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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을 놓치다 / 이해원

 

 

실꾸리처럼 풀려버린 퇴근 길

오늘도 졸다가 역을 놓친 아빠는

목동역에서 얼마나 멀리 지나가며

헐거운 하루를 꾸벅꾸벅 박음질하고 있을까

 

된장찌개 두부가 한껏 부풀었다가

주저앉은 시간

텔레비전은 뉴스로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핸드폰을 걸고 문자를 보내도

매듭 같은 지하철역 어느 난청지역을 통과하고 있는지

연락이 안 된다

하루의 긴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졸음이 한 올 한 올 비집고 들어가 실타래처럼 엉켰나

기다리다 잠든 동생의 이불을 덮어주고

다시 미싱 앞에 앉은 엄마

헝클어진 하루를 북에 감으며 하품을 한다

 

밤의 적막이 골목에서 귀를 세울 때

내 선잠 속으로

한 땀 한 땀 계단을 감고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

현관문 앞에서 뚝 끊긴다

안 잤나

졸다가 김포공항까지 갔다 왔다

늘어진 아빠의 목소리가

오늘은 유난히 힘이 없다

 

 

 

 

2012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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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지친 나에게 새로운 불꽃이 일어

 

이런 기쁜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두 번의 수술로 몸과 마음이 지쳐 올해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귀를 의심했습니다.

 

너무 떨려서 전화도 제대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늦게 시작한 분들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젊은 문학도의 길을 가로막은 건 아닌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늦게 출발해 시의 발아점까지 달리기엔 숨이 찼습니다. 햇빛도 보기 전에 멈춰버린 날들이 폐지처럼 수북이 쌓였습니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시를 놓고 있다가 느닷없는 당선 소식으로 마음에 불꽃이 일었습니다. 이 소중한 불꽃, 시를 향한 뜨거운 열정으로 태우겠습니다.

 

옛날 호롱불 밑에서 밤늦도록 책을 보시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때 저의 가슴에 시의 씨앗 하나 묻어놓으신 분들, 기뻐하실 모습을 상상하니 너무 보고 싶어 눈물이 납니다.

 

주저앉은 제 손을 잡아주신 유종호, 신경림 심사위원님과 세계일보사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시의 길로 이끌어 주신 박주택 선생님, 항상 용기를 주시던 이문재 선생님께 큰절 올립니다.

 

힘들 때 힘이 되어 주시던 마경덕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시사랑 화요팀 선생님들과 문우들 고맙습니다.

 

묵묵히 지켜보는 남편과 딸 미라, 아들 명훈이와 창훈이, 친지들, 친구들, 저를 아는 모든 분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일곱 명의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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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따듯하고 애달픈 시서민가정의 풍경 잘 묘사

 

지난해보다 작품 수준이 높다는 것이 심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지만, 개성이 강한 작품이 많지 않다는 지적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행을 타는 것인지 응모작들이 서로 비슷비슷한 점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창작교실 등의 영향이 없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예선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 중에서 특히 정수박이, 설수인, 이해원의 작품들은 당선작으로 일단 손색이 없는 것으로 판단됐다.

 

정수박이의 능선을 바라보며는 무리 없이 읽히는 장점을 지녔으며 호소력도 상당하다. 한데 내용이 너무 평범해서 어디서 한 번 들은 것같이 귀에 익다. ‘민달팽이는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껍데기조차 지니지 못하고 대학을 나온 아들의 취직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오늘의 아버지 모습이 잘 나타나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기에 충분한 내용이다. 그런데도 당선작으로는 무언가 1퍼센트 모자란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어느 한 구석 맺힌 데가 없어서일 것이다. 설수인의 시 가운데서는 투석실의 하루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직접적인 체험 없이는 쉽게 얻을 수 없는 표현이라는 점이 우선 호소력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 고통을 통해 도달하는 깨달음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한데 조금 장황하고, 내용 탓인지 읽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대목이 없지 않다. ‘줄 끊긴 바이올린이나 앉은뱅이 저울에 대해서도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해원의 역을 놓치다는 참 따듯하고 애달픈 시다. 여러 면에서 오늘의 정서를 잘 대변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가난하지만 평화스럽고 행복한 서민의 가정 풍경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새롭고 예리한 느낌을 주지 못하는 흠을 가졌다. ‘육교 밑 고고학자냉장고는 태교중은 비유가 안이하고 서툴다. 이상의 후보작들을 놓고 숙의한 끝에 시의 완성도에 무게를 두기로 하면서 역을 놓치다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 심사위원 유종호·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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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밭 / 홍문숙

 

 

비가 내리는 파밭은 침침하다

제 한 몸 가려줄 잎들이 없으니 오후 내내 어둡다

다만

제 줄기 어딘가에 접혀있던 손톱자국 같은 권태가

힘껏 부풀어 오르며 꼿꼿하게 서는 기척만이 있을 뿐,

비가 내리는 파밭은 어리석다

세상의 어떤 호들갑이 파밭에 들러

오후의 비를 밝히겠는가

그러나 나는 파밭이 좋다

봄이 갈 때까지 못다 미행한 나비의 길을 묻는 일은

파밭에서 용서받기에 편한 때문이다

어머니도 젊어 한 시절

그곳에서 당신의 시집살이를 용서해주곤 했단다

그러므로 발톱 속부터 생긴 서러움들도 이곳으로 와야 한다

방구석의 우울일랑은 양말처럼 벗어놓고서

하얗고 미지근한 체온만 옮기며 나비처럼 걸어와도 좋을,

나는 텃밭에서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한줌의 파를 오래도록 다듬고는

천천히 밭고랑을 빠져나온다

 

 

 

 

2011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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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은유의 텃밭에서 세월과 만나다

 

아버지는 인문학자시다. 그분이 읽던 흑백의 서책들은 이제 나비 한 마리 꿈꿀 수 없지만 아버님은 가끔씩 내 삶의 철자법이 맞지 않을 때에도 설핏 숨어들기에 좋은 내 인문학의 서책이셨으며 따뜻한 은신처였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내 문학의 시원은 아버지로부터의 어쩔 수 없는 유산일 것이며 유산이란 때로 세월의 미시성을 강의 깊이로 흐르다가 문득 마주치는 어머니와도 같은 것. 그리고 나에겐 내 필생의 힘으로도 낳을 수 없는 어머니라는 의미와 인연의 텃밭, 그 대신 신생의 어머니를 만나는 세월의 대가가 곧 나비였으리라.

