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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 박수봉

 

 

빗속에 집이 잠겨있다

태풍이 온 나라를 휩쓸었지만 빈집은

날개를 접고 흔들리지 않았다

식구들은 모두 전주로 떠나버리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빈집

퇴행성관절염에 어깨 한쪽이 내려앉은 채

기울어 가는 생을 붙들고 있다

빈집의 담장을 지나다보면 허옇게 바랜 집이

손을 저으며 말을 걸어온다

평생 걸어온 길의 기울기와 그 길로 져 날랐던

가난과 고단함에 대해서 빈집은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빈 방에다 새긴다

행간마다 피어나는 유폐의 점자들

마당 우물터로 목마른 잡초들이 조촘조촘 들어서고

버리고 간 장독대엔 혼잣말이 웅얼웅얼 발효 중이다

죽은 참가죽나무에 앉아 종일 귓바퀴를 쪼아대던

새소리도 날아가고 귀가를 서두르는 골목

일몰의 욕조에 몸을 담근 빈집이

미지근한 어둠으로 눈을 닦는다

종일 입술을 다문 대문을 빈집은

몇 번이고 눈에 힘을 주어 밀어 보지만

끝내 대문 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마당 깊은 곳까지 어둠이 차오르면 빈집은

눈을 들어 별자리를 더듬는다

식구들이 몰려 간 서남쪽 하늘

별이 기울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한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들쥐가

들어앉아 새끼를 낳았다

이따금 달빛이 새끼들의 털을 핥아주고 갔다

들쥐는 빈집의 뒷다리를 갉아 먹으며 자라고

집은 제자리에서 우물처럼 늙어간다

빈집의 늑막 아래로 어둠이 점점 차오른다

 

 

 

 

 

[당선소감] “시의 길은 말없이 인내하며 살아가는 삶의 뒷모습 따라가는 것

 

보라색 공원관리 조끼를 입은 사내들이 나무 줄기를 자르고 있었습니다. 나무는 지난 계절을 잃고 바람을 흘리며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그런 나무 곁에서 문득 내가 줄기 잘린 나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퍼렇게 뻗어 가는 시의 줄기를 잃고 자꾸 움츠러드는 제 모습이 나무를 닮았다며 허전함의 지평을 늘이고 있을 때 당선 통보를 받았습니다.

 

전화를 끊고, 다시 수변 공원 나무들을 보러 나섰습니다. 매서운 한파에 뭉툭하게 가지가 잘린 나무들이 즐비하게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나무의 잘린 부분을 어루만지면서 저는 제 시가 가야할 길을 더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잘리고, 꺾이고, 찢겨가면서도 말없이 인내하며 살아가는 삶의 뒷모습을 따라가는 것이 시의 길임을 어렴풋이 느끼면서 천천히 공원을 걸었습니다.

 

저의 움츠러든 손목에 힘을 실어주신 심사위원들께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름이 더욱 무거워졌음을 염두에 두고 열심히 쓰겠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최종심에서 낙선하고 우울해 할 때 낙선주라며 담근 술을 따라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던 오산의 문우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를 사랑하는, 제가 사랑하는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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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주관적 정서의 객관화, 소통 잊지 않은 작품"

 

전주에 펑펑 함박눈이 쏟아지겠다고 예보된 날 신문사로부터 본심에 올라온 14편의 시를 전달받았다. 이름을 지운 응모자의 시편들은 자아와 세계의 화해 불가능을 확신하는 비규범성이나 이질적인 것들의 혼돈 등을 과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혼종적 욕망이 들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금의 시단 풍토와 다르게 뜻하는 바가 분명했고 시어들 개개의 인상과 소리 맵시가 어울려 새 형상을 짓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응모작 중에서 <괄호 밖의 사람들>, <빈집>, <편의점 라이프>, <오래 머무르는 풍경>, <바람의 건축> 등의 작품을 오래 들여다봤다. <괄호 밖의 사람들>괄호 안의 사람들을 궁금하게 함과 동시에 모래가 환기하는 삶의 황폐성을 떠올리도록 하고, <오래 머무르는 풍경>에 적힌 경작금지라는 팻말누군가는 스며들고 또 누군가는 닮아간다라는 구절은 시 읽는 즐거움을 주었다. <편의점 라이프><바람의 건축>도 심사위원들의 시선을 끌었다.

 

숙고 끝에 <빈집>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태풍을 피해서 모두가 떠난 빈집, 삶의 내력과 유폐된 시간을 감당하는 의인화는 고단한 시간을 견딘 타인의 이야기, 동시대 모두의 사연으로 읽혔다. ‘평생 걸어온 길의 기울기에 어울린 빈집의 서사는 시 공부를 열심히 한 흔적도 보였다. 시는 주관적 정서의 객관화이며, 소통이라는 점을 잊지 않고 시적 형상화에 공력을 들인 <빈집>의 시인,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민윤기(서울시인협회 회장), 이병초(전북작가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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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집 / 유수진 

 

 

아침이라면 모를까

저녁들에겐 다 집이 있다

주황빛 어둠이 모여드는 창문들

수줍음이 많거나 아직 야생인 어둠들은

별이나 달에게로 간다

 

불빛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건

다 저녁의 집들이다

 

한 켤레의 염치가 짝짝이로 돌아왔다

수저 소리도 변기 물 내리는 소리도 돌아왔다

국철이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설거지를 끝낸 손가락들이

소파 한 끝에 앉아

어린 송아지의 배꼽, 그 언저리를 생각한다

 

먼지처럼 버석거리는 빛의 내부

어둠과 빛이 한 켤레로 분주하다

저녁의 집에는 온갖 귀가들이 있고

그 끝을 잡고 다시 풀어내는 신발들이 있다

 

적어도 창문은 하루에 두 번 깜박이니까 예비별의 자격이 있다

 

깜박이는 것들에겐 누군가 켜고 끄는 스위치가 있다

매번 돌아오는 관계가 실행하는 수상한 반경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있고

스위치를 딸깍, 올리면 집이 된다

 

별은 광년을 달리고 매일 셀 수 없는 점멸을 반복한다

그러고 나서도

어수룩한 빛들은

얕은 수면 위로 귀가한다

 

 

 

[당선소감]

 

수변길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잔잔한 물결 위로 불빛들이 도착하고 있습니다. 어룽어룽 빛들이 물결 따라 흔들렸습니다. 징검다리로 올라서니 수변길에서 보던 빛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빛들은 조금 옆으로 자리를 옮겨 제 몸을 다해 점멸하고 있습니다. 징검다리를 하나씩 건널 때마다 빛들이 자리를 옮깁니다. 이쪽과 저쪽을 다니며 수면 위에서 반짝이는 빛들을 오래 봤습니다. 집 쪽으로 고개를 돌려 전등을 환하게 켜둔 방을 헤아렸습니다. 아파트엔 불 켜진 방이 많았습니다. 저기 어디 내 방에도 불이 켜졌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따스해졌습니다. 밤 기온이 영하라는데 콧속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달았습니다. 불이 환한 창문들 사이로 듬성듬성 아직 빛이 귀가하지 않은 방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수변길을 오래 걸었습니다.

