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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루와 나나 / 김희준 

 

 

 

 

 

가위를 쥐어봐요
                                                        우리는 유전자가 편집된 채 태어난 최초의 쌍둥이
                                                        에이즈에 걸리지 않는 미래형 맞춤 아기예요
                                                        말랑한 유리를 만지는 모순된 인류 미래의 심장입니다
                                                        크리스퍼 베이비(Crisper Baby)
                                                        바코드를 파란 엉덩이에 붙여도 좋겠습니다

 

 

어쩌다가 만들어졌어 루루는 득을 따지지만 나나는 우연이라 하지 8월은 어쩌다가 포도에게 빚을

져서는,여름을 담보한 과일이 속절없이 투명해져 가

 
루루, 무례한 씨를 가졌구나 당도 높은 태양이 바구니에서 후숙되는 중이야 다음 생은 입 없는 하

루살이가 좋겠어 평생 말을 연습하다가 끝내 소리할 수 없는 계절을 삼키다가 당신 이름이 유언이

되는 비루한 알몸이면 좋겠어

 
나나, 과일을 조심해야 해 파란 혈맥을 가진 여름을 함부로 만지는 건 위험해 태양이 파과하고 있어

바구니에 죽은 열기

가 번지고,

 
이리 와, 퍼즐을 맞추자
비어버린 부분을 맞춘 조각을 쏟아버렸지 이건 누가 잘라둔 장마일까

 
루루, 어쩌다가 태어났더라? 네가 죽는 걸 봐야겠어
여름이 오려둔 절기가 내리고 있어 바구니가 멍이 들고 우리는 금방 슬퍼지겠지
물컹한 태양을 만지다 보면 캄캄해지는 한쪽을 어떻게 해야 할까
포도 넝쿨에 매달린 우리는 알맹이만큼 다양한 안색이야

 
나나, 사랑스러운 말을 연습하자 우리가 우리라는 걸 알게 된 건 언제였더라 아파본 적 없는 루루가

아픔을 배우게 된 건 또 언제였지

 
넝쿨이 서걱거리는 저녁

 
정교한 탯줄을 빨아들이는 우리의 다음 생

 
나가자 나나, 돌아와 루루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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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희준이 자기 행성으로 돌아간 뒤 여러 일이 있었습니다. 크고 작은 일에서 문득문득 희준을 만납니다. 이렇게 아무데서나 희준이 보이니 이제 희준은 시공간을 자유롭게 다니는 몸을 가졌나 봅니다. 아득한 시간을 건너고 있는 제게 희준은 언제나 말합니다. 엄마,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그 말을 놓칠까 저는 자꾸 말에 기댑니다.

 

?루루와 나나?를 발표하고 바로 떠났으니 희준은 지면에 실린 글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희준에게 좋은 기별이 되어 닿았을 겁니다. 수상 소식을 들은 희준은 어떠할까 생각합니다. 아마 많이 웃을 겁니다. 웃음이 많은 아이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겁니다.

 

선생님 시가 너무 좋아요. 매일 절절 생각해요. 제가 많이 사랑해요.

 

또 이렇게 말할 겁니다.

많이 모자란 제게 큰 상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더 열심히. . 하겠습니다. 라고요.

 

이른 나이에 자기 행성으로 떠난 아이를 깊이 품어주신 시산맥과 심사위원님께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김희준을 지구별에 오래 붙들어주신 모든 분께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 김희준 엄마 강재남 두손

 

 

 

 

 

 

   빗방울 랩소디 / 진혜진

 

 

   우산이 감옥이 될 때

 

  예고도 없이 소나기가 쏟아진다 손잡이는 피하거나 피하지 못할 것에

잡혀있다

  비를 펼치면 우산이 되지만 우산을 펼치면 감옥

 

  귀고리 목걸이 발찌 팔찌에 수감된 몸, 쇠창살 소리가 난다

  소나기 속의 소나기 나만 흠뻑 젖는다

 

  보도블록 위에서 이질감이 된 빗방울, 절반은 나의 울음 나머진 땅의 심

장에 커다란 구멍을 낼 것이다

 

  버스정류장 앞 넘치는 웅덩이가 막차를 기다리는 새벽 2시의 속수무책

과 만나 서로의 발목을 확인한다

 

  빗방울 여러분!

