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알츠하이머 / 박미선

 

 

어느 날, 나는. 구름이 찔끔찔끔 흘리고 간 볼트를 주워 먹다 돼지우리로 들어왔다 찌지직, 뚝, 뚝

 

<나는 참새> 나는

 

전깃줄 잘라 고무줄놀이를 한다 살찐 돼지, 털로 새끼줄을 꼬아 목에 채웠다 코에 코뚜레를 끼우고 밤의 팬티를 갈아입혔다 가슴살 조금씩 잘라 밥상보를 만들자 앙상해진 두 다리가 콘센트에 꽂혔다 조잘거리던 혀를 뽑아, 나는

 

돼지의 기억들로 수의를 만들고 있다 눈에선 쌀뜨물이 흘러 나왔다 돼지는 머리에 꽃밭을 만들어 나를 유혹했다 뚝배기 안에는 구멍 숭숭한 양말들이 눌어붙어 있다 한 숟가락씩 먹을 때마다 불러오는 건 배가 아니라 허기였다

 

발등에 무화과나무 한그루 심을 수 없다 머리를 주머니에 꾸역꾸역 쑤셔 넣으며 만원이 되길 기다려 보고, 솜사탕을 손가락에 먹여 보기도 한다 돼지 안의 돼지 한 마리 지퍼를 열고 유치원에 간다 비오는 날 대추나무 가지에 네발 사다리를 올려놓고 싶다 아직은 아니라고 안녕, 안녕, 주머니에 넣어둔 만원이 수염을 낳을 될 때까지 잠시 풍선껌을 씹으며 기다려 돼지야

 

묵은 김치를 꺼내려 김치 냉장고를 연다 숨이 하얗게 끊겨 겨울을 내뿜고 있는, 먼저 돼지와 협상한, 어머니의 손 전화 한 구.

 

 

 

 

 

[당선소감] 꼿꼿이 일어나서

 

난 턱걸이 선수다. 모든 게 까딱까딱... 복도, 행운도, 사랑도... 철봉을 거머쥐고 있는 손바닥에서 어제의 눈물이 고인다. 나의 스테인리스 같은 가슴에 가 닿기 위해 많이 헤매고, 아파하고, 애무했다. 하지만 매번 나에게 달려와 안기는 건 미끄러지는 너의 시선과 온기를 불어 넣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손바닥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손목에 전류가 흐른다. 하지만 이대로 놓아버릴 수는 없다. 내가 선택한 마지막 열정을... 땡볕이 살을 구워도, 바람이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도, 잡고 있는 손에 54kg의 희망을 매달고 하늘을 당겨본다. 알츠하이머는 조금씩 지워지는 내 내면의 지우개다. 놓치고 싶지 않은 모든 것들과의 싸움이다. 자존심이란 녀석은 이미 꼬들꼬들 말려 해장국으로 끓여 먹었다. 난 더 밑바닥과 조우할 것이다.

 

나에게 이런 행운이, 아니 잘못 온 전화겠지. 끊고 나서 한참을 공룡과 놀았다. 시는 나에게 일기다. 가장 친한 친구요, 배신하지 않는 애인이다. 알츠하이머는 국밥집에서 태어났다. 6달간 인생 공부 많이 했다. 그 곳 지인들과 금보고. 감사 인사 올린다. 경남대 박태일 교수님, 마산대 김륭 교수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못난 딸 걱정에 아파하시는 아버지, 어머니, 언니들, 남동생, 올케, 친구들에게 고맙다. 우리 아들 현준이 현수 사랑하고 항상 노력하는 모습 보여주고 싶다. 끝으로 진주 가을 문예에 깊은 감사드리고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난 이제 질경이가 되려한다. 발길질을 피하지 않겠다. 단단히 뿌리 내릴 수 있게 해주는 걸음걸음에 고맙다. 고맙다고 전하겠다. 꼿꼿이 일어나 하늘에 손바닥을 펴 보이겠다.

 

 

 

[심사평] 통념과 보편,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운 발상의 순도 높은 시

 

오랜만에 다시 진주 가을 문예 시부 심사를 맡게 되었다. 이 가을 문예에 응모된 작품들을 읽는 가운데 확실히 이 상이 시행돼 오면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음에 실감하게 되었다. 최근 잇달아 공모 시상한 인근의 천강문학상의 흐름과도 다르고 김만중문학상의 흐름과도 달랐다.

