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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과 담의 차이 / 봉윤숙

 

 

우리의 이야기는 지붕 속에서 산다

지붕을 가지고 있는 벽과 지붕이 없는 담 안엔

사슴벌레 달팽이 사금파리 장지뱀 등 여러 종류가 산다

벽은 못, 시렁 아버지의 맥고모자

달력의 날짜로 불리기도 한다

드나들거나 넘을 수 있는 높이의 담은

그림자와 낙서의 한 영역이다

벽은 문 없는 간극과 문의 사고가 가끔 어긋나기도 하지만

옷들은 그 사이에서 잘 기대어 무늬를 새긴다

담을 넘어간 소리는 키 큰 소문이 되고

담 밖에 있던 사람이 훗날

벽의 못에 걸리기도 한다

담은 올록볼록한 퍼즐 같다 퍼즐을 맞추려 틈새의 흐름을 허용한다 그 사이로 번식하고 바람이 드나들며 물길도 흐른다 구멍이 없어 마음, 다만 낙서로 대신하는 일들이 있고 수직의 소문들이 넓다

커다란 순록을 보면 따뜻한 벽이 생각난다

그들은 스스로 진화된 지붕을 가지고 있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뿔로 계절은 완성되고 빨강은 절판된다

숲은 담이다

나무들은 지붕이 없으므로 흔들린다

이야기가 없을 때는

흔들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꽃 앞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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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링거액처럼 떨어지던 은유들아 고맙다

 

내가 죽었다. 교통사고였다. 그러나 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눈뜨니 새벽이었다. 다시 태어난 느낌이다.

 

내 앞의 계절은 시였을까? 귀를 쫑긋거리는 이야기들이 벽과 담을 넘나든다.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나타나는 끌림의 미학. 아니, 기우뚱거리는 불안. 손끝을 날아올랐다가 살포시 내려앉는 공포. 일어서지 않는 언어를 일으켜 세우려는 즈음 아버지는 벽의 못에 걸려 이제는 이야기가 되셨다.

 

웃는 얼굴의 아버지가 새삼 그립다. 매만지지 못 한 바람은 무늬를 새길 수 없고 꿰지 못하는 것들이 늘 범람했다.

 

똑 똑 링거액처럼 떨어지던 은유들아 고맙다.

 

숭의여대 강형철 선생님, 전기철 선생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은유의 날개를 달아주신 김영남 선생님과 정동진 회원님들 모두 고맙다.

 

곁에서 함께 해준 신랑과 사랑하는 아들과 딸이 있어 행복한 날들의 연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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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낯선 형식이지만 기본 위에 축조된 시

 

본심에 200편 가까운 응모작이 올라왔다. 최종 논의된 작품에서 `달과 비누'는 이미지 형상화 능력이 뛰어났으나 모호했다. `내 마음 속 국어사전'은 삶과 죽음의 도정에서 학습하는 언어를 국어사전으로 은유한 전개가 돋보였으나 단순 평이가 흠결로 `달과 비누'와는 상반된 흐름을 보였다.

 

`물고기는 첨벙하는 소리가 귀다'는 참신한 설정과 감각적 이미지 전개가 돋보였으나 응모작의 수준차가 컸다는 점에서 `벽과 담의 차이'를 당선작으로 올린다.

 

`벽과 담의 차이'는 활달한 수사와 짜임새 있는 전개로 재치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근사한 시를 넘어 좋은 시는, 낯선 형식이되 의미를 배반하지 않는 시다.

 

정서적 고양과 정화, 공감 공명이라는 시의 기본 위에 축조된 시다.

 

신인다운 패기를 잃지 말고 정진 대성하시길 바란다.

 

- 심사위원 : 이영춘, 홍성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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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대가 활짝 피었다 / 봉윤숙 

 

 

8월의 뒤란은 출출하다
태양이 볼륨을 높이다가
긴 치맛자락 끌고 내려오면
슬픔도 허기 채워 가라앉고
그 반대쪽으로 풀벌레 소리가 화창하다
소란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게 한다
그러나 나의 발걸음을 재촉하진 말자
살금살금 고민하며 다가오는 잎새
그 잎사귀 몇 잎 입에 물면
바람의 손가락도 짭조름해진다
빨랫줄 옷가지들이 바람을 몹시 귀찮아한다
옷가지들에 쫓겨난 바람이 장독대를 드나들며
뒷짐 지고 하늘바라기를 하거나
기어오르는 담쟁이 넝쿨 담벼락에 주저앉거나
풍경 속으로 그림자를 흐느적거리며 사라지게 한다
땡볕이 넓적해지면 계절이 새롭게 열린다
빛들도 숙성되며 바스락거리는 동안
내 인생의 무늬도 옅어지는 것은 아닌지
찬란한 정오
장독대에 나를 활짝 펼쳐 놓는다

