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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 일기 5  / 이용호

-배롱나무에 물들다 

 

그대에게 번져가기 위해서는

햇살의 중력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정착하기 위해 제 한 몸을 던져 버리는

저 목숨들

 

가을엔 누군가 저 집에 와서

처마 밑에 풍경을 여럿 달고 갔다

사방이 어른거리던 저녁 가지에서

안타깝게 떨어지던 고요를

하나 둘 받아내던

나무 한 그루

 

대지를 향해 투신하는 건

차마 열매 맺지 못한 잎새들이지만

한때는 슬프게 일생을 울기만 하던 것들마저

이제는 눈부시게 자라나 있어

바람이 불면 저 풍경들 스스로 불을 밝혀

커다란 별 한 채씩을 세울 것이니

 

봄이 되면

풋풋하게 터져 나올 수많은 가지의 새순들이

한때는 고통의 상류에 정박했을 과거를

눈처럼 툭툭 털어낼 것이다

투명하게 빨아올린 저 먼 미래의 수분들이

뿌리를 거쳐

맨 윗가지의 진실에 닿을 것이니

 

그 날부터

처마 밑에 매달려 있는 풍경들이

더욱 푸르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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