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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화법 / 하기정

 

구름은 여태 제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어

형상은 당신 머릿속에나 있지

내가 만들 수 있는 건 물방울이 아니야, 보다 가볍지

당신의 어깨를 적실 수도

당신의 입가를 핥을 수도 있지

 

그러니 나를 구름이라 이름 짓는 건 아주 치명적이지

네가 구름이라고 부르는 것들, 네가

토끼, 라고 부르면 난 하마처럼 하품을 해 네가

고양이, 라고 부르면 난 호랑이처럼 포효하지 네가

의자, 라고 부른다면 금세 침대를 만들어 줄 수도 있어

만지면 폭삭 꺼지는 먼지버섯, 그러니 나를

버섯이라 불러도 좋아

형상은 당신 눈 속에나 있지

그러니S라인 B라인은 네 이름

 

무대가 아닌 곳에서만 춤을 출거야

내 음악은 내 귀로만 흘러들어 언제든지

다시 태어날 수 있어 나를

이해하려 시도한다면 그것은 서툰 오해

나를 만지려든다는 건 아주 절망적이야

롤러코스터를 생각한다면 모르지

추락은 오로지 빗물, 눈물

 

행여 구름을 담아서 팔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당신의 시선을 구부리는 일

악어, 라고 하면 도마뱀이 되어줄래?

고래, 라고 하면 돛단배가 되어줄래?

나에게 나를 너, 라고 불러줄래?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밤의 귀 낮의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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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더 부지런히 나아갈 터"

오리나무에 대한 기억이 있다. 유년의 뜰에 서 있던, 어쩌다 그 나무가 숲으로부터 멀리 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 나무에 고삐를 묶은 채 둘레를 빙빙 돌곤 했다. 심심해지면 그 오리나무의 체온은 얼마나 될까, 귀에 대고 재어 본 적이 있다. 보잘 것 없고 소용 없는 작은 열매를 연민했던 지난날로부터, 그 나무로부터 이제 아주 멀리 와 버렸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를 쓴다. '나'로부터 벗어나기를, 좀 멀리 떨어져 버리기 위해, 고삐를 좀 풀어버리기 위해. 하지만 나는 여전히 둘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나의 시어들은 육화된 말들이 아니라 휘발되는 말들이다. 언어들이 대립되어 저의 존재를 끊임없이 새롭게 피워내길 바랄 뿐이다. 그것은 물음의 형식이며 오래 전부터 풀지 못한 답이 없는 물음이어서 나의 '시쓰기'는 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언어이며 동정이며 연민이다.

웅크리고만 있던 나의 언어들을 세상 밖으로 소통의 길을 터 주신 김명인, 이하석 두 분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시의 자장 안으로 끌어주시고 중심 에너지가 되어 주시는 안도현 교수님께 감사라는 말 말고 뭐가 있을까, 역시 시의 언어가 아니고서는 드릴 말씀이 없다. 열정이 넘치는 우석대 대학원 문창과 교수님들께도 고개 숙여 인사드린다. 은사님이신 김혜원 선생님, 대학원생 문우들께도 고맙다는 말씀드린다.

샘물이 마르지 않으려면 퍼올리기를 게을리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에게, 더욱 간절해지기를.

 

 

 

 

[심사평] "수사의 굴레 벗어버리려는 시인 의지 돋보여"

 

예심에서 걸러진 스무 명, 100여편의 작품들은 그 나름대로 시의 미학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것은 '오르골' '살구알락나방 애벌레' '달의 족적' '몽골파오' 등을 응모한 네 분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거듭 논의된 여러 응모작의 중심에서 줄곧 거론되었던 것은 '몽골파오' 외 10여편을 함께 묶어 제출한 응모자의 시편이었다. 그의 응모 작품들은 그만큼 뛰어나 보였다. 그리하여 심사는 자연스럽게 이 응모자의 여러 시편 속에서 당선작 한 편을 골라내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의 응모작 중 어떤 작품은 말이 낭비되는 수다스러움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요즈음의 신인들에게서 흔히 읽히는 억지스러운 상상력이 살펴지지 않았다. 그의 시가 작위의 산물이 아니라, 가슴으로 익힌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는 개성적인 시의 문법뿐만 아니라 발견의 묘미도 함께 터득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 사로잡혀 호명되는 낯익은 사물들은 저마다의 자리에 새롭게 정돈되면서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인다.