가끔 질문을 받습니다. 글을 왜 쓰냐고, 시를 왜 쓰냐고. 그럴 때마다 막막하고 난감합니다. 왜 쓰는지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도 답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쪽엔 흰 종이를 펼쳐 둔 채 다른 쪽에 한글파일 화면을 열어 두었습니다. 답을 찾아가는 일을 계속하겠습니다. 귀가를 기다리는 창문들에 관심을 두겠습니다. 수면 위에서 점멸하는 별의 끝을 잡고 풀어가겠습니다. 여정의 길목마다에서 스위치를 찾겠습니다. 스위치를 딸깍, 올리는 일을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어수룩한 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전북일보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 고향, 엄마 보고 싶어요. 아버지, 당신의 등을 존경합니다. 아들아, 딸아, 사랑한다. 남편에게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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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사유의 깊이가 돋보여

 

예심을 거쳐 본심에 열한 분의 작품이 올라왔다. (응모자의 인적 사항이 없이 응모 번호만 응모작 맨 앞에 적혀서 보내왔다). 심사위원들은 코로나19로 만나지는 못하고 각자 좋은 작품을 뽑기 위해 숙독을 하고 다시 각각 세 분의 작품으로 압축했다. 본심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없는 것은 없다」 외 2편, 「흙냄새 향수」 외 4편, 「저녁의 집」 외 3편이었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세 분의 작품들은 모두 소위 신춘문예 풍조에 물들지 않고 자신들만의 목소리로 시의 위의와 진정성을 지키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다.

먼저 「없는 것은 없다」 외 2편의 작품은 대담한 언어 구사와 상상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언어를 부리는 기교가 겉으로 너무 드러나면 소통과 감동에서 약간 멀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비록 오타였다 하더라도 “맡겨”를 “맞겨”로 쓴 실수는 마지막 퇴고나 맞춤법에 신경을 쓰지 않았구나 하는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음을 알아주면 좋겠다. 「흙냄새 향수」 외 4편에서는 시적 진술과 이미지를 이끌어가는 힘이 좋았다. 그러나 일상을 읽는 독법이 평이함으로써 참신한 감각, 즉 신선미가 떨어진 듯하여 아쉬웠다. 「저녁의 집」 외 3편은 요즘처럼 세상이 코로나19로 어수선할 때 너무나 소중해진 당연한 일상을 따뜻하게 보듬고 위로가 되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차분하면서도 치열한 시적 사유와 언어를 다루는 능력이 돋보인다. 동시에 다른 응모작들도 고른 수준을 견지함으로써 앞으로 좋은 시인이 되리라는 믿음을 주었다. 그러기에 심사위원들은 「저녁의 집」을 최종 당선작으로 결정하자는 의견이 서로 일치했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심사위원 허형만 시인, 김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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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재개발지구 / 한경선

 


매물로 나온 낯선 문자들이 새겨져 있다

푸른 종이 속 세종대왕을 사랑한 삼촌은

강남로에 집현전을 차려놓고

그 안에 가득 바람을 풀어놓았다

이곳의 바람은

타워팰리스 하늘과 내통한 지 이미 오래다

집현전 내벽에 새롭게 나붙은 훈민정음을 보며

성층권에서 내려온 별똥들의 수다가 한창이다

별똥들의 방언도 이곳에서는

종종 새로운 훈민정음으로 인정된다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소문의 지도를 따라

북두칠성이 제 궤도를 돌 때

궤도를 벗어난 뭇별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각진 상자 한 귀퉁이에 지친 제 하루를 누인다

모양과 크기가 다른 상자 속의 상자

앰뷸런스 소리가 빈번한 이곳

곽에서 관으로 이동하는 길목에도 훈민정음이 있다

흐린 불빛을 달고 수직으로 오르내리는 관은

언젠가는 땅속 깊이 스며들어 더 이상

길어 올릴 수 없는 검은 우물을 만질 것이다

노숙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이미 그 우물의 색깔을 알고 있다

종종 허름한 지하방으로 스며들던 그 우물의 예언을 사람들은 한때

언문이라고 불렀다는 것도,

순식간에 곽이 관으로 변하는 것은 집현전의 소관이 아니다

ㄱ자로 꺾인 길을 돌아 ㄴ자로 통하는 길은

강남로 후미진 골목 도처에 널려있다

나랏말싸미 세상인심과 달라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주위에 이상한 소문의 울타리를 친다

바람이 곽을 슬쩍 밀면 순식간에 관이 되는 이 새로운 골목에서

세종대왕을 사랑한 삼촌은 집현전 벽면에 새로운 훈민정음을 붙이고

네모난 상자곽 안의 잠을 사랑한 아버지는 오늘도

당신의 잠 속에 칠성판을 그려 넣고 일찍 잠자리에 드셨다

아버지에겐 종종 잠도 또 다른 언문이다

 

 

 

[당선소감]

 

시를 쓸 때마다 공복을 돌아 나오는 번지를 알 수 없는 시린 바람이 같이 불어왔습니다. 생업에 매달리면서도 시를 놓아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시는 간절한 기도이고 구원의 손길이며 숨어있는 신과 같았습니다. 절망의 끝에서 신에게 매달리듯 생활의 기대가 어긋나면 시심이 뭉글거렸습니다.