  심장이 없고 웃기만 하는 물의 가면을 벗기시겠습니까

  젖어서 만신창이가 된 표정을 바라만 보아도 되겠습니까

 

  어떤 상실은 끝보다 시작이 더 아프다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끝이 날까

 

  검은 우산과 정차하지 않는 버스 바퀴와 폭우가 만들어 내는 피날레

 

  밑줄을 긋듯 질주하는 차가 나를 후경에 밀치고 사라질 때

 

  젖어서 죄가 되는 빗방울

  용서가 잠겨있는 빗방울

 

  우산은 비를 따라 용서 바깥으로 떠난다

 

 

 

 

포도에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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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산맥작품상은 매호 시산맥시회 회원들이 추천한다. 2020년 여름호부터 2021년 봄호에 게재된 작품 중 제11회 시산맥작품상 후보에 오른 작품은 21편이었다. 그중 1차 예심을 통과한 작품은 16, 2차 예심을 통과한 작품은 8편이었다. 본심을 맡은 강 수 시인과 김 륭 시인이 각각 2편의 작품을 최종심에 올렸으나 수상작을 선정하지 못해 시산맥작품상 기 수상자인 최정란 시인이 다시 작품을 추천, 다음의 3편을 최종 논의하였다.

 

이인주 여우를 위로함

진혜진 빗방울 랩소디

김희준 루루와 나나

 

이번 최종 예심에 오른 시들은 두 개의 전혀 다른 축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하나는 은유의 축을 기반에 둔 시들이고, 다른 하나는 환유의 축에 토대를 둔 시들이다. 은유의 축에 가까운 시들은 의미(메시지) 전달이 중심이 되고, 화자의 정서와 주제 의식이 비교적 명료하게 전달된다. 반면에 환유의 축에 가까운 시들은 시인의 무의식이나 자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파편화된 이미지와 초현실주의적 사유의 경향을 보여준다. 그동안 현대시의 흐름은 <은유적인 축>에서 벗어나 <환유적인 축>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왔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인의 정신적 삶의 세계를 반영하기에는 <환유적 이미지>가 더 적합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새로움>이라는 미학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유적인 시>는 조금 낡고 고루한 느낌이 들고, <환유적인 시>는 그 표현상의 특징으로 인해 더 새롭고 참신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시의 본령이 낯설게 하기를 통한 인식의 새로움을 환기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이번에 최종 본심에 오른 시인들은 자신들만의 개성적인 방법으로 그러한 미학적 오체투지를 하고 있으며, 나름대로 성과를 달성하고 있다.

 

최종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빗방울 랩소디> <루루와 나나> <여우를 위로함>이다. 이 중에서 환유적 축에 가까운 시들은 <빗방울 랩소디> <루루와 나나>이고 반면에 이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은유적 축에 가까운 시는 <여우를 위로함>이다.

 

<여우를 위로함>여우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한 상상력의 변주를 통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이 비교적 선명하게 잘 드러나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우라는 기호의 의미를 다양하게 변주하면서, 이러한 변주를 상상력의 차원으로 확장하여, 화자의 삶에 대한 고뇌와 트라우마를 이미지화함으로써 독자의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있다. 이 시의 미덕은 각각의 이미지들이 매끄럽게 연결되고 이어지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여우로 표상되는 여성성에 대한 문제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한다는 점에 있다.

 

<빗방울 랩소디> <루루와 나나> 두 작품은 시어들이 기호화되어 있고, 이미지들이 파편화되어 있다. 시어와 시어 사이,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의미 간극을 최대로 벌려 놓았기 때문에, 독자의 상상력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 시들은 파편화된 이미지들을 통하여 독자를 화자의 내면 속으로 이끈다. 거기서 우리는 시인이 현재 처해 있는 실존적 문제에 대해 <낯선 깨달음>을 얻고, 우리들 자신의 실존적 문제로 확산시키며 공감대를 형성해 나간다.