 

권태가 욱신거릴 때마다 텃밭을 찾곤 했다. 그럴 때마다 한 사나이는 내 권태의 목록과는 관계없는 도시 저쪽의 서류철을 뒤적이거나 어느 소인국의 작은 병정처럼 돌아오곤 했다.

 

나비가 우화를 꿈꾸는 건 오후의 우울을 낳기 위함이지, 젖은 소낙비가 파줄기의 어느쯤을 똑똑 부러뜨리기도 하는 그 놀랍고 목이 긴 은유 속을 낮은 금속질의 열쇠로 딸깍, 열어주던 한 아이 그 속에서 올겨울엔 아들 정환이와 오월이 되어 은신시킬 새로운 파씨들을 골라보는 일

 

내 문학의 항해가 검은 돛배일 때마다 은밀한 등대가 되어주신 박경원 선생님과 차령문학그리고 시내에서 십분 거리의 내 귀가길을 동행해준 몇십년 동안의 평택 방축리행 시내버스에게도 겸손한 감사를 전합니다.

 

또한 저에게 큰 기회를 주신 유종호 신경림 심사위원님과 세계일보사에 감사드리며 더 깊은 문학의 길로 정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긴 하루, 그의 말들은 낙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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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경직돼 있지 않고 자연스럽고 신선

 

예년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에 확 띄는 작품은 없었다. 오늘의 한국시가 갇혀 있는 프레임을 과감하게 깨트리는 작품을 찾을 수 없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저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소리를 중언부언하는 시는 눈에 띄게 줄었다. 아주 뛰어난 작품은 많지 않으면서도 당선작이 되어도 손색이 없을 작품은 적지 않아 선자들은 마음을 놓았다.

 

특히 다음 네 분의 시가 처음부터 주목을 받았다. 홍문숙의 파밭등은 시를 쓴다는경직된 포즈가 안 보이면서, 자연스럽고 신선하게 읽혔다. 속도감도 있는 데다 요즘의 유행과도 한 발 떨어져 있는 것도 미덕이었다. 그러나 투고한 작품들의 편차가 심해 쉽게 신뢰감이 가지 않았다.

 

종정순의 개나리는 왜등은 기지도 있어 보이고, 밝고 환한 분위기의 시여서 심사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우리 시가 가진 청승과 궁상이 없는 것도 호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화문석’ ‘현대방앗간같은 산문투의 시들은 시의 맛을 반감시킨다.

유명순의 시 중에서는 내통이 가장 뛰어났다. 부부 간의 관계, 나아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보는 시각이 자못 설득력이 있다. 한데 시들이 전체적으로 숨통을 조일 듯 답답한 것이 흠이다. 게다가 뫼비우스의 띠같은 흔해빠진 이미지가 일부 그의 시를 상투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최인숙의 시들은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데다 표현도 큰 무리가 없고 자연스러웠다. 한데 어쩐지 시창작교실의 냄새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시는 쓰는 것이지 쓰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시를 위한 시가 가지는 감동은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이상 네 사람의 시를 놓고 많이 얘기한 끝에 결국 홍문숙의 파밭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심사위원은 합의했다.

 

심사위원 신경림, 유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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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고 하였다 / 권지현

 

 

우루무치행 비행기가 연착되었다

북경공항 로비에서 삼백삼십 명의 여행자들은

여섯 시간째 발이 묶인 채 삼삼오오 몰려다녔다

현지여행객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행가방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

떠들어대거나 서로 담배를 권했다

 

담배를 피워올리건 말건

나는 도시락으로 식사를 했다

비행기는 언제 올지 오지 않을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연착한다는 안내표시등 한 줄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연신 줄담배를 피우고

나는 로비를 몇 바퀴나 돌고

하릴없이 아이스크림을 핥다가

마침내는 쪼그리고 앉아 지루하게 졸았다

항의하는 나를 마주한 공항여직원

가슴께에 걸린 얼굴사진이 흐릿하게 지워져 있어

내가 가야할 길마저 희미해 보였다

 

비행기는 오지 않고

결리는 허리뼈를 아주 잊을 때까지 오지 않고

우루무치행 비행기는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2010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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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문학의 길 가르쳐주신 스승께 큰 절

 

하이데거는 시의 본질을 구명하는 자리에서 시는 존재의 개명(開明)’이라고 말했습니다. 완성된 시작품 자체의 내용뿐만 아니라 시를 이루어가는 과정이 존재를 개명해 가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삶을 이루는 여러 요소 중에서 시 쓰기는 제 생의 마지막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벌써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이제는 구체적인 주물을 부어주고 숨결을 들어앉혀 생동감 넘치는 세계들을 하나씩 세상 속으로 내보내고자 합니다. 그 세계 속으로 초대된 사물과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표정, 다른 마음결로 싱그러워지기까지 저는 나폴대며 떠가는 민들레 씨앗에 가볍게 얹혀 날아오르다가도 시원한 장대비 따라 두 발 철벅이며 흘러내릴 것입니다. 그리곤 어디쯤에선가 튼실한 시의 뿌리를 내리고 싶습니다.

 

사람은 단지 절반만 그 자신이며 나머지 절반은 그의 표현이라고 에머슨은 시인에서 이른 바 있습니다. 작품을 쓰기 전에 창조적인 삶을 살아야 하며 작품 속에서 다시금 새롭게 자신의 생을 구체화해야 함을 이른 말이라 생각됩니다.

 

문학의 길을 가르쳐주신 스승 신대철 선생님께 큰 절 올립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편 박성우 시인과 딸내미 규연양, 언니와 동생 가족들, 시어머니와 시댁 식구들, 국민대 학우들과도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정양 김용택 안도현 선생님을 비롯한 전주 쪽 응원부대 여러분, 참 고맙습니다.