냉혹한 시의 밖에서 다시 시로 돌아오기를 거듭하는 동안 나 자신이 시를 배반한 것인지 시가 나를 배반한 것인지도 흐릿해진 지금, 이제 시를 진정으로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망설임의 끝에, 아주 떠나간 줄만 알았던 뮤즈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면 시라는 가난한 상자곽 안에서 버텨온 지난한 노숙의 시간이었습니다. 시라는 허름한 상자곽 안에서 죽음의 관으로 아주 떠밀리지 않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주신 전북일보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종종 무기력증에 빠지는 저를 용기로 일으켜 세워준 동국대학교 일산캠퍼스 시창작 교실의 박남희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지난 수년간 같이 공부하면서 아낌없는 질책을 해준 문우 여러분들께도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어젯밤 꿈속에서 제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시던 엄마! 그 손길의 기억 영원히 간직할게요. 미래를 알 수 없는 시를 쓴답시고 컴퓨터에만 매달려 젊음을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한 예쁜 두 딸 지연이 남경이, 묵묵히 엄마를 이해해줘서 정말 고맙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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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대칭적 소재들 유기적으로 화융… 시적 발상 절묘”

 

올해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자는 372명에 작품수는 1488편에 달했다. 지난 해보다 응모수가 증가되었으며 질적으로도 상승 기류를 탔다고 여겨진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10명 분 40편의 시를 고르고 골라 우수작품으로 ‘훈민정음 재개발지구’, ‘별이 빛나는 낮에’, ‘비문을 읽다’, ‘이음 베이커리’, ‘별이 의문부호로 떠 있는 바다’ 등으로 선별되었는데, 최종심에서 ‘훈민정음 재개발지구’가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신춘문예는 그 반향의 민감성으로,문학계에 끼친 영향의 상징성으로 연유하여 이의 품격에 합당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다음 몇 가지 필요 조건을 내 걸었다.

존귀하고 경이로운 우리 모국어를 충분히 잘 승화시켜 빛내고 있는가. 아름다운 정서를 잘 빚어 냈는가. 내포된 메세지는 미래지향적으로 건강한가. 시의 본질인 기본 체제 갖춤이나 형상화를 비롯한 여러 가춤으로 시적 감동을 함유하며 언어 예술의 경지를 달성하고 있는가. 등등이다.

당선의 영예를 안은 ‘훈민정음 재개발지구’는 이러저러한 조건에 걸맞게 신춘문예 당선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고 보았다. 훈민정음이라는 어휘가 담고 있는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 정신을 이끌어 와 시 전편에 한 사조로 굽이치게 하며, 여기에 얹어 현대의 세태적 실감을 풍자로 연출하고 있다. 대칭적 소재들이 유기적으로 화융하며 조화를 이루게 하여 서사적 스토리를 엮는다. 시적 발상이 우선 절묘했다. 세종대왕은 화폐로서 강남의 부를 창출하는 재화를 의미하며 또한 훈민정음의 정신을 함께 상징하여 중의적 표상으로 등장한다. 상층의 부류와 가난한 서민이 교차적으로 이야기 속에 끼여 든다. 곽과 관에 서로 넘나드는 이미지의 진화도 관심을 끈다. ㄱ과 ㄴ이 기호로 등장하는 교집합성과 대립성은 훈민정음의 정신 본연에 다가간다.

‘언문’은 집단 무의식, 거대한 민족 문화의 누적적 잠재 의식을 담지하며 이 시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인 셈이다. 말하자면 백성들을 이롭게하려는 훈민정음의 고유 정신인 나라 말씀인 것이다.

북두칠성과 칠성판은 마치 생과 사, 빛과 어둠, 운명의 지배자(하늘)와 고단의 삶을 펼쳐 가는 피지배자(땅)로 상호 대치를 보이며 함께 조화로움에 다가간다. 이 시에서는 고결하고 신성한 훈민정음 정신과 세속적 부동산 실태와 노숙에서 돌아 온 아버지로 표상되는 가난한 서민의 삶 등 세 타래의 얼킨 스토리의 영상이 교차적으로 오버랩되며 종결에 이른다.

결국 마지막엔 원융(圓融)을 표방하며 옹근 시 정신을 성취한다.“아버지에겐 종종 잠도 또 다른 언문이다.”

 

- 심사위원 : 유안진 시인, 소재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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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터미널 / 김헌수

 

 

빗물 고여 팔랑이는 흙바닥 길에 숨통을 터놓고 바퀴자국 훑고 간 자리에 안부를 걸쳐 놓는다 이때 삼례터미널은 빈집 같다 버스들은 벚꽃 잎들을 헤아리며 종점 없는 마을로 떠날 것 같다

내 안에 새겨진 주름 패인 얼굴을 현상해 놓고 흑백사진 같은 터미널 지나 후정리 길목에서 손 흔들던 그의 모습을 던져주고 간다

걸어 잠근 뒷문 곁에 그림자 없는 하루가 눕는다 들마루에 앉아서 나누던 습관들이 헐렁해졌다 가끔 자리를 내어주는 그곳, 떨어지는 너그러운 빗방울이 욕심을 내던 처마 밑이 환하다

녹이 슨 남자가 떠난다 그를 엿보는 눈빛 덕분에 말은 쌓여가고, 버스가 지나간 자리에 희미하게 고요가 들어앉았다 나도 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다음 날이면 또 들어와 앉는 터미널에서 그를 만지고 있다

삼례터미널은 빠져나갈 수 없는 출구다 살아온 지난날이 자동판매기 속에서 낡아가고 있다 쓸어내린 눈꺼풀을 길들이는 감각들, 아무도 몰래 음각해 놓은 문양으로 피어 목판화를 찍어내고 있다

 

 

 

 

[당선소감] "섬세하고 발랄한 시 쓰고 싶어"

 

비가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전화를 받았다.

순간 멍하더니, 당선되었다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마음이 봄볕처럼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실컷 잡았다고 생각하면 달아나던 말, 성글게 짜여진 언어, 담백하고 슴슴한 문장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무엇보다 빛나게 어루만지고, 사람 냄새가 나는 시, 섬세하고 발랄한 시를 쓰고 싶다.

시와 함께 뒹굴고 호흡하면서 마음의 채비를 달리하고 싶다.

늘 다독여 주던 많은 분들이 생각난다.

먼저 부족한 시에 손 내밀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전북일보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하늘에 계신 부모님, 모든 것의 동기가 되어주는 사랑하는 세윤, 세영, 요한, 누구보다 기뻐할 신영, 은영, 민휘, 인숙언니, 든든한 힘이 되어 준 선비유통, 대전식구들과 친지들,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님들과 날선 합평의 시간을 함께한 문우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시의 원동력이 되어준 글벗동인, 곁을 내어 준 열린시문학회, 깨복쟁이 금초27회, 선영회와 마음의서랍 친구들, 기도로 품어 준 봉동중앙교회, 모든 분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

 

 

 

이유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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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고요한 은유, 따뜻한 위로같아"

 

예전에 결선 작품들을 보고 나와서 나눈 말이 생각났다. 시들이 너무 어려웠다는 의견이다. 해독이 불가한 암호와도 같은 난독증을 일으키는 시들은 화성악을 내치며 유리창에 스티로폼을 긁어대는 것처럼 불편한 불협의 음을 차용해 시종 들이대는 난해한 음악을 읽는 것 같았다.

