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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 박수봉

 

 

빗속에 집이 잠겨있다

태풍이 온 나라를 휩쓸었지만 빈집은

날개를 접고 흔들리지 않았다

식구들은 모두 전주로 떠나버리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빈집

퇴행성관절염에 어깨 한쪽이 내려앉은 채

기울어 가는 생을 붙들고 있다

빈집의 담장을 지나다보면 허옇게 바랜 집이

손을 저으며 말을 걸어온다

평생 걸어온 길의 기울기와 그 길로 져 날랐던

가난과 고단함에 대해서 빈집은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빈 방에다 새긴다

행간마다 피어나는 유폐의 점자들

마당 우물터로 목마른 잡초들이 조촘조촘 들어서고

버리고 간 장독대엔 혼잣말이 웅얼웅얼 발효 중이다

죽은 참가죽나무에 앉아 종일 귓바퀴를 쪼아대던

새소리도 날아가고 귀가를 서두르는 골목

일몰의 욕조에 몸을 담근 빈집이

미지근한 어둠으로 눈을 닦는다

종일 입술을 다문 대문을 빈집은

몇 번이고 눈에 힘을 주어 밀어 보지만

끝내 대문 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마당 깊은 곳까지 어둠이 차오르면 빈집은

눈을 들어 별자리를 더듬는다

식구들이 몰려 간 서남쪽 하늘

별이 기울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한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들쥐가

들어앉아 새끼를 낳았다

이따금 달빛이 새끼들의 털을 핥아주고 갔다

들쥐는 빈집의 뒷다리를 갉아 먹으며 자라고

집은 제자리에서 우물처럼 늙어간다

빈집의 늑막 아래로 어둠이 점점 차오른다

 

 

 

 

 

[당선소감] “시의 길은 말없이 인내하며 살아가는 삶의 뒷모습 따라가는 것

 

보라색 공원관리 조끼를 입은 사내들이 나무 줄기를 자르고 있었습니다. 나무는 지난 계절을 잃고 바람을 흘리며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그런 나무 곁에서 문득 내가 줄기 잘린 나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퍼렇게 뻗어 가는 시의 줄기를 잃고 자꾸 움츠러드는 제 모습이 나무를 닮았다며 허전함의 지평을 늘이고 있을 때 당선 통보를 받았습니다.

 

전화를 끊고, 다시 수변 공원 나무들을 보러 나섰습니다. 매서운 한파에 뭉툭하게 가지가 잘린 나무들이 즐비하게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나무의 잘린 부분을 어루만지면서 저는 제 시가 가야할 길을 더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잘리고, 꺾이고, 찢겨가면서도 말없이 인내하며 살아가는 삶의 뒷모습을 따라가는 것이 시의 길임을 어렴풋이 느끼면서 천천히 공원을 걸었습니다.

 

저의 움츠러든 손목에 힘을 실어주신 심사위원들께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름이 더욱 무거워졌음을 염두에 두고 열심히 쓰겠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최종심에서 낙선하고 우울해 할 때 낙선주라며 담근 술을 따라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던 오산의 문우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를 사랑하는, 제가 사랑하는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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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주관적 정서의 객관화, 소통 잊지 않은 작품"

 

전주에 펑펑 함박눈이 쏟아지겠다고 예보된 날 신문사로부터 본심에 올라온 14편의 시를 전달받았다. 이름을 지운 응모자의 시편들은 자아와 세계의 화해 불가능을 확신하는 비규범성이나 이질적인 것들의 혼돈 등을 과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혼종적 욕망이 들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금의 시단 풍토와 다르게 뜻하는 바가 분명했고 시어들 개개의 인상과 소리 맵시가 어울려 새 형상을 짓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응모작 중에서 <괄호 밖의 사람들>, <빈집>, <편의점 라이프>, <오래 머무르는 풍경>, <바람의 건축> 등의 작품을 오래 들여다봤다. <괄호 밖의 사람들>괄호 안의 사람들을 궁금하게 함과 동시에 모래가 환기하는 삶의 황폐성을 떠올리도록 하고, <오래 머무르는 풍경>에 적힌 경작금지라는 팻말누군가는 스며들고 또 누군가는 닮아간다라는 구절은 시 읽는 즐거움을 주었다. <편의점 라이프><바람의 건축>도 심사위원들의 시선을 끌었다.

