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당선작] 우물 / 권기만

 


목마를 때, 경주 박물관 간다

뜰 앞 우물에서

공손하게 물 한 바가지 떠먹는다

이 우물 앞에선 텅 빈 마음이 바가지다

조용히 눈 감으면

물이 고여와 넘친다

넘쳐흘러 하늘에 가 고인다

하늘 한 바가지 떠먹기 위해

새들은 몸속을 텅 비운다

누가 맨 처음 허공에 우물을 파고

청동의 치마를 둘렀을까

거꾸로 매달려 있어도

낭산 너머로 흘러가는 반월半月

우물 속에 잠겨 있다

때가 되면 텅 비어지는 몸을 들고

목울음까지 차오르는 에밀레

한 바가지 퍼서 월성月城이 젖도록

흐득흐득 마시다보면

우물도 달을 퍼서 마시고 있다

   

 

 

발 달린 벌

 

nefing.com

 

 

 

[가작] 탑골 / 윤승원

 

 

물소릴 밟으며 산을 오른다

대나무 숲 그림자 장삼처럼 펄럭이는 길을 지나면

달빛은 발아래 물비늘처럼 부서진다

옥룡암 돌다리를 건너 마중 나오는

보리사 저녁예불소리

산 아래서 길을 잃어버리는 날이 많았던 나는

발자국을 벗고 부처바위 밑에 쪼그려 앉는다

무서움도 모르고 주변을 살피다가

들쭉날쭉 소망을 쌓은 탑재들을 본다

탑이 많아 탑골이라 했던 것일까

은하처럼 널브러져 있는

달빛 돌조각들을 주워 탑을 쌓는다 한 기단, 두 기단

탑은 어느새 삼나무 우듬지 위로 올라서고

구름이 합장하듯 찰주에 걸리고

바람이 편종 소리로 산기슭을 적시면

꽃이 피는 것처럼 탑들이 피어난다 탑골엔

층층의 나무며 크고 작은 키의 풀,

높고 낮게 나는 새들이 품고 있는 탑들이 자라고 있다

저녁이 되면 배반리 사람들 고단한 머리맡에

저마다의 소망을 쌓기도 하는,

산 아래 불빛들이 어둠을 토닥거리는 시간

누가 내 안에 마애불하나 돋을새김하고 있다

 

 

 

 

 

[심사평]

 

‘우물 외’, ‘탑골 외’, ‘땅속의 여자 외’를 투고한 세 분의 작품이 당선을 겨루었는데, 고심 끝에 ‘우물’을 당선작으로, ‘탑골’을 가작으로 결정하였다.

 

당선작은 종소리의 파문을 출렁이는 우물물로 환치시키는 능력이 탁월했고, 비움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정신을 일깨움으로써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정신적 기갈을 채우는 데도 훌륭히 기여하고 있다. 작품의 완성도와 울림, 스케일도 나무랄 데가 없다. 함께 투고한 두 편의 시도 이 분의 탄탄한 실력을 보증하고 있었다. 다만 사물과 비유가 약간 어긋나면서 시적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면과 군데군데 보이는 타성화 된 언어는 경계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탑골’은 좋은 작품이었으나 언어가 좀 절제될 필요가 있었고, 대상을 완전히 자기화하는 데 약간 부족함이 있어 보였으며, ‘땅 속의 여자’는 과거에 갇혀 있는 흠이 있었다. 응모자 모두는 ‘신라정신’은 박제화된 것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 삶과 정신 속에 스며 있으며 나날이 갱신되고 승화되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월명문학상이 문인지망생들의 더 많은 사랑을 받는 문학상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이임수, 손진은 교수

 

728x90

 

 

우물 / 최영신

 

 

무너진 고향집 흙담 곁에 고요로 멈추어 선 우물 속을 들여다본다. 물을 퍼올리다 두레박 줄이 끊긴 자리, 우물 둘레는 황망히 뒤엉킨 잡초로 무성하다. 그 오래 올려지고 내려지다 시신경이 눌린 곳, 깜깜한 어둠만 가득 고여 지루한 여름을 헹구어낸다. 하품이 포물선처럼 그려졌다 사라진다. 내가 서서 바라보던 맑은 거울은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몇 겹인지 모를 시간의 더께만 켜켜이 깊다.

