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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 / 이정임

 

 

잘방잘방

 

가을 강은 할 말이 참 많답니다

저렇게 눈부신 석양은 처음이라고 내가 입을 열었습니다

참 오랜만에,

도무지 닫혀 있던 입

흰 귓바퀴 꽃을 봅니다

안개 짙은 그 하얀 꽃을요

 

나는 휠체어를 밀어주면서 한 바퀴 즐거운 나의 집, 두 바퀴 세 바퀴 현()을 타 봅니다 눈감고 오물오물 따라하는 어르신 핑 돌아 떨어지는 눈물 한낮의 요양원 창밖으로 찔끔 찍어 냅니다 사람들은 먼 나무위에 앉아 졸고 가을 강은 나를 자꾸 떠밀고 갑니다 알 없는 안경너머로 두 다리 유니폼의 건장한 날이 있습니다 서슬 퍼런 기백이 있습니다 백지로 두고 떠나자고 말한 적 있답니다 구절초 강아지풀 억새 어우러진 둔덕 제 모습에 반해 석양을 품은

 

비록 비위관(脾胃管)에 연명하지만 포르르 동박새 동백나무에 오르고 옛 기억 하나둘 돌아옵니다 참 맑은 하늘이 도리질 치다가 풀썩 잠이 들라 합니다 퐁당 물구나무를 서거나 물비늘을 따라 멀리멀리 헤엄쳐가기도 하는

 

가을 강은 심하게 몸살을 앓는 중입니다

 

소실점 잘방잘방 아스라이 붉은

 

 

 

 

[당선소감] "그늘진 곳 들여다보며 따뜻한 시 쓰겠다"

 

멀리서 오신 이름, 보름달보다 크고 둥근 뽀얀 박으로 덩그렇게 오신, 아무리 많은 보석이 쏟아진대도 저는 슬근슬근 톱질을 아낄 거예요.

 

아버지가 말씀하셨죠, 초록초록 옛날 옛날에 말들이 뛰놀던 곳이라서 마리뜰이라고,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떠나 살고 마리뜰을 그리워합니다.

 

까만 말고 하얀 나비고무신을 조르던 여름. 아버지 지게 위에 다소곳 따라오던 까만 머루와 어머니의 정갈하게 널린 하얀 빨랫줄, 오동나무에 걸린 하얀 눈 냄새, 참새 떼 날아오르던 닭장아버지는 눈 가래로 나는 싸리비로 눈을 치웠죠, 쓸다보면 어느새 다시 와서 살포시 앉던 녀석들 늦깎이 공부를 합니다. 한 번도 펴보지 못한 교과서의 잉크냄새가 미안해 휴학을 결심한 적 있지요. 감히 말하라면 저의 시는 오롯이 고향으로부터 옵니다.

 

홍유릉 둘레 길을 걷다가 당선 소식을 받았습니다. 방방 뛰다가, 뛰다가 날다가, 이렇게 덜컥, 오시다니요. 조용히 설레다가 처절하게 허기지다가 그러기를 10여 년, 많이 기쁩니다. 내일이 동지입니다. 일부러 느긋하게 하얀 밤을 샙니다. 동글동글 새알심을 만들며 빕니다. 제 곁에 있는 모든 이들이 건강하고 무탈하기를 소원합니다. 나의 버팀목 경진 현진 성후 고맙고 사랑해, 동생들아, 조카들아, 이제라도 고봉밥을 차려보자. 도향스님! 존경합니다. 불 켜놓고 자면 해롭다고 새벽마다 불꺼주고 가는 그 정성, 알지요.

 

사유의 힘, 치열하게 들여다보라, 운율 속으로 우렁우렁 명 강의 이지엽 교수님 고맙습니다. 김동찬 교수님, 시와 길 선생님들, 회장님 덕분입니다. 인사를 빠뜨려서 늘 죄송한 분이 계십니다. 꼭 뵈러 갈게요. 이런 큰 기쁨의 자리 마련해주신 광남일보와 관계되시는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부족한 제 시()를 선해주신 심사위원님께 큰절 올립니다.