결선에 오른 10인의 작품들은 우수한 시들이 많았다. ‘소년병’과 ‘회전의 시간’과 ‘삼례터미널’에 주목했다. ‘소년병’은 시를 밀고 가는 힘도 단단하고 신선했다. 전혀 다른 시선이기는 하지만 문득 군대이야기를 쓴 이문열의 등단작이었던 ‘새하곡’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소년병’을 받쳐줘야 할 다른 시편들이 다소 무게감이 떨어졌다. 언어 선택이 젊다는 것은 장점이기도 하겠으나 정제되지 않은 수식어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회전의 시간’은 그의 다른 작품인 ‘오늘의 나이’와 ‘장항선’에서 보여주는 재치와 또 다른 시적 감각을 보여주는 수준에 오른 성취를 가늠케 했다. 그러나 “달맞이꽃을 깨운 샛노란 얘기들이”라든지 “물레의 올을 타래로 짓는 실패의 날들”과 같은 표현은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던 전체적인 시의 분위기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을 해서 오히려 풍요로운 시적 멋과 맛을 돋보이는 역할을 해야 하는 은유로서의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잔잔한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쓴 ‘삼례터미널’은 다른 작품인 ‘7번 출구에서’· ‘개개비의 여름’과 함께 대상의 이면과 그림자까지 관찰하며 사려 깊은 내면을 밀도 있게 그려놓았다. 모름지기 시인의 눈이라면 대상의 아득한 너머와 순간의 찰나까지, 쓰러지고 일어나 건너온 시간까지를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걸어 잠근 뒷문 곁에 그림자 없는 하루가 눕는다” “빗방울이 욕심을 내던 처마 밑이 환하다”라니, 이 같은 고요한 은유에서 볼 때 시를 짓는 새로운 시인의 눈이 따뜻하고 그렁그렁한 눈매로 대상을 위로하며 시를 풀어놓았을 것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당선작을 결정해야 한다. 실험적이고 길들여지지 않은 상상력이 꿈틀거리는 젊고 싱싱한 야생의 시에 손을 내밀어야 할까. “나의 음악은 울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가수 밥말리의 말처럼 상처받은 생명의 동굴 속 내면으로부터 울려나오는 부드럽고 깊은 응시의 위로와 산들을 껴안고 가는 먼 산빛과 같은 시를 불러내야 할까 망설였다.

결국 ‘삼례터미널’을 당선작으로 선택하였다. 축하한다.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첫 시’이다. 당선작이 대표작이 아니라 삶의 길 위에서 시의 종착역행 나침반을 잃지 않고 오래오래 치열한 시마에 사로잡혀 먼 길을 가는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이운룡, 박남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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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 / 정연희

 

 

귀가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멀고 가까운 말들도

 

촌에서는 하나로 연결된 귀가 된다

 

귀걸이처럼 빛나는 소문들

 

귀가 제일 빠른 곳은 촌이다

 

특용작물을 심은 노총각의 이야기, 젊은 며느리와 늙은 시어머니와 다국적 갈등, 파리 한 마리와 한나절을 놀았다는 과부댁, 허리가 점점 늦가을 풀포기처럼 구부러지는 재 너머 노인, 합죽의 입 꼬리에서 뛰어오는 손자들 부러운 마음 감추고 듣는 독거노인들 이야기가 점심 물린 마을회관에 가득하다. 토지수용 소문에 동네가 술렁이고 쇠약한 용돈을 먹고 약장사가 지나가고 나면 촌에는 보일러 공기구멍에 집을 짓는 새와 부엌이 놀이터인 쥐가 퍼트리는 소문이 있다

 

반상회가 끝난 자정 무렵

 

민화투 점수로 오고가는

 

소문의 끄트머리들이

 

텅 빈 까치집으로 들어간다

 

폐가는 집 비운 소문으로 흉흉하고

 

논두렁에는 논두렁 소문이 길게 늘어나고

 

어쩌다 주춤했던 귀들도

 

오일장 다녀 온 뒤로 다시 무성해지는

 

이발관 그림 같은 풍경에 뛰어든 사람들

 

밤이 빨리 찾아오는 촌 풍경에

 

바쁜 귀가 몰입해 있다

 

 

 

 

 

[당선소감] "시가 쇠약한 농촌에 울림 줄 것"

 

내 생애 가장 근사한 선물인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우리들의 고향은 비약적이고 시린 곳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도 늘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따뜻한 체온을 느끼게 해주는 모체다. 점점 쇠약해져가는 농촌의 현실이 마음 아프지만 시란, 그 본질적인 곳에서 울림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되돌아보면 비탈길을 내려와 햇살 쏟아지는 신작로로 떠나 온 그곳. 화려한 도색의 글들이 쌩쌩 지나간 뒤를 바라볼 때마다 나의 글은 갓 도시에 입성한 사람처럼 주눅이 들고 한없이 초라했다. 그런 시를 위로한 것은 바람의 속삭임이었다.

 

바람은 내 손을 잡고 물결치는 푸른 보리밭을 날다가 꽃가지를 흔들어대며 깔깔거리기도 했다. 그 촌스러움은 한없이 작아지다가 흙과 햇살과 바람과 별빛을 가득 채우는 넓은 가슴이기도 했다.

 

소박한 시를 쓸 수 있는 환경과 우리들의 고향인 촌에 감사한다. 또한 힘을 실어 주신 유안진, 이동희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두 분의 선택에 누가 되지 않는 시를 쓰도록 노력하겠다.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딸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 더없이 행복한 날이다. 늦게 찾아 온 시가 늦은 것이 아니라 이미 어린 날의 순박한 체득이었음을 고백한다. 우리들의 고향을 위해 언제나 흙냄새 나는 정론을 펼치고 있는 전북일보에 감사드린다. 잊지 않고 글다운 글 열심히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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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사라져가는 우리 것 지키는 시심"

 

시문학이 지닌 제일의 가치는 문학적 진실에 있다. 문학적 진실은 필연적으로 사유의 깊이와 미학적 감동으로 이루어진다. 시를 읽는 사람의 정신세계에 파열음을 내는 사색적 자극, 물신의 재미에 빠져 사는 사람에게도 격조 높은 심미적 쾌감을 주는 표현의 아름다움이 결합하여 시를 시답게 한다. 그것이 바로 문학적 진실이다.

