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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을 걷는 장화들 / 이병철

 

 

파랗고 맑은 냉기에도 코가 얼지 않는 우리는

언제나 싱싱한 뒤축으로 수평선을 걷는 장화들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수심(水深)이 깊어질수록 바다의 과거를 잘 기억하는

오래된 가죽장화, 유빙에다 이마를 닦아 물광을 내며

아열대의 꽃잎을 흉내 내는 크릴새우를 쫓아다닌다

우리는 발목도 없이 발가락도 없이 난류에서 한류로 행진한다

캄브리아 시절에 따뜻한 바다 위를 걸어가던 신들이

탁족(濯足)을 하려고 장화를 벗어 놓았는데

그게 그만 바다에 빠져 밍크고래들이 된 것을

나는 다 발설해버리고 말았으니,

우리는 구멍으로 물숨을 쉬는 끈 없는 장화들

옆구리에다 파도를 주먹밥으로 뭉쳐 매달고 다니면

장화를 바느질하려는 수선공들을 만나기도 한다

태양에 달군 뾰족한 쇠가 내리꽂혀도

유선형의 몸은 능글능글한 데가 있어 작살을 바다로 흘려버린다

물빛 발자국들을 한꺼번에 연안으로 몰고 가면서 우리는

가죽나팔을 길게 분다, 높고 고운 소리 너머로

깨진 유리 바다가 일어서도, 장화들은 끄떡없다는 듯이

 

 

 

 

오늘의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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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평택 생태시 문학상’은 평택시와 한국문인협회 평택지부가 자연생태계의 환경보존과 그 가치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자 하는 취지로 비롯되었다.

 

심사기준은 인간에 의한 자연생태파괴, 환경파괴, 생명 순환질서 파괴, 인간존엄성 상실 상황에서 재생태계 질서회복에 중점을 두고 있다.

 

네 번째의 ‘생태시 문학상’을 심사하며 다섯 명(이귀선, 진춘석, 배두순, 김영자, 유병만)의 심사위원들은 즐거운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맙고 유쾌한 일이었다. 응모자도 많고 전체적인 수준이 높아 한 편 한 편 탐독하는 시간도 많이 소요되었다.

 

이번 공모전에는 모두 347명이 응모하였으며 예선과 본선, 두 번의 심사를 거쳐 최종 다섯 명의 작품을 두고 치열한 점수제를 운용하여 이병철 시인의 《수평선을 걷는 장화들》을 대상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들은 이병철 시인의 작품들을 폭 넓은 상상력과 사유의 깊이를 신선하게 표현하여 생태시의 수준을 높이고 있음을 시사했다. 응모한 세 편의 작품이 모두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를 얻어냈다. 활달하고 톡톡 튀는 이병철 시인의 무궁한 상상력과 표현력이 생태시의 폭을 한층 더 넓혀주고, 다양한 이미지의 변형은 재미까지 더해주고 있다.

 

최종심사까지 올라와 경합을 벌인 작품으로는 ‘잇구멍의 숲’, ‘요정의 원’, ‘몽고반점을 새긴 바위’등이다. 모두 탄탄한 내공을 가진 작품들이어서 내려놓기가 아쉬웠다. ‘평택 생태시 문학상’에 응모한 모두의 열정에 감사드리며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낙선자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 심사위원 배두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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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혈목이의 책장 / 이병철

 

 

당신은 풀잎 위에 누워 돌을 떨어뜨리고 있었어요 나는 당신 귀밑머리에 매달린 하얀 박쥐들을 떼어냈고요 우리의 책은 폭설을 쏟아내고 있었지요 마른 혀도 꽃이 될 수 있을까요 그때 바람이 입 속으로 들어왔어요

 

바람이 갈비뼈를 두드리자 피아노 소리가 났어요 소리가 빚어낸 동전 몇 닢 손에 쥔 하늘은 구름을 보름달솥에 고았지요 어둠이 우러났어요 별가루 뿌리고 배추흰나비와 벚꽃잎 고명 얹은 국 한 사발 떠 주었지요

 

국을 들이킨 당신은 은어 떼 헤엄치는 수박 향기로 반짝였지요 당신이 흘러든 풀섶에서 유혈목이가 기어나와 내 품을 파고들었어요 책장엔 진달래꽃 피어났고요 알몸을 포갠 우리는 따뜻한 무덤이 되어갔지요

 

 

 

 

오늘의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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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부끄럽지 않은 행복한 시인 될 것

 

이십대의 모든 날들을 시 쓰기에 바쳤습니다. 시가 돈이 되지 않아도 행복했습니다. 아무도 걷지 않은 오솔길의 임금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서른 살이 되자, 돈이 되지 않는 시를 계속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멀리 달아났습니다.