 

이 순간도 양로원에서, 요양원에서 고독으로 뒤척이고 계실 어르신들의 안녕을 빌어봅니다. 얼굴도 모르는 시아버님, 늘 다독여주시던 시어머님, 그리고 저희 7남매 곁을 일찍 떠나가신 친정 부모님께 이 영광된 상()을 바칩니다. 춥고 어둡고 그늘진 곳을 들여다보며 따뜻한 시를 오래도록 열심히 쓰겠습니다.

 

차곡차곡, 다시 시작입니다.

 

 

 

 

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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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균일한 울림따스하고 섬세한 서정 기대"

 

밤을 새워 영혼의 즙을 짠 문청들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시를 쓰면 굶어 죽는다는 말을 듣지 않고 시를 쓴 이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엔 끊임없이 시를 쓰는 이들이 태어나고 그들의 시에서 영혼의 위로를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삶과 시. 지극히 이질적인 두 존재의 병치야말로 현생 인류를 설명하는 가장 따스하고 지적인 방식 아닐런지요.

 

점자책4, ‘트라이앵글4, ‘내 안의 붙박이장4,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4편의 작품을 읽는 동안 마음 안이 따뜻해졌습니다. 현실과 유리되지 않았고 난해시의 범람에서도 거리를 두고 있었지요. ‘시가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해야하지?’하는 의문에 대한 답이라도 하듯 삶을 붙들고 있는 섬세한 현의 긴장이 느껴졌지요.

 

점자책의 주인은 손으로 세상을 읽을 수 있는 이들의 꿈을 새들이 부리 끝으로 톡톡톡 문 열어 달라’ ‘혹등고래가 허공을 유영하듯 지느러미를 펄럭인다고 묘사했습니다. 세계를 인식하는 차이를 결핍감이 아닌 자신만의 이해로 받아들였지요. ‘트라이앵글은 작은 타악기를 통해 인간의 의미에 다가가는 인식의 바다가 있었지요 인간은 사랑을 이해하는 데 일생을 바친다와 같은 범상한 인식이 트라이앵글의 진동을 통해 다가오는 순간 시의 본질이 은유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내 안의 붙박이장은 함께 응모한 별주부전이 생각날 때 쯤과 함께 우리 시의 고질적인 난해성을 극복한 좋은 예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낡은 가구와 고전을 통해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같은 인간의 본성을 쉬운 언어로 표현한 미덕이 있었습니다.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을 읽어가는 동안 제목이 주는 일시적인 번거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심성이 맑고 착한 시였지요. 휠체어를 밀며 휠체어 안의 어르신에게 조용조용 가을 강을 얘기해 주는 모습이 따스했습니다. 쉬운 언어가 갖는 촉촉한 질감이 강 건너 무지개처럼 펼쳐지는 신비한 느낌이 있었지요, ‘내 안의 붙박이장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모두 당선작이 될 시의 품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을 당선작으로 정한 이유는 함께 응모한 숙부’, ‘내가 꽃을 들여다보는 동안’, ‘그 봄 언저리 호박벌이 맨땅에서 구를 때와 같은 시편들이 지닌 균일한 울림 때문이었습니다.

 

따스하고 섬세한 서정의 물결이 세계를 향한 큰 울림이 될 수 있음을 당당히 보여주는, 멋진 시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심사위원 곽재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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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 변영현 

 

 

파란 동그라미를 그려요

당신은 호수인 줄 알고 뛰어들어요

 

팔랑팔랑 헤엄쳐요

바다처럼 넓고 깊어요 파란 동그라미

속의 당신이 파랗게 물들고

나를 찾아봐, 하는 목소리에

물이 뚝뚝 떨어져요

안 보여요 안 보인다니까요

여기 있어, 하는 목소리에

숨이 헉헉 차오르네요

 

파란 동그라미 위에 파란색을 더해요

내게는 다른 색이 없거든요

조금 다른 파란색이면 당신을 찾을지도 몰라요

몰랐어요 더 깊어질 뿐이라는 걸

바닥을 찾지 못할 거예요

하늘을 찾지 못할 거예요

파란 지구별에서 나갈 수 없듯

당신은 거기서 허우적거리겠죠

 

파란 동그라미 파란 동그라미

블루칩 같기도 하고 버튼 같기도 해요

속는 셈 치고 한번 눌러 볼까요?