 

이런 시문학의 진리를 외면한 채 시류에 편승하거나 소위 신춘문예형시 쓰기로 독자를 현혹하려는 자세를 경계한다. 그런 경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시문학 지망생들이라면 반드시 화자의 체험이 깊이 육화되어 있어야 할 것이며, 그 체험적 진실이 미적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우리말을 갈고 다듬는 일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시인의 제1사명이 바로 모국어의 지킴이가 아니겠는가.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여덟 응모자 33편의 작품을 정독했다. 제목이 곧 제재라면 김정숙 씨의 새우가 쓴 고래의 자서전새우가 쓴 고래의 전기여야 마땅할 것이며, 한문수 씨의 폭우를 만나다에서는 중심 제재인 폭우를 형상화하려는 진술들에서 폭우의 원관념이 실종되고 말았다. 체험적 진실이 깊이를 이루지 못한 점, 표현의 언어 감각이 의욕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런 작품들을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남은 작품은 김진희 씨의 허공과 최인순 씨의 불을 자르는 사내와 정연희 씨의 귀촌이었다. 세 응모자들이 함께 묶어 응모한 다른 작품들까지 면밀히 검토하면서 허공은 참신한 발상에도 불구하고 체험의 내면화 정도에서 섬세함이 모자라다 보았으며, ‘불을 자르는 사내에서는 우리말을 가꾸고 다듬으려는 의장(意匠)이 좋은 성과를 내고 있었다. 이를테면 파란 불꽃만 피워 올린 한 그루 불꽃, 정원사가 다듬어 놓은 불은 몇 백 년을 활활 타오를 것이다등의 표현의 참신성에서 끝까지 당선작과 겨루었다. 그러나 귀촌의 장점을 넘어서지 못했음을 아쉽게 여긴다.

 

당선작 귀촌의 미덕은 많다. 사소한 듯이 보이는 소재들에서 사라져가는 우리 것의 소중함을 지켜내려는 시심(詩心),

 

모국어의 지킴이로서 올바른 시인의 사명에 대한 자각, 체험이 육화되어 스스로 우러나온 태어난 시이지 만들어진 시가 아니라는 점, 타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몸담고 있는 우리의 현실과 정면으로 맞닥뜨려 이를 형상화해 내는 시안(詩眼)의 참신함 등에서 당선작으로 밀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보았다. ‘귀촌이 함축하는 세계가 오늘의 농촌-시골마을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열어주는 것은 물론 막연한 소문으로 피폐화되어 가는 현실에 대한 의장은 뜻있게 보였다. 다른 응모작들 까끄라기’ ‘바람수습’ ‘씀바귀에서도 고른 밀도를 보여, 이 당선자가 펼쳐 보일 시문학의 장래를 안심할 수 있겠다는 것도 당선작으로 미는데 힘이 되었다.

 

좋은 시를 만난 느낌이 소중하다. 아깝게 선에 들지 못한 시문학 지망생들의 분투를 빌며, 당선자의 문운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 심사위원 유안진, 이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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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 반지하 신혼방 / 김상현

 

 

가을 산길 위에서 느닷없이 냄새가 혀를 밀어 넣었다

하얀 앞발톱의, 엎어져 있는 두더지 주검

두더지는 반지하 방이 되고 있었다

잘 닦은 화이바 같은, 검은 갑옷의 벌레가

시체에 세 들어 늦깎이 신혼방을 만들고 있었다

주검이 있을 때, 짝을 맺는다는 송장벌레

저 더듬이 끝이 뭉툭한 것은

그 교감도 한때는 부딪혀 옹이 박힌 것

구린 터 속에서도 더듬거리며 전등을 갈겠지

저 등판의 빛은 그들 눈에 모닥불이 타오르는 증거다

자글자글 끓는 된장찌개 투가리, 그런 뜨거움 올린

양은밥상을 들고 거뜬히 문지방 넘는 삶

둘은 두더지를 땅에 묻을 때까지

쉬지 않고 흙을 파내려갈 테지

흙으로, 나무뿌리를 갉았을 몸을 닫고 쓰러진 밑바닥 위에

꽃 장판을 깐 다음

반지하가 지하가 된 방 안에서 서로를 쓰다듬겠지

때로는 이웃 풍뎅이 애벌레와 다툴 일도 있겠지만

샛별 같은 알을 낳고 그 아이들은

가까스로 냄새를 막은 몸의, 한 터럭까지 다 뜯어먹고서야

벽 틈새에 손톱 밀어넣는 것이 햇살이었음을 알겠지

목숨이 윤이 나는 저 까만 옷의 청소부 부부

오늘 같은 초야(初夜),

숲 속은 달이 익어 참 부끄럽겠다

 

 

 

 

 

[당선소감] "글쓰기로 혼 뺏겼던 한 해 소망 이뤄"

 

내가 글을 쓰면 잘 될 것 같으냐, 점집에 가 물을 때마다 그쪽 사람들은 말한다. 글 쪽과는 잘 맞습니다만, 그냥 취미로만 쓰라고, 쓰면서 행복하면 좋은 것 아니냐고.

 

그런데 지난해 참 이상하다. 9월에 3일 간격으로 문학상을 받았다. 김유정 신인문학상 시 부문 당선과 근로자 문화예술제에서 최고상인 대통령 대상을 역시 시를 통해 받은 것이다. 정부에서 보내주는 해외연수도 다녀왔다. 그저 생계의 길 위에서 줍는 법만 익힌 개미, 그런 개미 한 마리가 구름 위의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그 옛날 우체국 계단에서 글 봉투를 품고 있던 한 아이의 눈망울을 생각하였다. 개미 눈앞에 펼쳐진 밤하늘은 그 아이의 반짝이는 까만 눈망울을 닮았을 거라고 상상해보았다. 콧날이 시큰해졌다.

