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오르다 / 박희준
어느 날 전봇대에 말야
뿌리가 나고, 뿌리가
불타는 노을 속에 잔뿌리 내리면
그 힘찬 뿌리의 행진
도시의 어둠 향해 뻗어가는 힘은 말이지
마치 눈과 귀는 땅속에 박고
물구나무선 나무처럼 거꾸로 서서
전봇대는 발에 핏줄을 발끈 세우겠지
양철지붕 슬레이트 맞붙은 골방
찌릿찌릿 퓨즈를 스스럼없이 지나
쥐똥 얼룩진 천장에도 수액을 쏟아놓겠지
잎사귀를 양껏 벌리고 앉은
작은 키의 명아주잎사귀처럼
어둠 밝히는 불빛은 바로
전봇대가 땅으로부터 빨아댄 양분이야
봐봐, 뿌리는 세상 곳곳 다리 끝으로
배고픈 아이에게 젖을 물리듯
칭얼대는 어둠밖에 둥그런 가슴 내놓고
불빛을 한 모금씩 나눠주는 거겠지
생각해봐 그리하여 마침내 오오
한 그루 전봇대가 꽃봉오리 매다는 것을
그 속에 아직 깨어나지 않은 희망의 말들
환하게 아아 수동*을 밝혀주는 거겠지
뿌리가 나눠준 일용의 양식 좀 보아
산 아래 무성한 건물들이 자라고
우거진 시멘트 숲에도 별이 뜨는 것처럼
우암 기슭에 터지기 시작한 저 불들 좀 보아
* 수동 : 청주시 우암산 기슭에 위치한 달동네
[심사평]
무기물/무생물을 의인화하여 대상에 대한 독창적인 인식을 개진하는 것은 시창작의 오래된 방법론이다. 의인화는 무감하게 잠자는 존재를 일깨워 살아있는 만상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이다. 의인화는 시의 의의 가운데 하나인 존재에 대한 활성적 인식을 통해 넓고 깊은 세계를 발견하는 데 일조한다. 당선작 <우암, 오르다>는 의인화 혹은 활유적 상상력을 흥미롭게 보여준 작품이다. 중심 소재인 “전봇대”에서 “도시의 어둠을 행해 뻗어가는” “힘찬 뿌리의 행진”을 연상하고, 도심에 펼쳐진 전깃불의 풍경을 “우거진 시멘트 숲에도 별이 뜨는 것”과 동일시한 점이 예사롭지 않다. 더구나 전깃불을 “희망의 말들”이라고 함으로써 문명의 이기에 대한 새롭고 포용적인 관점마저 제공하고 있다. 시의 방법과 인식이 마뜩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피아노 숲>도 당선작 못지않은 뛰어난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으나, 시상의 흐름이 다소 불안정한 부분이 있어 아쉬웠다. 이외에 <대나무의 生>, <선풍기>, <벚꽃 보살>, <발인>, <터미널> 등도 일정한 수준을 확보한 수작들이었다. 이들은 조금만 더 가다듬는다면 충분히 당선권에 들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설명적 진술이나 관념적 언어를 줄이고 비유의 구체성과 깊이를 확보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 이번 문학상에 응모해 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훗날을 기다린다.
- 심사위원 손종호(시인,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형권(문학평론가, 국어국문학과 교수)
[당선소감] 불타는 가슴으로
뜨거워지고 싶었습니다. 미적지근하게 데워지는 것이 아닌, 누군가에게 따사로이 스며드는 사람이고 싶었습니다. 시라는 불씨를 만난 후론 줄곧 행복한 시간들뿐이었습니다. 물론 힘들었던 시간들이 간혹 제게 찾아왔지만 시는 제게 어떠한 미사여구도 어울리지 않을 멋진 옷을 재단해주었고 눈부시게 아름다운풍경들은 제 가슴속에 또 다른 세계를 열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핑계들로 그 따스함에 녹아 안일하게 나태해 진 것이 사실입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제 자신에게 더 채찍질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겠습니다.
지금 저는 새하얀 한지 옆, 먹을 갈며 침묵하는 학생에 불과합니다. 시란 저의 멘토가 되어준 제 주변의 곳곳에 작은 풀벌레 소리들, 꽃잎에게서 많은 교훈을 얻어 가슴에서 풀어내 담아낼 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곁에서, 혹은 누군가와 함께 할 때 조용히 스며들고 있을 모든 순간들 속에 스쳐간 모든 인연들이 언제나 저와 함께 하길 바랍니다.
졸업 후 한 번도 제대로 찾아뵙지 못한 명석고등학교 은사님들, 저의 문학의 길의 첫발을 내딛게 해주신 한남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님들과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언제나 함께 해주신 시정신학회 선배님들과 후배들, 기쁘다고, 속상하다고, 아프다고 하면 함께 소주잔을 들어준 친구들. 그리고 저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제가 상을 받을 수 있기까지의 가장 큰 원동력이 돼주신 아버지, 어머니께 이 영광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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