잭팟이 터질까요, 당신이 튀어 오를까요?

하나, 둘, 셋!

아, 물감이 덜 말랐네요

파랗게 질린 손바닥 좀 보세요

당신이 묻어 있는 건 아니겠지요

 

파란 동그라미를 그려요

파랑이 파르르 떨고 있어요

 

 

 

 

[당선소감] 나홀로 중얼거림이 시가 되다

‘중얼거리는 사람이다’ 라고 나를 불러본다. 어릴 때 간혹 아버지가 문을 벌컥 열고 “도대체 누구랑 얘기하는 거니?”라며 방을 둘러보셨다.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방에서도 길에서도 중얼거렸다. 그것이 이상하게 보인다는 걸 안 이후 소리 내지 않고 중얼거린다. 이상의 시 ‘꽃나무’에는 한 꽃나무를 위해 그러는 것처럼 달아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사람처럼 길거리에서 싸우는 사람을 위해, 죽은 사람을 위해, 길고양이를 위해, 어쩔 수 없는 것들을 위해 중얼거린다. 아무 쓸모없는 것, 그것이 나를 숨 쉬게 한다. 그 중얼거림이 백지를 채우고, 채워진 백지가 시가 되기까지 몇 년이 지났다.

오늘 당선 전화가 왔다. 기분이 이상하다. 누군가 내 목소리를 똑똑히 들은 것이다. 혼자인 줄 알고 중얼거리던 그 방에 이제 누가 앉아 있다.

중얼거림이 시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장하빈 선생님, 변희수 선생님, 이솔희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친구 진희와 다락헌 시인학교, 낭구동인 문우들께도 고마운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전할 수 있도록, 내 목소리에 응답해 주신 심사위원께도 감사드린다. 내 마음의 시인, 이제는 여기 없는 작은언니에게 이 상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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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말놀이의 능수능란함 뚜렷해

신춘문예 작품들을 심사하면서, 응모작들이 대부분 심리적으로 너무 위축되어 있는 게 아닌가, 그 원인이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가지는 비대면의 우울과 바이러스에 의한 공포의 고통스러운 그늘일지도 모른다. 또는 점점 더 팍팍하게 조여드는 삶과 환경의 압박감 때문일까? 심한 자기류의 언어 방기나 과도한 언어굴절이라는 한동안 유행해온 젊은 세대들의 언어 구사 특징이 많이 가신 가운데, 과거와는 다른 삶의 그늘들이 젊은 문학도들을 사로잡고 있는 게 너무 무거운 듯 여겨져 안타깝다는 생각을 한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20명의 100편 가량. 그 중 마지막까지 남아서 겨뤘던 작품들은 ‘손’ ‘본색’ ‘부초들의 잠’ ‘중심, 중심들’ ‘블루’ 다섯 편. 모두 나름의 독특한 빛깔들을 띠면서 개성적인 언어구사를 능숙한 솜씨로 보여, 그 중 한 편을 뽑는 게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어차피 한 사람 만의 손을 들어줘야 할 수 밖에 없는 것. 마지막으로 집어든 게 ‘블루’였다.

‘블루’는 푸른색의 인식을 통해 사랑을 확인한다. 언어의 반복과 리듬, 그리고 유머감각을 통해 사랑과 자기 인식의 우울과 명랑을 경쾌한 어조로 꿰어나가는 말놀이의 능수능란함이 돋보인다. 구성도 무난하고 주제를 끌고나가는 언어구사의 힘도 예사롭지 않다. 무거운 주제들이 많은 응모작들 가운데서 이 작품이 의외의 경쾌함으로 시선을 끌었다고 여겨진다.