 

저에게 큰 기회를 주신 유종호 신경림 심사위원님과 세계일보사에 감사드립니다. 더 넓은 문학세계로 나아가라는 뜻에 답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작은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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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담담하고 소박하면서 서정성·균형감 가져

 

좋은 작품이 여러 편 눈에 띄었다. 권지현의 모른다고 하였다는 담담하고 소박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담담하고 소박하다고 해서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공항 여직원/ 가슴께에 걸린 얼굴 사진이 흐릿하게 지워져 있어/ 내가 갈 길마저 희미해 보였다처럼 평이한 일상 속에서 삶의 결을 찾아내는 눈은 결코 예사로운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시는 시를 가지고 무슨 엄청난 것을 해보겠 다는 허영심이 억지와 무리로 이어지면서 읽기 어려운 시가 범람하는 우리 시단을 향하여 던지는 새로운 질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낡지 않은 서정성과 균형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 시의 미덕이라 할 수 있다. 지나치게 평범하다는 비판이 따를 수도 있겠지만, 주말부부의 쓸쓸한 삶의 단면을 그린 냉동실이며 박물관을 통하여 과거와 오늘을 대비시킨 플래시도 이 작자의 저력이 탄탄함을 말 해준다.

 

고민교의 어느 결혼이민자를 향한 노래는 아주 재미있고 따뜻하면서, 시의에 맞는 주제이기도 하다. 쉽게 융합할 수 없는 둘 사이를 가래추자에 비유한 것도 적절하고, 간절한 마지막 구절도 강한 울림을 준다. 이 시를 읽으면서 시는 역시 시의 특성을 버릴 수 없으며, 시가 산문의 상태를 그리워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게 된다.

 

신은유의 시 가운데서는 고딕식 첨탑이 가장 좋았다. 좀더 난삽한 바닥만 보면서 걷는 것은 내 오랜 습관이다도 마찬가지이지만, 깊은 사유와 고뇌의 흔적이 아로새겨져 있어서, 읽으면서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드는 시다. 하지만 너무 말이 많고 어지럽다. 말을 고르고 빼는 보다 엄격한 과정을 거친다면 참으로 좋은 시를 쓸 사람으로 생각된다.

 

이상 세 사람의 시를 놓고 토의한 끝에 선자들은 권지현의 모른다고 하였다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심사위원 유종호,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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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없음

 

 

 

 

 

2009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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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흔히 한두 편 눈에 번쩍 띄는 작품이 있게 마련인데 이번에는 그렇지를 못했다. 발상이나 기법이 모두 비슷비슷하고 세상이나 사물을 보는 눈에도 깊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것은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데 따른 것이고, 다시 그것은 시를 제대로 읽지 않은 데 연유하는 것이리라.

 

실제로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당장 화제가 되는 시만을 몰입해서 읽는 경우를 허다하게 본다. 그래서 한두 편 그럴듯하게 만들어 놓기도 하지만, 손끝으로 만든 시가 깊이가 있고 생명을 가지기가 쉽지 않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는 당장의 효과를 우선시하는 시창작 강의의 영향도 한몫을 한다. 하지만 좋은 시가 어찌 말이나 논리로 설명이 되겠는가. 좋은 시를 많이 읽어 몸에 익히는 수밖에 없을 터로, 동시대 또는 당대의 시만을 읽는 공부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적어도 우리 시에서 고전이 되어 있는 것이라면 모두 폭넓게 공부하여 스스로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 알게 되는 것만이 좋은 시를 쓰는 가장 빠른 길이다.

 

잘 안 읽히고 시원한 맛이 없는 것도 투고된 작품들을 관류하는 특성이었다. 내용이나 기법이 참신하지 못하고 진부한 것이 많았다. 가령 의도적으로 산문 형태를 취한다든가 행을 부자연스럽게 자른다든가 쉼표를 쓰지 않는다든가 등의 방법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여러 번 써먹은 기법으로 전혀 새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여러 투고자들은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이에 비하면 자연스러운 리듬을 갖는 시가 훨씬 새로울 수 있는데도 말이다.

 

너무 원론적인 얘기일 수도 있겠으나 억지로 시를 만들려고만 하지 말고 시를 쓸 수 있는 바탕을 가지려는 노력을 하는 것도 시를 공부하는 중요한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 것은 이래서이다. 두보가 그렇게 좋은 시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불우하고 진실한 생애를 살았으며, 그의 가슴에는 항상 세상의 부조리와 불공정에 대한 정직하고도 성실한 분노와 비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예를 든다면 너무 거창한 예가 될는지 모르겠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졸가리를 알 수 없는 장황한 시도 많았다. 내용은 없으면서도 터무니없이 긴 시들도 시를 읽는 즐거움을 반감시켰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유정, 이명, 김희정의 시는 읽을 만했다.

 

이유정의 철제계단은 상징성도 있고 비유도 자못 재미있는 대목이 없지 않았다. ‘상쾌한 아침을 위하여는 문자 그대로 상쾌하고 속도감 있게 읽히는 미덕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평이했다. 신인으로서는 무언가 새로움이나 패기에 있어 부족한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이명의 눈보라 치는 새벽앨리스가 없는 이상한 나라는 이유정과는 반대로 장엄한 맛이 있고 가락에도 힘이 넘쳤다. 하지만 치기가 보이는 것이 흠이었는데, 그의 다른 시 현대 우편제도의 천문학적 기원이 결정적으로 그 흠을 확대시켜주었다.

 

김희정의 홈쇼핑 치타는 재주가 번득이는 시로 크게 호감이 갔다. ‘숙성되는 방은 위 작품을 쓴 같은 작자의 것으로는 너무 발상의 격차가 심해 역효과를 가져왔다.

 

억지로라면 앞의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당선자로 뽑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심사자들은 숙고한 끝에 당선자를 내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더 좋은 시인으로 태어날 동기를 만들어 주기로 했다.

 

- 심사위원 유종호,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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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집 / 박미산

 

 

갈비뼈가 하나씩 부서져 내리네요

아침마다 바삭해진 창틀을 만져보아요

지난 계절보다 쇄골 뼈가 툭 불거졌네요

어느새 처마 끝에 빈틈이 생기기 시작했나 봐요

칠만 삼천 일을 기다리고 나서야

내 몸속에 살갑게 뿌리 내렸지요, 당신은

문풍지 사이로 흘러나오던

따뜻한 온기가 사라지고

푸른 송진 냄새

가시기 전에 떠났어요, 당신은

눅눅한 시간이 마루에 쌓여있어요

웃자란 바람이, 안개가, 구름이

허물어진 담장과 내 몸을 골라 밟네요

하얀 달이 자라는 언덕에서

무작정 기다리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화티에 불씨를 다시 묻어놓고

단단하게 잠근 쇠빗장부터 열겁니다

나와 누워 자던 솔향기 가득한

한 시절, 당신

그립지 않은가요?