 

신춘문예 당선 전화를 받았다. 나는 전화를 끊고서, 신문에서 오려 벽에 붙여놓은 2014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상식 사진을 바라보았다. 2년이 흘렀고, 사진 속에 한 자리에 내가 앉아야 할 일이 생긴 것. 웃다가 울기를 반복하였다. 고백하건대, 사진 속의 저 현장 속으로 간절히 들어가고 싶었었다. 올 여름방학 기간에만 시 50, 동시 35, 단편소설 1편을 쓴 게 사실이었다. 혼을 빼앗겼다는 표현이 맞다. 혹시 내가 이렇게 창작에 홀려 내 정해진 팔자를 바꿔놓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기호지세, 호랑이를 탄 기세로 끝까지 몰아가야 한다는 생각. 도중 내려오면 호랑이에게 먹힌다는 생각을 하였다.

 

졸고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전북일보 사에 감사의 말씀 올린다. 글눈을 뜨게 해주신 우석대 문창과 교수님들과 제 옆을 지켜준 문우들께 우체국 계단에서 망설이던, 낯 잘 가리는 그 아이는 구원받을 수 있었다고 거듭 감사의 말씀 올린다. 글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점괘는 어디까지 바꿀 수 있는지 나와의 싸움을 피하지 않겠다. 끝으로 (달려라 검정분필) 제자들에게 영광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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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삶에서 희망 발견하는 시각 뛰어나"

 

신춘문예라는 제도는 한 편의 작품을 뽑는 일이지만 한 사람의 시인을 문단으로 불러내는 일이다. 그래서 심사위원들은 한 작품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응모자가 습작에 쏟아 부은 훈련의 흔적까지 읽으려고 한다. 시와 그 시를 쓴 사람을 같이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기준으로 작품을 판별할 때, 구태의연한 서정시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시를 꿈꾸고 있는지, 시에 끌어들인 특수한 성격의 언어들이 이 세계의 보편적이고 균형적인 감각을 확보하고 있는지, 그리고 발설하고 싶은 개인의 일과 발언해야 하는 집단의 일 사이에서 갈등하는 과정을 거쳤는지 등을 살펴보게 된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것은 모두 9명의 작품이다. 말을 다루는 솜씨들이 뛰어나 다들 오랜 습작을 거쳤으리라 짐작되는 작품들이었다. 그렇지만 내면의 울림이 느껴지는 중량감은 대체로 부족해 보였다.

 

우리는 그 중 5명의 작품에 주목하였다. 정재돈의 <산낙지>, 이시윤의 <4분의 3박자로 반달이 지나간다>는 낯선 이미지를 충돌시켜 새로움을 구하고자 하는 작품들이지만 아직은 덜 익어 어색한 느낌이 강했다. 서귀옥의 <망중한>은 안정된 호흡으로 주제를 의도대로 차분하게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의식의 찌’ ‘생의 잔해들과 같은 낡은 표현을 하루바삐 걷어낼 줄 알아야 새로운 시의 나라에 당도하리라 생각한다.

 

이동한의 <사과>는 깜찍하고 활달한 상상력, 군더더기 없는 언어 운용 기법이 매혹적이어서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어깨를 겨루었다. 그런데 시의 뒷부분이 공허한 말장난으로 마무리되는 점이 결정적인 흠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당선작은 김상현의 <두더지 반지하 신혼방>으로 결정되었다. 죽은 두더지의 몸에 깃들어 사는 벌레를 통해 사람 사는 세상의 따뜻함을 길어 올리는 시인의 시각은 예사롭지 않다. 오밀조밀한 감각의 배치도 뛰어났다. 함께 응모한 작품들에서도 우리는 만만찮은 필력을 감지할 수 있었다. 죽음에서 삶의 희망을 발견하는 당선작의 온기가 이 냉랭하고 삭막한 세계의 불꽃이 되기를 빈다.

 

심사위원 문효치, 안도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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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새, 번지점프를 하다 / 박복영

 

 

아찔한 둥지난간에 올라 선 아직 어린 갈매새는 주저하지않았다.

굉음처럼 절벽에 부딪쳐 일어서는 파도의 울부짖음을

두어번의 날갯짓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어미가 날아간 허공을 응시하며 뛰어내린 순간,

쏴아, 날갯짓보다 더 빠른 속도로 하강하던 몸이 떠올랐다.

 

한 번도 바람의 땅을 걸어본 적 없으므로 가는 발가락은 오므린 채 가려웠다.

하강은 추락을 꿈꾸지 않는 법.

가슴 깃털을 헤집고 파고드는 처녀비행의 속도는 두려움이 되지 않았다.

 

끊임없이 밀려와 절벽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꽉, 물고

허공에 길을 찾는 갈매새가 잠시 수평선을 읽었다.

굽은 부리에서 거친 파도의 현이 흘러나오자

휜 바람줄을 따라 기우는 날개가 다시 팽팽해졌다.

 

태어나서 처음 바람을 거스르는 동안 갈매새는 바람의 부피를 다 가늠할 수 있을까.

포물선의 꼭지점에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슬아슬한 궤적이 허공에서 지워지고 바람줄을 따라가며

바람이 풀어놓는 행의 단서를 찾는 동안 가슴 가득 차오르는 생의 씨앗들.

 

의문들이 빠져나올 때마다 날개가 책장처럼 펄럭였다.

갈매새가 날개를 당기며 내려다 본 벼랑 끝엔

벗어둔 신발 같은 텅 빈 둥지 옆으로

누군가 방생한 키 작은 해국들이

코카콜라 병뚜껑 같은 머리에 노랗게 흰 뼈를 우려내고 있었다.

 

 

 

낙타와 밥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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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혹평 아끼지 않은 아내에 감사"

 

때늦은 전화를 받고 무작정 걸었습니다. 어금니 깨문 바람이 흩뿌리는 눈발의 서사와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으로 버팅기는 앙상한 마른 이파리의 둥근 몸 같은 메타포처럼. 점퍼에 말아 넣은 몸을 구부려 그렇게 한참을 걸었지요. 시린 무릎이 저려올 때까지.

 

내가 찾는 말은 무엇일까. 나뭇가지에 흔들림을 주는 바람의 유혹이며, 흔들리며 화답하는 나뭇가지의 언어임을 알았지요. 흔들리거나 흔들림을 주는 우리네 삶처럼.

 

시의 자유 속에 등뼈를 세우고 방향을 가르쳐 주신 이향아 시인님, 이동희 시인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고맙게 잘 자라준 아이들과 어둡다며 밝은 시를 써 보라고 혹평을 아끼지 않은 아내와 빈터 동인들, 수원의 김, , 홍 시인과 원주에서 늘 서두르지 말라고 다독여주신 임일진 선생님께 이 감사를 전합니다.

