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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 이성부

 

 

가까이 갈수록 자꾸만 내빼는 산이어서

 

아예 서울 변두리 내 방과

 

내 마음속 깊은 고향에

 

지리산을 옮겨와 모셔놓았다

 

날마다 오르내리고 밤마다 취해서

 

꿈속에서도 눈구덩이에 묻혀 하우적거림이여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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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들의 어렵고 고통받는 삶을 작품 속에서 여러 형태로 그려낸 시인으로, 개인의 행복이나 불행이 사회와 무관하지 않다는 인식 아래 소외된 존재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민중시를 썼다. 1980년대 말 이후에는 산(山)과 산행(山行)을 소재로 한 시를 주로 쓰고 있다. 1960년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 경희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9년 〈한국일보〉 기자로 입사해 〈한국일보〉와 〈일간스포츠〉에서 홍보부, 생활부, 사회부, 문화부 부장 및 편집국 부국장을 지내고 1997년 사직했다.

 

1962년 〈현대문학〉에 〈열차〉 등으로 추천 완료되어 등단했고,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우리들의 양식〉이 당선되었다. 〈이성부 시집〉(1969), 〈우리들의 양식〉(1974), 〈백제행〉(1976), 〈전야〉(1981)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는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과 서민의 정한을 담아내는 사실주의 시로서, 민중적 차원의 보편성을 획득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으며 작품활동을 중단하고 산행에 나서, 사회구조의 부조리와 폭력에 대한 절망, 자기학대와 죄의식이 역사의 상처와 만나면서 어떻게 제자리를 찾는가를 성찰하였고, 이후 산에 얽힌 역사뿐만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살이를 온전히 담아내는 시를 쓰고 있다.

 

〈빈산 뒤에 두고〉(1989), 〈야간산행〉(1996), 〈지리산〉(2001),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2005), 〈도둑산길〉(2010) 등은 그 결과물이다. 현재 그에게 있어서 '산'은 한국인의 삶과 역사, 문화의 중요한 무대이자 배경이며 삶의 터전이자 의식 형성의 원형적 상징이다. 시집 이외에 산문집 〈산길〉(2002)을 냈다.

 

현대문학상(1969), 한국문학작가상(1977), 대산문학상(2001), 편운문학상(2005), 가천환경문학상(2007) 등을 수상했다.

 

 

 

도둑 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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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문학상’ 수상한 이성부 전 일간스포츠 문화부장

 

“가까이 갈수록 자꾸 내빼버리는 산이어서
아예 서울 변두리 내 방과
내 마음속 깊은 고향에
지리산을 옮겨다 모셔놓았다
날마다 오르내리고 밤마다 취해서
꿈속에서도 눈구덩이에 묻혀 허위적거림이여”

지난달 31일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이성부 시인(사진)은 자신이 지리산에 대해 갖는 애틋한 사랑을 이렇게 읊었다. 97년 일간스포츠 부국장 겸 문화부장을 끝으로 언론계 생활을 마감하고 백두대간의 시적 형상화에 주목하고 있는 이씨는 “너무 기쁘다”는 말로 수상소감을 대신했다.

대학 재학시절인 1962년 현대문학에 ‘열차’ 등의 시가 추천되어 등단한 이씨는 그 뒤 60∼70년대에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신문기자로서 80년 광주를 겪으며 그는 언어에 대한 절망,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노여움과 서러움 때문에 한동안 시의 세계를 떠나 있었다.

그는 “시와 언어와 문자를 경멸하는 시를 몇 편 썼으나 가슴만 더 답답해질 뿐이었다”면서 “그 때문에 아예 시쓰기를 단념하고 신문사의 기획물에만 매달려 숨어있는 예인이나 장인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삶을 신문에 쓰는 것으로 견디기 어려운 세월을 보냈다”고 말했다.

이런 그에게 다시 시를 쓰게 만들어준 것은 ‘산’이었다. “파충류와 같이 꿈틀거리기만 하던 내게 어느날 산이 왔다. 내가 산에 간 것이 아니라 산이 나에게 왔다.” 앞사람의 발뒤꿈치만 보고 오르던 직장 산악회의 무덤덤한 산행을 1년쯤 한 뒤 그는 비로소 산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 책상머리에 앉아서도 산악지도만 들여다보면 가슴이 설레였고 지도와 나침반과 관련 책들을 매만지는 시간이 많아졌다”면서 “광화문 네거리에서 바라보이는 북한산의 보현봉이 나를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고 당시의 자신을 회상했다.

이렇게 ‘산’과 만나게 된 그는 이후 10여년간 산에만 매달려 지내다 90년을 전후해 산 체험을 바탕으로 한 시와 에세이 등을 발표했다. 그리고 지리산에서 백두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을 올라 감동과 느낌을 시로 담아내려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 첫번째 결실이 이번에 수상의 영예를 안게 된 시집 <지리산>인 셈.