 

 

 

 

2008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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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느리게 공부하는 내게 격려·질책해 준 선생님께 감사

 

나는 무언가를 시작할 때라든가 막막한 나날이 계속될 때마다 산을 탔다. 바싹 마른 말이 먼지를 피우며 스르르 무너지려 할 때 지리산을 완주했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설악과 북한산에 다니면서 내 몸을 다져 밟았다.

 

잘근잘근 밟혀 돌아오면 후줄근한 내 몸에서 말들이 피어나왔다. 허기진 가슴에서 바람이, 구름이, 안개가 시로 피어났고 때로는 미처 피어나지 못한 말들은 나도 모르게 곳곳에 쌓여 갔다.

 

찰랑찰랑 의심하던 사랑을, 요절을, 시를 여름 계곡에 떠나보내고 푸른빛이 사라져 이슥해진 나의 겨울 계곡은 은빛의 물 뿌리가 드러났다. 바닥이 다 드러난 나는 솔솔 내리는 눈발에 목을 축이고 사모하는 긴 혀를 따라 구불구불 의심했던 길을 다시 갔다.

 

피어나지 못했던 말은 부패되지 않은 채 골짜기로 흐르고 있었으며 이리저리 부딪치며 새 물길을 터뜨리기도 했다.

 

지난밤 나는 가장 예쁜 꿈을 꾸었다. 눈 쌓인 계곡에 차가운 바람을 얼굴에 맞으면서도 지천으로 피어나던 꽃살문들이 활짝 웃고 있었다.

 

내가 존경했던 선생님께서 철없는 나에게 늦게 피는 꽃이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지진아처럼 느리게 공부하는 나에게 격려와 질책을 아낌없이 해주신 최동호 선생님과 시 합평회를 할 때마다 묵사발을 만들어준 수요시창작팀, 유안진 선생님, 장만호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치매로 고생하시는 시어머님과 구십이 넘도록 식당일을 하시는 친정어머니, 묵묵히 나를 지켜준 남편과 사랑하는 두 딸 단비와 차래에게도 고마움을 보낸다. 십년을 함께 땀 흘린 택견패들에게도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고, 무엇보다도 유종호 선생님과 신경림 선생님 두 분 심사위원께 감사드린다.

 

오랜 세월 흐르는 동안 유연해지고 너그러워진 말로 살냄새 나는 시를 쓰고 싶다. 나는 우리들의 삶을 감싸 안는 따뜻함이 묻어나는 시를 씀으로써 두 분 심사위원께 두고두고 은혜를 갚을 참이다.

 

 

 

 

태양의 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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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신선하고 맛깔스럽게 쓴 아주 따뜻한 시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이 수준이나 내용이 비슷비슷했다.

 

특별히 개성 있는 시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았고, 재미있게 읽히는 시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실직’(이재근), ‘나비의 꿈’(문계현), ‘너와집’(박미산) 같은 작품들은 신춘문예라는 관문을 통과할 수준은 넉넉히 되었다.

 

먼저 실직은 삶에 뿌리박은 정서의 시로서 호소력을 갖는다. 한데 무언가 신선한 맛이 덜하고, 죽음의 이미지가 시를 무겁게 만든다. 게다가 너무 건조하다.

 

같은 작자의 얼굴은 읽는 재미는 실직보다 낫겠는데, 산만하고 장황한 것이 흠이다.

 

나비의 꿈은 장애인 부부의 외식 나들이가 소재가 된 시로서, 그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비유가 좀 억지스럽고 관념적이다. 외국인 근로자가 화자가 되고 있는 붉고 둥그스름한 다라이는 정리가 더 돼야 할 소재 같다.

 

하지만 남과 같지 않은 상상력은 그의 앞날에 기대를 가지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너와집은 아주 따듯한 시여서 일단 호감이 간다.

 

물론 너와집은 실제의 너와집이기보다 당신가 만든 사랑의 집일 터, 그 비유가 호소력이 있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말이나 감각도 신선하고 맛깔스럽다. ‘문둥이가 사는 마을, 이랑진 무덤들 사이에도는 열두 살 여름의 추억을 소재로 하고 있는 시로서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재미있게 읽힌다.

 

이렇게 해서 우리 두 심사위원은 최종적으로 박미산의 너와집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 심사위원 신경림·유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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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엄한 모자 / 이기홍

 

 

오늘 예식장에 그를 데려가기로 합니다 그는 내 가슴속에 살면서도 맨 위에 올라가 군림하기를 좋아합니다 어쩌면 그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끔, 내 든든한 밑바탕이 되어주는 그가 차갑고 근엄한 얼굴을 치켜들면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가 다소곳이 머리를 조아립니다 예식장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도 나보다는 그에게 더 깊은 관심을 표하기도 해 속이 몹시 상합니다 이제 그가 없으면 나는 사람들의 괄호 밖으로 밀려날지 모릅니다 그래서 난 외려 그의 보디가드가 됐습니다 그의 뾰족한 코가 땅바닥에 곤두박질치진 않을까 낯선 바람에라도 끌려가 낭패를 당하지 않을까 조금도 맘놓지 못하고 그를 지켜봐야 합니다 슬그머니 내 위까지 올라와 상전이 된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나 나는 이렇게 나와 다르게 살아야 하나요 그를 몰아내고 청바지 입기를 좋아하는 나를 데려올 수는 없나요

 

 

 

 

2007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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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밝은 날을 뒤로하고 나는 어둠 속으로 걸어갔었다 거기서 그대가 먼 종소리로 날 부르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다가갈수록 꽁꽁 숨어버리던 그대 그대를 찾아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다 나는 깊은 어둠이 되었다, 숯이 되었다. 그 깊은 밤, 비로소 내가 암흑이 되고 나서야 그대가, 해맑은 그대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숯이 된 내 몸이 뜨겁게 타면서 빛을 낸 것이다. 이제 내가 타는 빛으로 세상은 다시 환해지고 나는 그대를 어슴푸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시가 내 앞에 다가와도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고 겨우 눈치채고 마음을 고백하려고 달려갔을 땐 이미 시는 점점 더 내게서 멀어져만 갔었다. 그럴 때, 시를 알아보는 방법과 불러들이는 방법을 알려주셨던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 드립니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감태준·정희성·이승하 선생님들과 선후배님 그리고 함께 길잡이가 되어준 문학아카데미와 정동진역 동인형들, 사랑하는 어머니와 가족들, 길을 열어주신 세계일보사와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무한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비슷비슷한 내용, 비슷비슷한 형식의 작품들이 너무 많았다. 불필요하게 산문 형식을 취하고 있거나, 억지로 만든 흔적이 앙상하게 드러나 있는 시도 적지 않았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고 대상을 주의 깊게 보려는 자세를 보기 어렵다는 점이 아쉬웠다. 널리 유행하는 시 창작 강좌 등의 부정적 영향이 아닌가 싶었다. 아무리 시를 보는 눈이 바뀌어도 지극히 개성적이고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시각을 가졌을 때 좋은 시가 된다는 점만은 달라질 수 없을 것이다.

