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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코니의 시간 / 박은영

 

 

필리핀의 한 마을에선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이 있다

고인은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긴다

이까짓 두려움쯤이야

살아있을 당시 이미 겪어낸 일이므로

무서워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뚜껑을 발로 차거나

철심을 휘어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저 웃는다

평온한 경직,

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웠다

생은 난간에 기대어 서는 일

허공과 허공 사이

무수한 추락 앞에 내성이 생기는 일이라고

당신은 통유리 너머에서 그저 웃는다

암벽 같은 등으로 봄이 아슬아슬 이울고 있을 때

붉은 시클라멘이 피었다

막다른 향기가

서녘의 난간을 오래 붙잡고 서있었다

발아래 아득한 소실점

더 이상 천적으로부터 훼손당하는 일은 없겠다

하얀 유골 한 구가 바람의 멍든 발을 매만져준다

해 저무는 발코니, 세상이 한눈에 보인다

 

 

 

2018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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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5이별 통보한 애인이 내 발목 잡은 기분

 

허기가 졌다. 국거리용 소고기를 구워 먹고 책상에 앉아 끼적거리고 있는 사이 당선 연락을 받았다. 예고 없이 찾아온 전화였다. 멍하니 하루를 보냈다. 나보다 지인들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당선작은 5년 전에 써놓고 묵혀두었던 시다. 그토록 간절하게 원했던 겨울은 그때였었다. 우리, 이제 헤어져. 애인에게 이별 통보를 하고 돌아서는데 나쁜 남자였던 그가 발목을 붙잡은 기분이다. 사는 일이 이렇다. 내 뜻대로 되는 게 어디 있던가.

 

시 쓰는 거 힘드니까 그만두라는 말로 매년 위로하던 가족들, 이종섶·조수일·김형미 시인님, 이건수·한철희 목사님내가 나로 살아갈 수 있는 건 전적으로 이분들의 존재 덕분이다. 특히, 나의 아들아! 창문 없는 고시원을 거쳐 이민 가방을 끌고 그 먼 길을 가는 동안 얼마나 막막했니. 비록 웅크리고 꿈을 꾸지만 볕 들 날이 너에게 오리라 믿는다. 너와 나는 약하지만 언제나 강했다.

 

황동규, 정호승 선생님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를 드린다. 아무튼 이건 기적이다. 겨자씨만 한 믿음이 나에게 있었던가. 돌이켜보면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산성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부끄러울 따름이다. , 겨울이 가고 그 길로 다시 추운 겨울이 오겠지만 이제 나는 시편 같은 봄을 기다릴 것이다.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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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風葬문화라는 구체성 통해 삶과 죽음의 동일성 깨닫게 해

 

시는 말과 언어를 다루는 기술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인간 삶의 내면을 응시하는 깊은 사고와 이해에서 나온다는 점을 투고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듯해서 안타깝다. 우리 삶과 유리된 채 공연히 초현실적으로 매끄럽게 톡톡 튀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 많다는 것은 시를 쓰는 기술이 앞선 작품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본심 최종심까지 오른 작품은 이창원의 금요일기’, 홍경나의 먼우물’, 최민주의 그림자 동물원’, 이영란의 ’, 박은영의 발코니의 시간’ 5편이었다. 이 중에서 피상적이고 관념적이며 감상적인 작품을 먼저 배제하고 나자 발코니의 시간’ 2편이 남게 됐다.

 

이라는 말의 유사성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 시다. 짚을 감아줌으로써 감나무는 혹한의 겨울을 견딜 수 있고, 그 짚 속에 기어든 벌레들 또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내용이 시의 전체를 이루고 있으나 평이함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나무에 짚을 감아주는 의미가 모성적 차원으로까지 승화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나무들도 영혼이 있다면/ 저 짚에 조용히 은거하고 있을 것이다와 같은 결구 또한 평이하고 안이하다고 판단돼 결국 발코니의 시간이 당선작으로 결정됐다.

