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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 댁 할머니 손가락엔 구구단이 산다 / 오서윤

 

 

동호 댁 할머니 손가락엔 수상한 장부가 산다

계산법을 알 수 없는 덧셈과 뺄셈이 숨어 있다

수리에는 없지만 가끔 세상에서 발견되는 셈법

옆집 상처와 몹쓸 사람에겐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숫자를 솎아내는 속 깊은 구구단이다

 

할머니의 손가락엔 천기를 읽는 두꺼운 달력이 산다

팥꽃이 피는 시기와 산을 넘어오는 장마

콩이 여물어 갈 때마다 할머니는 더 바쁘다

복잡한 족보와 길흉의 절기와

식구들의 생일과 오래전에 죽은 나이도 다 기억한다

 

갑골문자처럼 단단한 할머니의 손등

주판알 튕기듯 못생긴 손가락 하나하나 세어 왕복할수록

할머니의 곳간이 풍성하다

이른 봄 멀리서 오는 소식을 감지하던

손가락이 파르르 떨릴 때도 있지만

어느새 넓적한 손등이 어지러운 마음을 덮어버린다

 

학교 문 앞에도 못 가본 주먹구구식이지만

할머니의 몸엔 여러 곳의 교문이 있다

차곡차곡 쌓여있는 이름 없는 할머니의 졸업장

 

동호 댁 할머니 돌아가시고

그 집 식구들 모두 가막눈이 되었다

 

 

 

- 오서윤 시집 <체면>(시작시인선 0413)

 

체면

 

deg.kr

 

 

 

‘2021 목포문학박람회’ 목포문학상의 영예의 수상작품이 결정됐다.

시는 31일 김종식 목포시장,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대표이사, 채희윤 목포문학상 운영위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목포문학상 당선작을 발표했다.

국내 단일부분 최대상금 1억원인 장편소설 부문에는「보트 하우스」(이숙종, 64세)에게 수상의 영예가 돌아갔다.

△시 부문에는「동호 댁 할머니 손가락엔 구구단이 산다」(오정순, 64세) △희곡 부문에는「행진곡」(박소연, 58세), △문학평론 부문에는「돌봄의 위기 속에서 문학이 윤리를 말할 때」(강도희, 27세)가 선정됐으며 상금은 각 1천만원이다.

문학을 주제로 전국 최초로 개최되는 목포문학박람회(10.7~10)의 대표 프로그램인 목포문학상은 전국의 문학인과 해외 6개국(미국, 일본, 독일, 캐나다, 호주, 캄보디아) 교민 등 총 1,136명이 3,728편을 응모해 뜨거운 참여 열기 속에서 진행됐고, 한층 높아진 성장성과 잠재력, 브랜드가치를 나타냈다.

「보트 하우스」는 문장의 묘한 리듬으로 작품이 필요로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능력, 감각과 사물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데 성공한 문체, 원거리에 사회적인 상처를 배치해 두고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쓸쓸하고도 담담한 삶을 그려내려는 작가의 윤리적 태도 등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작가 이숙종씨는 “미국 허드슨 강가의 별장인 보트하우스에 모인 사람들의 불, 물, 꿈, 영혼에 관한 이야기다. 이들이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다양한 사건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은희경 장편소설 심사위원장을 비롯한 심사위원들(이승우, 우찬제, 김별아, 김형중, 편혜영)은 “1억원이라는 상금과 목포문학상의 향방을 가르는 첫 회 심사라 부담이 컸다. 모든 심사위원이 3회에 걸쳐 심사를 진행했고, 본심에 오른 9편의 작품을 5번 투표하는 등 숙고 끝에 최종 수상자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어 ”목포문학상을 한국 굴지의 문학상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목포 출신의 한국 문학사의 거목들을 기리는 최선의 방법은 ‘오로지 가장 우수한 작품을 선정하는 것’이라 믿고 예상 응모수의 두 배가 넘는 작품들을 읽으며 뜨거운 8월 한 달을 기꺼이 심사에 헌납했다”고 심사소회를 밝혔다.