 

구민숙의 시들은 시의 전개도 날렵하고 말의 구사도 자못 신선하다. 특히 자꾸 헛것처럼같은 시는 흠잡을 데 없이 꽉 짜인 시로 읽히며, ‘귀가같은 시도 기성 시인의 것이라면 충분히 우수한 시로 거론될 법하다. 하지만 투고돼온 다른 사람들의 시와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 크게 다르지가 않다.

 

문정인의 시 가운데서는 외국인 노동자를 다룬 것으로 보이는 오카리나 부는 오빠가 속도감도 있고 가장 재미있게 읽힌다. ‘옥탑방 여자도 밝고 환하면서도 서글픈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작자의 만만찮은 솜씨를 보여준다. 다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고 많이 들은 것 같은 이미지요 정서인 것이 흠이다.

 

이들 둘에 비해 최찬상의 시들은 덜 다듬어진 듯하면서도 개성적이다. 그러나 이 발상이나 시법에 있어 아주 새로운 데 반하여, ‘자전거희망의 길같은 시는 아직 치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걱정을 떨쳐버리기 어렵게 만든다.

 

이기홍의 시도 개성적이라는 점이 먼저 호감을 갖게 한다. 특히 근엄한 모자는 속물화돼 가고 있는 주변에 대한 야유이면서 동시에 똑같이 속물화돼 가고 있는 자신에 대한 야유이기도 함으로써 감동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사색과 고뇌의 궤적도 엿보일뿐더러 문명비평적인 시각까지 담보하고 있는 수작이다. 이에 비해서 푸른 바람의 집이나 내 몸속을 구르는 돌은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 미흡하다.

 

이상 네 사람의 작품을 놓고 논의한 끝에, 작품의 편차가 좀 불안하기는 했으나, 드물게 개성적이라는 점, 동세대 시인에게 결여돼 있는 사색적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 등을 높이 평가해서, 어쩌면 모험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심사자들은 이기홍의 근엄한 모자를 당선작으로 뽑는 데 합의했다.

 

심사위원 유종호·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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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여인 / 이윤설

 

 

매일 창 여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지만, 매일 창 여는 순간 일정하게 지나가는 이국의 여인. 자줏빛 붉은 함박꽃 모직코트를 여며 입은 그 몸은 뚱뚱하나 검게 불 타는 흑발, 영롱한 흑요석의 눈동자를 불가리아 여인, 이라 칭하기로 하자. 가본 적 없는데도 그 여인 볼 때마다 벽력처럼 외쳐지는 불가리아! 정염의 혀가 이글거리는 태양과 열정이 조합된 발음! 가혹하게 태질하는 칼바람을 움츠려 깊이 찔러넣은 함박 핀 꽃은 불길하게도 피붉어 하염없이 걷고 걸어도 불가리아 여인 하염없이 걷고 걸어도 내 창 앞 그 여인 어쩌다 여기에 와 있는 거죠, 겹쳐진 창문으로 지나가는 그 여인 부풀어 터질 듯 꽃핀 몸, 타오르는 흑요석 눈빛은 생각하겠지, 저 이방의 여인 코리아의 여인 창 속의 갇힌 듯 노랗게 뜬 얼굴 부르쥔 손 왜 내가 지나가는 이 시간마다 일정하게 창을 여는 걸까. 어떤 이끌림이 그녀와 나의 눈동자 속 흑점에 맞추어지고 우리 서로 의아해하며 바라본다 왜 하필 나를 선택한 걸까. 하고많은 사람 중에 불가리아 여인 코리아 여인 우연히 다시 만난다면 스치듯 안녕, 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불길하게도 매일 일정하게.

 

 

 

2006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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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오늘의 기적에서 신의 은유를 느낀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은유가 있다.오래도록 어두운 창을 바라보는 날이었어도 잘 지냈다고 미소지을 때, 그 미소에는 그의 혼자인 촛불이 흔들리던 날들과 등을 기대고 허공에 그리던 얼굴 같은 것들이 모두 둥글게 감싸인 채 소유되는 것이다. 돌아서는 그의 어깨 뒤로 숲의 잎들이 가을을 받아적기 시작할 때, 그는 그 모든 날들을 자신의 힘겨운 육체의 일부분으로 가지고 호젓한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사람이 모두 시인인 때는 제 뜨거운 아픔을 손에 꽉 쥐고도 놓지 않고 지니고 갈 때이다. 그것이 또 하나의 자신이 될 때까지 버리지 못하고 울 때이다. 사람의 은유는 신에게서 배워 사람만이 읽을 수 있도록 주어진 것, 그래서 그는 신의 은유로써 살아가고 신의 품에서 죽어가는 것이다. 신이 그를 버리지 못하고 울 때이다.

 

오늘 이 평범한 기적에서 나는 신의 은유를 느낀다.

 

나의 모든 아름다운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감태준·이승하 선생님과 문창과 선생님들, 강형철 선생님, 오정국 선배님, 차창룡 선배님 그리고 멀리서 마음의 손 잡아주시는 철학과 선생님들과 선후배들, 토지문화관의 봄에서 여름까지 뜨거운 예술가의 자세를 보여주셨던 고마운 선생님들, 나의 벗 기연. 그리고 엄마 아빠 가족들, 내가 그다지도 귀애하는 꽃과 새와 별의 지옥인 너에게. 기회를 주신 신경림 유종호 선생님께는 말로 다하지 못하겠습니다.