 

발코니의 시간은 삶의 고통에 대한 견딤이 죽음의 고통 또한 견디게 해준다는 중의적 의미가 내포된 시다. 정년퇴직한 뒤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우는 아버지의 현재적 삶과 암벽에서 풍장의 과정을 겪고 있는 죽음의 삶을 발코니의 통유리를 경계로 대비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동일성을 깨닫게 해준다. 자연적인 해체의 과정을 견디는 풍장 그 자체가 바로 오늘의 삶에서도 가장 요구되는 인내의 덕목이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관념성을 풍장 문화라는 구체성을 통해 나타내고 있는 점이 이 시의 힘이자 장점이다. 신춘문예에 당선된다는 것은 마치 하나의 새로운 우주를 만난 듯한 기쁨일 것이다. 진심으로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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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고* / 박은영-

 

 

빈티지 구제옷가게,

물 빠진 청바지들이 행거에 걸려 있다

목숨보다 질긴 허물들

한때, 저 하의 속에는 살 연한 애벌레가 살았다

세상 모든 얼룩은 블루보다 옅은 색

짙푸른 배경을 가진 외침은 닳지 않았다

통 좁은 골목에서 걷어차이고 뒹굴고 밟힐 때면

멍드는 건 속살이었다

사랑과 명예와 이름을 잃고 돌아서던 밤과

태양을 좇아도 밝아오지 않던 정의와

기장이 길어 끌려가던

울분의 새벽을 블루 안쪽으로 감추고

질기게 버텨낸 것이다

인디고는

인내와 견디고의 합성어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

애벌레들은 청춘의 옷을 벗어야 한다

질긴 허물을 찢고 맨살을 드러내는

각선의 방식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대생들이

세상을 물들이며 흘러가는 저녁의 밑단

빈티지가게는

어둠을 늘려 찢어진 역사를 수선하고

물 빠진 허물,

그 속에 살았던 푸른 몸은 에덴의 동쪽으로 가고 있을까

청바지 무릎이 주먹모양으로 튀어나와 있다

한 시대를 개척한 흔적이다

 

*인디고: 청색염료.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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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일흔다섯을 바라보는 아버지, 뒤꼍에서 톱질을 하고 계신다. 이 산 저 산에서 모은 고사목의 곁가지를 잘라내고 같은 크기로 토막을 내는 동안 목장갑 낀 손으로 허리를 두드리고 이내 가쁜 숨을 돌리고……돌이켜보니, 아버지의 그 넓던 어깨가 오그라들도록 나는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불효막심하게 시만 썼구나. 내 시가 화목보일러 숯불보다 뜨겁기를 바라며 누군가의 가슴을 덥혀 주리라 고집하며, 아궁이에 들어가면 흔적도 없이 타버릴 종이를 끌어안고 말이다. 겨울이 돌아올 때마다 방은 춥지 않느냐는 말로 불쏘시개를 대신하던 아버지, 노송가피 같은 손등과 톱밥 묻은 눈 밑과 근심으로 얼룩진 옷소매가 이제야 보이는 것이다.

 

당선소식을 듣고, 나 대신 주변 사람들이 울어주었다. 좌골이 닳도록 기도로 밀어주신 엄마, 언제나 소녀 같은 언니,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은 오빠, 사랑하는 조카들, 함께 동행해준 기독교시동인님들, 나주안디옥교회 일당백의 성도님들……그리고 나의 아들아! 네가 내 속에서 나와 세상 앞에 굴하지 않고 멋지게 헤쳐 나가는 모습이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힘들 땐 하늘을 바라보라는 약속, 잊지 말자.

 

문을 두드린 지 열두 해다. 소재호 석정문학회 회장님께서 감사하게도 문을 열어주셨다. 앞으로 겨우살이 땔감을 준비하는 노부의 마음으로 시를 써야겠다. 하지만 결코, 추운 이들의 가슴에 군불을 지필 수 없다는 것을 알만한 나이테를 가졌다는 것이 슬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이 한 장의 시간보다 길게 불꽃을 피워 올려 언 손이라도 녹여줄 시집 한 권을 남겨보리라 다짐해본다. 재능보다 인내를 주신, 가장 낮고 작고 천한 자의 주인인 하나님께 이 모든 영광을 돌린다.

