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인상 / 강인한
1
다들 불 끄고 잠든 밤
앞마당 우물에 나와 끼얹는 물소리
희다.
열여덟 블라우스 흰 교복
복숭아처럼 솟은 가슴
희다.
잠들락 말락 어렴풋한
틈새로
차갑게 끼얹는 한 줄기
물소리.
2
진심으로 달라고 하면
주고 싶데요,
나는.
지나간 남의 이야기처럼
말하는 목소리
들린다.
웃고 있는 사진 속
향연(香煙)처럼
흰
물소리.
[심사평] 두 개의 인상을 꽃피운 시인의 실존 의식
한국 시문학사에서 전봉건은 전후(戰後) 모더니즘 시를 추구한 대표적인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인정될 수 있지만, 좀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한국의 시단이나 학계에서는 모더니즘을 현실 인식이 없는 개념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선입견이 지배적인 것은 모더니즘을 문학의 한 사조로 이해하기보다는 리얼리즘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전봉건문학상의 심사평에서 이와 같은 점을 제기한 것은 모더니즘에 대한 고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나 연구자 중에서 전봉건과 강인한의 시 세계에 대한 관련성에 궁금증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전봉건 시인이 모더니즘 시를 추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 인식이나 역사의식이 없다고 볼 수 없고, 강인한의 시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봉건의 시 세계는 한국전쟁이 가져온 충격과 상흔을 극복하려고 한 산물로 볼 수 있습니다. 생명력에 대한 강인한 의지로 인간 실존의 존엄성과 가치를 추구한 것입니다. 그가 「춘향연가」「속의 바다」「돌」「6․25」 등을 제재로 삼고 연작시를 쓰고, 견고한 시인 정신이 반영된 이미지를 구축하고, 유구한 생명력을 노래한 것이 그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따라서 남진우가 『전봉건 시전집』(문학동네)을 간행하면서 전봉건 시 세계의 본질을 “에로스의 시학”이라고 진단한 것은 일리가 있습니다.
전봉건은 한국전쟁의 비극을 사랑의 정신과 항일성의 언어로 극복하려는 모더니즘 시를 추구했습니다. 이와 같은 지향은 자연을 순수하게 노래한 소위 서정시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서구의 모더니즘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등장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그동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들이 이룩해 놓은 도덕, 사상, 윤리, 종교 등에 근본적으로 회의하고 몸소 겪어야 하는 불안과 소외 등을 주체적으로 반영해낸 것입니다. 따라서 모더니즘은 현실 인식을 회피하거나 역사의식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한 운동입니다.
한국전쟁이며 독재정권을 몸소 겪은 전봉건이 추구한 시 세계 역시 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단지 아방가르드적인 유럽 계열의 모더니즘보다는 감정을 적절히 통제하고 대상을 직관과 이미지로 정밀하게 묘사하는 영미 계열의 모더니즘 시 경향을 보였습니다. 결국 전봉건은 전후의 한국 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현대성의 획득이라고 생각하고 모더니즘 시를 추구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결은 다소 다르지만 전봉건의 시 세계는 박인환, 김수영, 김종삼, 김규동 등과 같은 지형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또한 강인한의 시 세계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전봉건이 “앞 산자락에서는/아버지가 죽었다/뒤 산자락에서는/작은아버지가 죽었다/앞 산중턱에서는/삼촌이 죽었다”(「6․25 21」)라고 민족 국가 건설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운 한국전쟁이 가져온 무자비한 폭력을 고발한 모습은, 강인한이 “부하의 총에 죽은 깡마른 군인이, 일찍이/이 강변에서 미소 지으며 쌍안경으로 쳐다보았느니/색색의 비행운이 얼크러지는 고공의 에어쇼,/강 하나를 정복하는 건 한 나라를 손에 쥐는.”(「강변북로」) 것으로 여긴 권력자를 비판한 것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경제 발전을 빌미로 국민의 자유를 탄압한 독재 권력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전봉건이 “수천 년 수만 년을 돌 속에 갇혔어도/억척같은 그 어둠에 갇혔어도/눈 똑바로 뜬 물고기가 어찌 휘황한/황금빛이 아닐 수 있을 것이며/그 어둠 깨지자 어찌 꼬리쳐 하늘로/하늘로 솟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돌 36」)라고 상상한 것처럼, 강인한은 “내 손 안에서 숨 쉬는 알/동우리에서 막 꺼낸 피 묻은 달걀처럼/이 속에서 눈뜨는 보석 같은 빛과 팽팽한 힘이/내 혈관을 타고 심장에 전해온다”(「빈 손의 기억」)라고 돌의 생명력을 상상합니다. 그리고 전봉건이 “아직도/좀 어두운”(「6․25 1」) 시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 맞서 “이제/곧 밝은/새벽”(「6․25 3」) 을 기다리듯이 강인한은 어둠을 걷어내는 웃음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아픔 위에 아픔을 붓는
밤의 크고 고요한 손을 본다.