새롭게 출발하는 수상자의 경쾌한 발걸음에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이하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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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 해변 / 이명선

 

 

검은 얼굴의 아이가 있어

조류를 타고 해변까지 밀려온 대륙의 아이가 있어

뿔뿔이 흘러가는 하늘에 흰 수리는 원을 그리며 비행하고 있어

 

거듭 얼굴이 풀어져 

뭍으로 오르려는 눈꺼풀이 흩어져 

 

반복의 역사는 번복되는 아이들로 가득해

창창한 것은 꿈의 세계야 검은 눈물로 적셔지는 땅도 있어 

 

우리에게 바다는 수평선 너머에도 있지만 

아이에겐 수평선 너머의 바다엔 해변이 없어

 

불시에 버리고 온 대륙처럼

감은 눈 속에서 모래 언덕이 푹푹 꺼지고 있어

 

반신반의 하는 얼굴이 있어

간절함은 체험이 아니야 찢기는 세계에 발을 담그면 붉은빛의 인내가 필요해

 

국경을 물고 가는 새야

하늘을 균일하게 나누면 새들로부터 망명한 낙원이 있을까

 

한참을 뛰어가도 숨이 차지 않는 해변이 있어

검은 얼굴의 아이가 부르던 난민의 노래가 밀려나가는 

 

 

 

 

[당선소감] 홀로서기를 마무리하며

 

며칠째 계속되던 한파주의보가 해제되었습니다. 당분간 한랭전선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선이 사라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안도합니다. 사라지지 않았는데 보이지 않을 때 저는 안도합니다.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올겨울 들어 처음 올려다봅니다. 시립니다.

 

시린데 온몸으로 퍼지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뜨겁기 때문입니다. 눈이라도 펑펑 내린다면 더 시린 하늘을 찾아서 밖으로 나가려는 충동이 일 것입니다. 듣고 있던 노래의 볼륨을 더 줄입니다. 아예 들리지 않는다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제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혼자 생활하는 것이 편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걷다 보면 물 위거나 구름 위였습니다. 빠지거나 떨어질 수 있는 불편에 대한 직감으로 자주 붉거나 창백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낀다는 것이 평범이라는 걸 알지만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났나 봅니다.

 

그래서 늘 혼자 지냈습니다. 외출할 때마다 자주 모자를 썼습니다. 모자를 푹 눌러쓰면 타인의 시선뿐만 아니라 제가 보고자 하는 것들에서 가려질 것 같았습니다. 어떤 욕망도 제 것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사라지지 않았는데 보이지 않을 때 저는 안도합니다.

 

저의 하루는 단순했습니다. 온종일 음악을 들으며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중얼거리다 보면 모든 중얼거림은 저에게로 다시 되돌아오곤 하였습니다. 되돌아오는 중얼거림을 언제부턴가 받아 적었습니다. 혼자 지내는 일치곤 매력적인 일이었습니다.

 

당선 소식을 받았습니다. 순간 혼자 중얼거릴 수가 없었습니다. 무작정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여전히 없었습니다. 이제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걸어가야겠습니다. 그 길을 내주신 경인일보사와 저의 중얼거림을 받아주신 심사위원님께 큰절 올립니다.

 

저에게 최초로 시를 보여주고 시의 길을 내준 이돈형 시인과 시의 날개를 펼치게 한 김지명 시인께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쓰겠습니다. 이 말이면 될 것 같습니다.

 

늘 애틋하게 지켜봐 주는 이종영, 이영선, 이영예, 김병찬 그리고 끝끝내 사랑인 재인이에게도 깊은 마음 전합니다.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실 엄마, 아버지 곧 사진 가지고 찾아뵙겠습니다.

 

 

 

 

홈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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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절제·인내로 묘사한 인류의 비극

 

이명선 당선자의 '한순간 해변'은 지난 20159월 시리아 난민 아이의 죽음을 소재로 인류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이 인류가 저지르고 있는 비극을 그리면서도 인내와 절제가 미덕인 시 세계를 펼쳤다고 평가했다.