 

 

 

꽃 앞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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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좋은 작품으로 모든이에게 보답할 것”

 

가장 가까운 것이 가장 먼 것이다. 시란 그런 것일까. 순방향이거나 역방향이거나 시신경이 녹아 있는 곳, 출혈과 응고가 반복되었다. 소란을 앓던 두통이 머무르는 곳마다 폭설이 내렸다. 앞으로 더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이 갇혀 살았다, 아주 오랫동안.


낮은 곳, 미약한 부분, 아래의 심정으로 생각하고 보려 했지만 눈은 항상 위로 치켜 떠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시를 문지르던 손바닥을 펼쳐보면 껍질만 자글자글하다. 연약한 곳에서도 단단한 한 세상이 여물고 있을 것이다.


좁혀지지 않던 간격이 두근두근 싹을 틔운다. 무심함이 오래되면 범람하는 걸까. 기우뚱거리는 불안을 발굴해준 이브의 선물.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고맙습니다. 좋은 시로 보답하겠습니다.


제 시의 앞 계절, 강형철·전기철·김영남 선생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벌써 저만치 앞서가신 문우님들, 뒤따라 가겠습니다.


또한 저를 우뚝 서게 만들어주신 농민신문사의 앞날이 활짝 펼쳐지길 바랍니다.
 

오랜 세월 묵묵히 지켜봐준 신랑, 1월 초에 공부하러 미국으로 떠나는 사랑하는 딸, 나라의 부름을 받게 될 사랑하는 아들, 모두 고맙고 사랑합니다.


미열의 밤이 깊어갑니다. 눈 뜨면 새 날이 우리 앞에 떠오를 것입니다.

 

 

[심사평] “공감각적인 비유·상상력 전개 돋보여

 

가을 과원에서 잘 익은 싱그러운 햇과일을 고르는 즐거움 또는 아득한 심해에서 영롱한 진주를 건져 올리는 기쁨과도 같았다. 예심을 거쳐 익명으로 제시된 117편(20명)의 응모작 중에서 당선작을 고르는 감회가 그랬다. 응모자들 또한 언제쯤 당선의 영예가 주어져 새해 신춘문예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할까 하는 기대와 설렘이 클 것이다.

심사위원 3명이 최종심에 올린 것은 <장독대가 활짝 피었다> <끈> <채비> 3편이었다. 3편 모두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었으나 거듭된 윤독과 합의를 거쳐 <장독대가 활짝 피었다>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이 작가의 <산 너머 남촌> <풍경의 삽화> 등 나머지 응모작도 절차탁마를 보이는 고른 수준인 데다 풋풋한 감성과 농촌 정서를 맛깔스럽게 형상화하는 능력을 높이 샀다.

특히 당선작으로 뽑은 <장독대가 활짝 피었다>는 도시 아파트 생활로 사라져가는 ‘장독대’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내세운 시상 전개와 언어 구사가 신선했다. 시의 첫 연에서는 ‘출출한 8월의 뒤란’으로 햇살이 내려오면 ‘슬픔도 허기 채워 가라앉고’ ‘반대쪽으로 풀벌레 소리가 화창하다’라며 전경을 제시하고 있다. 이어서 장독대로 다가오는 ‘잎사귀 몇 잎 입에 물면’ ‘바람의 손가락도 짭조름해진다’ ‘옷가지들에 쫓겨난 바람들이 뒷짐 지고 하늘바라기를 하거나’ ‘땡볕이 넓적해지면 빛들도 숙성되고 바스락거린다’ 같은 공감각적인 비유와 상상력 전개가 돋보인다. 아쉽게도 당선의 영예를 비껴난 많은 응모자들에게도 격려를 보내며 찬란한 미래를 기약한다.