누군가의 나직한 잠이 흐르고
잠 속으로 툭 떨어지는
빗방울이었다,
나는.
멀리서 가까이서 뿌옇게 내리는
가을의 분별,
회복할 수 없는 어둠을 토하며 지금
내 피는 닳는다.
새도록 떠다니는 잠의 바다여.
묵은 책갈피에 오래 파묻혔던
내 손은 눈을 뜬다.
목질의 가느다란 실핏줄과 물결 소리를
자욱이 풀어준다.
사물은
내 피가 닳는 저 어둠 뒤에서
희게 말하고
희게 웃는다.
― 강인한, 「희게 말하고 희게 웃는다」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아픔 위에 아픔을 붓는/밤의 크고 고요한 손”을 방관하거나 회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회복할 수 없는 어둠을 토”하는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피”가 “닳는” 대응을 합니다. 아픈 상황에 자신의 아픈 몸을 밀어 넣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탓하지 않고 기꺼이 맞서는 세계인식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묵은 책갈피에 오래 파묻혔던” 자신의 “손”이 “눈을” 뜨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하여 “목질의 가느다란 실핏줄과 물결 소리를/자욱이 풀어”줍니다.
화자는 자신이 “피가 닳는” 응전으로 헌신했을 때 실존의 조건들이 “희게 말하고/희게 웃는”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지각이나 우연적인 감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랜 삶의 체험과 현실 인식을 통해 자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회 내에 살고 있는 인간의 영혼과 양심의 지속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질풍노도의 시대”(「질풍노도 시대가 있었다」)를 거쳐온 강인한 시인의 고투가 씨알로 빛나고 있습니다. “웃고 있는 사진 속/향연(香煙)처럼/흰/물소리”(「두 개의 인상」) 속에서 새로운 생명체가 꿈틀거리며 탄생하고 있습니다.
심사위원(맹문재․오형엽)
강인한 시인이 제6회 전봉건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전봉건문학상 수상작으로 강인한 시인의 ‘두 개의 인상’ 외 4편이 선정됐다. 수상자는 상패와 상금 1000만원을 수여하게 된다. 전봉건문학상은 1950년대 모더니즘 대표 시인 전봉건 시인의 시적 성취를 기리기 위해 2015년 마련됐다. 제1회 김행숙시인, 2회 송재학 시인, 3회 김상미 시인, 4회 이승희 시인, 5회 한영옥 시인이 수상했다.
현대시학 작품상은 전형철 시인의 ‘슬프다고 말하기 전에’ 외 4편이 선정됐다. 수상자는 상패와 상금 500만원을 수여받는다. 현재 우리 시단에서 가장 왕성하고 개성적인 시작 활동을 보여주는 시인에게 수여한다. 박용래, 김종삼, 조영서, 김선영, 임성숙, 정진규, 이원, 이장욱, 이덕규, 박형준, 이병률, 이인원, 장석원, 위선환, 권혁웅, 조연호, 조말선, 우대식, 이승일, 이은규, 전형철 시인 등이 역대 수상했다.
현대시학 2020 신인상은 서종현 시인(‘ㄱ’ 외 4편), 하시안 시인(‘파일의 방식’ 외 4편)에게 돌아갔다. 수상자는 각각 상패와 상금 100만원을 받는다.
이 상은 ‘현대시학’ · 현대시학사가 주최하고 전봉건문학상·현대시학 작품상 운영위원회가 주관, 금보성 아트센터가 후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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