향후 장편소설 수상작은 문학박람회 기간에 ㈜문학과 지성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된다. ㈜문학과 지성사는 최종 당선작 발표와 함께 목포지역 소외 계층 문학 꿈나무를 위해 출판 도서 605권을 시에 기증했다. 

목포문학상 시상식은 목포문학박람회 기간이자 한글날인 10월 9일 평화광장 해상무대에서 개최되며, 심사위원과 심사평은 목포문학박람회 홈페이지에서 9월 1일 확인할 수 있다.

김종식 시장은 “목포문학상에 보여준 국내외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감사드린다”면서 “수상자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 목포문학상 수상을 발판삼아 한국 문학을 넘어 세계 문학을 이끌어가는 작가로 성장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목포문학박람회는 ‘목포, 한국 근대문학의 시작에서 미래문학의 산실로’라는 슬로건으로 목포문학관, 목원동 일대, 평화광장 등 목포 전역에서 문학전시관, 4인4색문학제, 골목길 문학관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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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면 / 오정순

 


막, 죽음을 넘어선 지점을 감추려
서둘러 흰 천으로 덮어놓고 있던 익사자
최초의 조문이 빙 둘러서 있다

발을 덮지 않는 것은 죽은 자의 상징일까
얼굴은 다 덮고 발을 내놓고 있다
다 끌어올려도 꼭 모자라는 내력이 있다

태어날 때 가장 늦게 나온 발
저 맨발은 결국 물을 밟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복사기처럼 훑던 흰 천
끝내 남은 미련을 뚝 끊듯 발목에 걸쳐져 있는 체면
가시밭길을 걷고 있거나
아니면 용케 빠져나와 눈밭을 지났거나
물길을 걷다가 수습되어 왔을 것이다

발은 죽어서도 끊임없이 걷고 있어 덮지 않는 것일까
만약에 발까지 덮어놓았다면
자루이거나 작은 목선 한 척이었을 것이다
경계는 저 물 속이 아닌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둔 곳인지 모른다

발이 나와 있으므로 익사자다
고통도 화장도 다 지워진 얼굴은
체면이 없다
누군가 흰 천을 끌어당겨 체면을 덮어준 것이다

 

 

 

 

우주가 들어있는 작은 공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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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는 벅찬 동행이자 선물"

 

친구와 며칠 전에 본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결코 거창하거나 화려하지 않은 세계관이 던진 메시지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상이 마법이 되는 순간을 부러워하고 있을 즈음, 마법처럼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당선 통보였습니다. 삶의 단면에 몇 번은 마법과도 같은 기적이 끼어드는가 봅니다.


제게 아주 오래된 시간의 흔적이 있습니다. 이십대에 칠 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썼던 일곱 권의 일기장입니다. 누군가 그랬지요. 뭔가 해낼 거라고. 그러나 특별하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문학이라는 마법에 걸렸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3학년 때 당선된 대학 문학상은 영원히 마법에서 헤어나지 못할 거라는 더 강한 주문이었습니다. 오히려 나태해져가는 일상을 깨운 것은 바닥에 납죽 엎드려 무릎을 꿇은 채로 시를 썼던 백일장이었습니다. 시를 향한 저의 최초의 경배이자 초심이기도 하지요.


시는 벅찬 동행이었고 선물이었습니다. 또 나를 기다리는 시, 통증의 두께와 깊이밖에 내세울 게 없지만 더 세게 끌어안겠습니다.


작년에 경남신문 최종심에 올랐습니다. 올해, 제게 주신 당선의 영광이 누군가에게 용기와 도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모님과 남편과 두 아들, 두목회 동인, 이재무 선생님과 손광성 선생님, 선희 언니와 김주, 신공나라 문우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작품을 선해주신 심사위원님과 경남신문에 허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겸허와 초심을 잊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 드립니다.