심사위원 권영민 문학평론가, 김송배 시인, 손해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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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신라는 발효 중 /  봉윤숙

 

 

백자 달 항아리가 보인다

이음새 말끔히 다듬어진 둥근 궤적 따라

동굴처럼 깊어지는 몰입의 경지

침묵의 모퉁이 돌아 나오는 망치질 소리

발효의 시간

 

그 백자 항아리 속

햇살 구워지고 소나무 향이 번지면

시간의 장작은 붉게 타 오르고

무심한 아름다움이

균열의 틈을 메우는데

 

거기 대나무 숲이 있는가

달빛은 어둠으로 휘어지며

새의 사랑은 변방에서 깊어지는데

더러 빠지는 깃털은 누구의 것인지

금낭화도 야윈 몸을 늘어뜨리며

고요의 목덜미를 적신다

허공의 뼈대를 세운다

 

숨겨진 달 항아리는

그늘 냄새를 풍기는 어둠

어둠의 주름이 환하게 펴지면

향기의 다락방엔 삐걱이는 사다리 뿐

 

그 곳에서 신라가 발효 중이다

 

 

 

 

꽃 앞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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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불광불급 (不狂不及) 이라 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미쳐야 미친다. 미치려면 미쳐라. 지켜보는 이에게 광기로 비칠 만큼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미친듯이 몰두하지 않고는 결코 남들보다 우뚝한 보람을 나타낼 수가 없다. 정민의 "미쳐야 미친다"에 나오는 글귀다.

 

늘 미안했다. 시에게, 발꿈치 들고 담 너머를 기웃거리는 아이처럼 주변만 맴돌았다. 그러는 사이 다른 사람들은 벌써 저만치 가 있었다. 그렇지만 맴돌기를 멈출 수는 없다. 무뚝뚝한 담벼락이 나에게 답을 주는 그날까지 아니 밀랍인형처럼 흥건히 녹아내릴 때까지,

 

폭설이다. 강원도에만 눈이 온 것은 아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도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다. 실제와 상상이 흩날리는 곳에서, 내부와 외부가 서로 조응하는 곳에서, 멋진 저녁으로의 초대를 받을 것이다. 지상에 내리는 눈들은 제가 누울 곳을 찾아서 가는 것은 아닐까 아직도 시에 온전히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뒤돌아봅니다. 부족한 저에게 넘치는 가족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시의 손을 잡을 수 있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신 숭의여대 강형철, 전기철 선생님 고맙습니다. 몇 해 동안 메타포와 오른쪽, 왼쪽 날개를 달 수 있게 깨우쳐 주신 김영남 선생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공부하던 " 정동진역" 식구들, 함께한 시간들이 있어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부족한 저의 시를 이렇게 큰 상으로 보답해주신 경부문협 성춘복, 김후란, 김송배 선생님 깊은 감사 드립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큰 모습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심사평] 시적 구도와 주제의 투명성

 

현대시의 작품경향은 대체로 시적 소재와 구도의 설정에서 투명하고 명징한 주제의 투영이 창작의 본령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6백여 편의 응모작품들을 읽은 결과 모두가 이와 같은 시적 상황과 전개 과정에서 창출하는 주제에 부응하는 언어의 융합과 함께 각자의 개성에 따라 적절하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문학대상이라는 역사와 전통이 작품의 수준과 응모자들의 시정신의 예측을 위해서는 우선 언어의 역량을 살피는 일이었다. 이는 시와 언어의 상관성은 그 작품의 성패를 가늠하는 일차적인 기준이 되어 시적 대상물에 대한 신선하면서도 함축된 의미의 요소들을 응축하고 있는가에 중점을 두고 심사에 임했다.

 

이 결과 <물 위에 지은 탑> < 지금 신라는 발효 중> 그리고 <감은사지에서> 등 세 편이 마지막까지 장시간의 논의를 필요로 했다. 이는 심사위원들이 정한 기준에 따라서 언어의 구사와 주제의 투명성이 작품의 골격으로 현현되어 그 메시지가 선명하게 전해지고 있는지를 몇 차례의 독해를 거쳐서 < 지금 신라는 발효 중> 을 당선작으로 선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 백자 달 항아리' 를 통해서 탐색하는 '신라가 발효'하는 시적 구도와 접근이 '허공의 뼈대''어둠의 주름'이라는 이미지가 적시하는 언어와 동시에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서 이러한 시적 정황들이 현대시의 의미성과 근접하게 발현되는 언어가 감응을 유로해서 공감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현대시는 이미지의 창출에서 함축된 주제가 바로 언어와의 조화가 가장 적절하게 나타날 때 그 작품은 수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더욱 정진해서 좋은 작품 창작하기를 기원한다.

 

심사위원 성춘복, 김송배, 김후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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