 

 

 

 

[심사평]

 

금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에는 170여명에 500여 작품이 응모되어 팽팽한 경쟁을 보였다. 신춘문예에 응모되는 작품들은 대개가 작가들의 무한한 문학적 체험과 연마를 거쳐 정제된 산물이어서 이미 시의 품격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이번 응모된 작품들 중에서는 시제 인디고’‘그림자는 저체온증’‘지렁이 다비식’‘필사의 밤’‘ 주홍날개꽃개미’‘북해의 공작시간등에 시선이 매우 끌렸다. 모두 시적 체제는 잘 갖추어져 있었다.그러니까 이 작품들이 최종심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약간씩의 아쉬운 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인디고는 수준이 매우 높아서 당선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인디고는 쪽에서 나온 남색이라 했다.색깔을 시 제목으로 내거는 자체부터가 이미 범상함을 벗는다.이 시는 역사적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절제된 감성으로 주조된 서정성을 바탕으로 어둔시대를 견인하는 서사적 정경이 오버랩된다.블루의 색소가 인상적으로 내비치며 인상파 그림의 구도와 명암이 쉬르리얼리즘의 경역도 넘나든다. 제재들은 자꾸 대칭하며 조화해 가는,아이러니와 패러독스가 시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청춘이 선호하는 낡은 청바지...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그리고 얼마나 심대한 이미지의 부딪침인가.

 

현대의 세대가 옛 세대를 끌고 와서 한 시공에 두어 충돌과 융합을 자아낸다. 결기 높은 시이다. 청바지는 낡아서 무릎이 나와야 한다. 이 청바지는 그대로 상징성의 총화이다.

 

동서양의 만남이며 이는 또한 시공을 달리한 문화의 충돌이자 혼융이다. 이 때 하의 속 애벌레가 절묘한 시점에 등장한다. 애벌레는 장차 성충이 될 터이다.매미처럼 어둠을 털고 일어나 허물을 벗고 마침내 푸른 미래의 하늘을 날 것이다.

 

어둠을 늘려 찢어진 역사를 수선하고...한 시대를 개척한 흔적의 시구가 청바지에 얼마나 적확하게 부합하는가.

 

심사위원 소재호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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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리의 봄 / 박은영

 

 

한 여인의 젖을 아이가 빨고 있었다

 

말 못하는 어린 것의 울음이 서모에서 부는 바람소리 같았다

 

핏덩이를 등에 업은 어미의 자장가가 들리는 듯한데

 

젖몸살을 앓던 아침, 붉은 비린내가 퉁퉁 불어 마을을 떠돌아다녔다 새들이 총소리를 물고 둥지로 날아갔다 소란스런 포란의 방향, 꽃을 내준 가지가 동쪽으로 기울었다

 

그것은 서쪽에서 해가 뜰 일

 

서모에서 부는 바람소리가 말 못하는 어린 것의 울음 같았다

 

뚝 뚝, 지는 목숨들 사이

 

아이는 나오지 않는 젖을 한사코 빨아대고 있었다

 

어미를 살려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그 힘으로 동백꽃이 피고

 

젖 먹던 힘을 다해 봄이 오고 있었다

 

* 서우봉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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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이번 공모전을 준비하는 동안, 참 많이 아팠습니다.

 

제가 몰랐던, 무지하여 알지 못했던 사실들로 인해 가슴을 치며 울었습니다.

 

새벽에 가슴 통증으로 일어나 거울을 보니 감자알만하게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멍 자국은 공모를 준비하는 내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땅을 밟고 사는 게 참 많이도 부끄러웠고 까닭 없이 흐르고 했던 지난 눈물들 또한 죄스러웠습니다.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얼마나 몸서리치게 무서우셨습니까.

 

아직도 캄캄한 동굴 깊이 숨어 있을 분들, 그분들의 손을 잡고 함께 밖으로 나오고 싶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 밤을 아침이 오도록 동행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젠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다시 봄이 오고 동백꽃이 피었다고, 저는 이 말씀을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세상엔 왜 이렇게 가려진 것들이 많은지,

 

한 문장 한 문장 시를 통하여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잃어버린 마을들과 잃어버린 이름들과 잃어버린 지난 시간을 되찾아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간절함이 조금이나마 전해진 것 같아, 참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부족한 저를 믿어주시고 선해주신 신경림 선생님, 이시영 선생님, 김준태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예심 심사위원님들 또한 머리 숙여 감사 드립니다.

