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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김수영문학상 시 당선작] 서효인 /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외 2편)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평화는 전투적으로 지속되었다. 노르망디에서 시베리아를 지나 인천에 닿기까지, 당신은 얌전한 사람이었다. 검독수리가 보이면 아무 참호에 기어들어가 둥글게 몸을 말았다. 포탄이 떨어지는 반동에 당신은 순한 사람이었다. 늘 10분 정도는 늦게 도착했고, 의무병은 가장 멀리 있었다. 지혈하는 법을 스스로 깨우치며 적혈구의 생김처럼 당신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전투는 강물처럼 이어진다. 통신병은 터지지 않는 전화를 들고 울상이고, 기다리는 팩스는 오지 않는다. 교각을 폭파하며, 다리를 지나던 사람을 헤아리는 당신은 정확한 사람이다. 굉음에 움츠러드는 사지를 애써 달래며 수통에 논물을 채우는 당신은 배운 사람이다. 금연건물에서 모르핀을 허벅지에 찌르는 당신은 인내심 강한 사람이다. 허벅지 안쪽을 훔쳐보며 군가를 부르는 당신은 멋진 사람이다. 노래책을 뒤지며 모든 일을 망각하는 당신은 유머러스한 사람이다. 불침번처럼 불면증에 시달리는 당신은 사람이다. 명령을 기다리며 전쟁의 뒤를 두려워하는 당신은 사람이었다. 백 년이 지나 당신의 평화는 인간적으로, 계속될 것이다. 당신이, 사람이라면.

 

 —《현대시》2011년 9월호

 

 

 

 

 

헤르체고비나 반성문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미안한 마음으로 참호를 만듭니다

 

삽의 끝이 점점 둥그렇게 변합니다

 

삽을 쥔 손가락이 삽이 됩니다

 

손을 달고 있는 팔이 삽이 됩니다

 

팔을 지탱하는 몸통은 진즉에 삽입니다

 

허리가 삽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삽은 존중받을 가치가 없습니다

 

삽이라서 죄송합니다

 

 

참호의 방향은

 

오전 10시 어머니의 심정처럼

 

복잡하고 종잡을 수 없어

 

그냥 밑으로 파고들기로 합니다

 

이삿날의 침대 밑이랄까

 

최후의 5분이랄까

 

인종 청소랄까

 

빵을 위한 새벽의 긴 줄이랄까

 

친절을 가장한 린치랄까

 

군인 앞에 선 추녀 이교도랄까

 

유기견의 성대랄까

 

상상해서 죄송합니다

 

말이 많아 잘못했습니다

 

 

삽이 된 몸이 총자루를 꼭 그러모으고

 

언 땅에 머리를 박습니다

 

차마 아무도 쏠 수가 없고 해서

 

밑으로 열심히 파고들기로 합니다

 

우리의 종교는 삽에게 알몸을 내어주던

 

땅 아래에 있었군요 가만히

 

서로의 바닥을 봅니다

 

 

참호 안에서 우리끼리

 

죄송하다 말하고

 

괜찮다고 대답해봅니다

 

 

  —《시에》2011년 봄호

 

 

 

 

 

마그마

 

   

 

아이티에서 진흙 쿠키를 먹는 아이를 보면서 밥을 굶지 말자. 진흙 같은 마음을 구웠다. 내전이 빈번한 나라처럼 부글부글 끓는다. 라면 같은 그것을 날마다 먹어야 한다. 스스로를 아끼자, 스프 같은 마음을 삼켰다. 한 장의 휴지를 아끼기 위하여 코를 마셨다. 자위를 삼갔다. 물로 닦았다. 성병 걸린 르완다 여자애를 떠올리며 성호를 그었다. 이마에서 배로 손가락을 옮길 때 손을 잘 씻어야지, 불현듯 다짐했다. 지진을 대비한 건물처럼 잘 휘어지는 마음. 변덕을 견디며 체위는 다양해져 갔다. 깨끗한 사람이 되기 위해 거품을 일으켰다. 부글부글 빨리 익었다. 모스크바에서 황산을 뒤집어쓴 베트남 유학생 얘기를 들으며 편식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뭐든 차별은 나쁜 일. 풀과 나뭇잎의 색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쌀국수를 먹을 때는 꼭꼭 씹는 게 중요합니다, 의사는 말했다. 할례 의식 중인 꼬마를 보며 의사의 말을 되씹었다. 꼭꼭 씹어 삼킨 다음엔 양치질을 오래 하리라, 삐친 사람의 입처럼 벌어지지 않던 꼬마의 그곳이 벌어지자 치약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마그마처럼 헛구역질을 하며 괴상한 소리를 내 본다. 뜨거운 다짐들이 피부를 뚫고 폭발한다. 바로 이곳에 서 있다. 들끓는 마음을 가진, 괴물.

 

 

 —시집『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2011 김수영문학상 수상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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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 / 1981년 광주 출생. 전남대 국문과 졸.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명지대 문예창작과 박사과정 재학.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 현재 ‘작란(作亂)’ 동인으로 활동 중.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copyzig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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