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작] 우물 / 권기만
목마를 때, 경주 박물관 간다
뜰 앞 우물에서
공손하게 물 한 바가지 떠먹는다
이 우물 앞에선 텅 빈 마음이 바가지다
조용히 눈 감으면
물이 고여와 넘친다
넘쳐흘러 하늘에 가 고인다
하늘 한 바가지 떠먹기 위해
새들은 몸속을 텅 비운다
누가 맨 처음 허공에 우물을 파고
청동의 치마를 둘렀을까
거꾸로 매달려 있어도
낭산 너머로 흘러가는 반월半月
우물 속에 잠겨 있다
때가 되면 텅 비어지는 몸을 들고
목울음까지 차오르는 에밀레
한 바가지 퍼서 월성月城이 젖도록
흐득흐득 마시다보면
우물도 달을 퍼서 마시고 있다
[가작] 탑골 / 윤승원
물소릴 밟으며 산을 오른다
대나무 숲 그림자 장삼처럼 펄럭이는 길을 지나면
달빛은 발아래 물비늘처럼 부서진다
옥룡암 돌다리를 건너 마중 나오는
보리사 저녁예불소리
산 아래서 길을 잃어버리는 날이 많았던 나는
발자국을 벗고 부처바위 밑에 쪼그려 앉는다
무서움도 모르고 주변을 살피다가
들쭉날쭉 소망을 쌓은 탑재들을 본다
탑이 많아 탑골이라 했던 것일까
은하처럼 널브러져 있는
달빛 돌조각들을 주워 탑을 쌓는다 한 기단, 두 기단
탑은 어느새 삼나무 우듬지 위로 올라서고
구름이 합장하듯 찰주에 걸리고
바람이 편종 소리로 산기슭을 적시면
꽃이 피는 것처럼 탑들이 피어난다 탑골엔
층층의 나무며 크고 작은 키의 풀,
높고 낮게 나는 새들이 품고 있는 탑들이 자라고 있다
저녁이 되면 배반리 사람들 고단한 머리맡에
저마다의 소망을 쌓기도 하는,
산 아래 불빛들이 어둠을 토닥거리는 시간
누가 내 안에 마애불하나 돋을새김하고 있다
[심사평]
‘우물 외’, ‘탑골 외’, ‘땅속의 여자 외’를 투고한 세 분의 작품이 당선을 겨루었는데, 고심 끝에 ‘우물’을 당선작으로, ‘탑골’을 가작으로 결정하였다.
당선작은 종소리의 파문을 출렁이는 우물물로 환치시키는 능력이 탁월했고, 비움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정신을 일깨움으로써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정신적 기갈을 채우는 데도 훌륭히 기여하고 있다. 작품의 완성도와 울림, 스케일도 나무랄 데가 없다. 함께 투고한 두 편의 시도 이 분의 탄탄한 실력을 보증하고 있었다. 다만 사물과 비유가 약간 어긋나면서 시적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면과 군데군데 보이는 타성화 된 언어는 경계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탑골’은 좋은 작품이었으나 언어가 좀 절제될 필요가 있었고, 대상을 완전히 자기화하는 데 약간 부족함이 있어 보였으며, ‘땅 속의 여자’는 과거에 갇혀 있는 흠이 있었다. 응모자 모두는 ‘신라정신’은 박제화된 것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 삶과 정신 속에 스며 있으며 나날이 갱신되고 승화되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월명문학상이 문인지망생들의 더 많은 사랑을 받는 문학상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이임수, 손진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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