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 나무 / 정지윤
그들의 발소리는 너무 조용하여
먼 훗날 겨우 발견될 뿐,
아르볼 께 까미나(arbol que camina)
태양을 찾아가는 나무의 뿌리는
아마존의 고대 지도를 기억한다
끝과 시작이 맞닿은 유랑
기억을 더듬는 긴 촉수의 뿌리들은
수십 개월 느리게 이동한다
걷는 나무에게 숲은 한낮 궤도일 뿐
달과 달 사이로 시간이 흐른 뒤
숲은 파헤쳐졌다
나무들은 뿌리 앞에서 뒤틀림을 멈춘다
태양을 훔치는 뿌리들은
제 뿌리를 등 뒤에 남기며 다시 앞을 향해 걷는다
숲을 향해 숲이 되기 위해 걷는 일
아마존을 느린 걸음으로 가는 아마존의 나무들
언젠가 숲이 초원에 이르는 날
절룩거리며 걸어 나와
제 그림자와 뒤꿈치에 박힌 상처들을 전할 것이다
나는 잠시 멈춰선 채
먼지 같은 시간을 바라다본다
고통은 크기만큼 가벼워지는 것이어서 깔깔거리며
저마다 제 이름을 깊은 곳으로 불러들인다
아르볼 께 까미나(arbol que camina)
[당선소감] 직관·초월로 빛나는 언어의 집…따뜻한 시 쓸 터
시가 오는 길을 늘 열어두고 기다릴 겁니다.
알 수 없는 이끌림의 자리에 시가 있었습니다.
앎으로 가득한 세계를 넘어 직관과 초월로 빛나는 언어의 집으로 이끌어 준 수많은 질문과 질문 끝의 닫힌 문들, 그러나 그 닫힌 문이 곧 열린 공간의 시작임을 이제 압니다.
이미지와 의미들과 숱한 상황들을 붙잡고 표현하기보다 그것들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일은 아직 멀지만 이제 조급해하지 않겠습니다.
춥고 힘든 계절을 견디고 있는 이들에게 미약하나마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삶의 온기가 느껴지는, 이 산과 저 산의 봉우리를 깊게 울고 가는 시를 쓰겠습니다.
넓고 깊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나침반이 되어 주신 이영진 선생님 고맙습니다.
귀한 자리에 설 수 있게 손을 잡아주신 심사위원님과 경상일보에 깊이 감사드리며 정진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심사평] 명징한 이미지로 내면세계 깊이있게 투시
응모된 작품 수준이 비슷하여 우열을 가려내기가 힘들었다. 대부분 산문적 요소가 많고, 시가 지녀야 할 함축성이 없으며, 문장이 장황하게 길었다.
최종적으로 선자의 관심을 끈 작품은 3편이었다. ‘물의 부스러기’ ‘사파리동네’ ‘걸어가는 나무’였다. ‘물의 부스러기’는 물을 꽃으로 인식하는 대상에 대한 시선은 돋보였으나, 사유의 깊이가 부족하고 평이한 점이 흠이 되었다. ‘사파리동네’는 인간의 삶을, 초원에서 먹이를 찾는 동물에 비유한 추상력이 좋았으나, 의인화와 서술적 표현이 지나쳐 산만했다.
이에 비하여 ‘걸어가는 나무’는 산만하지 않고 간결하며, 내면적 깊이도 있었다. 식물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태양을 찾아가는 나무의 뿌리가 수 십 개월 느리게 이동하는 일월의 섭리나, 숲이 되기까지의 상처와 고통을 감내하는 과정을 무리 없이 전개하고 있다. 특히 대상과 내면의 등가적 유추가 섬세하며, 이미지가 청신하여 신뢰감이 갔다. 신인에게는 자기만의 화법과 개성적 표현력이 있어야 한다. 이해하기 힘들며 장황하고 모호한 시가 많아진 요즈음 한국시단 풍토에, 명징한 이미지로 내면세계를 깊이 있게 투시한 작품은 아주 드물다. ‘걸어가는 나무’는 언어가 간결하고, 투명한 이미지가 환기해내는 전이적 상상력을 부여하는 능력을, 중요한 가능성으로 인정하여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당선을 축하한다.
- 심사위원 : 권달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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