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둥근 이유 / 하기정
안골 사거리 우회전 공터 지나 높은 오르막 길을
유모차 한 대 오신다
팔월의 햇살 아래 불 지핀 아궁이 속 같은 열기가 아스팔트 위를 어룽거리는데
유모차엔 아기 대신 노끈으로 친친 동여 맨 삼양라면 박스 새우깡 박스 옥시크린 박스
내용물 없는 빈 상자가 삐죽 튀어 나왔다
노파가 유모차에 걸어 놓은 간판처럼
아슬아슬 고갯길이 한참이다
‘지구는 둥글지, 자꾸 걸어 나가면’
지구가 둥근 이유는 멀리 수평선 돛단배를 보면 알지
돛단배는 돛부터 보여주다 차츰 배 전체가 드러나지
노파의 등과 아스팔트 길이 쌍곡선이다
저 속도로 가다보면 빈 종이상자의 무게만큼
라면 한 박스라도 바꿀 수 있을까
나아간다는 것은 제자리로 돌아오는 일
빈 상자 묶음은 들쑥날쑥, 뒤틀린 판게아처럼
노파의 손은 밀려난 대륙의 끝자락을 잡고 있다
지구는 둥글지
굴러도 항상 그 자라 한 바퀴 돌아 나와도 제자리 걸음
바다에 나가 돛의 머리를 보지 않아도 알지, 지구가 둥근 이유를
대륙과 대륙이 멀다
닻을 내릴 수 없다
[심사평]
2010년으로 30주년을 맞는 5.18문학작품의 외연을 어디까지 넓힐 것이냐는 주최자나 응모자나 공통된 고민 중의 하나일 것이다. 폭넓게 5월 정신의 연장이나 확대를 작용시키자면 그 한계가 모호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 어떤 주제이든 과연 5.18과 연관성을 가지며 과연 절실성은 있는가가 항상 심사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각설하고, 경제적 난국 탓인지 유난히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 시들이 많았다. 또한 5.18문제를 직간접적으로 다룬 작품들이 적지 아니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생경한 구호성 목소리가 섞여있거나 혹은 지나치게 주눅 들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문학)는 허위를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허위를 말하는 것조차 허위가 아닌지 되물어야 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당선작 「지구가 둥근 이유」는 작품의 완성도와 사회의식이랄까, 현상의 묘사나 고발에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하려는 의지를 높게 샀다. 특히 민중적인 인물들을 내세워 감칠맛 나는 넋두리로 시를 노련하게 이끌어가는 다른 시들과 달라 현대적이고 이지적인 높게 샀다.
끝으로 당선은 되지 못했으나 끝까지 고민한 작품은 「들창 밖 모시풀」, 「신기동리 가는 길」이었다. 매우 잘 쓴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익숙하다는 느낌이 망설이게 한 것은, 순전히 심사위원의 취향일 수 있는 만큼 다른 지면을 통해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임동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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