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스페인 / 이신율리
죽는 사람들 사이로 날마다 비가 내린다
사과는 쓸모가 많은 형식이지 죽음에도 삶에도
수세미를 뜬다 사과를 뜬다
코바늘에 걸리는 손거스러미가 환기하고 가는 날씨
를 핑계로 미나리 전이나 부칠까
미나리를 썰 때 쫑쫑 썰어대는 말이 뒤섞인들 미나리
탕탕 오징어를 치며 바다가 보인대도 좋을
다행히 비 내리는 날이 많아 그 사이로 사람이 죽기도 한다
올리브 병에서 들기름이 나오면 핑계 삼아 한판
사과나무에서 다닥다닥 열린 복숭아를 다퉈도 되고
소금 한 주먹 넣으며 등짝도 한 대
단양과 충주 사이에 스페인을 끼워 넣는다
안 될 게 뭐 있어 비도 오는데
스페인보다 멀리 우린 가끔 떨어져도 좋을 텐데
철든 애가 그리는 그림 속에선 닭 날개가 셔터를 내리고 오토바이를 탄 새가 매운 바다에서 속옷과 영양제를 건져 올렸다 첫사랑의 정기구독은 해지했다
꽃병에 심야버스를 꽂았다 팔다리가 습관적으로 생겨나는 월요일, 아플 때마다 키가 자라는 일은 선물이었다
불꽃이 튀어도 겁나지 않은 나이는 이벤트였지
단풍 들지 않는 우리를 단양이 부른다 스페인은 멀고
안전벨트를 매고 접힌 색종이처럼 사진을 찍는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누군가 멀리 떠난다
[당선소감] “이 세상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감사합니다”
까마귀가 얼어붙은 목청을 녹이자 유자나무가 등불을 켭니다. 노랑은 빨리 달려오는 발목을 가졌다고 생각할 때 벨이 울렸습니다. 편두통은 어느 계절을 돌아 여기 와서 끝이 되었을까. 손끝에 모은 0도에서 바닐라 라떼를 만들어 오래된 연인들에게 나눠주는 상상을 합니다.
희망이 텅텅 비었던 정오의 숲에서 길을 잃고 나를 잃었던 시간들 쓸모없는 것에 관심이 많아 세계를 건너 너에게로 간다고 썼습니다. 우주가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깨어나 또 다른 나를 찾아 젤리를 뿌리고 스티커를 붙여 내 안에 어떻게 나를 배치할까 궁리합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말들이 새 이마를 가지고 수천 번의 질문을 하는 상상로를 걸어옵니다.
초승달에 그네를 매 하늘을 날았다는 당신의 태몽이 맞았습니다. 죽은 가지를 부러뜨리면서 나는, 밤나무 숲을 걸어 나옵니다.
길 열어주신 나의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감사합니다. 선해주신 심사위원님, 세계일보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인생론적 깊이 함축… 언어적 안정감 탁월”
202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응모작들은 예년에 비해 숫자는 조금 줄었지만 그 수준과 내실은 더욱 탄탄해졌다고 할 수 있다. 역량 있는 신인들이 이렇게 다양한 작품을 투고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기쁘게 다가왔다. 심사위원들은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을 읽어가면서 다수 작품이 빼어난 언어와 안목을 보여주었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시단의 주류 시풍이나 관습적 언어를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의 경험적 언어에 오랜 시간과 정성을 쏟았을 작품들이 많았다. 침체기에 있는 한국 시는 이들의 언어를 통해 새로운 개진을 해갈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그 가운데 김하미, 이신율리, 조민주씨의 작품을 오래도록 주목하였는데, 숙의 끝에 상대적으로 균질성과 언어적 안정감을 가진 이신율리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신율리씨의 ‘비 오는 날의 스페인’은, 비가 내리는 풍경 속에서 구성해가는 사람살이의 외관과 생태와 속성이 인생론적 깊이를 함축하고 있는 수작이다. 그 안에는 음식들에 관한 숱한 기억의 구체성과 함께, 스페인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더 멀리 떠나 있어도 좋을 사랑과 불꽃과 시간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수없는 ‘사이’에서 벌어지는 생의 파노라마가 환상성과 역동성을 함께 거느리면서 그림처럼 사진처럼 다가온 선물이자 이벤트였다. 더욱 성숙한 시편으로 세계일보 신춘문예의 위상을 높여주기 바란다.
당선작이 되지 못했으나 구체성과 심미성을 두루 갖춘 사례들이 많았다는 점을 부기한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우리 주위에서 살아가는 타자들을 애정 깊게 응시한 결실도 많았다. 다음 기회에 더 풍성하고 빛나는 성과가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응모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마음 깊이 당부 드린다.
심사위원 안도현·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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