 

 

 

 

눈물의 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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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밀도·울림 있어 신뢰할 만한 작품"

 

생명력을 가진 것들은 도태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도전하고 실험합니다.

 

문학 역시 그러한 것은 생명체라는 증거일 것입니다. 독자들은 새로운 문학의 모습을 신춘문예 당선 작품을 통해서 발견하려고 기대합니다. 그 기대에 부응하려는 듯 올해에도 참신한 방향을 궁구하고 모색하려는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크게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무모하다 싶은 실험, 일체감과 통일성이 부족한 작품도 있었습니다. 안이한 타성에 젖어 있거나 목적의식이 두드러져 보이는 주제, 수사적 표현에서 독창성이 의심되는 작품들도 있었습니다.

 

예선을 거쳐 올라온 아홉 사람 중에서 이정희 씨와 박복영 씨가 최종까지 남게 되었습니다.

 

이정희 씨의 손이 만평이다는 여유 있는 호흡과 적절한 전환이 돋보이지만 처음 3행에 걸었던 기대가 아무런 암시도 없이 끝나버린 아쉬움이 컸습니다. ‘은 은유와 생략으로 간결미를 보인 반면 그만큼 추진하는 에너지가 부족했습니다.

 

이에 박복영 씨의 갈매새, 번지점프를 하다가 최종 당선작으로 무난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박복영 씨의 다른 시들, ‘점묘화법’, ‘소리의 걸음을 읽다 등도 비슷한 밀도와 울림을 보여주어 더욱 신뢰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용도 없이 시끄럽고 현란한 작금의 세상에서 응답도 보상도 없는 문학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여러분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부디 여러분이 걸어가는 문학의 길에 눈부신 광명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심사위원 이향아, 이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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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가 있는 풍경 / 노동주  

 

 

시소는 늘 기울어 투석기처럼
한쪽 팔을 바닥에 떨구고 있다
빈둥거리는 그 사내의 엉덩이가 얼마나 무거울까
쏘아 올리기에는 시소의 두 팔이 너무 길다
곤장이라도 맞은 듯 매번 엎어져 있다

사내도 굄돌처럼 하늘을 인 듯 무겁다
햇빛 그늘진 저 받침점이란 건 뭔가? 가슴팍에
점 아닌 섬처럼 박힌 저것
누구도 그 중심에 안착해 본 적 없다
시소는 늘 중심을 빗나간 기웃거림의 형식으로
흔들리며 웃고 운다, 끽끽거린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할머니가 가볍게 시소에 앉는다
브라보콘을 흘리는 일곱 살의 오후가 번쩍 들린다
그 기울어진 시소의 경사면을 따라
문득 이삿짐 트럭이 오르고 영구차가 내려간다
눈길에 미끄러지는 출근길이 열리고
이부자리에 맨발을 모으는 저녁 냄새가 피어오르기도 한다

사내의 엉덩이도 시큰거린다
중심으로부터 몸이 무거울수록 가깝게
가벼울수록 멀리 앉는 게 균형을 맞추는 법이라지만
늘 빈손인 사내는 거구여도 뒷자리에 앉고
천근의 추를 몸에 단 흐릿한 얼굴은 맞은편에 앉았다 간다

시소는 땅 속에 처박히거나
아니면 나무처럼 직립하고 싶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시곗바늘처럼 좌우로 훅훅 언젠가 돌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가 뭐래도 진짜 시소의 균형이란
때를 기다리는 것, 엉덩이 짓무르도록
방아를 찧을 때마다 꺽꺽 시소가 울고 있다

 

 

 

 

[당선소감] "문우들에 대한 고마움 잊지 않겠다"

 

경적이 울립니다. 뒤돌아보니 택시입니다. 혹시나 싶어 앞사람 등짝에 툭 던지는 소리, 그 생활의 방식을 ‘시’라 믿습니다. 굳게 뒤돌아선 사물의 뒤통수에 대고 오래 말을 걸곤 했습니다. 돌아오는 게 늘 퇴짜일지 몰랐지만, 힐끔 고개 돌린 옆모습이라도 기억했다가 그걸 받아 적는 밤은 늘 깊었습니다.

영혼의 반을 시인이 되는 길에 걸었습니다. 내 반쪽만을 통과한 사람들아, 아이들아 미안하고 고맙다. 퇴근 후 방문을 닫고 무언가 헛것만을 쓰고 있는 아들의 어깨를 보며, 아버지 어머니는 어떤 시간을 사셨을까. 오래 살아계시라. 아들의 이야기를 이제부터 들으소서.

금이 번진 벽에 새로 도배를 하던 날, 몇 번의 귀얄질로 벽지 속 국화꽃이 천장까지 피어오르던 오후가 있었습니다. 쥐가 달그락거릴 때마다 아버지가 천장을 치대던 그 밤도 생생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 삶의 실금 위로 떨어져 내려쌓인, 그 따뜻한 국화꽃잎의 기억으로.

평생을 사는 나. 시 쓰는 삶에 한 아름 꽃잎을 보태주신 종호 선배, 지웅 형, 안성덕 선생님 고개 숙여 인사드립니다. 박성우 선생님, 정양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제 생활의 반인 가족과 친구와 진봉초 식구들에게 고마움 전합니다.

나를 시인처럼 살게 해준 하연, 사랑합니다.

문우들에 대한 고마움은 생활로써 대신 갚겠습니다. 졸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두 선생님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매번 제 시의 뼈대를 부러뜨리던 강연호 교수님, 저는 언제나 강골이 될까요. 은혜가 깊지만 갚을 수 없는 깊이이므로 갚지 않겠습니다. 더 빚을 지렵니다. 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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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 정신의 집중과 몰입 매우 뛰어나"

 

지금 시는 산업화 광속의 감각 때문에 멀미를 앓고 있다. 인쇄 언어의 앞날이 걱정이다. 그럼에도 시와 시인은 여전히 존재하고 증가하면서 진화하는 추세에 있다. 한 마디로 시대적 아이러니이다.

