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감
김경주
오늘의 구름을 망칠 수 있는 것은 미친 자의 웃음뿐이다
땅강아지 한 마리
앞발을 들고 서서
먼 저녁 하늘을 바라본다
내가 돕는 허공으로
날이 조금 더 어두워진다
귀먹은 새처럼
저녁이 날아오는
사이
인간이 여러 개의 문으로 희화화된다 가령 구멍에서 기어 나와 어두워지는 땅에 몸을 비비기 시작하는 땅강아지가 만드는 작은 그늘은 이름은 잊었지만 내가 알던 입술의 색, 구름을 훌렁훌렁 넘어 밤이 오기 전, 인간의 눈 안쪽으로 넘어가야 하는 노을은 색은 잊었지만 내가 외우던 설치식물의 이름을 닮았다
귀먹은 새들을 돕는 나의 바람이 여기 있다
오늘의 피를 망치는 것은
말라 죽은 땅강아지가 입 밖으로 내놓은 목젖이
여러 개의 그늘로
희미해지는
사이
귀먹은 새가 와서 돕는다
질감 2
귀먹은 새가 와서 돕는다
한밤의 줄넘기를
쥐가 나는 발가락을
빛바랜 알약들을
공벌레를
그녀의 둔부를
정오의 햇빛을
피를 마셔 본 기억을
욕조 속에 죽은 채
누워 있던 사생활을
서식지 없는 문장들을
어젯밤엔 검은 통을 비우고
오늘 아침엔 붉은 물을 깨문다
누가 내다 버렸는지 모를
죽이 골목에 흘러 있는데
외로운 식성을
이야기하는 밤이 있다
언어에 대해
피 맛에 대해
이해를 피하는 표정에 대해
예리한 숲에 대해
문장을 각오하고
앉으면
가장 예리한 세월을
놓치지 않는 새들
있어
즐겁고 캄캄한
복도라는 게
-<시차의 눈을 달랜다> 제 28회 『김수영 문학상』수상 시집-민음사
획(劃) / 김경주
새들이 마주 오는 죽은 새들을 마주칠 때
그들은 서로의 속눈썹을 얼굴로 쓰다듬고 지나간다
바람은 그 높이에선 늘 눈을 감는다
서로 다른 붓털이 만나서 만들어 가는 하나의 획
이상하게 한 획을 긋는 붓에서는 바람 냄새가 난다
붓을 삶는다
삶은 붓은
혈압에 좋다
<1>-거울 속 나이테/김경주-
점점 길어지는 평균수명처럼 왼팔은 자랐다. 점점 귀여워지는 세계에 나는 오른팔을 사용한다. 아무도 부도를 눈치 채지 못하지만 나팔꽃은 까만 활명수를 마신 후 내장을 내놓고 죽고 별들은 교포처럼 자신의 배경을 위심하고 있다. 나에겐 '배우자' 가 필요해! 이렇게 일기에 처음 적었던 건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라고 믿는다. 무언가를 적어두고 믿었던 건 한참 후의 일이지만
결국 나는 '기도' 가 막혀 죽을 것이다
내 거울 옆에는 나무가 한 그루 있고 나무는 자신의 나이테를 거울 안으로 옮기는 중이다
<2>-작은 소설/김경주-
홀수의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골목까지 호각을 불며 뛰어갈 때 첫 페이지에 나오던 사람은 자신의 눈 속에서 마지막 페이지에 등장하는 사람의 눈을 보았고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등장하는 사람은 술집에서 가짜 눈알 한쪽과 첫 페이지를 손에 쥔 채 쫓겨난다
동네에서 시계를 잃어버렸는데 그걸 찾기 위해 배낭을 메고 동네가 아닌 전 세계를 떠도는 자의 눈을 생각해 명백하게 충실하지만 가까스로 빗나가는 수태처럼, 시간은 늘 각오하고 움직이는 것 같아 눈부신 신경질이 아름다워질 나이가 되자 나는 해마다 숲에 가서 버려진 피아노를 두들기다가 손목의 시계를 몰래 숨기고 오는 소년이 되었다 그리고 곧 건반의 방식에 대해 관심이 없어졌지
시계공의 아들을 때려 본 경험에 대해 내가 구두 수선공의 방식으로 이야기할 때
