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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아버지들 / 이온정

 

 

그때 그곳의 가장들은 모두 얼굴이 검었다  지하가 어두웠고 무거운 지하의 힘으로 나라도 사람들도 살아가는, 도처가 검은 색으로 발광되던 때였다.

 

여자들은 땅속에서 올라온 탄 덩이와 돌을 분간해내는 선탄부 일로 검은 화장일색이었다 다른 곳보다 검은 밤이 더 길었던 곳, 갱부의 헬멧엔 아스라한 은하의 별들이 매달려 있었지만 별들이란 꼭 멀리 있는 게 아니어서 눈앞의 어둠을 밝히는 데도 급급했다

 

 굳세게 달려간 은하 갱도 650,* 등에 걸머진 막장마다 세우고 금길 뚫는 발파뜸은 서슴지 않는,

 

은하계로 가는 길은 좁고도 멀었다

 

검은색은 힘이 세었고 흰색은 비웃거리에 불과하던 시절, 광산미**와 가다오리***로는 성에 안 차는지 얄팍한 간주마저 뭉텅뭉텅 잘라 먹다 끝내는 이색의 동색이 혈전을 벌이던 곳,

 

방전 마스크를 쓴 아버지들의 채굴기, 지금도 깊은 갱도 하나씩 숨결 사이에 숨겨 놓고 육탈의 끄트머리에서 컹컹 검은 기침을 하며 별무리처럼 허공에 떠 있는 것이다

 

 

* 갱의 수

** 광부들에게 월급 대신 공급하는 가장 품질이 낮고 값싼 쌀

*** 한 주마다 갑, 을, 병방 순서로 교대하다 주휴일이 안 날 때는 잇달아 하는 근무 

 

 

 

수상한 시절

 

nefing.com

 

 

시 부문 당선작인 이온정의 검은 아버지들3편은, ‘갱부의 헬멧아스라한 은하의 별들을 보려는 노력과 함성에서 아직도 귀에 광장깃발의 세월을 담고 농꾼으로 살아가고 있는 난청’ ‘천수만 씨지지직거리는세월을 한 편의 시에 오롯이 담아보려는 노력 등이 돋보인다. 과거가 결코 현재와 단절될 수 없고 결국 미래의 이야기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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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러코스트 / 이온정

 

 

놀이 공원엔 비명이 꽃핍니다

도대체 어떤 믿음이 저렇게

비명을 질러대는 걸까요

믿음은 힘이 세고

구심력과 원심력에 매달려

아찔한 생을 소진하고 있는 걸까요?

밖으로 튀어 나갈 수 없는 이 놀이는 무섭습니다

현기증을 다독이며 회전하는

공중의 수를 서서히 줄이기로 합니다

훌라후프처럼 돌리고 돌리던

저녁의 둘레를 줄이면

둥근 공포는 야광으로 빛날까요

노랗게 질릴수록 안전 운행을 믿지만

믿어서 더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힘이 센 믿음에서 이탈하고 싶지만

굴곡의 운행은 중도하차를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존재의 끈을 놓지 않고

기어이 튕겨나간 방식으로 지킨 일생이라면

저렇게 즐거워도 됩니다

멀미를 추스르며

현란한 굴레를 휘돌리던 바퀴들의 공중

즐겁던 아비규환이 조용합니다

어떤 절정도 저렇게

가볍게 내려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놀이기구 밑엔 비명들이 즐비하고

비명은 즐거움과 고통의 두 가지 방식입니다

구심력으로 밀고 원심력으로 배신당하는

이 아찔한 일생의 놀이를

아이들은 일찍부터 배우려 합니다

 

 

 

 

[당선소감] 時의 끈 잡고 고마운 이들에게 빚 갚아갈 것

 

고백하자면 시를 쓰면서 알게 된 사물의 의인성이 두려웠다. 실상과 허상이 손잡고 조곤조곤 말을 걸어올 때 나의 오래된 종교는 슬쩍 나를 눈감아주기도 했다. 늘 그랬듯이 신춘으로 보낸 시들의 안부가 틈틈 궁금하긴 했지만 잊은 듯 일상에 바빴다.