 

하지만 달아나면 달아날수록 시는 더 강하게 저를 잡아당겼습니다. 돌아선 뒤통수에 쏟아지는 시의 따가운 눈총이 미안하고 괴로워 몹시 취해버린 밤도 많았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저녁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 나름으로는 갈림길에서 받은 전화였습니다. 용기와 힘, 그리고 막막한 두려움이 동시에 제 가슴에 불을 밝혔습니다. 그 불빛을 의지해 뒤돌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화는 시가 걸어온 것이었습니다. 서른 살에 세상을 떠난 김유정 선생이 걸어온 것이었습니다. 누나 집에 얹혀살며 늑막염으로 괴로워하던 가난한 청년, 치료비도 없이 병과 문학을 함께 키워야 했던 김유정 선생을 떠올려봅니다.

 

선생은 절망 가운데서도 결코 문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나이 서른 살 짧은 생애였지만, 선생이 남긴 문학은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김유정 선생의 서른한 살, 서른두 살을 제가 살아낸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읽고 쓰겠습니다.

 

선생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숨이 여린 작품을 잡아 일으켜 근력과 호흡을 불어 넣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온화한 미소로 격려해주시는 이승하 교수님, 제겐 아버지와도 같으신 이경교 교수님, 시 쓰기의 즐거움을 알게 해주신 장석주 선생님께 감사 드립니다. 명지전문대, 서울과기대,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의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 드립니다.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겠습니다. 행복한 시인이 되겠습니다.

 

 

 

 

[심사평] 응축·변주·확장 탁월한 수작

 

본심에서 세 분의 작품을 거론했다.

 

먼저 <죽은 시인의 사회> 11편을 투고한 심상숙의 작품들에선 시적 포즈나 비의 같은 것에 욕심 부리지 않고 문장을 끌고 가는 정서의 힘이 느껴졌다. 시인이 관찰하는 인물, 사건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이 남다른 묘사 문장을 탄생시켰다.

 

그렇지만 어떤 시들은 기행문이나 산문 같았다.

 

<비의 기원> 4편을 응모한 민경란의 시는 다른 응모작들에서 흔히 보이는 상투적인 우화 만들기, 한결 같은 감상적 정서를 훌쩍 벗어나 주변 공간 묘사에 의지해 자신을 표현하고, 해부하고, 고백하는 남다른 표현법을 갖고 있었다. 자신만의 표현법, 자신만의 문장 구사 방법을 갖고 있다는 것은 자신만의 언어 세계를 갖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일상적 대화 수준으로 떨어져 버린 문장의 나열이 들어있는 <광염소나타> 같은 시가 신뢰를 떨어트렸다. <유혈목이의 책장> 4편을 응모한 이병철의 시들은 어떤 순간에 집중하여 그 순간을 증폭시켜 이미지의 정원으로 확장하는 시적 구축의 방법이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네 입술이 닫히는 순간 세상의 문들도 닫히, ‘추억 속 고통은 무슨 힘으로 밝히지?’하고 고통스럽게 질문하다가 뒤틀리고 찢겨진 살결을 보이며 검게 물든 엽록소를 배설할 거야’(<일기예보>) 라고 다짐하는 장면에 이르는, 시적 언술의 연속이 작은 한순간에서부터 독자를 이끌고 가 확장된 시의 이미지 공간에 부려 놓는 힘이 느껴졌다.

 

그러나 <비 개인 저녁의 안부 편지>에서처럼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센티멘탈하기만 할 때는 시를 쓴 의도를 의심하게 했다.

 

논의 끝에 이미지의 응축과 변주, 확장이 시의 문장들에 깃들게 함으로써 시적 긴장이 발생하게 한 <유혈목이의 책장>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 심사위원 정현종·김혜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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