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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의 눈보라 / 박진성

 

 

우리는 가만히 앉아 손톱 사이로 들어오는 세계에 대해 말하면 안 되나요 거울 속엔 눈보라, 그리고 걸어가는 사람들 천천히,

 

몸이 없는 바람과 마음이 없는 유리 그리고 밤하늘을 데려가는 별자리에 대해 말하면 안 되나요

 

어제 죽은 사람은 모두 서른일곱 명, 유리에 붙어 우릴 보고 있는 좀비들, , 우리의 손톱으로 들어올 수 있어요

 

손가락이 모자라요

노래는 넘치죠

 

시계는 시계의 세계에서 돌고 우리는 시간이 없는 것처럼 그리고 그림자를 데리고 사라진 태양에 대하여,

 

속눈썹에 앉아 있는 세계에 대해 말하면 안 되나요 거울 속엔 여전히 눈보라, 그러나 갈 곳이 없는 식물들, 다른 피로 모든 곳을 갈 수 있다고 다른 피로 당신은 말하겠지만

 

물에서 녹는 긴 긴 눈, 청어보다 더 푸른 것들에 대해 말하면 안 되나요

 

청어가 좋아요

먹어 본 적이 없으니까요

 

긴 긴 지느러미들, 우리가 물속에 있다고 말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안 되나요 구멍은 없어요 우리가 구멍이니까요 흐르는 흐르는 물속의 눈보라,

 

물속에서 다 녹아 버린 눈들에 대해 우리는 말하면 안 되나요

 

 

 

 

하와와, 너에게 꽃을 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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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천년의시작에서 시행하는 제7회 시작작품상 수상작으로 박진성 시인의 '물속의 눈보라'가 선정됐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홍용희 문학평론가는 이번 시작작품상 수상작인 박진성 시인의 물속의 눈보라에 대해 그의 시는 물속눈보라가 존재하는 비경을 중층적 상상과 몸의 감각으로 전언하며, 중층적 상상을 통해 세상 속의 또 다른 세상의 심연을 감지하고 이를 시각이 아니라 섬세한 손톱의 촉감으로 읽어 내고 있다그의 시 세계에는 비가시적이고 비선형적인 세계가 들어와 서로 엇섞이고 충돌하고 활성화하는 풍경이 더듬어진다. 특히 회화체의 통사 구조가 지닌 시적 소통과 공감의 감응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라고 평했다.

 

박 시인은 2001'현대시'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 '목숨' '아라리' '식물의 밤', 산문집 '청춘착란'을 펴냈다. 지난해 '동료들이 뽑은 올해의 젊은 시인상'을 받았다.

 

시작작품상은 지난 한 해 동안 계간 '시작'에 실린 신작시들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작품 1편을 선정해 수여하는 상이다. 그동안 유홍준, 신용목, 김경주, 이덕규, 허연, 이원 시인 등이 수상했다. 시상식은 6월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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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 이원

 

 

이상한 봄

 

깊은 발은 희망을 모를 테니

깊은 발은 바닥을 모를 테니

깊은 발은 실밥 푸는 곳을 모를 테니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식탁 의자에 몸 냄새가 밴 카디건을 걸쳐 두었지만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다시는 환청과 만나지 못한다 해도

그림자의 무릎뼈가 미처 펴지지 못했다 해도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이상한 봄

달아나는 발목

 

엄마 아빠

피가 흩어지는 축제

 

비명과 꽃잎과 누수를

돌멩이와 비닐봉지의 중력을

나란히 이해해

 

땅을 오래 두드린 발

얼리지 않은 땅

풀들은 담장 위로위로 솟아오른다

 

이상한 봄

춤을 추다 발목만 남았어

내용을 생각할 틈이 없었어

온몸에 죽음의 불이 붙었었거든

 

작은 점 하나가 목젖 부근에

눈물을 참으면 울퉁불퉁하다

지구에서처럼

 

홈리스는 하늘을 향해 침을 뱉는다

새들은 허공을 깨고 간다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서지 않는 엘리베이터에 타 본 적이 없어도

바다와 하늘이 바로 다음 언덕에서 만나고 있어도

사방의 벽마다 출구가 마련되어 있다고 해도

 

구겨진 틈 아니면 조롱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등 너머에서 붙잡던 목소리를 혀처럼 뽑아 쥐고 있어도

 

나는 사람이다

팔다리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너는 사람이다

예쁘고 연한 발목을 가졌다

 

자를 게 남았다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 2023년 편도행 화성 정착 프로젝트 공개 모집을 다룬 기사 제목.

 

 

 

 

사랑은 탄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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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서는 <오늘의 시인> 코너를 대신하여 <6회 시작작품상 수상자 이원 특집>을 게재한다. 등단 이후 지금까지 “‘라는 개념의 견고한 틀에 도전하면서 동시에 시적 상상력과 시적 형상화의 한계를 동시에 넘어서려고 했던 이원 시인”(<시작> 2014년 봄호, ?6회 시작작품상 심사평?)의 신작시 3편과 김익균, 김승일의 작가론을 싣는다. 김익균 평론가의 이원론은 기존의 이원 시에 대한 비평 담론들이 무심히 지나쳤던 이원 시의 문채의 수사학에 착목하여 이원 시인이 이미지 상태의 사유에 어떻게 도달하고 있는가를 면밀히 구성하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 한편 김승일 시인의 이원론은 다정다감한 작가론이다. 이 글을 읽고 있노라면 이원 시인이 얼마나 따뜻한 시인인지를 느낄 수 있는데, 그런 만큼 그녀가 한국 시단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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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의 나날 / 허연

 

 

강물은 무심하게 이 지지부진한 보호구역을

지나쳐 갑니다. 강물에게 묻습니다.

 

사랑했던 거 맞죠?”

그런데 사랑이 식었죠?”

 

상소 한 통 써 놓고 목을 내민 유생들이나, 신념 때문에 기꺼이 화형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장마의 미덕이 있습니다. 사연은 경전만큼이나 많지만 구구하게 말하지 않는 미덕, 지나간 일을 품평하지 않는 미덕, 흘러간 일을 그리워하지도 저주하지도 않는 미덕. 핑계대지 않는 미덕. 오늘 이 강물은 많은 것을 섞고, 많은 것을 안고 가지만, 아무것도 토해 내지 않았습니다. 쓸어안고 그저 평소보다 황급히, 쇠락한 영역 한가운데를 몰핀처럼 지나왔을 뿐입니다. 뭔가 쓸려 가서 더는 볼 일이 없다는 건, 결과적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치료 같은 거죠.

 

강물에게 기록 같은 건 없습니다

사랑은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오십 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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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시작이 운영하는 제5시작(詩作)작품상수상자로 시인 허연(47·사진)씨가 선정됐다. 수상작은 장마의 나날’.

 

1991현대시세계로 등단한 허 시인은 특유의 냉소적 문법으로 세계와 존재의 역설적 희망을 구축하는 시 세계를 선보여왔다.

 

심사위원인 김춘식 동국대 국문과 교수는 수상작을 연륜과 섬세한 감성을 동시에 보여 주는 새로운 시의 가능성이라고 평했다. 다른 심사위원인 유성호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슬픔을 인간 존재의 보편적 형식으로 노래하면서도, 소멸해 가는 것들을 감싸 안으면서 사랑의 형식을 치열하게 탐색하는 작품이라고 밝혔다.

 

시작작품상은 시작문학상의 새 이름으로 계간 시작에 발표된 신작시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에 주는 상이다.

 

시상식은 15일 오후 6시 서울 동숭동 대학로 예술가의집 3층 다목적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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