 하나가/ 끈질긴 힘줄로 나를 끌어당겼다는 것을/ 그게 바로 나의 깔끄러움을 뒤집어쓴/ 어머니였다는 것을”과 같은 표현을 통해 내밀한 본질 탐구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대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아울러 세 편의 수상작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시적 진정성이 물씬 묻어난 「복숭아」 「여름, 도원桃園의 밤」을 우수상에 올렸으며, 등위에는 들지 못했지만 「화관을 쓰고 여행을 한다」의 작품에도 오랫동안 시선이 머물렀음을 밝힌다. 그리고 아쉽게 탈락한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다음번엔 위에서 제시한 여섯 가지의 감점 요인을 극복하여 좋은 작품으로 다시 만나길 바란다.
< 하린 시인 약력>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 졸업.
2008년 《시인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이 있고,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와 시창작 안내서 시클이 있음.
청마문학상 신인상(2011)과 송수권시문학상 우수상(2015), 한국해양문학상 대상(2016)을 수상.
중앙대, 한경대, 광주대, 협성대, 서울시민대, 열린시학아카데미, 고양예고 등에서 글쓰기 및 시창작 강의를 함.
현재 계간 열린시학 부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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