 

 

 

 

[심사평] "삶과 사물을 꿰뚫어 보는 빛나는 예지"

 

비슷비슷한 내용, 비슷비슷한 이미지들의 시가 많은 것은 같은 세대가 같은 정서, 같은 생각에서 살고 있는 데 연유하는 바도 없지 않겠으나, 한편 시를 잘못 공부하고 있어 그런 것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억지로 만들어 잘 읽히지 않는 시도 많았지만, 삶과 사물을 꿰뚫어 보는 빛나는 시가 예년에 비해 더 많았다. 그 중에서도 이윤설의 시들이 단연 빛난다. 우선 세상을 보는 눈이 남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가령 불가리아 여인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창을 열고 같은 시간에 지나가는 이국 여인을 본다는 것이 시의 내용인데, 그를 불가리아 여인으로 상정한다든가 또 그의 위치에서 창 안의 나를 바라본다든가 하는 설정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못된다. 시가 전체적으로 지극히 발랄하고 싱싱하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성난 여자에서는 활기와 거침없는 서술이 독특한 리듬을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도 시가 재미가 있고 속도감 있게 읽힌다는 점도 미덕이다.

 

재미있고 잘 읽힌다는 점에서는 황현진의 시도 뒤지지 않는다. ‘당신과의 드라이브당신에게 키스를같은 시는 시라면 으레 심각하고 어렵다는 개념을 바꿔 놓는다. 한데 어딘가 한구석 덜 익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 흠이다.

 

김종분의 시들은 조금 구투라는 느낌을 준다. ‘나는 불량 농민이다는 메시지도 분명하고 잘 읽히지만, ‘나는 구술 면접을 잘 볼 자신이 없다같은 시는 지루하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이만큼 형상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우리 문학에서 전반적으로 사회적 상상력이 퇴색되어가고 있는 현실에 있어 그의 시들은 매우 값진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마지막까지 남은 세 사람의 작품 중에서 이윤설의 불가리아 여인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선자들은 쉽게 합의했다.

 

심사위원 유종호(문학평론가·시인), 신경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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母女의 저녁식사 / 윤진화

 

 

배추김치.... 파김치.... 상추겉절이.... 오이소박이.... 어머니.....

.... 어머니.... 우리 집 식탁에는 온통 풀뿐이네요

우리의 저녁 식사는 말들이 좋아하겠어요

보세요? 하얀 접시 위에 그려진 말이 우리보다 먼저

우리의 저녁 식탁에 와 있잖아요. 그래요. 거기요. 가만히,

아이처럼 귀를 기울이면,

어디선가 또 다른 말이 들길을 지나 마을 건너

가난한 우리 식탁으로 달려와요. 들리세요?

주인을 버리고 달려오는 말울음 소리요

저기 먼 곳에서는,

젖가슴 하나 달린 여자들이

안장도 없는 말을 타고

드넓은 대지를 흔들며 산다던데... 히잉! 어머니

주홍빛 하늘이 몰려와 대지를 덮으면

동그랗게 몸을 웅크린 여자들이

말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우리 식탁을 향해 자신의 말들을 찾아

고단한 하루치 태양을 쉬게 하고 달려와요

... 히잉! 어머니

당신이 좋아하는 딸기 아이스크림이 녹을 때처럼

하늘이 물들어갈 때, 그녀들이 달려와요

가슴 하나를 도려낸 그녀들이, 자꾸만 자꾸만

초대받은 손님처럼 달려와요

어머니, 유방암에 걸린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여

듣고 계신가요?

전사들이

우리의 밀림으로 몰려오는 소리,

그 침묵의 소리들이요

히잉! 어머니.

 

 

 

 

2005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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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시가 당선 "더더욱 감사열심히 하겠습니다

 

올 한해 더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이번에 당선된 시는 제 시중에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시입니다. 그래서 본심 심사위원들께 더더욱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할머니! 당신처럼 곱고 따뜻하고 깔끔한 분이 세상을 떠나려 하신다는 의사의 말이 믿기지 않습니다. 제발 부탁이니 지금은 가지 마세요. 전에 말씀하신 앙고라 스웨터, 이참에 좋은 걸로 사드릴 수 있다고요. 그리고 지금은 너무 춥다고요.

 

시계 속, 작은 톱니가 큰 톱니에게 머리를 지긋이 눌리며 내지르는 비명- 착각. 이 끔찍한 아비규환에 하루를 열고 닫고, 웃고 우는 아둔한 착각.

 

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는 맘- 착각. 저 무수한 착각의 셔터를 누르는 거역할 수 없는 시선.

 

Thanks to:서형순 여사, 테오 같은 동생들과 안나, 아득한 이국의 언어 아버지, 사랑하는 ZEUS, 우리는 시를 믿는다 詩川, 언제나 그 자리 선배 미영, 허방을 향한 농담 스스와타리, 너무 고마운 사람 승렬이 아재, 하늘 아래 효부 큰엄마 황숙자 여사, 삶을 연극처럼 연극을 삶처럼 연극마당, 획을 긋는 국립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따뜻한 명지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참삶 참문학 어의문학회·19, 국정호, 이주영, 김주현, 박상남, 최혜선, 전지원, 경아언니, 안치윤·박수현 부부 그리고 기꺼이 시가 되어준 여러분의 삶.

 

Special Thanks to: 아픔을 드러내는 법 닥터. 키팅, 한걸음에 달려와 안아주신 이사라 선생님, 죽기 직전에 만난 정신과 주치의 아무도 몰래 묻어주고 싶었던그들의 詩集에게, 예심 심사하신 선생님께

 

 

 

 

모두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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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당선작 발상탁월우리지평 넓힐 것 마지막 후보작 2편도 만만찮은 솜씨

 

윤진화, 강호정, 이우경의 시들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윤진화의 母女의 저녁 식사는 발상이 아주 신선하다.

 

풀뿐인 식탁--아마존의 여왕 히포리테-유방암에 걸린 어머니의 연상도 재미있지만, 이미지가 청승맞거나 구질구질하지 않고 쌈박하고 날렵한 점도 호감을 갖게 한다.

 

많은 사람들의 시가 내용이나 형식에서 서로 닮아 있는 데 반하여 이 시는 다른 사람의 시와 전혀 같지가 않다. 사물을 보는 시각이 다른 사람과는 본질적으로 같지 않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리라.