그리고 낯선 부재중 번호. 믿은 건 아니었지만 어쩌면 믿음보다 더 힘이 셀 것 같은 시는 강산이 두 번 바뀌고도 남은 굴곡진 날들의 중도하차를 결국 용납하지 않았다. 고맙고 또 고마웠다.

아주 오래 전 딱 이맘 때, 유년의 친구를 만났었다

“나는 돈을 열심히 벌 터이니 너는 시를 열심히 써라.”

산골의 차가운 눈밭에서 내민 하얀 봉투엔 볼펜 사서 쓰라는 따뜻한 정이 몇 장 겹쳐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참 많은 이들에게 빚을 졌다. 목적지에 이르려면 어지럽고 멀미나는 롤러코스트를 얼마나 더 타야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일생 시의 끈을 잡고 즐겁게 빚을 갚아 나가리라.

일일이 호명할 수 없이 많은 정겨운 이름들과 시를 쓰면서 왜 시인이라 부르지 말라 하냐고 묻던 나의 보물 1호 열이, 늦었단 생각 들지 않도록 축제의 장 앞자리로 당겨주신 경상일보와 김재홍, 이영주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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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로 말하기 방법 체득해 보여준 작품

예심을 거친 74편의 시를 공들여 읽었다. 단단한 구조를 이뤄내고 있는 작품들도 있었지만 아직 시의 어법을 찾지 못한 작품들도 많았다. 시는 독창적인 말하기 방법의 하나다. 그냥 떠오르는 심회를 글로 쓰는 말하기가 아니라 지극히 절실한 직관이나 영감을 잘 짜여진 언어로 구조화해내는 특이한 말하기의 방법이다. 응모작들을 읽으면서 느낀 소회 중 다음의 두 가지를 지적해 두고자 한다.

우선, 시는 절실한 표현 의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사무치는 긴장을 지닌 시적 제재를 찾았을 때를 기다려 글을 써야 한다. 시의 표현 의도가 중층적 암유나 의도적 모호성을 추구한 것일 때에도, 독자가 깊은 혜안으로 접근해 갔을 때 금강석처럼 견고하면서도 빛나는 광휘의 표현 의도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시가 좋은 시다.

그리고 응모작들이 너무 헤프게 말들을 쓰고 있었다. 정제되지 않은 말을 쓰다 보니 시의 길이가 지나치게 길어진 작품들이 많았다. 시의 길이가 길어질 수도 있지만 꼭 필요한 말들의 결집이어야 하는 것이다. 시는 무잡한 상념의 나열이나 욕구불만의 배설물이어서도 안 된다.

‘롤러코스트’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롤러코스트’의 작자는 시로 말하기의 방법을 성실히 체득해 보여줬다.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이 당면한 위난의 상황을 ‘롤러코스트’의 ‘원심력’과 ‘구심력’의 논리를 차용해 보여줬다. ‘롤러코스트’는 궤도열차라고 부르는 놀이 기구다. ‘청룡열차’나 ‘은하열차’라고도 부르는 그것이다. 고속으로 달리는 열차가 휘돌면서도, 거꾸로 매달린 사람이 떨어지거나 튕겨나가지 않는 것은 밖으로 튕겨나가려는 ‘원심력’이나 중심으로 빨려 들어오려는 ‘구심력’ 때문이다. ‘롤러코스트’에 탑승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없이 궤도열차의 운행 방식에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다. ‘롤러코스트’의 시인은 놀이기구에 탑승한 채 자신의 자유의지를 던져버리고 살아야하는 현대인의 난망한 상황을 보여주었다. 쉼 없이 노력해서 훌륭한 시인으로 대성하기를 바란다.

마지막까지 심사자의 눈길을 끌었던 응모작 중 ‘얼룩말 미싱’ ‘밑돌’ 등이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얼룩말 미싱’은 경쾌하고 선연한 이미지를 구사할 수 있었지만 불필요한 부연이 눈에 띄었으며, ‘밑돌’은 착상의 새로움이 돋보였으나 공감을 불러내는 힘이 약했다.

심사위원 이건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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