그는 북한의 산들을 꼭 가보고 싶지만 여러 가지 장애가 많아 마음이 편치 못하다. 그는 “이제 60이 다 된 나이에 너무 큰 목표인 것 같기도 하지만 자유와 고독과 야성을 찾아가려는 이 행위야말로 나의 시가 가야 하는 길과 닮아 있는지 모른다”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그는 “남쪽의 백두대간은 지금 80% 정도는 오른 것 같다”면서 “그 사이 작업이 신통치 못하고 성에 차지 않지만 ‘내가 걷는 백두대간’의 작업이 완성될 때까지 더 열심히 하고 부지런해져야겠다고 다짐한다”면서 감사의 소회를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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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상] 도둑 산길 / 이성부

 

 

신새벽 벼랑에 엉클어진 철조망을 딛고 넘어

칠팔 년 전 내려왔던 산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가지 말라는 길을 가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심하게

가슴 두근거리고 불안하다 죄를 짓는 일이 이럴진대

오늘 하루 산행이 무사할지 제대로 될지

걱정이 슬그머니 배낭을 잡아 끌어내린다

길은 풀섶에 가려져 끊어질 듯 희미하고

나뭇가지들이 제멋대로 뻗어나서

자꾸 앞을 가로막는다 사는 일도 이렇게

갈수록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많아진다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본다

내가 훔친 산길이 고요하게 흔들거린다

길이 끝나는 데서 넓은 너덜겅이 가파르다

까마득한 비탈 바위덩어리들을 밟거나 피해 가거나 건너뛰거나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면서 위로만 올라간다

전에 내려왔을 적에는 미처 몰랐는데

너덜 오름길이 이리 팍팍하다는 것 오늘 알겠구나

평생을 쌓아 올린 욕망이 무너져 내린다면

치솟는 꿈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린다면

이렇게 나뒹굴어 널브러지고 눈 부릅뜬 몰골이 될까

이 폐허로 무엇을 만들겠다고 저리 이빨들을 갈고 있을까

세찬 바람에 내 몸이 휘청거린다

여기서 자칫 떨어진다면 저 깊이 모를 어둠 속으로

내가 먹혀들어 가 사라질 것은 뻔한 일

부엉이바위에서 그가 역사 속으로 몸을 던져버린 일도

저 치욕의 끊임없는 광풍이 등 뒤에서 그를 자꾸

떠다밀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결단 다음의 짧은 허공에서 그는 눈을 감은 채

무엇을 보았을까 과연 세상은 아름다웠을까

아아 죽음의 한순간은 생각건대 순결한 것인데

나는 살겠다고 기를 쓰며 바위 모서리를 잡아당긴다

나는 아무래도 시정잡배들과 다를 것이 없나 보다

세계의 마음을 사로잡기는커녕

내 한 몸 추스르기에도 이리 쩔쩔매는구나

길을 찾아 다시 숲속으로 접어든다

사람의 발자국이 얼마나 많이 쌓여져서

이 험한 곳에 이런 차분한 길이 되었을까

이렇게 몇 차례 너덜과 숲길을 오르내리다가

벼락 치듯 비명을 내지르며 달아나는 멧돼지 내외

땅을 흔드는 육중한 덩치의 저 민첩함

그를 따라 흩어지는 얼룩무늬 새끼들 예닐곱 마리

나도 놀라고 두려워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긴다

자연은 말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저절로 살아 커서

저희들끼리 살랑살랑 춤추며 노래한다

이것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느낀다

허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의 욕심은 끝이 보이지 않아

사람의 뜻대로 개입하고 간섭하고 파괴하고

깊이 들어가 소리와 내음과 흔적을 퍼뜨리면서부터

녀석들은 집주인이 길손에게 쫓겨나듯 터전을 잃어버린다

나는 사람이 만든 죄에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잠시나마 녀석들의 평화를 깨뜨렸다는 데서

이 자연에게 칩입자가 됐다는 생각으로 송구스럽다

놀라 도망쳐 숨죽이고 있을 녀석들이 짠하다

발걸음 재촉하여 마지막 너덜에 이르렀다

누군가가 돌들을 쌓아 갈지자로 길을 만들어놓았다

고맙기도 하고 부질없기도 하다

문득 사람 낌새를 느끼며 위를 쳐다보니

시꺼먼 젊은 사내 하나 멈추어 서 있다

나를 내려다보며 인사를 한다 그도 혼자다

나 같은 녀석이 또 있구나 안심하고 몇 마디 말을 나누고

악수를 한 다음 헤어져 간다

오늘 하루 처음 만난 사람이

내가 왔던 길을 내려가며 사람 내음을 보탤 것이다

이제부터가 공룡능선이다*

금지된 산길 구간은 지났으니 붙잡힐 일은 없겠으나

내 마음은 여전히 내가 도둑놈이어서 맑지 못하다

다시 가슴 벌렁거린다

벌써 한나절이 지나갔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쉬엄쉬엄

찰지게**올라가야 한다

 

* 설악산 마등령에서 무너미고개 사이의 능선, 외설악과 내설악을 가르는 경계선으로, 백두대간 마루금의 한 부분이다.