 

<빗방울 랩소디>소나기 속의 소나기 나만 흠뻑 젖는다와 같이 독자의 감성을 끌어들이는 흡입력 있는 이미지들이 매력적인 시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소나기는 우리가 아는 소나기가 아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소나기속에 감춰져 있는 낯선 소나기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시 속에 형상화되고 있는 빗방울도 낯선 빗방울이다. 시인은 그것의 시니피에(기의)죄의식으로 전환시킨다. 그 결과 화자를 적시고, 밤을 적시는 비는 를 환기시키고, ‘죄의식을 강화시키는 촉매제가 된다. 아울러 온 세상은 로 젖어 버린다. ‘우산하나로 어찌 그 죄를 피할 수 있으며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죄의식에 침윤된 화자는 스스로 죄수가 되고, 그 순간 세상은 감옥이 된다. 화자가 입은 옷은 죄수복이 되고, 화자가 치장한 액세서리는 수갑이 된다. 죄인으로서의 삶. 이러한 실존의식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을 환기해 준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소나기빗방울이라는 이미지를 끈기 있게 천착해나가는 시정신과 주제의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루루와 나나>에 제시되는 이미지와 시어들은 죽음과 공포라는 시인의 무의식/자의식을 구체화하는 데 집중한다. ‘루루나나는 화자의 분열된 자아로 읽히며, 그것의 통합을 추구하는 시인의 욕망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이원적/대립적인 상상력을 통해 방황하는 시인의 내적/무의식적 갈등을 드러내면서, 끝까지 갈망하지만 성취하지 못하는 자아의 합일로 인한 고통을 처절하게 형상화해 내고 있다. 마지막 부분의 나가자 나나, 돌아와 루루는 그러한 사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다.

 

나나루루는 엇박자로 움직이고 있으며, 영원히 같은 공간에 존재할 수 없는 실존의 간극을 형상화해주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영원히 완성된 자아로 합일할 수 없는 현대인의 실존적 고통을 잘 그려내고 있는 수작이다.

 

이런 각자의 특성을 가진 3편의 작품을 가지고 심사자들은 오랫동안 고심을 하였다. 3편 다 수상작으로 충분하였으나, 이번 수상작으로는 환유적인 의미망을 잘 표출한 <빗방울 랩소디><루루와 나나>를 공동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수상자에게는 축하의 말을 아쉽게 탈락한 분께는 다음을 기약해 본다.

 

심사위원 강수(시인. ), 김륭(시인), 최정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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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음이 길어질 때 / 진혜진

 

 

포도에서 만납시다

머리와 어깨를 맞댄

돌담을 돌면 포도밭이 있다

맛이고 흔적인

우리의 간격은 포도송이로 옮겨가고

담장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처럼

지지대를 타고 몸을 쌓는다

씨를 품는다

우리는 서로 기댄 채 손끝이 뜨거워지고

포도는 오래 매달릴수록 그늘의 맛이 깊어진다

입꼬리 올린 갈림길마다 가위눌린 꿈에서

쓴맛이 돈다

포도는 입맞춤으로 열리고 선택으로 흩어진다

바둑판 위에서 반집을 지키는

흑백의 돌처럼

우리는 내려올 수 없는 온도

피가 둥글어진다

언젠가 통화음이 길어졌을 때

그것이 마지막 고별이라는 걸 알았고

덩굴인 엄마가 욱신거려

그해 포도 씨는 자꾸만 씹혔다

깨물어 버릴까

한 팔이 눌리고 한 다리가 불면인 잠버릇이 생긴 곳

자유로를 지나 수목장 가는 길 포도 알맹이를 삼킨다

하나의 맛이 두 개의 흔적을 낸다

단단히 쌓은 탑을 나는 한 알 한 알 허물고 있다

탑이 물컹하다

 

 

 

 

2017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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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이제 시와 오롯이 동거하기로”

 

마음을 비워야지 하면 욕심이 찼다. 욕심을 비워야지 하면 적막이 찼다. 시의 여정이 그러했다. 이번에는 그래 이번에는…

 

언제부턴가 도서관 계단을 세는 버릇이 생겼다. 송이에서 포도를 한 알 두 알 빼 먹듯이.

 

통화음이 길어질 때 포도송이에서 저를 떼어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광주일보 신문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 상상력을 지지해주시고 충고와 격려 해주신 분들 고맙습니다.