 

숙고 끝에 <빈집>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태풍을 피해서 모두가 떠난 빈집, 삶의 내력과 유폐된 시간을 감당하는 의인화는 고단한 시간을 견딘 타인의 이야기, 동시대 모두의 사연으로 읽혔다. ‘평생 걸어온 길의 기울기에 어울린 빈집의 서사는 시 공부를 열심히 한 흔적도 보였다. 시는 주관적 정서의 객관화이며, 소통이라는 점을 잊지 않고 시적 형상화에 공력을 들인 <빈집>의 시인,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민윤기(서울시인협회 회장), 이병초(전북작가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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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순의비를 읽다 / 박수봉

 

 

돌이 찢어진 비문을 꽉 물고 있다

입술을 다문 침묵을 쪼아

빗돌의 늑골에 문신을 새긴 사람은

붓을 챙겨 떠나버리고

깨진 돌만 남아서 그때를 증언한다

돌은 침묵을 가장하고 있지만 돌에는

임진의 여름 풀꽃들이

폭풍우에 쓰러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스며있다

비문의 진술을 딸가 보면

북채를 쥔 사내 따라 삽을 놓고

기꺼이 졸이 된 사람들

탕, 타탕, 터지는 화구를 몸으로 막아

무명천에 펄럭이는 의를 몸뚱이에 감았다

돌의 찢어진 흉곽에서 진물처럼

마지막 비명이 묻어 나온다

지은 죄가 두려워 빽빽한 돌의 진술을

찢어버리고 황급히 꼬리를 감춘

섬나라 살쾡이들

아직도 속내를 해무에 감춘 채

호시탐탐 내륙을 훔쳐보고 있다

조각난 뼈를 맞추고 피부를 꿰맨

비의 깨진 이마에 순의가 선명하다

군데군데 뜯겨나간 살점은

돌의 심장으로도 차마 발설할 수 없어

시멘트로 봉해버린 상실의 시간이다

 

 

 

 

편안한 잠

 

nefing.com

공모전 당선자의 시집을 소개합니다.

 

 

 

[당선소감]

 

거대한 암벽을 타고 오르는 능소화 줄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수백 미터의 암벽을 덮으며 기어오르는 능소화에겐 두려움이란 없어 보였습니다. 암벽에서 품어내는 어마어마한 냉기와 폭염의 열기를 다 받아내며 한 땀 한 땀 오르는 지칠 줄 모르는 집념 앞에서 나는 알지 못하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두리번거리지 않고 망설이지도 않고 오로지 오르기만 하는 거대한 오체투지, 깎아지른 벼랑에 써 가는 능소화의 육필을 나는 눈이 부셔 제대로 읽지 못하였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 장면을 떠올리며 나태해지는 나 자신을 다잡아 보곤 합니다.

수상 소식을 접하는 순간 한 노시인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석가헌 앞뜰에 연꽃을 심어놓고 바람을 가두어 여름을 출렁이던 시인의 웃음 띤 얼굴이 새삼 그리워집니다.‘繪事後素’를 강조하시던 선생님, 돌아가실 때까지 시를 놓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연못에 지금쯤 푸름이 범람하고 있을 것입니다.

 

오르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벼랑을 잡고 있는 가늘고 거친 줄기에 꽃 한 송이 피게 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또한 박토에 시의 싹을 가꿀 수 있게 문학의 토양을 제공해 주시는 (사)중봉조헌선생선양회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리고 항상 저를 응원해주시고 격려히 주시는 오산 문인협회 문우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더 열심히 노력하여 부끄럽지 않은 작품으로 만나 뵙겠습니다.

