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티재 넘다 / 천영애
지분거리던 슬픔이 예까지 따라올 건 또 뭔가
끊어질듯 더하는 길 따라 어느 한 구비에서
푹 주질러 앉으며 허리 꺾고 감당하고 싶었던 것인데
끝내 따라올 건 또 뭔가
나무들 옷 바꿔 입고 시치미 뚝 뗀 채 나 몰라라 하고
염치없이 잎보다 먼저 피어올랐던 꽃 진지 오래인데
어쩌자고 자꾸 따라오는 건가
어디에서 한 목 놓아 터지자는 건지
이놈의 슬픔 참 질기기도 하다
미나리 파는 여자의 미나리 꽃 같은 머리칼이
서걱서걱 바람에 요동치는데
꿈쩍 않고 견디는 저 깊은 자리
한 철 공들였던 것들 구불텅한 찻길에 내어놓고
미동도 없이 길만 바라보는 저 여자
슬픔이란 그 무슨 반찬 같은 것도 아니고
베어내도 자라고 또 자라는 미나리 같은 것도 아니고
여름이 온다고 꽃 환하게 피울 재간도 없는 것이
어쩌자고 혼자 헐티재 그 아름다운 길 넘어 오는지
질퍽한 미나리꽝에서 미나리 파는 여자 애꿎은 미나리만 저벅저벅 밟아댄다
묵음의 음표 같은 긴 장화 신은 발이
베어내도 자라고 또 자라는 미나리를 밟는다
질기게도 따라붙는 슬픔도 저벅저벅 밟아서
길 위에 내어놓고 팔 수 있다면
이 아름다운 헐티재 어느 모퉁이에서
천년을 지고 가는 바위처럼 꿈쩍 않고 견딜 것을
슬픔은 어쩌자고 눈치도 없이 자꾸만 따라오는 건지
[심사평]
충대문학상의 연륜이 깊어서인지 예년에 비해 응모작의 편수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물론 양적 증대가 질적인 수준의 향상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충대문학상의 권위가 높아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상상력이 활발한 대학생들의 시는 무엇보다 한국시의 미래를 가늠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심사위원들의 기대 또한 높았다. 심사과정에서 느낀 공통된 소감은 전체적으로 시적 감수성에 어떤 변화가 있다는 점이다. 현실주제에 관심을 두는 사회학적 상상력 보다는 일상적인 소재, 자연친화적인 상상력의 시들이 증대되었다.
우리의 기대만큼은 아니었으나 당선작 ‘헐티재 넘다’를 만날 수 있었음은 다행스러웠다. 예년의 경우 종심에 오르는 작품이 대개 10편을 넘었으나 금년에는 불과 6편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당선작 ‘헐티재 넘다’는 짐짓 전통적인 서정에 기대어 있는 듯하면서도 예사롭지 않은 서정의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3연에서 시상이 심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지만, 시 구조의 견고성과 함께 독창적인 운율은 매우 개성적이며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능숙하여 시인으로서의 성장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부디 정진하여 큰 시인으로 대성하길 빈다.
당선작과 함께 겨룬 작품은 ‘소리의 기원’, ‘불효설계도(不孝設計圖)’, ‘초병’ 등이었다. 특히 ‘소리의 기원’은 시적완성도가 높아 끝까지 심사위원들의 선정을 어렵게 하였으나 ‘침묵’, ‘슬픔’과 같은 시어의 반복이 시상을 단조롭게 한다는 공통된 판단에 따라 아깝게 선외로 밀려나게 되었다. 응모자 여러분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 심사위원 국문학과 손종호 교수(시인), 회계학과 이동규 교수(시인), 영문학과 박영원 교수
[당선소감]
당선을 예견했다면 오만일까. 문학다운 문학을 해보기 위해서 철학을 공부하는 만학도여서 젊은이들의 축제의 장에 끼어들기가 좀 뭣했지만 졸업하기 전에 스스로 기념되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내가 공부하는 철학이 사유에 도움이 되었음을 말하고 싶다.
글을 쓴다는 일은 나를 끝없이 몰아댄다. 나는 잠을 아끼고, 노는 것을 아끼며 읽고 쓴다. 글이 내 생애를 규정지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내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줄 것은 글 밖에 없다는 것을 믿으면서.
글쓰기가 낭만인 시절은 지나갔다. 글쓰기가, 특히 시 쓰기는 치열하게 한번 덤벼보아도 좋을 내 삶의 이정표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읽고, 다니고, 사유하며, 쓴다. 누구나 한번쯤은 해보았을 젊은 날의 문학도가 대학을 기점으로 치열한 삶의 한 방식이 되는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 대학이 시 쓰기의 한 기점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 나는 새로운 전환점에 와 있다. 철학을 공부하고부터 나는 늘 철학과 문학의 경계선에 발을 디딘 채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철학공부가 많을 때는 책상위에 시집을 깔아놓고, 문학 쪽으로 치우친다 싶으면 철학책을 얹어 두었다. 어느 한 쪽도 소홀하고 싶지 않았고,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싶었다.
젊은 학생들의 축제의 장이 되었으면 좋을 충대문학상을 나이 든 만학도가 받아가니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충대문학상이 전국적인 대학생 문인들의 축제의 장이 되기를 바라며 심사위원들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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