 

 

 

 

[심사평] "인식의 힘 보여준 세심한 관찰"

 

응모작들은 대부분 일상성에 주목하고 있었다. 생활에 밀착하면서도 소통과 공감에 주력하는 시들이 많았다. 일상의 소소한 문제들을 내면화하여 구체적인 실감을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겠으나 타인의 삶과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점은 아쉬웠다는 것이 심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다양한 분야와 계층의 사람들이 투고하는 것이 신춘문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 응모작들을 통해 우리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성도와 신인으로서의 새로움, 진지하면서도 노력의 흔적이 엿보이는 작품을 선택하자는 합의를 거쳐 이서빈, 문민철, 오서윤 씨의 작품을 최종심에 올렸다.

이서빈 씨의 뒤집기는 유비적인 상상력을 사용하여 아이의 첫 뒤집기와 노모의 화투패 뒤집기를 겹쳐 놓음으로써 탄생과 소멸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비적 상상력이 주는 단순함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문민철 씨 작품의 경우 거침 없는 화법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시간과 기억의 문제를 자신만의 문체로 이끌어가는 힘도 좋았다. 신인다운 패기가 큰 장점이었지만 전체적인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 흠이었다.

심사자들은 어떤 이견도 없이 오서윤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택하였다. 오서윤 씨는 세심한 관찰력을 통해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인식의 힘을 보여주었다. 간결한 문체를 사용하고 시의 호흡을 잘 조절하고 있다는 점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당선작 ‘체면’은 익사자를 덮은 흰 천에서 삐져나온 발을 통해 삶과 죽음, 인간의 문제를 존재론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태어날 때 가장 늦게 나온 발’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가고 있으며, 발의 드러냄과 감춤이 인간의 근본적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통해 몸과 삶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시이다. 고통스럽지만 기쁜, 이중적이고 역설적인 시의 길에 들어선 것을 축하드리며 한국 시단을 빛낼 소중한 시인이 되시길 바란다.

 

 

- 심사위원 : 최영철 배한봉 장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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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공터의 풍경 / 오정순

 

 

공터에 내리는 비는 구겨진 절기의 줄기가 느릿합니다

버려진 액자가 있고

시든 난 한 포기가 비에 젖고 있습니다

일직의 빗줄기가 지나가고 뿌리를 잡고 있는 바위에

푸른 이끼라도 살아 날듯합니다

깨어진 유리에는 깨어진 햇볕이 어울리겠지요

반짝, 비가 갠 공복의 허공엔 햇볕이 따뜻합니다

소슬하게 바람이라도 불었는지

흔들린 난잎 주변에 먹물이 번져 있습니다

골목을 막 들어선 봄의 등 뒤로 아지랑이 배접이 구불구불하고

몇 년 아니, 몇 십 년 쯤 피어있었을

꽃대가 피곤해 보입니다

붉은 노을이라도 세 들어 있는지

낙관엔 오래 흔들린 악력握力이 흐릿합니다

 

낡은 시선만 가득한 풍경,

떠나 온 벽의 경사가 누워 있습니다

어쩌면 저 풍경의 크기만 한 흰 공터를

벽에 남겨 놓았을지도 모르지요

상실의 흔적들이란 저렇듯 각이 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공터의 담 벽이 비스듬히 그늘을 만들고 있고

어쩌다 풍경화 한 점 걸리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담 벽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공터의 배접으로 드러눕는 시간

흔들리는 그늘들은 모두 저녁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이제, 그 어떤 풍경도 이 액자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듯

캄캄해지고 있습니다

 

 

 

 

우주가 들어있는 작은 공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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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깨진 액자 유리 사이로 비가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핏물처럼 번져나가며 흐릿해지는 꽃과 낙관을 오랫동안 바라보았습니다. 누군가 간절하게 잡고 있던 것들이 사라지는 모습은 내게 하나의 풍경으로 남았습니다.

 

시를 쓰면서 언제나 어둠을 헤맸습니다. 늦은 시작이 어둠에 묻혀버리는 절망이 될까봐 새벽까지 깨어있는 날이 많았습니다. 이제 조금은 형체를 분간할 수 있다면 교만일까요. 수상이란 벅찬 감격을 잠시 호사를 누리듯 기뻐하면 안 될까요. 숨을 조였던 시간들이 일제히 푸른 이끼 같은 울음을 토해내려고 합니다.