 

역시 어머니의 잃음을 노래한 두 개의 꿈도 뛰어난 시다. 슬픔이니 아픔이니 하는 직접적인 표현 한마디 없이도 더 강하게 그것을 느끼게 하는 점, 시인의 만만치 않은 솜씨를 보여 주고 있다.

 

강호정의 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시다. 시를 통해서 삶과 죽음의 문제며 진실을 찾아가는 자세도 돋보인다. ‘몸을 들여다보는 순간이며 선언에 대하여는 시적 완성도나 안정감에 있어 결코 손색이 없지만, 다 죽음을 다룬 시여서 신춘시로서는 좀 무겁다. 당선 여부에 관계없이 좋은 시인이 될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우경의 시 중에서는 소시민의 삶의 모습이 잘 드러난 문패가 가장 뛰어나다. 이미지도 선명하고 표현도 아주 매끄럽다.

 

그러면서도 억지가 없고 자연스럽다. 흠잡을 데 없이 날씬하게 빠진 시라는 칭찬이 조금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한데 다른 시들이 뒤를 받쳐주지 못한다. 너무 편차가 심한 점은 조금 안심이 되지 않는다.

이상 세 사람의 시 중에서 윤진화의 母女의 저녁 식사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이 시가 가진 분방하고 건강한 상상력은 우리 시의 지평을 크게 확대할 것으로 기대되는바, 앞으로의 활동에 크게 기대를 건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신경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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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손 / 문신

 

 

1

정말로 한번 만져보고 싶게 작은 손이었다

 

2

싸락눈이 내리는 저녁

우리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즐거웠다

누군가의 농담에 모두들 과장된 표정으로 웃어주었고

그것만이 우리의 저녁을 아름답게 장식한다고 생각했다

문득,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축축한 것들이

우리들의 배경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어떤 이는 전화를 하러 눈치껏 자리를 뜨고

그 옆자리의 친구는 화장실에 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들은 빈자리의 쓸쓸함을 애써 외면하려는 것처럼

문이 열릴 때마다 눈길을 돌리곤 했다

그때마다 낯선 얼굴을 만나고는 서둘러

쓰디쓴 눈물빛 술잔을 비웠다

갑자기 세상이 시큰둥하게 보이는 저녁이었다

무서운 속도로 쌓아놓은 빈 병들을 보며

 

가끔씩 던지곤 하던 농담도 시들해져갈 무렵

창 밖으로 함박눈이 내렸다

우리들은 다시 활기를 띠며 눈에 얽힌

적어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것이 사랑이든, 낭만이든,

아니면 진부한 자유이든, 상관이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즐거웠으며

즐거워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조바심 나는 저녁이었으므로

또 한 친구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우리들은 감추어두었던 속내를 더욱 단단하게 여미며

썩 괜찮은 농담을 찾기 위해 침묵을 지켰다

침몰하기 직전의 선장처럼 우리는

어떤 결정이라도 단호하게 내려야 할 순간이었다

그러나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것처럼

창 밖의 함박눈은 우리들을 비껴서 내렸다

서너 걸음 앞에 놓인 영정 사진 한 장으로

우리들은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었으므로

삶의 변두리로 밀려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빈 병들은 쓰러졌고 아직은

채워지지 않은 잔들이 우리들 앞에 남아 있었고

감당하기 벅찬 날들은

더 이상 우리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날이었다

남자의 손을 보았다

지하보도에 엎드려 있는 남자의 손은 작았다

제 목숨조차 스스로 거두지 못한 친구의 손처럼, 세상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제것으로 움켜쥘 수 없을 만큼 작은 손

그 작은 손위에 놓여진 동전 개수만큼 침침한 저녁이었다

 

 

 

 

2004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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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만이 내 존재 이유다

 

미련퉁이처럼 시만 쓰고 싶었습니다. 연애도 취직도 하지 않고,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시만 쓰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시는 쓰지 못하고 어느 순간 나는 미련퉁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이 알아주는 진짜 미련퉁이가. 그 미련퉁이가 다시 시를 쓰겠다고 합니다. 연애도 해보고 취직도 해버린 미련퉁이가 염치없이 시를 쓰겠다고 합니다. 도대체 시에 무슨 매력이 있어서 그러는 건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외로울 때마다 시를 읽었습니다. 때로는 행간에 발목이 빠져 마음이 시큰거리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시는 제 등을 토닥여주었습니다. ‘스스로 아파하지 마라. 너는 너 아닌 모든 사람들의 아픔을 몸으로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시는 그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미련퉁이는 시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시가 뭔지를 보여주신 이 땅의 모든 시인들과 시집과 그리고 사람들. 그러나 아직은 부족하기에 오늘 또 한 권의 시집을 샀습니다.

 

당선 소식에 가장 먼저 기뻐해 주신 이병천 선생님. 고맙습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미련퉁이에게 시의 길을 가르쳐주시고 늘 안타깝게 지켜봐주신 선생님의 젖은 눈빛이 문득 낮달처럼 떠오릅니다. 선생님의 눈빛이 언제 어디서라도 저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시를 처음으로 읽어주신 김승종 교수님, 시 쓰기를 그만둘까 고민하고 있을 때 그 정도면 괜찮다고 다독여주신 이희중 교수님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곁에서 저를 지켜봐준 부모님과 착한 이정민이 아니었으면 제가 시를 쓸 수나 있었을까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마음사랑병원 가족들에게 이 기쁨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3일만 기뻐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미련퉁이는 또 시를 써야겠습니다. 두 분 심사위원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똑부러지는 시를 쓰겠습니다.

 

 

 

 

곁을 주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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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삶의 슬픔 담담히 묘사

 

예심을 통과한 응모자 19인의 작품들 가운데서 5분의 1이 본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들은 나머지 작품들에 견주어 비슷하기보다는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제 나름의 개성을 풍기는 것은 모든 예술작품의 첫 걸음이다. 예컨대, 모대가리금풍뎅이 한 쌍과 가시돌거미 새끼들의 삶과 죽음을 빌려서 애벌레 같은 아이를 안고 뛰어내린 어미를 보여준 잃어버린 길’(박여주), ‘탱탱한 가지 위에서/ 포슬포슬한 감자 위에서/ 아삭아삭한 오이 위에서/ 알싸한 쪽파 위에서/ 팔랑거리는나비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그린 세 시의 나비’(이승주), ‘열 아홉 평 진달래 아파트 가판대에서 오천원에 세 장씩 싸구려로 팔리는 ‘30수 면사 런닝셔츠같은 이력서’, 서양문물이 세계화의 이름으로 동양을 점령해버린 이 시대에 아시아 갈대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태평양을 건너가서 미국의 오대호 연안에 뿌리를 내렸다는 여정기’(김미안) 등이 그러한 발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편의 시,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평가되기에는 모자라는 데가 있어서 아쉬웠다. 부분을 다루는 이들의 솜씨가 전체를 마무리하는 기량으로 발전되기를 기대한다.