 

그리고 얼굴 모르는 구성원이 되어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경희사이버대 교수님들께도 감사드리며 나의 당선을 기원하며 촛불을 밝혀주신 분들과, 마음을 모아준 친구 시인들, 그리고 스터디 선배님들, 일일이 이름 거론하지 않아도 제 마음 속에 각인 되어 있는 것 아시죠?

 

저녁 무렵에 걸려온 전화 한 통화. “여보세요 혹시 진혜진씨 아닌가요?”

 

이제 시와 오롯이 동거하기로 한다.

 

 

 

 

포도에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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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만남과 헤어짐의 진부한 사건 포도의 이미지로 생기를 얻다”

 

시는 가끔 속인다. 속이는 주체는 시 자체다. 쓰는 사람도 속이는 줄 모르고 속이고, 읽는 사람도 속는 줄 모르고 속는다. 시가 때로는 쓰는 사람을 초과하고 읽는 사람을 홀릴 때가 있다는 것, 그것이 시의 위력이자 위험이다. 그러니 단 한 편의 수작만으로는 시인을 믿을 수가 없다. 그것이 시인이 아니라 시 자체의 능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상현 씨의 ‘기다리는 여자’ 외 5편은 체험과 관찰에서 서정적 순간들을 이끌어내는 기예가 능숙했다. 이봄 씨의 ‘빙하기의 식사’ 외 2편은 부드러운 묘사와 딱딱한 진술을 교직하는 능력이 강점이었다. 이서영 씨의 ‘암전’ 외 4편과 이재민 씨의 ‘두근두근 동물원’ 외 4편은 삶의 내막을 투시하는 시선이 깊다는 점이 닮았다. 전자의 ‘10년 후’와 후자의 ‘간지’ 같은 작품은 여느 앤솔로지에 포함되어도 손색없을 수작이었다. 장수연 씨의 ‘나무의 표정을 빌리다’ 외 3편은 화술의 나이가 젊은데 특히 ‘비닐하우스’의 발랄한 상상력이 인상적이었다.

 

이분들에게서는 가장 좋은 시 한 편을 선뜻 골라낼 수 있었다. 그러나 김기숙 씨의 ‘선잠’ 외 3편과 진혜진 씨의 ‘먼지의 결혼식’ 외 4편의 경우는 그럴 수가 없었다. 김기숙 씨는 감정을 냉철하게 통제하고 정교한 언어의 구조물을 만드는 일에 실패가 없었고, 진혜진 씨의 작품들 역시 발상과 화술에서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다. 이 점이 오히려 두 사람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이중 진혜진 씨의 작품, 특히 ‘통화음이 길어질 때’가 선택된 것은 심사자의 취향이 개입한 결과다.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진부한 사건이 포도의 이미지로 생기를 얻는 장면들이 아름다웠다. 진혜진 씨에게 보내는 축하만큼의 진심을, 김기숙 씨에게 보내는 위로에도 담고 싶다.

 

심사위원 신형철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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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나무 상영관 / 진혜진

 

 

신호등은 봄을 켠다

길 하나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두 그루

이 도시에 앵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은 길목마다 앵두나무를 심었다

 

우듬지에 앵두가 켜지는 순간, 몇 갈래의 속도가 생긴다

몇 분 간격으로 익어 터지는 앵두

비와 졸음 사이에 짓무른 앵두

붉은 앵두는 금지된 몸에서만 터져 나온다

한 쪽 눈을 질끈 감는 사이

길바닥에 누운 흰 사다리를 오른다

아이가 손을 들고 소나기 그친 사이를 뛰어간다

할머니는 한 칸 한 칸 신호음 사이를 건너고 있다

사람들이 마중과 배웅으로

사다리를 건너면 앵두의 색깔이 바뀐다

 

빨강을 물고 순식간에 달려가는 계절이 다른 계절의 입술에 물리듯

앵두나무 뿌리는 발설되지 않은 소문까지 뻗어있다

 

앵두가 지고 나면 초록 이파리

여름 정원에 비비새 울음으로 남아

그 울음 끝으로 떨어질 이파리로 남아

세를 불리는 앵두나무

공중으로 발을 들어 올린다

언제라도 짧은 치마를 입듯 가벼운 신호음

떠나갈 사람과 돌아올 사람의 안부가 위태로워

처음 같은 얼굴로

막을 내리지 못하는 봄이 있다

 

