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주에 온 사람 (외 2편)
김성대
그는 슬로 모션으로 왔다
토끼 몇 마리가 그의 고독 주위를 천천히 돌고 있었다
둘째 주에 온 사람
그는 너무 천천히 왔기에
그가 오고 있는 게 아니라
시간이 조금씩 그를 옮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 감기는 시간은
벽화 속을 걷는 것처럼
그의 등 뒤에서 다시 흘렀다
둘째 주는 토끼몰이로 시작되었다
슬로 모션으로 도는 토끼들은 쉽게 몰아졌지만
너무 느리게 돌고 있었기에 우리는 계속 빨랐다
토끼와 함께 토끼 사이에서 우리는
그의 고독 주위를 빙빙 돌아야 했다
멀리서 보면 그의 고독을 숭배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고독의 신도들처럼 둘째 주가 되면
우리는 그를 둘러싸고 그의 고독을 돌았다
그의 고독은 자성을 띠게 되었고
토끼의 귀 모양만으로도 둘째 주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올 건가요?
둘째 주가 지날 때마다 묻곤 했지만
떠날 때도 올 때와 같이 슬로 모션이었기에
우리는 그가 떠나는지도 몰랐다
그는 떠나지도 돌아오지도 않는데
그는 여전히 느렸고 우리는 계속 빨랐기 때문에
그가 떠나고 돌아오는 것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떠나고 돌아오는 것은 우리였는지도
그의 고독에 감기는 시간
아주 느린 토끼들
그는 한 사람이 아닐지도
그의 고독은 하나가 아닐지도 모른다
둘째 주에 온 사람
아무리 천천히 와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고
벽화 속을 사는 것처럼
둘째 주가 되면 우리는 상세해졌다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
함구
함구는 조금씩 우리를 달리게 하는지도 모른다
함구는 조금씩 바깥에서 깊어진다
여기는 속 없는 굴속 같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바깥을 모으는
굴은 지상으로 입을 벌리고
토끼는 반시계 방향으로 굴을 오른다
빨간 눈은 데굴데굴, 먼저 굴러가 있다
있는 힘껏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리뛰기
토끼는 자신의 눈을 보면서 달리는 것이다
자신을 함구하는 빨간 눈이 토끼의 공률이다
아버지랠리
공률 제로의 아버지는 서식지를 오염시키지 않는다
청정 지역이 되어 버린 아버지
일제히 눈을 켜고 빨간 눈을 따라간다
뒤에서 보면 무릎을 공회전하고 있다
이 눈을 좀 꺼 줘
자꾸 늘어나는 눈을 끄고 싶다지만
제로에 제로의 공률을 가속해 천문학적 사십 세에 이른다
반시계 방향의 급커브를 꺾어져서야
오래 비워 두었던 눈을 한번 감아 보는 것이다
다시 빨간 눈이 들어오고 있다
아버지는 한밤중에 그 눈을 따라간다
아랍인 투수 느씸
느씸은 공을 쥐지 않고 던진다
긴 손금으로 공에 대해 기도하고
시간 속에 공을 놓는다
공은 한없이 느리지만 시간의 결을 타고
반시계 방향으로 공회전하기 때문에
아무리 정확한 타자라도 맞출 수 없다
공에 대한 기도가 시간을 휘는 것이다
그러나 공을 받을 사람은 없고
느씸은 자신이 던진 공을 노려보느라 눈이 충혈된다
공은 젖어 가고 느씸의 눈은 폭발하고
빨간 눈이 흩어지고 흩어진 눈들이 느씸을 바라보고 있다
그가 던진 공은 눈먼 그만이 받을 수 있다
납굴증
밤의 소리들이 만질 수 없는 귀를 음각한다
귀 가득 무엇이 이리 무거울까
귀가 뜨거워질 때까지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귀는 말라 가고 우는토끼,
몸 안을 반시계 방향으로 돌고 있다
몸을 얻고 나서 몸 밖으로 나오기가 어려워진
이 밤은 누군가의 눈 속 같군
눈알이 염주가 될 때까지
이 밤을 모으고 있는 눈은 누구의 것인지
우는토끼 속의 우는토끼
돌아보는 눈까지 멈추고
한 벌 귀로 남은 밤
미결
이것은 관점의 문제가 아니다
긴 귀,
피가 미치지 않을 만큼 긴 귀가 결론을 뒤집지는 못했다
눈알을 반시계 방향으로 굴리며
관점을 덜어 내고 있는
그들의 정신만큼 안전한 곳은 없다
없는 귀 가득 명료한 결론들
정신은 없는 귀에 순응하는 것이다
귀가 좁아졌기 때문은 아닐까요?
끊임없이 자신을 듣는 귀 안쪽이 비리다
이름이 너무 길거나 붙일 수 없거나
귀의 기억만으로 그들은 자신을 기를 수 있는 것이다
귀가 없다면 계속 지켜봐야겠지만
눈이 없다면 계속 귀 기울여야겠지만
사자와 형제들
오후 4시의 나는 자꾸 형제가 되는 것이다
사자는 모두 암사자
사자는 모두 다섯 마리
동남아의 소년들은 왜 내게 형제라고 하는지
얘들아, 나도 밥은 차릴 줄 몰라
오후 4시의 냉장고에 뭐가 잇는지 몰라
저 사자, 사자들 좀 데려다 4시 밖으로 몰아 줄래
사자는 모두 암사자
사자는 모두……?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너희는 몇 시를 착시하고 있는 거니
말을 할 때마다 숫자가 늘고 주는
나는 모래알처럼 눈이 나빠지는데
큰 불알 작은 불알 큰 불알 작은 불알
마음은 됐고 몸은 함께해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하며
형제가 형제를 출몰하는
형제가 형제를 꿰매는
그거 너희 몸 맞니
너희의 오감을 나눠 담은
오후 4시는 사자보다 늘어지는데
얘들아, 함께 도시락을 싸자
도시락을 싸서 도시락을 미끼로 형제를 놓고 오자
이것은 꿈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형제들에게 생애라는 먹이를 주자
큰 불알 작은 불알 큰 불알 작은 불알
마음은 됐고 몸은 함께해
너희는 누구의 응급한 욕망을 다니는지
너희의 가장 축축한 곳에서
나, 라는 것에 들린 나, 라는 것들이
사납고 응급하게 사자를 몽정하는데
그것이 몇 마리인지는 세어 보지 않도록 하자
우리가 느는지 주는지 말할 수 없다고 해 두자
사자는 모두 암사자
사자는 얼굴에 묻은 피를 어떻게 닦나
눈알이 무거워지는 먹이를 어떻게 호리나
사자가 시작되는 곳에서
얘들아, 사자가 시작되기 직전에 우리 통째로 마주치자
몇 번을 태어나도 좋지만
우리 계속 하나가 되지는 않은 채
누군가의 생애에서 먼저 이빨 자국을 남기는 미래로
오후 4시의 형제들을 돌려 막자
— 시집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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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대 / 1972년 강원도 인제 출생. 한양대 국문과 졸업, 같은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2005년 《창작과비평》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으로 제29회 〈김수영 문학상〉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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