 

저를 서른여덟 해 동안 마음 아프게 품고 계시는 부모님, 평생 갚지 못할 부모님의 기도로 제가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주 4.3사건 희생자, 그리고 유족 여러분 앞으로 제주 4.3을 알리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나의 아버지였고 어머니였고 할머니였고 삼촌이었고 이웃이었던 분들과 다시 재회할 수 있도록 시를 쓰겠습니다.

 

봄감자를 수확하는 손처럼 정직한 시인이 되겠습니다.

 

 

 

[심사평]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응모자 아홉 분의 110편이었다. 전체적으로 의욕적인 작품들이 많아서 반가웠다. 올해로 비록 2회째를 맞이했지만 제주4.3평화문학상에 대한 문학인(문학지망생 및 기성문인)들의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어 보였다.

 

특히 제주4.3’에 대한 문학적 노력들이 살아나고 있는 것 같아 옷깃을 여미며 심사에 임하였다. 어제의 역사가 시, 소설을 통해서 다시 숨을 쉬게 된다는 것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삶(역사)과 문학에도 생산적인 에너지를 불어 넣어주는 효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4.3은 변방의 역사가 아니다. 6.25한국전쟁을 전후하여 한국현대사의 또 하나의 중심에서 제주4.3은 증좌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제주4.3을 거치지 않고 한국현대사에 대한 숙제를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 남쪽 바다 한 가운데에 떠있는 제주4.3 이후 문제적 다중심의 하나로서 작동하고 있는 오늘 우리가 당면한 모습의 일면이기도 하다.

 

이것은 역설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제주(제주4.3)는 한국문학에 중요한 모티브와 오브제, 그리고 테제와 안티테제를 어떤 책무처럼 두루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바로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제주4.3평화문학상응모작품들을 심사한 결과, 좋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더없는 기쁨이었다. 테크닉 수사법에 의존하여 괜히 길어지는 컴퓨터시를 응모한 몇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일정 부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응모자의 시편을 가지고 작품성, 작가정신(시인정신), 미래전망 등을 고려하면서 심도 있게 심사함은 당연한 것이었다.

 

본심에 올라온 아홉 분 중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응모자(작품)는 다음과 같다.

 

[수산에 들다] [옛날, 옛날 썩은 섬에서] 8편의 시가 손에 잡혔다. “알돌과 밑돌이 서로에게 닳아가는 소리”([수산에 들다]) 표현은 화자의 시선이 발견의 눈을 가지고 있어 섬세하고 아름다운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썩는다는 것은 어디론가 몸 바꾸는 일등의 아포리즘 기법을 넣어 노래한 강정마을의 이야기는 가작이었다. [수산에...] 등을 응모한 이의 나머지 작품은 시적 긴장감이 떨어지고 어떤 시는 너무 평이하게 소재주의에 빠져 있었다. 사물에 대한 치열성이 더해지면 시로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주는 응모자였다.

 

[붉은 감나무 사원] 23편의 시가 다음으로 손에 잡혔다. 그러나 [붉은...]을 제외하면 응모자의 의욕과는 달리 시적 긴장감이 덜했다. 실패한 작품은 없는데 거의 모든 작품이 고만고만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한 송이 꽃이 피는데도 천지(하늘과 땅)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터득한다면 그렇게 시가 쉽게 씌어지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 응모자는 어떤 매너리즘(타성)에 빠져 있어서 사물을 보는 시선이 한곳으로만 고정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이 응모자의 시에 대한 견결한 성실성은 다른 응모자들에 비하여 장점으로 보였음은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북촌리의 봄] [견치(犬齒)] [어우늘] [작은 뼈] [파종] [순이삼촌] [백년초] 등을 선보인 이의 시작품이 제2회 제주4.3평화문학상 응모자(응모작품)들 가운데서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제주4.3을 이만큼이라도 아픔과 사랑으로 혹은 눈물()을 가지고 시로 노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로되, 이 응모자의 시작품은 우선 전체적으로 날것이 아니면서 읽는 이의 마음에 누군가의 살()이 낯설지 않게 닿는 듯한 그런 느낌을 주었다. 시를 노래하는 사람이 제주4.3(한국현대사)을 혈육의 슬픔(시의 힘)으로 소화하고 육화하고 있다는 것이 예의 시편들 곳곳에서 확인되면서 가볍지 않은 감동과 함께 시적 성공을 거두고 있다.