 

 

 

포도에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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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아픔마저 아름답도록 시 그릴 것

 

나의 사거리에도 앵두가 켜집니다. 자주 정체되고 시도 때도 없이 클랙슨을 눌러 댔습니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빈손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올해도 그냥 넘어가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가로수 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봄이지만 우리 도시, 신호등의 봄은 봄이 아니었습니다. 눈이 아프도록 세상을 들여다보면 이미지가 펼쳐진다고 했습니다. 몇 개의 방향을 가진 사거리입니다. 저마다의 역할로 떠나가고 돌아와도 아무도 안부를 묻지 않는 횡단보도 앞에서 나는 그들의 안부를 묻는 배역을 담당하고자 합니다. 누군가의 발걸음에 젖어 있는 불안, 아픔, 무서움, 그리고 절규까지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될 수 있도록 시를 그리겠습니다. 비록 멈칫거리는 붓질일지라도.

 

어둠 속에서 촛불을 밝혀주신 김영남 선생님, 늘 독특한 상상력을 갈구하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막막한 가로수 길에서 제 시의 원근법을 쥐여주신 심사위원님들과 경남신문사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당선을 기원하며 마음을 모아주신 분들에게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신비디움 꽃대의 행운을 전송해준 친구 김분홍 시인, 시를 사모하는 김유진 시인에게 하루 9할의 시간이 어서 시와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늘 격려와 충고 아끼지 않은 스터디 선배님들 고맙습니다. 내가 시로 좌절하고 시로 서러워할 때 단 한 번도 시를 탓하지 않고 격려해주며 내 편이 돼준 남편 신용찬씨, 아들 채훈, 그리고 언니들, 오빠, 저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모든 분들을 사랑합니다. 그럼 제 배역에 어울리는 막을 올리렵니다.

 

 

 

 

 

[심사평] 활물의 비유 개성있게 선보여

 

 

우리 선자들에게 넘어온 시는 총 786편이었다. 올해는 태작들도 많았던 반면 일정한 수준으로 고른 기량을 가진 분들도 골고루 응모해 와 문학의 위기와 위축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식지 않는 문학에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응모작들의 주된 주조는 경기부진과 어려운 세태, 사회 혼란 탓인지, 거시세계보다는 미시세계에 가까웠다. 자영업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는 시편들도 여럿 있었고, 일상의 소품들과 거리 풍경, 자연, 가족간의 관계에 대한 해석들이 많았다.

 

마지막까지 선자들에 남겨진 작품들은 열 분이다. 열 분의 작품들 중 우리 선자들의 의견이 쉽게 일치한 시 당선작은 진혜진의 ‘앵두나무 상영관’이었다. 진혜진은 당선작 외에 함께 투고한 시편들에서도 당선작에 버금가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미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시집 한 권 정도 분량의 작품을 가졌음직한 자유로움과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신춘문예 출신 시인들이 당선 후 일 년 만에 대부분 사라지는 상황에서 시를 오래 쓸 것만 같은 신인을 만나 기뻤다. ‘앵두나무 상영관’은 앵두를 거리의 빛에 대비해 사람의 내면과 일치시키는 활물의 비유를 개성있게 선보인 작품이다. 앞으로 쓰는 자로서의 강건한 정신의 높이를 획득해가는 큰 시인으로 대성하기를 바란다.

 

당선작은 되지 못했지만, ‘버클’의 이희라, ‘삼각김밥’의 장시은, ‘온순한 짐승을 따라가다’의 이규정, ‘현호색 풀밭’의 김신유 등이 신선하고 재기발랄한 시적 세계를 선보였으나, 편차를 보여 끝까지 선자들을 아쉽게 했으며, ‘악성바이러스 치료하기’의 김혜강, ‘사막의 저녁’의 이선유, ‘이대 팔’의 정연희, ‘잡초의 발견’의 최수안, ‘합석’의 채선정 등도 풍부한 시적 기량을 갖추고 있으나, 뒷심이 부족해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분들도 꾸준히 정진하면, 머지않아 지면에 등장해 좋은 시인으로서의 기량을 충분히 선보일 자질을 갖추고 있으므로 다음을 기약한다.

 

- 심사위원 : 김언희·성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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