 

1158편이 접수된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서 본심 심사위원들은 18편의 시를 골라 평가했다. 이 가운데 4편이 당선작 후보에 오르며, 심사위원의 매서운 심사대에 올랐다.

 

'한순간 해변''익투스' '수수께끼 나라의 첫 인사법' '미역국을 삼킨다는 것', 등이 당선 경쟁을 벌였다. 우선 '미역국을 삼킨다는 것'은 의미가 함축되도록 말을 활용하는 솜씨가 두드러진 작품이라는 평을 받으며 심사위원을 사로잡았다.

 

시상을 단단하게 다뤄본 느낌을 준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심사위원들은 섬세하게 형상화하는 작업이 아쉬웠다고 평했다.

 

종교적인 느낌이 강한 '익투스'는 시를 조여내는 실력, 한 편의 작품을 완성시키려는 의지가 읽히는 작품으로 잘 조정된 시적 발화를 보여줬다는 평을 이끌어냈다. '수수께끼 나라의 첫 인사법'은 시문이 유려하고 상상력이 돋보인 작품으로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자웅을 겨뤘다.

 

본심 심사위원들은 '한순간 해변'의 이명선 당선자가 당선작 외에도 응모한 시가 고루 상당한 실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줬다. 좋은 시인을 발굴했다고 입을 모았다.

 

반면 심사위원들은 응모자들이 실험적인 작품쓰기에 주저한 것에 대해선 아쉬움을 표했다.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시에서 사유의 날카로움이 드러나지만, 대체로 서정적인 작품이 많았다고 지적했다.

 

심사위원들은 가족과 개인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좁아진 것이 각박한 현실 속을 살아가는 이들의 생존법을 반영한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표했다.

 

마지막으로 시인을 꿈꾸는 응모자들에게 시를 통해 가보지 않은 낯선 곳에 가려는 노력을 당부했다.

 

- 심사위원 : 김명인, 김윤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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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침대 / 오병훈

 

 

그의 침대에는 한 마리의 악어가 산다
한 번 물리면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보일 만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다
그의 이불은 검은 늪 위에 떠있는 아름다운 분홍 수련이다. 이불 밑에는 거대한
앨리게이터가 눈을 희번득거리며 천천히 유영을 하고 있다
악어는 조급해하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영원한 포로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는 악어를 숭배한다 매일 밤 그는 악어에게 자신의 먹음직스런 살점과 하얀 뼈를
제물로 바친다 악어가 그의 살점을 뜯을수록 의식은 점점 혼미해진다
그가 불면증에서 벗어난 것도 악어의 덕분이다 지난 장마 폭풍우가 몰아치던
여름밤 꿈에서 그는 처음으로 악어를 만났다
5년 간의 실직이 그를 한 병 반의 소주 없이는 잠들 수 없게 만들었고 그런 그에게
악어는 구세주 같은 존재이다
악어는 조금씩 조금씩 그의 살점을 뜯어먹는다 하지만 고통은 잠시뿐
피를 흘리면 흘릴수록 그의 정신은 혼미해지고 그는 이내 아득하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언젠가 악어는 그의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탐할지 모른다
비내리는 검은 밤 그는 지금도 악어를 만나기 위해 검은 늪 위에 몸을 누인 채
분홍 수련 이불을 덮고 있다

 

 

 

빨간스케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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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인간은 태초에 선한 존재였을까? 악한 존재였을까?


한때 이 명제에 대해 한참동안 생각한 적이 있었다. 대학에서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한결같이 공격적이고 대인관계를 가벼이 생각하였다. 힘든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는 하나의 가설을 만들게 되었다. 태초에 사람이라는 유인원은 악한 짐승이었다. 헌데 짐승들의 무리중 한 마리가 절름발이였다. 다른 동료들은 그가 약하고 빨리 걷지 못하니까 그를 장난삼아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그는 동료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며 하나의 생각을 하게 된다. 왜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는 걸까?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그 절름발이가 인간이 선해지는 사고를 하게된 첫 번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힘든 사회생활로 내가 탈진했을 무렵 도시개발공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곳은 놀랍게도 멋진 남자들의 집단이었다. 그것이 대학 졸업 후 시를 다시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다시 사람이라는 단어에 대해 희망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키게 된 것이었다.