 

 

 

 

 

 

[우수상] 풍란의 발 / 임송자

- 중봉 조헌선생의 동상 아래서

 

한 번 먹은 마음으로

돌에다 뿌리를 내리는 목숨이 있다

사람의 가슴으로 뻗어오는 천년의 뿌리

거친 바람 천길 벼랑도 두렵지 않다

바람의 상소를 움켜 쥔 한 사내가

허공에 발을 내딛고 있다

높고 순결한 저 보폭의 음계는

어느 가파름으로 깃드는 붉은 목청일까

상한 시절을 쳐내는가

우국충정 뜨거운 가슴 부셔내며 퉁퉁 부르튼 발 아래로

푸른 촉이 돋는다

지부상소

닷새장 마당이 내려다보이는 북변동 가운데 서서

철물점 도끼를 무심히 들여다보시겠지요

오늘은 낙조청강*에 내리는 빗소리 함께 데리고

그냥 시인으로 오시면 포장집 술잔에서도 살구꽃이 필테지요

그런 날에는 봄볕에 그을린 당신의 그림자 곁에서

꽃씨처럼 포슬포슬 꿈을 꾸는 일도 괜찮겠다

장터의 소란이 사그라들면

버들가지에 간고등어 한 손씩 꿰어들고 들판의 실핏줄같은 논두렁길을 따라

감정리로 스며들어도 좋은 저녁

비는 그치고 어둠이 어둠을 덧칠해나가는 시간

새로 돋는 별들이 차례로 다녀가고

당신은 풍란 꽃 희디흰 함성으로 오시어

길눈이 어두운 계절의 한복판을

들었다 놨다

 

* 낙조청강 - 조헌선생 시조의 한 구절 

 

 

 

 

[당선소감]

 

늙었으나 수형이 아름다운 뒤안 감나무 위에서 아침부터 뻐꾸기가 울었습니다. 자주 감자가 막 꽃대를 밀어 올리는 오월 끝자락 푸른 소식을 접했습니다. 오래 아주 오래 시를 외면하고 살았으며 그럴수록 정신은 가난하고 아팠습니다. 집안 곳곳에 자리한 석부작을 보다가 문득 선생을 떠올렸습니다. 여문 것을 피하여 살아온 제가 한없이 부끄러운 풍란의 계절입니다. 늘 갈증이던 문학의 갈피를 접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의 글 올립니다. 초록을 따라 가 봐야겠습니다.

 

 

 

 

[심사평]

 

2021년 제15회 중봉조헌문학상에는 시 955편(194명), 수필 193편(97명)이 도착하였다. 모두 291명 문사(文士)들이 자그만치 1,148편의 작품을 정성껏 보내주었다. 작년인 2020년과 비교해보면, 참여인원은 약 50명, 작품 수로는 대략 220편 정도가 증가한 것이다. 중봉문학상이 전국적인 관심이 된 지는 오래되었다. 이를 반증하듯 서울부터 제주까지 전국 각지에서 빠짐없이 작품을 보내주었다. 미국은 물론 연길시와 흑룡강성, 길림성 등 중국에서도 여러 작품이 도착했다. 이 문학상을 제정하여 운영할 때 걱정스런 여러 목소리를 이 같은 관심과 성원으로 잠재울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문학상의 제정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는 자평을 하게 되었다. 전국의 문사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렇다고 책임감의 무게가 적어지는 것은 아니다. 피할 수도 없다. 중봉문학상에 응모하는 작품들의 모양새가 해가 다르게 매력적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매력적인 작품들을 모두 소개하여 기쁨을 공유하지 못해 안타까울 따름이다. 중봉문학상의 틀을 확대할 필요성이 매우 심각하게 제기된다고 하겠다.

