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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남기고 간 자리 / 노원숙

 

 

무창포, 밤의 입구에 닿았다

바람이 수면 속을 내달리는 동안
파도는 아코디언처럼 제 몸의 주름을 꺼내 해풍을 연주한다

썰물에 앙상한 제 뼈를 다 드러낸 무창포, 이곳의 명물은 모세의 기적이다
성경 속 모세가 도시 어느 쪽으로 난파됐는지 알 수 없는 지금
나는 몇 모금 목마른 그리움을 해풍에 적시기라도 하려는 듯
무작정 이곳까지 밀려들었고, 눈부신 인파들의 야광 같은 웃음들 속에
이 밤, 자객처럼 나도 그 속에 하나의 그림으로 박혀든다

무창포, 이곳에 다다르면
문명저쪽 한낮의 연체된 갈증들과 밀린 일상의 근심들조차
한낱 갈매기의 새우깡 반 토막 보다도 작아지고 마는,
누구든 이곳에서 오면 바닷물을 찍어 오래전 구약성서의
안쪽에서 밤새 하나의 새로운 출애굽을 써내려가도 좋을,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아침이 되자
누군가의 호미 속에서 오래된 말씀 하나 진주알처럼 반짝, 들춰진다

 

 

[당선소감] "시처럼 우엉처럼 젊어지고파"

 

지난 늦가을에 우엉을 수확했습니다. 잘 챙겨 먹으면 '20년 젊어진다'는 우엉. 한 계절 창고 한편에 깊이 잠들어 있었던 그것들을 며칠 전 꺼내 손질하느라 머리를 잘라 냈습니다.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열흘쯤 방치했었는데, 잘려진 우엉 머리에서 연둣빛 혁명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접시에 물을 받아 올려두었는데 크리스마스이브에 보니 튼실한 싹으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순간, 저는 생명의 외경을 느꼈습니다. 무참히 잘려져도 죽지 않고 자라는 저 우엉! 저 새싹처럼 그렇게, 저도 시련이 올 때마다 시를 향한 집념을 촉수처럼 키워왔습니다.

 

서울에서 온 한 통의 전화는 제게 우엉 싹과 같은 에너지였습니다. 크리스마스 전날의 행운! 하늘의 주님께서 주신 참으로 큰 선물입니다. 무엇보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아직 많이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과 기독공보 관계자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올립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저에게 깊은 가르침을 주셨던 김명희, 이설영, 채석준, 김산, 정병근, 문정영, 이화은 이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의 절을 올립니다. 또한, 그동안 함께한 문우님들께도 고마움의 인사를 전하며, 지금도 시 공부를 하시는 모든 분들의 앞날에도 행운이 꼭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시를 쓰면 나이보다 더 젊어진다'는 말씀을 믿으며 좀 더 열심히 시창작에 매진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저를 알고 계시는 모든 분들께 즐거움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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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성서에 기록된 인물에 대한 시적 변용 잘된 작품, 文彩ㆍ비유 개성미 돋보여"

응모작품을 읽고 좋은 작품을 가려내는 일은 투고자 못지 않게 선자로서도 기대감으로 긴장하게 된다. 신인들이 어떤 작품들로 한국문단에 등장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대다수의 작품들은 시적 소재나 대상을 날 것으로 취했기에 생경한 소재주의에 머물고 말았다. 외골수의 신앙정서 혹은 성서의 역사적, 신화적 팩트를 시인의 의식으로 수용하고 이를 문학적으로 재현해내는 과정이 미흡하거나 생략되었을 때 문학작품으로써의 감동을 이끌어 낼 수 없다.

당선작 노원숙의 '바람이 남기고 간 자리'는 성서에 기록된 인물에 대한 시적 변용이 잘된 작품이다. 모세의 신명(神命)에 따른 행적을 시적변용을 통해 음미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발견한다. 내면의 신앙심이 무의식적으로 깔려 있어 자연발생적으로 발현되는 결과이다. 여기에 시어의 문채(文彩), 제시된 비유들의 개성미가 돋보인다. “~아코디온처럼 몸의 주름을 꺼내 해풍을 연주"하거나 "자객처럼 나도 그 속에~ 그림으로 박혀"버리는 수사(修辭)들이 신선하다.

시속의 화자는 무창포 해변에서 하나님의 종 모세의 기적을 체현하고있다. 그리고 드디어 갈라진 바다에서 "~오래된 말씀 하나 진주알처럼 반짝, 들춰"내고 있다. 화자는 무창포로 성지순례를 가서 출애굽시기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비의(秘儀)를 경험한 결과를 시의 언어로 표상한 것이다. 기독교 신앙시의 한 전형(典型)이 됨직하다. 함께 묶은 다른 작품들도 별 수준차이가 없어 그의 역량을 믿을 만 했다. 

끝까지 내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고홍숙의 '들판 라디오' 등이 있다. 그리고 최수현의 '아름다운 소원' 등과 박숙영의 '일몰의 그림자'등의 시인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전한다.

- 심사위원 박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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