가장 마지막 페이지부터 시작되는 소설이 가장 처음에 닿았을 때
홀수의 아이들이 골목에서 돌아와 호각을 주머니에서 다시 꺼내고 입에 대기 시작한다 되감기처럼
문제는 내 이야기의 중간에 문득 사라진 아이들의 상태랄까?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자가 죽은 병사의 가슴에서 자신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발견했을 때 심정이랄까 그때 가서야
그건 짝수의 아이러니지만 첫 페이지엔 무덤의 묘사만, 마지막 페이지엔 무덤을 여러 개 가진 자의 이야기를 써 보고 싶어
오래 전 문득
개명을 하고 작명집을 나오는 사람의 표정이 궁금한 오후가 있었다
그때 저녁은 빈 교실 칠판에 분필로 북북 흩어놓던 새 때 같은 거
그때 기별은 점집 무녀가 사람들이 버리고 간 죽은 이름들을 하나하나 불러보는 거
오래 전 문득
가계(家系)에 없는 언어로 개명한 후
묵은 이름을 잊기 위해
그 이름을 구름으로 옮기고 있을 때
어느 문장 속에 떠오르던 내 무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무덤의 이름이 끝끝내 생각나지 않았다
그 곡해를
내 피로 흩어진 한 짐승의 동요(童謠)라고 불렀을 때
그때 그 동요(童謠)는
자신을 떠난 한 짐승의 숲이 되었다
저녁에 흰 뼈가 드러나는 바람과 함께
나는 묻힐 것이다 수십 개의 이름으로
살고 있는 단 하나의 곡마단을 생각해 이 이름을 사용하고 잠든 날엔 저녁 무렵에만 깨어나기로 하고, 이 이름을 잊은 날엔 저녁으로만 만들어진 물병을 뒤집어놓고, 발등에 그린 새의 피를 빼내다가 잠들기로 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본 저녁의 계명은
분필로 혼자서 칠판에 북북 흩어놓던 새 때의 분진 같은 거
아무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바닥에 가루로 흘러내린
그 모래의 이름을 이제
나는 쓸 것이다
나의 가계엔 내 피가 안 통하는 구름이 있다
이 저녁은 ‘고래의 눈 속’이다
비가 내리자 하루 종일 어린 딸들의 머리를 땋아 주던 아버지의 견유주의 같은 것에 대해 생각한다 어느 날 어느 곳에도 숨지 못해 눈으로 추방당한 시제는 어느 날 갑자기 눈물이 되어 버린다 이후 비린 세계에만 곧 자신의 눈을 주게 되었는데 그 눈의 진실을 찾기 위해 저녁이 되면 눈을 말리는 사람의 편에 가서 고래는 눕는다 그 저녁은 고래의 눈이다
누군가 내 눈을 만지고 있는 것 같아 눈을 뜰 수 없었던 순간에 대해
매일 누군가의 감은 눈을 만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잠이 들 수 있었던 순간에 대해
사람이 가장 마지막에 꾸는 꿈은 처음 꿈을 꾸었던 날을 기억하기 위해 필요한 꿈일지도 몰라 바깥소식이라는 게 다 그렇지 처음 눈을 그려 넣었던 도화지 속에 저도 몰래 생긴 눈사람처럼
고래의 저녁엔 수많은 화실 속으로 바닷속 음계가 흘러가고 물방울들이 움직여 고래가 될 때까지 아이들의 붓 끝은 출렁거린다
비가 오는 날 백 번 꾼 꿈이 있어 고래의 등에 탄 눈사람……
그 눈사람은 고래를 타는 꿈을 몇 번 꾸었을까
이 저녁은 눈사람이 꾸는 악몽이어서 잠시 물린다
늙은 고래가 눈사람들을 자꾸 뱉어 낸다
염전 / 김경주(1976. 7. 14, 출생. 광주)
죽은 사람을 물가로 질질 끌고 가듯이