본심의 작품들 중 「금강」외3편(이인애),「거울을 긁다」외2편(박평숙),「즐거운 독」외4편(문화영),「장수 한우축제」외4편(이근영),「생골 아지매」 외 3편(임미성) 등은 모두 한 사람이 쓴 작품처럼 진술 형태가 비슷비슷하다. 평범한 어조에다 일상적 서정이 주조(主調)를 이루고 있다. 관객이 무용 공연장에서 춤은 사라지고 패션만 보인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마찬가지로 시는 사라지고 언어만 난무한다면 헛심이 팽길 것이다. 옥석을 가리는 작품에서 언어와 시정신은 섬광처럼 빛나야 한다.

끝까지 남은 작품으로 「나무의 관상(觀相)」(한병인)은 서정 묘사에 치중, 비교적 안정된 심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나무’에 대한 깊은 인식과 언어 구조의 층이 얇아 주제 의식을 드러내기에는 버거워 보이는 것 같다.
「바다의 구두」(이지산)는 사람 중심의 편견에 의한 자연(바다)의 희생과 새만금 방조제와의 불협화를 풍자한 생태학적인 시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미래파적 추구 정신을 보여주는 작품인데 3·5연의 청신한 진술에 비해 끝부분 8·9연은 긴장이 풀어져 어색한 상투성과 불투명하고 난삽한 언술로 되어 있다. 짱짱하고 단단하게 응축시켜 공력을 살려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 작품이다.

당선작 「시소가 있는 풍경」(노동주)은 인간 사회의 중심축과 평형감각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에 천착, 치열하게 형상화된 작품이다. 언어의 함축적 의미나 비유의 정확성과 긴밀성, 그러한 심층 구조의 역동성에 의해 흡인력과 시안(詩眼) 전개의 안정감도 돋보인다. 덧붙이면 대상의 내면을 투시할 줄 아는 시정신의 집중과 몰입, 언어가 함의하고 있는 상쾌하고 투명한 미의식 등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라는 점에 심사위원 두 사람의 의견도 일치했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와 더불어 초심을 잃지 말고 이제부터라는 각오로 더욱 정진하여 한국 시인들의 중심에 우뚝 서 주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박성우,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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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줄 / 김정경 

 

 

파업이 길어지고 있었다
주머니엔 말린 꽃잎 같은 지폐 몇 장
만지작거릴수록 얇아졌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므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시간,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여니
방바닥에 검은 줄 하나 그어져 있다
특수고용자로 분류된 나는
노동조합이 철야 농성 중인 회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출입문 위에
붉은 글씨로 쓴 부적들 나부끼고
제 이름 외치며 뛰쳐나온 노란 팬지꽃
화단 위에 삐뚤빼뚤 구호를 받아 적었다
나무 기둥의 몸을 열고 나온 날개미들,
좁은 방에 검은 줄 늘려가고 있다
문 걸어 잠그고
쓰다 남은 살충제 쏟아 붓는다
혼자서 살겠다고
혼자만 살아보겠다고
고쳐 쓰고 또 고쳐 쓰던 자기소개서
개미들이 따라가며 밑줄을 긋는다
고쳐 쓰다만 자기소개서 위의 검은 줄이 흩어진다

 

 

 

골목의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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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손녀에게 한 수 가르쳐 준 할머니께 영광을"

 

올봄 고향에는 유난히 벚꽃이 고왔다고 했습니다. 그 고운 꽃빛이 다하고 배롱나무 꽃 필 즈음 할머니께서 하늘로 꽃구경 가셨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울다 말고 그날 분의 방송 원고를 썼습니다.

그렇게 불성실한 자세로 할머니를 보내드리며 죽은 자의 일과 산 자의 책임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가시는 길에도 손녀딸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신 아름다운 매화, 정가매 씨. 당선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할머니가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제가 쓰는 글에 책임을 지며 살겠습니다. 제 시에 뼈를 세워주신 부모님, 시의 살이 되어주신 원광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님들과 원광문학회 식구들, 헐벗지 말라고 옷을 지어주신 우석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교수님들, 외롭지 않도록 함께 길을 걸어준 문우들께 인사를 전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차마 순서를 정할 수 없어 고마운 이름들을 쓰지 못하겠습니다.

두고두고 그 이름 부르면서 곁에 있겠습니다.

제 시의 가능성을 보아주신 유강희 선생님, 박성우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족한 시를 보듬어 주신 정양 선생님, 이시영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열망에 빠지게 했던 두 분 선생님께서 제 시를 안아주셨다는 것이 아직도 꿈 같습니다.

생애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신 전북일보사에도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심사평]  "파업현장 현실 인식·시적 긴장감 돋보여"

 

마지막까지 남아 선자들을 고심케 한 작품은 '검은 줄'(김정경)과 '닭'(정지웅)이었다. '닭'은 '닭이 발톱을 세워 저물녘을 뒤란에 눌러놓는다/머리에 달린 어떤 생각이 갈 방향을 콕 쪼아야 한 발 걷는 닭/퇴근 없는 저 눈이 무섭다'처럼 언어가 생각을 담는 솜씨가 놀라울뿐더러 비유가 관습을 벗어나 새롭게 빛을 발하고 있다.

말하자면 관념을 언어로 낚아채 시적 표현으로 밀고 나가는 능력이 돋보였다.

'검은 줄'은 '파업이 길어지고 있었다//주머니엔 말린 꽃잎 같은 지폐 몇장/만지작거릴수록 얇아졌다'로 시작되는 시의 첫머리처럼 우리 시대의 아픈 '파업 현장'을 다루고 있는 작품인데, 기왕의 사실주의 시들의 상투적인 표현을 벗어나 현실을 다루면서도 시적 주체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숙고 끝에 우리는 언어의 날카로움이 살아있는 '닭' 대신 오늘의 사회 현실을 독자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검은 줄'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에 합의했다.

같이 응모한 다른 작품에서도 보이지만 '닭'의 시인은 그 건강한 농경정서가 자칫하면 익숙한 농촌시들의 복제에 기여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깨끗이 씻어버리기에 아쉬운 표현들이 많이 눈에 띈 반면, '검은 줄'은 파업현장을 다루면서도 거기에도 끼지 못하는 '특수고용자'로서의 신분이 뚜렷이 부각된 시구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므로/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같은 표현이 보여준 바대로 주체와 현실의식과의 시적 긴장이 앞의 작품보다 조금 더 우위를 차지한다고 판단되었다.

이밖에도 선자들의 눈을 끈 작품은 '보랏빛 선글라스'(문화영), '연잎 정자에 초대하다'(이정희) 등이었음도 밝혀둔다. '닭'의 시인에겐 정진을, 그리고 당선자 김정경씨에겐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 이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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