 

제15회 중봉조헌문학상 응모작품들의 내용과 형식이 매우 다양해졌다. 중봉 조헌 선생의 삶과 사상을 형상화한 것과 일반적인 작품들이 골고루 응모되었다. 중봉 선생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이전 작품들에서는 그와 의병의 삶을 의지와 희생의 관점에서 형상화한 것이 많았다면, 올해는 중봉과 의병, 당시의 상황을 현재의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작품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모두 나름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만, 중봉에 대한 접근이 다각화되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하겠다. 또한 일반적인 작품들의 수준도 상당했다. 이전에는 소재 중심의 습작들과 성긴 문학성을 노출하는 작품들이 경험의 차원에서 제출된 느낌이었다면, 올해는 그 어떤 것도 그냥 넘기기 힘든 문제성을 지니고 있었다. 중봉조헌문학상이 진화하고 있는 현상이고 그의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예심을 거쳐 본선에 올라온 작품은 시 4편과 수필 3편이다. 시에서는 최교민의 <사당에서 내리지 않고 버틴다>, 박수봉의 <순의비를 읽다>, 김종빈의 <목이 먹으로 갈려져>, 임송자의 <풍란의 발>이고, 수필에서는 김소희의 <자연의 물산을 소모하다>와 이정희의 <눈 오는 밤, 새 한 마리 때문에>, 황진숙의 <호위무사>이다. 모두 일정 이상의 수준과 새로움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어서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해도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모두 의식의 단단함과 형식의 세밀함을 보여준 작품들이었다. 그만큼 심사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숙고 끝에 최종 선정한 작품은 대상에는 박수봉의 시 <순의비를 읽다>이고, 우수상에는 황진숙의 수필 <호위무사>와 임송자의 시 <풍란의 발>이다.

 

박수봉의 <순의비를 읽다>는 금산 칠백의총 안에 있는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를 소재로 하였다. ‘순의비각’이라는 이름 아래 찢긴 채 놓여 있는 비석의 역사, 즉 “깨진 돌만 남아서 그때를 증언”하는 것을 듣고 있다. 북채를 쥔 사내와 그를 따른 백성들 그리고 치열한 전쟁을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는 항쟁의 뜨거운 역사만 증언하지는 않는다. 해무 속의 몸을 숨긴 어두운 세력들, 무엇보다 “돌의 심장”으로도 말할 수 없는 “상실의 시간”을 증언하고 있다. 이 시는 감정 분출이 일부 과한 측면도 있지만 크게 거슬리지 않고, 깨진 순의비각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소환하고 해석하는 참신한 상상력을 보여줘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황진숙의 수필인 <호위무사>는 인생의 굴곡을 여러 신발들을 통해 속도감 있게 들려주고 있다. 다소 뻔한 갖가지 사연들이 가진 기억과 자랑 속에서 새롭게 들린다. <규중칠우쟁론기>도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은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체와 현실과 사물에 대한 세밀한 관찰이 읽는 맛을 더하고 있다. 임송자 시 <풍란의 발>은 ‘중봉 조헌선생의 동상 아래서’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김포시 북변로 거리에 서 있는 중봉의 동상을 올려다보며 과거의 그를 현재로 불러내고 있다. 공교롭게도 입상작으로 선정한 시 두 편이 모두 중봉을 매개하는 유적과 유물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동상이라는 상징물이 갖는 권위와 목적성과는 대비되는 지점의 상상력을 함께 드러내 절묘한 균형을 이룬 작품이라 하겠다.

 

이번 제15회 ‘중봉조헌문학상’도 열성적인 참여로 풍성하게 만들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내년의 ‘중봉조헌문학상’은 수많은 관심과 성원에 화답할 수 있도록 좀 더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앞으로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의 문학적 역량이 더욱 발전하기를 바란다. 문운과 함께 늘 건강하시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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