 

슬픔을 슬픔으로 노래하기보다는 그 슬픔을 버텨내고 이겨내는것을 이 응모자는 자신의 견결하면서도 젖은 음색(봄비와 같은)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은 이번 제주4.3평화문학상의 수확으로 여겨진다. [견치(犬齒)] [어우늘] [작은 뼈]도 만만치 않는 작품이었으나 [북촌리의 봄]을 수상작으로 올려놓는다. 제주4.3의 제노사이드(집단학살) 현장이기도 한 북촌리(혹은 너븐숭이)의 그날이 선연하게 되살아나고 있는 이 시의 마지막에서 1948년 그해 제주4.3은 이렇게, 오늘의 우리들에게 현현한다. 가을과 겨울이 아닌 봄으로. “뚝뚝, 지는 목숨들 사이 / 아이는 나오지 않는 젖을 한사코 빨아대고 있었다 / 어미를 살려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 그 힘으로 동백꽃이 피고 / 젖 먹던 힘을 다해 봄이 오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번 당선자의 작품은 제주4.3평화문학상의 취지에 가장 들어맞는 응모작으로 생각되며 전편이 분노와 회환으로 가득 찬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면서 큰 울림을 준다. 특히 견치파종은 시적 완성도도 험을 잡을 수 없을 만큼 높다. 시적 대상 앞에서 절대 흥분하지 않으면서 비극적 실화(實話)함묵의 예술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어서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오래 붙잡았다.

 

당선작 [북촌리의 봄] 응모자에게 축하드리며 앞으로 더욱 낮은 모습으로 거듭날 것을 믿는다. 한라산도 가장 낮은 곳, 바다 저 깊은 밑바닥에 뿌리를 두고서야 솟아있지를 않는가! 제주4.3문학상에 응모한 여러분의 건필과 건승을 빈다.

 

- 심사위원 신경림, 이시영, 김준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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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토구(土拘)* / 박은영

 

 

나는 삽 한 자루를 가지고 태어났다

땅을 팔 때마다 부하게 일어서는 흙먼지

배냇짓을 잊어버리고 땅파기에 열중한다

밤늦도록 땅을 파며 놀던 나의 멱살을 쥔 아버지처럼

손아귀 힘이 강해진다 파도파도 배고픈 날들

밥그릇 수만큼 삽은 커다래지고

손톱은 딱딱해져 삽날에 찍혀도 흠집이 나지 않는다

비이이- 구덩이로 고여 드는 울음,

물기 많은 한숨이 원을 그리며 퍼진다

한 삽 한 삽 퍼 올린 흙더미에 아내가 딸려오고

부화한 새끼들이 배고픈 줄도 모른 채

흙가루를 날리며 웃어댄다

움켜쥐는 법을 터득한 후 빨라진 삽질의 속도,

밥그릇이 쇳소리를 내며 바닥을 드러낸다

바다가 힌 눈에 들어오는 산자락

수평선 안쪽으로 각혈처럼 노을이 번진다

세상이 한 삽 가득 어둠을 떠먹는 시간

갈기를 세운 사자자리별똥별에 어깨는 움츠려들고

삽자루를 쥔 흙투성이 손은 굳어 펴지질 않는다

이제 삽을 내려놓아야 할 때

한평생 파놓은 깊고 어두운 구덩이

겨우, 내 한 몸 뉠 자리다

 

* 땅강아지 혹은 땅개, 땅개비라고 불리는 곤충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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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내가 짜박짜박 걸어 다닐 때, 가루농약을 콕콕 찍어 맛보고 있는 나를 엄마가 발견했다고 합니다. 물로 입안을 헹구면, 내가 그 물을 꿀꺽 삼켜버릴 것 같아 혀에 묻은 농약을 당신의 혀로 닦아내줬다고 합니다.

 

를 만난 지, 5년째입니다. 나는 가루농약을 찍어 맛보듯 콕콕 키보드를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내가 조제한 독을 혀끝에 올려 맛보았습니다. 수없이, 낙선했습니다. 그때마다 는 혀를 내밀어 나의 혀를 닦아내줬습니다. 단번에 꿀꺽 독을 삼켜 심장으로 스미지 않게 우둔한 혀를 닦아내주었습니다.