 

지금처럼 태양이 불 지피는 삼복더위에 물 한 두레박의 부드러움이란, 지나간 날 육신의 목소리로 청춘의 갈증이 녹는 우물 속이라도 휘젓고 싶은것. 거친 물결 미끈적이는 이끼의 돌벽에 머리 부딪히며 퍼올린 땅바닥의 모래알과 물이 모자란 땅울림은, 어린 시절 나를 놀라게 하고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과 물로 아프게 꼬여 간 끈, 땅 속으로 비오듯 돌아치는 투명한 숨결들 하얗게 퍼올리는 소녀, 시리도록 차가온 두레 우물은 한 여자로 파문 지는 순간부터 태양을 열정으로 씻고 마시게 된 것이었다. 밤이면 하늘의 구름 한 조각도 외면한 채 거울 속은 흐르는 달빛, 가로 세로 금물져 가는 별똥별의 춤만 담았다. 그 속에 늘 서 있는 처녀 총각, 어느 날 조각이 난 물거울 속 목숨은 바로 그런게 아름다움이라고 물결치며 오래 오래 바라보게 했다.

 

고인 물은 멈추지 않고, 시간의 때를 축척한 만큼 새카맣게 썩어갔다. 소녀가 한 여인으로 생을 도둑질당하는 동안, 우물도 부끄러운 모습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퍼올리고 내리던 수다한 꿈들이 새로운 물갈이의 충격으로 흐르다 모두 빼앗긴 젊은 날의 물빛 가슴, 습한 이끼류 뒤집어 쓴 채 나를 바라본다. 쉼없이 태어나고 흘러가는 것도 아닌, 우물 속의 달빛을 깔고 앉아서.

 

무너진 고향집 흙담 곁에 그리움으로 멈추어 선 우물 속, 젊은 날의 얼굴을 비춰본다. 생은 시 한 줄 길어 올리기 위해 두레박줄이 필요했던가. 인적이 끊어지고 잡초만 무성타한들 그 아래 퍼올려지고 내려지던 환영들, 물그리메의 허사로 증말하는가. 깜깜한 우물 속 어디선가 끝없는 고행의 길로 일생을 바친 소녀의 빈 웃음들이 둥글게 받은 하늘에 기러기 한 줄 풀어 놓고 있었다.

 

그대 우물은 아직도 갈증의 덫에 걸려 있는가?

 

 

 

 

2000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심사평] 새천년 여는 도전 정신 돋보여

 

새천년에는 새 시를? 언어는 그대로 있으면서 끊임없이 새로워진다. 마치 생명과도 같다. 그 새로와지는 변화의 중심에 시인이 있을 수 있다면 그 민족의 언어는 행복하다. 그런 의미에서 당선작 우물(최영신)이 결정되었다. 물론 이 작품이 우리 모두의 행복감을 충족시키지 않을는지 모르나 적어도 이 작품에는 새로운 도전이 있다. 이 도전은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된다.

 

무엇보다 가볍게 튀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고답적이지 않다. 그다음으로 이 시는 문제의식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시 정신을 동반하고 있다. 끝으로 상찬되어야 할 점이 있다면, 적절한 관찰과 경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삶 전체를 투사하는, 용해된 정열이랄까 하는 것이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모든 매력들은 가령 그 오래 올려지고 내려지다 시신경이 눌린 곳, (...) 하품이 포물선처럼 그려졌다 사라진다는 표현과 같은 데에서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제 얼굴을 드러낸다. 추억도 복고도 아닌 자기성찰로서 우물의 이미지가 이만큼 빚어지기란 결코 쉽지 않다. 격언의 풍자」 「흙을 바라보며등 다른 작품들도 우수하다. 독특할 개성의 시인으로서 자기 세계를 일구어 나가기바란다.

 

당선작을 양보한 작품들로서 바다가 나를 구겨서 쥔다(조정), 물방울 하나에도(한용숙) 등이 있었음을 부기한다.

 

- 심사위원 황동규·시인, 김주연·문학평론가

 

 

 

우물

 

nefing.co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