 

그렇다면 그 흐름은 무엇일까? 의식이나 발상이나 시상 전개에 있어 응모자들이 매우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통념으로부터 떠나고 보편으로부터 떠나고 관습으로 부터도 떠나서 이루는 의식의 끈 자르기, 또는 언어가 하나의 조각으로서 조각을 완성하는 화사한 잔치, 어쩌면 눈물겨움의 실현 같은 환상의 실현, 그런 경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알츠하이머>를 쓴 응모자는 이런 점에서 순도가 높다. 참새, 돼지우리, 전깃줄, 뚝배기, 한 숟가락, 냉장고, 어머니 등으로 이어지는 내면의 언어들이 언어 독자적으로 뛰고 있다. 우리는 그 뛰기를 보면서 소녀가 땅에다 그림을 그려놓고 칸칸이 뛰는 놀이(사방놀이)를 보는 듯한 경쾌함을 느끼게 되었다. 꼭 의미를 추구하는 분들은 이 시를 읽으며 우리가 대충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메타새콰이어>를 쓴 응모자나 <서울 아이티공화국 그리고 농담>을 쓴 응모자도 상당한 수련을 한 것으로 인정된다. “메타새콰이어와 함께 교보문고까지 걸었다.” 로 시작되는 <메타새콰이어>의 적정한 상상력이나 고시원에 누워 :“불구가 된 한국어를 구사하는” <서울 아이티공화국 그리고 농담>의 상상력 뛰기는 다 시를 허구의 틀로 본다는 점에서 실력이 출중하다. 그렇더라도 이번 수상은 그 허구의 순도 면에서 훨씬 기량을 갖추어 있는 것으로 평가된 <알츠하이머>를 낸 분에게 돌아갔다. 만장일치다. 상은 한판의 씨름과 같다. 둘째판 셋째판에서는 승자가 어느쪽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아자’ 다시 시작하자.

 

심사위원: 강희근, 김언희, 이상옥, 유홍준, 김이듬

 

728x90

 

 

알츠하이머 / 김혜강

 

 

어머니가 사는 마을에는

사철 눈이 내린다

온 세상이 하얀 마을에는

기억으로 가던 길들도

눈으로 덮이어

옛날마저

하얀색이다

눈이 소복

쌓이는 마을에서

온 몸으로 그림을

그리시는 어머니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그림을 지우고

지우고 그리신다

 

어머니가 사는 마을에는

하염없이 눈이 내려

바구니에 담을 추억도

색연필 같은 미래도 없어

하얗게 어머니는

수시로

태어난다

 

 

 

 

어머니의 마을에는 눈이 내린다

 

nefing.com

 

 

[당선소감]

 

낯선 전화번호가 뜨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광고 전화일 것 같아 받지 말까 하다 받았더니 당선을 알리는 전화였습니다. 정말 기뻤습니다. 오래전부터 공정하게 실력을 가리는 공모전에 당선한 시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쉬지 않고 노력하며 도전했지만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좌절과 실망의 해와 달이 수없이 뜨고 졌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순간들이 시작(詩作)에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는 내면에 있는 수많은 자아를 찾아갈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과 신비로 가득 찬 우주를,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눈을 조금씩 넓혀주는 마법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조금은 당당하게, 그러나 겸손한 자세로 시작에 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족들, 그리고 고독하고 아름다운 시의 길을 함께 가는 문우들과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평생의 소원을 이루게 해 준 동양일보와 옥천문화원, 그리고 옥천군과 심사위원 선생님께 큰절을 올립니다. ‘지용신인문학상이라는 명성에 누가 되지 않게 열심히 쓰겠습니다.

 

 

 

[심사평] 절제된 언어시적 변용 솜씨 알차

 

25회째를 맞는 지용신인문학상에는 올해도 경향 각지에서 300명이 넘는 수많은 시인 지망생들이 작품을 응모했다. 응모작이 해마다 증가하는 일은 물론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어느새 이토록 역동적인 시인공화국이 되었나 하는 생각도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를 너무 안이한 태도로 쓰는 습관이 왜 이렇게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가 하는 우려도 숨길 수 없었다.

 

시는 썼다가 다 지우고, 다시 썼다가 또다시 말짱 지우고, 종단에는 백지만 남는, 지우기(delate)만 남아있는, 하얀 공백 위에 피어나는 핏빛 꽃봉오리여야 하거늘, 어쩌자고 이렇게 산만하고 지루하게 무작정 길게만 쓰는 것인가.

 

당선작 알츠하이머’(김혜강)는 아주 단순한 소묘 같지만 그 안에 숨기고 있는 시적 변용의 솜씨는 얄밉도록 알차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안쓰러운 마음을 직설적인 토로와 절규를 통해서가 아니라, 말 못하는 카메라 렌즈를 통하여 당겼다 밀었다 하면서 절제된 언어로 표출해낸 빼어난 작품이다.

 

최종적으로 논의된 , 뿌리경전을 읽는 저녁’ (문순희), ‘김딸막 할머니의 국어시간’ (장현숙), ‘담쟁이’ (김은유)도 알맞은 시적 상상력을 잘 형상화해 흥미로운 시적 구조를 이루고 있지만 너무 인위적으로 가공한 흔적이 보이는 게 흠이었다. 어느 정도 시창작의 방법을 터득한 후에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개성화하여 독창적인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지용은 한국 현대시사의 서문이요 본문이다. 이토록 장엄한 현대시사의 현장 속으로 달려오는 지용신인문학상응모자들의 시적 성취가 날로 향상되기를 기원한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 오탁번 (시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