 

독을 닦아내주느라 고통스러웠을 가족에게 이 영광을 돌립니다. 특히, 독 묻은 혀뿐만 아니라 기도로 날마다 내 영혼을 씻겨주신 어머니 김영심 여사와 아버지 박병문 님께 이 상을 바칩니다. 기독교 동인모임 <품시>에게 향기 나는 백합꽃 한 다발을, 내 생의 수많은 인연들과 의령군민들께도 양떼구름 지나가는 푸른 하늘을 아침 창가에 내려놓고 싶습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뚜렷이 알겠습니다. 나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의 손이 부끄러워지지 않게끔 열심히 시를 쓰는 일, 그리고 한 사람을 지독하게 사랑하는 일!

 

모든 게 일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세상과 울컥 뜨거워지는 가슴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2010 제2회 천강 문학상 수상 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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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대상에 대한 차분한 사색

 

2회 천강문학상은 시, 시조부문을 분리시켜 시부문과 시조부문으로 나누어 모집했다. 시부문의 경우 전국에서 고루 응모해 왔고 기성과 신인을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응모작들의 수준이 고르고 높았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32편이다. 본심에서 가려내는 기준은 다음과 같이 정했다. 1)쓸 데 없이 길게 쳐지는 작품은 제외한다. 2)목적 없이 우회하거나 내면화하는 작품도 제외한다. 3)언어미학에 닿지 못한 작품도 제외한다.

 

이런 기준을 놓고 작품을 읽는데 지나치게 심각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시들이 많다.그냥 지나가는 눈으로 시를 읽으면 실력이 탄탄해 보이고 어딜 내놓아도 뽑힐 만한 작품으로 보이긴 한데 정작 심층적으로 읽어나가면 대체로 겉도는 소리를 내는 것이 많은 것이다. 이것은 겉멋을 내는 것으로 대상에 대한 골똘한 사색이 없는 것일 터이다.

 

난해를 위한 난해로 가는 시편들은 울림을 주지 않는다. 난해시라 하여 울림을 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난해가 하나의 흐름이나 목소리를 얻을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는 난해라 하더라도 소정의 울림을 준다.

 

대상으로 뽑아 든 <토구(土狗)>와 우수상으로 뽑아 든 <숫돌>, <눈부처> 3편은 앞에서 제시한 기준에 비교적 안착해 있는 시로 읽힌다. <토구>는 땅강아지과에 속하는 곤충을 소재로 쓰여진 우화적 터치의 시다. ‘토구의 일상을 그리고 있는데, 일상이라 했지만 사실은 생애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난해하지 않고 토구의 특색에 맞추어 나직 나직 말하고 있다. 욕심을 크게 내지 않는 것이 좋아 보인다. 어쨌든 토구가 살아감에 있어 대신할 수 없는 삶, 그 실존이 벗어날 수 없는 멍에라는 점을 각인시켜 준다.

 

우수상으로 뽑힌 <숫돌>은 숫돌이 가진 특질에 맞추어 이미지를 풀어내는 솜씨가 눈에 띈다. 숫돌은 대질리면서 닳는 것인데 너를 위해 눕고’ ‘빛나는 너를 위해 닳는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사각지대에 있는 한 생애를 드러내면서 공동체라든가 사랑이라는 내포로까지 의미가 확산되고 있음이 예사롭지 않다.

 

같은 우수상으로 뽑힌 <눈부처>는 잘 익은 서정시다. 앵두 한 알 같다는 느낌을 준다. 작지만 완결된 맛을 보여주는 순서정의 시다. 우리는 시를 사변적으로 끌고 온 것이 아닌지 반성해볼 필요를 느낀다. 우리는 시의 출구를 철학적이거나 현학적인 어느 쪽으로 내어 보려는 지나친 지적 갈증에 빠져 있지 않은지 살펴 볼 필요를 느낀다. 이럴 때에 이것이다.’하고 대안이 되는 한 편의 시를 내놓게 된다면 <눈부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눈사람처럼 곧 녹아버릴 것 같은 시다. 그리고 이 시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그 따스함을 말해주고 있다.

 

입상자 세 분은 지금처럼 그 고삐 그대로 쥐고 나가면서 자기들의 세계를 착실히 구축해 주기를 기대한다. 박수를 보낸다.

 

- 심사위원 평론가 윤재근, 시인 강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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