대전일보는 나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사한 신문사이다. 나는 동산중학교에 입학할 시 용두동에 살았었는데 학교는 문화동에 위치했다. 수업이 끝나고 문화동에서 용두동까지 걸으면서 항시 나는 대전일보사 앞에서 한시간 정도를 서 있곤했다. 당시 대전일보사 사옥 앞에는 큰 신문 열람판이 있었는데 중학교 1학년의 소년에게 그것은 새로운 세상, 어른들의 세상에 눈을 뜨게 하였다. 아직도 빙그레 이글스의 한희민 고원부 강정길 이정훈의 활약상에 대한 기사들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내 시의 토양인 충남대 시목문학동인회와 지도 교수님인 신용협교수님 그리고 신춘문예를 도전하도록 힘을 준 혜원이 또한 내 글의 열렬한 팬이자 지지자인 여동생 연희에게 고맙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시를 당선작으로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 드린다.

 

 

 

[심사평]

1천 5백편이 넘는 응모작을 한 자리에서 보아낸다는 것, 그 가운데에서 단 한편만을 골라낸다는 것, 두 가지가 모두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날로 살기는 어렵다는데 시인의 꿈을 접지 못하는 예비시인들이 이토록 많다는 데에 놀라운 마음을 가지면서 밭을 가는 마음으로 시를 읽었다.

거르고 걸러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김인옥의 「아버지의 모자」, 임수련의 「포도를 먹다가」, 오병훈의 「그의 침대」, 조혜영의 「모서리 사진관」, 김화순의 「그네」 등 다섯 편이었다. 제일 처음 떠오른 작품은 「아버지의 모자」였다. 시에 삶과 사색의 무늬가 곱게 들어가 있어 우선적으로 호감이 갔다. 허나, 함께 응모한 작품이 뒤를 받쳐주지 못했고 감상적인 표현이 지적되어 뒤로 밀렸다. 그 다음으로 떠오른 작품이 「모서리 사진관」과 「포도를 먹다가」였으나 전자는 깔끔하게 다듬어졌기는 하지만 소품이란 점에서 후자는 상상력이 뛰어나고 섬세한 표현에 마음이 갔지만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 또한 많이 주저스러웠다.

마지막으로 남은 「그네」는 현대문명을 소재로 다루면서 사물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세계를 직관에 의해 찾아내는 날카로운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어서 끝내 놓기가 아쉬웠다. 그러나 신춘문예란 제도가 스타탄생을 말하고 폭풍 그 자체이고 제왕 뽑기란 점에서 끝내 <그의 침대>로 落點되고 말았다. 이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결과인데 안전제일주의보다는 조금은 모험주의를 따른 것이고 엇비슷한 풀보다는 지상에 없는 異種의 풀을 심사위원들이 원했던 까닭이다. 또한 함께 응모한 작품의 수준이 대체로 고르고 「거미」와 같은 작품이 이 시인의 실력을 증명해주었음도 添記하고 싶다. 이 시인의 시엔 기발한 着想, 사물을 객관화시키는 능력이 뛰어나고 새롭다. 그러나 산만한 표현이 있고 獵奇性이 강해 사물을 따스하게 끌어안는 마음의 능력을 앞으로 길러야 할 과제를 갖고 있다. 그렇다 해도 새로움과 도발성과 그만의 唯美主義는 커다란 자산이요 힘이다. 기성시단의 눈치를 보지 말고 부디 駿馬로 자라 멀리 멀리 달려가 그만의 광활한 풀밭을 발견해주기 바란다.

심사위원 문정희(시인·동국대교수) 나태주(공주 상서초등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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