염전의 어둠은 온다
섬의 그늘들이 바람에 실려온다
물 안에 스며 있는 물고기들,
흰 눈이 수면에 번지고 있다
폐선의 유리창으로 비치는 물속의 어둠
선실 바닥엔 어린 갈매기들이 웅크렸던 얼룩,
비늘들을 벗고 있는 물의 저녁이 있다
멀리 상갓집 밤불에 구름이 쇄골을 비친다
밀물이 번지는 염전을 보러 오는 눈들은
저녁에 하얗게 증발한다
다친 말에 돌을 놓아
물속에 가라앉히고 온 사람처럼
여기서 화폭이 퍼지고 저 바람이 그려졌으리라
희디흰 물소리, 죽은 자들의 언어 같은,
빛도 닿지 않는 바다 속을 그 소리의 영혼이라 부르면 안 되나
노을이 물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노을 속으로 물이 건너가는 것이다
몇천 년을 물속에서 울렁이던 쓴 빛들을 본다
물의 내장을 본다 <2007년>
[작품해설]
바닷물을 끌어다가 삼일 정도 가둬두면 바닥에 소금 알갱이가 뭉치기 시작한다. 가만히 고인 바닷물이 제 안의 소금을 응결시키고 있는 저녁의 염전을 볼 때면 마음이 쓸쓸해지곤 한다.
스러지는 햇빛, 슬어가는 어둠, 남루한 생의 얼룩, 비늘 같은 욕망의 흔적, 서늘한 죽음의 그늘… 흩어져 있던 그리 어두컴컴한 것들이 가라앉곤 했던가.흰 눈이 내리는가 싶더니 상갓집 밤불처럼 노을이 내리는 염전. 그곳에서 시인은 소금의 소리, '죽은 자들의 언어'와 같은 그 '희디흰 물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소금의 빛, 그 '몇천 년을 물속에서 울렁이던 쓴 빛'을 본다.
소금의 근원인 '빛도 닿지 않는 바다 속'은 모든 생명의 시원이자 종말이다. 그러니까 존재의 끝과 시작을 듣고 보는 셈이다. 우리의 내장이 이리 어둡고 이리 쓴 이유일 것이다. 물의 내장이 그러하고, 생의 내장이 그러한 것처럼.노을 속으로 바닷물이 건너는 염전에 서면, 죽음과 소멸을 견뎌내는 법을 배우는 것만 같다.
실리고, 스미고, 비치고, 번지고, 가라앉고, 퍼지는 술어의 움직임 속에서 하얗게 증발하는 허공 속 흰 눈같이. 아니 깊은 바다 속 소리의 영혼같이, 아니 아니 온갖 사랑이 밀려왔다 밀려간 사람 속 쓰디쓴 내장같이. "나 없는 변방에서 나오는 그 시간이 지금 내 영혼이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부재중')라는 그의 시 구절이 떠오른다.김경주(32) 시인은 젊다.
2003년에 등단하여 2007년에 첫 시집을 냈으니 시력 또한 젊다. 한 시인은 "이 무시무시한 시인의 등장은 한국 문학의 축복이자 저주다"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스무 살 이후, 이 대학 저 대학에서 이 공부 저 공부 하며 밥벌이를 위해 대필작가, 학원강사, 광고일, '야설' 작가까지 했다는 기이한 이력이 인상적이었던가. 수려한 외모에 여행, 사진, 에세이, 영화, 연극을 넘나드는 전방위적 재능이 또 신인류(!)적이었던가. [정끝별 시인]
- 출생 1976년 7월 14일, 광주
- 데뷔 2003년 '대한매일 신춘문예' 등단
- 학력 서강대학교 철학과
- 경력 청소년 계간지 '풋' 편집위원
- 수상 2009년 제28회 김수영문학상
2005년 대산창작기금 수여
김경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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