 

이제 알겠습니다. 어둠 속에서 자주 넘어지지 말라고, 넘어져도 많이 다치지 말라고 발자국을 떼는 법을 알려주신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미덥지 않은 딸을 위해 늘 기도해주시는 부모님. 늦은 밤 스탠드 불빛에 눈이 부셔도 자는 척 해주는 나의 남편, 사랑하는 두 아들 대식, 윤식 그리고 나의 글 동지 덕희, 수정, 미자, 언주, 하린, 수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이 모든 영광 나를 일으켜 세우신 하나님께 드립니다. 소중한 기회를 허락하여 주신 의령군민,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큰 절로 감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서정시는 단순성의 미학이다. 분석의 대상이 되는 구조의 틀, 혹은 주제를 구성하는 의미론적인 층이 비록 복잡성을 띠고 있는다고 해도, 적어도 발화 형식의 결에 있어선 그렇다는 얘기다.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시를 산만한 사설(辭說)의 언술임을 착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하고 싶은 많다면 어쩔 수 없이 산문의 장르를 선택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시를 쓰는 사람은 다름 아니라 산문을 쓰는 사람이 하지 못하는 말을 부리는 사람이다. 그는 산문을 쓰는 사람이 쉽사리 할 수 없는 구석진 말의 물결 같은 흐름에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시는 사물의 이면을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의 상상적 결과가 아닌가 여겨진다.

 

우리 심사위원 두 사람은 예선에 통과한 스무 명의 공모작 약 150편 정도의 작품을 철저한 익명의 상황에서 면밀히 검토한 결과, 세 분의 응모자, 즉 한승엽, 임재정, 오정순의 시 작품들을 뽑는데 의견을 함께했다. 이 세 분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대상 한 편을 최종적으로 고르기로 했다.

 

한승엽의 붉은발말똥게는 시의성(時宜性)이 있는 글감에다 독특한 발상으로 인해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작품이었다. 우화적인 실존의 인격으로 투사하며 이를 현실의 장력(場力)으로 확대한 붉은발말똥게의 동선과 궤적을 바라보는 작자의 예리하면서도 주 · 객관적인 교차의 시선도 진지함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적 진술의 긴밀한 통사구조가 의도적인 탈문법이라기보다는 좀 미숙해 보이는 듯한 약점 때문에 이완되거나 해체되는 것 같아서 대상으로 미는 데 주저함이 앞섰다.

 

임재정의 물속 경주 남산과 오정순의 공터의 풍경을 두고 오랫동안 논의를 거듭하였다. 물속 경주 남산은 매우 환상적인 시다. 환상 그 자체가 주제이기 때문에 이 경우 주제를 현실로 환원시킬 필요가 없다. 이 밤은 어느 인연의 물속인가……화두를 튼 선객(禪客)의 격조 있는 어록과도 같다. ()의 세계로 약동하는 듯한, 꿈속처럼 아슴해 보이는 화려한 난센스의 언어! 여기에 서정시의 진경(眞境)이 있을 법하다.

 

오정순의 공터의 풍경은 버려진 그림이 있는 공터의 풍경을 묘사해 가면서 추보식으로 구성한 현대적인 의미의 서경시다. 전통적인 의미의 선정후정이 없다. 시 쓰는 이의 주관적인 감정의 실마리를 끝내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제는 오래된 이미지즘 시를 연상하게 하는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삶의 이면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버려진 의미를 탐색해 가는 가운데, 무언가 채워놓을 수 없는 삶의 아쉽고도 그리운 부분들을 여백처럼 남겨놓고 있다는 점에서 사뭇 다르고, 그래서 한결 인상적인 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종이 한 장 차이의 독창성과, 여타의 작품들이 지닌 신뢰성의 한 뼘 높이에 있어서, 오정순의 공터의 풍경을 대상으로 결정하기로 했다. 천강문학상 시 부문 대상 수상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앞날에 문운이 왕성하기를 기원한다.

 

- 심사위원 : 김종해(시인), 송희복(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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