** ‘차지게의 전라도 사투리.

 

 

 

 

도둑 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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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투구꽃 / 최두석

 

 

사노라면 겪게 되는 일로

애증이 엇갈릴 때

그리하여 문득 슬퍼질 때

한바탕 사랑싸움이라도 벌일 듯한

투구꽃의 도발적인 자태를 그려본다

 

사노라면 약이 되면서 동시에?

독이 되는 일 얼마나 많은가 궁리하며

머리가 아파올 때

입술이 얼얼하고 혀가 화끈거리는

투구꽃 뿌리를 씹기도 한다

 

조금씩 먹으면 보약이지만

많이 넣어 끓이면 사약이 되는

예전에 임금이 신하를 죽일 때 썼다는

투구꽃 뿌리를 잘라 잘게 씹으며

세상에 어떤 사랑이 독이 되는지 생각한다

 

진보라의 진수라 할

아찔하게 아름다운 꽃빛을 내기 위해

뿌리는 독을 품는 것이라 짐작하며

목구멍에 계속 침을 삼키고

뜨거워지는 배를 움켜쥐기도 한다

 

 

 

 

투구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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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시와시학이 강진군 영랑기념사업회와 공동 주관하는 제9회 영랑시문학상 본상 수상자로 이성부 시인이 선정됐다. 수상작은 시집 '도둑 산길'이다. 그리고 우수상은 시집 '투구꽃'의 최두석 시인이 선정됐다.

 

심사위원회는 산행을 통해 얻은 생명에의 깨달음과 자기성찰을 원숙한 필치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시상식은 다음 달 30일 오후 7시 강진 영랑생가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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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비 / 이성부

 

 

감악산 정수리에 서 있는 글자가 없는 비석 하나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너무 크고 많은 생 담고 있는 나머지

점 하나 획 한 줄도 새길 수 없었던 것은 아닌지

차마 할 수 없었던 말씀을 지녀

입 다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도 아니라면 세상 일 다 부질없으므로

무량무위를 말하는 것은 아닌지

저리 덤덤하게 태연할 수 있다는 것을

저렇게 밋밋하게 그냥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도 뒤늦게 알아차렸습니다.

 

 

 

도둑 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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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모국어 혈맥 타고 무위이화공초정신 구현

 

올해는 국권 침탈에 의한 모국어의 수난이 시작된 지 100년을 맞는 해다. 저 사나운 어둠이 나랏말씀과 내 나라의 글자를 무너뜨릴 때 이 겨레 정신의 혼불을 피워 아시아의 여명을 노래한 한국시의 선각인 공초 오상순 선생의 문학세계와 사상을 기리기 위해 1992년 공초문학상이 제정되었다.

 

구상, 박두진, 설창수 선생 등이 나서 제정한 공초문학상 운영세칙에는 지난 1년간의 발표 작품과 등단 20년 이상의 시력을 가진 시인을 대상으로 하며, 인품을 참조한다는 좀 특별한 조항도 있다.

 

18회 수상자는 시집 도둑산길을 출간한 이성부 시인으로 수상작은 백비’(白碑)가 선정되었다.

 

시력 50년을 맞는 이성부 시인은 1960년대 한국시의 백두대간을 등반한 이후 시대정신과 모국어의 깊은 혈맥을 타고 독보적 시 세계를 구축해 왔다. 특히 이번 수상작 백비가 실린 시집 도둑산길은 그의 반 세기 시업(詩業)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이룬 절정의 경지를 이루고 있다.

 

어느 한 작품도 저 웅휘했던 공초시와 맥락이 닿지 않는 것이 없지만 백비는 특히 무위이화(無爲而化·힘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변하여 잘 이루어짐)의 공초정신이 구현된 선시의 어법을 밟고 있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너무 크고 많은 생 담고 있는 나머지/ 점 하나 획 한 줄도 새길 수 없던 것은 아닌지에서 글자를 새기지 않아도 마음으로 읽고 전하는 불립문자의 진수를 담고 있다.

 

산과 더불어 생각하고 산에서 시를 떠올리는 산의 시인 이성부, 아무리 파헤쳐도 다 알아낼 수 없는 대자연의 장엄과 온 몸으로 부딪쳐 써내고 있는 시들은 그가 쏟아 부은 시간과 내딛은 발걸음만큼이나 이 땅의 모국어의 높은 탑을 쌓아가는 것이다.

 

수유리 빨래골에 장좌불와(長座不臥)하고 계실 공초께서 시 백비를 보시고 아마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며 크신 손을 내밀 것이다. 공초문학상에 빛을 더 해준 이성부 시인의 수상을 축하한다.

 

- 심사위원 임헌영 문학평론가, 신달자 시인·이근배 공초숭모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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