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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달팽이 / 이종섭
   
   1.
 
   집 없는 달팽이,
   몸집이 크고 길다
   집을 벗어버려
   잡혀가지도 않는다
 
   달팽이가 신기해도
   동그란 집이 없으면 본척만척,
   집을 위해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에게는
   달팽이집이 달팽이였던 것이다
 
   집을 나선 적도 없고
   돌아갈 집도 필요 없는
   달팽이 한 마리,
 
   집이 없어 홀가분한지
   배밀이로 가는 걸음
   바람처럼 가볍다
 

   2.
 
   여든이 넘어서도
   목수로 일하는 아버지
 
   잘 마른 나무 위를
   온몸으로 기어 다니며
   자르고 깎아 만든 목조건물 속,
   한 마리 달팽이가 되어간다
 
   자신의 분비물로 만든 탑을
   들락날락,
   뼈 묻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일까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아침마다 이슬 찾아 나선다
 
   마디 하나 없는 몸에
   투명한 집 한 채,
   무척추동물이 평생 걸려 세운
   무덤이다
 
   3.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나의 집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집에 맞춰 살아간다는
   깨달음 하나 배우자마자
   내 눈을 스치고 가는 바람의
   거대한 몸집
 
   보이지 않는 꽁무니를 따라
   땅끝까지 기어가면
   바람의 집은 지구
   지구의 집은 우주
 
   달팽이관 그 속에
   달팽이자리 별들이 살고 있다

 

 

 

 

수상소감 

 
사물이나 인물에 상상력을 불어넣어 재구성한 시가 있다면, 반면에 있는 그대로의 내용을 승화시켜 쓴 시도 있다. ‘민달팽이’가 바로 그러하다.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정착하고 목수로 일했던 아버지가 나이 들어 고향에서 할 일을 만났다. 그때 아버지를 만나러 고향에 갔을 때, 커다란 민달팽이 여러 마리를 보았다. 무수한 집을 지었으면서도 아흔이 되도록 집 한 칸 없으신 아버지. 집도 없이 맨몸으로 기어가는 민달팽이가 아버지의 모습과 겹쳐졌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시 ‘민달팽이’를 뽑아주신 심사위원께 감사드린다. 어릴 적 아버지 옆에서 토막 난 나무들과 연장을 가지고 놀면서 창의력을 키울 수 있도록 내 재주의 바탕이 되어주신 아버지께 이 시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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