이 응모자의 여러 시편 중에서 심사위원들이 합의해낸 당선작은 '구름의 화법'이었다.

이 시는 표면적으로는 변화무쌍한 구름의 일상을 노래하고 있지만, 섬세하게 살펴보면 언어적 소비에 대한 반감을 바탕에 깔아놓는 등 시인의 상상력이 사물의 운신과 사유의 폭을 넓혀준다. 이는 수사의 굴레마저 벗어버리려는 시인의 의지가 시적 자유를 온축(蘊蓄)해 보인 경우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일상의 공간 안에서 응고되기를 거부하는 이 미정형의 시선은 독자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심사위원 김명인, 이하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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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둥근 이유 / 하기정

 

 

안골 사거리 우회전 공터 지나 높은 오르막 길을

유모차 한 대 오신다

팔월의 햇살 아래 불 지핀 아궁이 속 같은 열기가 아스팔트 위를 어룽거리는데

유모차엔 아기 대신 노끈으로 친친 동여 맨 삼양라면 박스 새우깡 박스 옥시크린 박스

내용물 없는 빈 상자가 삐죽 튀어 나왔다

노파가 유모차에 걸어 놓은 간판처럼

 

아슬아슬 고갯길이 한참이다

지구는 둥글지, 자꾸 걸어 나가면

지구가 둥근 이유는 멀리 수평선 돛단배를 보면 알지

돛단배는 돛부터 보여주다 차츰 배 전체가 드러나지

 

노파의 등과 아스팔트 길이 쌍곡선이다

저 속도로 가다보면 빈 종이상자의 무게만큼

라면 한 박스라도 바꿀 수 있을까

나아간다는 것은 제자리로 돌아오는 일

빈 상자 묶음은 들쑥날쑥, 뒤틀린 판게아처럼

노파의 손은 밀려난 대륙의 끝자락을 잡고 있다

 

지구는 둥글지

굴러도 항상 그 자라 한 바퀴 돌아 나와도 제자리 걸음

바다에 나가 돛의 머리를 보지 않아도 알지, 지구가 둥근 이유를

 

대륙과 대륙이 멀다

닻을 내릴 수 없다

 

 

 

 

 

밤의 귀 낮의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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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2010년으로 30주년을 맞는 5.18문학작품의 외연을 어디까지 넓힐 것이냐는 주최자나 응모자나 공통된 고민 중의 하나일 것이다. 폭넓게 5월 정신의 연장이나 확대를 작용시키자면 그 한계가 모호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 어떤 주제이든 과연 5.18과 연관성을 가지며 과연 절실성은 있는가가 항상 심사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각설하고, 경제적 난국 탓인지 유난히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 시들이 많았다. 또한 5.18문제를 직간접적으로 다룬 작품들이 적지 아니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생경한 구호성 목소리가 섞여있거나 혹은 지나치게 주눅 들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문학)는 허위를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허위를 말하는 것조차 허위가 아닌지 되물어야 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당선작 지구가 둥근 이유는 작품의 완성도와 사회의식이랄까, 현상의 묘사나 고발에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하려는 의지를 높게 샀다. 특히 민중적인 인물들을 내세워 감칠맛 나는 넋두리로 시를 노련하게 이끌어가는 다른 시들과 달라 현대적이고 이지적인 높게 샀다.

 

끝으로 당선은 되지 못했으나 끝까지 고민한 작품은 들창 밖 모시풀, 신기동리 가는 길이었다. 매우 잘 쓴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익숙하다는 느낌이 망설이게 한 것은, 순전히 심사위원의 취향일 수 있는 만큼 다른 지면을 통해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임동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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