 

당선작으로 뽑힌 작은 손’(문신)은 오늘의 평범한 현실을 소재로 삼았다. ‘지하보도에 엎드려 있는 남자의 손제 목숨조차 스스로 거두지 못한 친구의 손을 오버랩시키면서, 죽은 친구의 영안실 풍경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고인이 남기고 간 빈자리의 쓸쓸함’, 조객들의 허황된 농담과 공허한 웃음, 피상적인 관습이 되어버린 조문과 속내에 감추어진 삶의 슬픔이 저녁에 내리는 싸락눈처럼 잔잔한 공감을 일으킨다. 아무런 내면적 교감도 없이 겉 모습만 스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활에 숨겨진 우수를 평이한 일상어로 형상화했다. 억지로 만들어낸 은유적 표현이 적어서 친근하게 읽히고, 산문의 어조에 시적 정취를 담았다. 구체적 부분에 충실하면서도 전체를 보여주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함께 투고한 숲으로 가는 곰 인형에서도 이 작품과 대등한 수준의 저력이 드러난다.

 

새 시인의 등단을 축하하며, 계속 정진하여 대성하기를 기대한다.

 

-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 김광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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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마경덕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2003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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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늦은 출발이지만 나에게 포기란 없다

 

증권과 자동차와 아파트를 얘기하는 친구들 곁에서 나는 시를 읽었다. 이미 그것들은 내게 위안이 되지 못했으므로. 값이 오른 증권과 새로 구입한 자동차와 평수를 늘린 아파트를 자랑하는 동안 나는 한 권의 시집을 먹어 치웠다. 도대체 그것들이 내게 얼마나 위로가 될 수 있는가. 시 한 편이 주는 넉넉함과 짜릿한 감동에 비한다면.


좋은 시를 만나면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성냥불을 확 그어댔다. 가슴에 치미는 왕성한 식욕. 그렇다. 지병인 식탐이 도져 아아, 나도 이렇게 맛난 시를 지어야지. 쩝쩝 입맛을 다셨다. 외로운 사람에게 내 글이 한 끼의 위로가 된다면 기꺼이 그의 밥이 되리라. 그러나 가진 건 오직 열정뿐. 아직 부족하고 많이 서투르다.


얼마 전 모 방송국에서 창사특집으로 '야생의 초원 세렝게티'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강가에서 물을 마시던 누(gnu) 한 마리가 악어에게 다리를 물려 물속으로 끌려가는 광경은 참으로 처절했다. TV를 지켜본 사람들은 대부분 악어의 밥이 되는 누의 죽음을 예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집념. 한 마리 연약한 짐승이 보여준 삶의 의지는 감동 그 자체였다.


나는 지금 악어에게서 풀려난 누의 심정이다. 당선의 기쁨을 잠시 접어두고, 앞으로 넘어야 할 만만찮은 강을 생각한다. 저 절실한 누처럼 끝까지 시를 붙잡고 늘어지리라. 늦은 출발이지만 애써 서두르진 않겠다.


병 깊은 어머니를 지켜보며 실의에 빠져 있던 나날. 느닷없이 날아든 당선소식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세상엔 아직 따뜻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 손을 들어주신 심사위원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보답하는 길은 열심히 노력하여 좋은 글을 쓰는 일.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능력을 턱없이 믿어주신 정공채, 김경민, 이윤학, 정병근 선생님. 격려를 아끼지 않은 남편과 시향 동인, 여러 문우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그녀의 외로움은 B형

 

nefing.com

 

 

[심사평] 대부분 상투적이고 내용모호

 

신춘시가 한국시를 망치고 있다는 말들을 한다. 좀 심한 소리지만, 근거가 아주 없는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 최근 45년 동안에 신춘에 뽑힌 시들을 보면 대개 비슷비슷해서, 포즈가 공연히 비장하고 내용이 모호하다.

 

또 억지로 만든 자국이 역력하여, 이미지도 상징도 생경할뿐더러 리듬감도 없어, 살아 있는 시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산문 형태의 시가 많대서 하는 말만은 아니다. 하긴 내재율 따위는 말할 것도 없고 콤마나 피리어드를 무시하는 등 어법을 어김으로써 독자의 관심을 끌려는 유치한 시도도 신춘시에서 비롯된 대목이 없지 않다.

 

이런 시들을 선자들이 계속 뽑아 놓으니까 좋은 시의 전범처럼 되면서, 신춘 응모시들이 이런 시 일색이 된다. 나아가서 이것이 한국시가 독자로부터 멀어지는 한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번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읽어가면서 매우 지루하고 답답했다. 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작품이 찾아졌다.

 

그것이 마경덕의 시들이다. 우선 말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고 힘이 있다. 시를 가지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그리고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터득하고 있는 시들이다.

 

특히 '신발론' '오래된 가구' 등이 두드러졌는데, 이만큼 무엇을 빼야 할 것인가를 안다는 것 자체가 시를 적잖이 공부해 왔다는 증좌다.

 

'굴뚝'은 소품이지만 이만한 서경의 시가 우리 시에 그리 많지 않을 터이다. 마경덕의 발견은 큰 수확이다.

 

이근화의 '만원 버스' 등도 상투적인 신춘시들과는 크게 달라, 재미있게 읽힌다. 표현이 아주 젊고 유연하다. '칠레라는 이름의 긴 나라'는 특이한 발상은 아니지만 경쾌하게 읽히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산문집을 텍스트로 하고 있는 '유리문 안에서'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시각도 매우 재미있는 것이다. 조금만 더 다듬으면 좋은 시인이 될 재목이다.

 

- 심사위원 김주연 문학평론가, 안도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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