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책 기둥 / 문보영

 

 

도서관에 간다. 밖에서 볼 땐 가로로 긴 직사각형이나 들어가면 첨탑이다. 높은 벽은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달았다. 너무 큰 창은 벽을 약하게 하며 창은 지나가는 것을 모두 수긍해버린다는 나의 생각이 틀렸다고, 도서관 사서인 에드몽 자베스는 말한다.

 

에드몽이 쓴 글라스의 왼쪽 알에 달린 얇은 줄은 어깨까지 드리운다. 이곳은 천장이 아주 높다, 생각하자 책을 높이 쌓아야 하니까, 에드몽이 대답한다 그는 램프의 뚜껑을 열어 기름을 채운 뒤 촛불을 켠다.

 

서가에는 책만이 있다 책들은 기둥 모양으로 쌓여 있다. 그 주변을 난쟁이들이 서성인다. 난쟁이들은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가로로 비틀어 책의 제목을 살핀다. 책기둥의 가장 아래쪽을 살핀다. 읽고 싶은 책은 늘 기둥의 가장 아래쪽에 있다 나는 읽고 싶은 책을 머릿속으로 떠올린다. 그러자 그 책은 기둥의 가장 아래 위치한다.

 

책기둥들은 어디론가 기울었다. 나는 기울어진 건물을 떠올린다. 피사의 사탑과 같이 똑바로 서지 못한 것들에 사람들은 환호한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것이 주는 감동은 책기둥이 주는 그것과 유사하다. 기우는 것은 어디론가 편향되니까 겉은 꼿꼿하나 안은 어디론가 치우친 인간의 몸을 떠올린다. 심장은 왼쪽으로, 간은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으므로 사람은 똑바로 걷는다. 기울어진 건물은 내부에 벽으로 치우쳐 자는 사람을 기른다, 는 내 생각을 읽은 에드몽이 나 대신 내 생각을 말한다.

 

그는 지팡이로 바닥에 널브러진 장서들을 옆으로 치우며 길을 만든다. 이따금 난쟁이들의 숱 없는 작은 머리를 지팡이로 내려친다. 난쟁이들이 독서에 집중하지 않아서라고 말하는 그는, 책기둥에 등을 대고 앉아 책에 푹 빠진 난쟁이들만을 골라 때린다.

 

난쟁이들이 책기둥을 무너뜨리고 원하는 책을 얻는다. 다시 기둥을 쌓는다. 난쟁이들은 책을 때리고 책을 향해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붓는다. 그럴 만도 하다, 고 나는 생각한다. 책은 무례하니까. 책은 사랑을 앗아 가며 어디론가 사람을 치우치게 하니까. 벽만 바라봐서 벽을 약하게 만드니까. 벽에 창문을 뚫고 기어이 바깥을 넘보게 만드니까.

 

난쟁이들은 맨 아래 깔린 책을 얻기 위해 기둥을 무너뜨린다. 책은 쌓여 기둥이 된다. 기운다. 치우친다. 쏟아진다. 다시 쌓인다. 맨 아래 깔린 책을 읽으면 그 위에 쌓인 모든 책을 다 읽은 거나 다름없다고, 그 한 권의 책은 그 위에 쌓인 책들을 집약한다, 는 나의 생각이 안일하다고 에드몽은 꾸짖는다. 햇살이, 몇 가닥 되지 않는 얇고 구불구불한 난쟁이들의 머리칼에서 반짝인다. 빛이 그들의 오래된 생각을 때린다. 난쟁이들은 이제 지친 게 아니겠냐고 생각하는 나는 아직 책을 덜 읽었다, 고 에드몽이 말한다.

 

 

 

책기둥

 

nefing.com

 

 

36회 김수영문학상에 신예 시인 문보영(25)이 선정됐다.

 

30일 김수영 문학상을 주관하는 민음사는 "178명의 시인이 50편 이상의 시집 원고를 투고한 2017'김수영 문학상'에서 수상의 영예는 신예 시인 문보영이 가져갔다"고 밝혔다.

 

수상작은 '책 기둥' 52편이다. 고려대 교육학과 출신의 문 시인은 2016년 중앙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심사위원 김나영(문학평론가)"문보영 시의 담백하고도 에너지 넘치는 문장 이면에는 삶과 세상을 대하는 시인의 용기와 정직한 태도가 두텁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평했다.

 

심사위원 조강석(문학평론가)"아쉬움과 결여조차 또 한 번 배신당하기를 희망할 만한 작품들이라는 것이 최종 결론"이라며 "또 하나의 사건이 되기를 희망하며 문보영 시인의 수상을 축하한다"고 전했다.

 

문 시인은 "별 이유 없이 시를 쓴다""시를 쓰는 순간만 아프지 않고, 시를 쓰지 않는 나머지 시간이 너무 지루하다. 사람들은 손잡이가 없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문으로 생각하지 않는데 시를 쓸 때만큼은 사람의 무릎이나 겨드랑이 아니면 허벅지에 난 점 따위에 달린 작은 손잡이가 보이며, 열릴 리 없지만 왠지 열고 싶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수상 소감을 밝혔다.

 

수상작은 격월간 문학잡지 '릿터' 9호에서 공개되며 수상 시집 '책 기둥'으로 만날 수 있다. 수상 시인에게는 상금 1000만 원이 수여된다.

 

728x90

 

 

막판이 된다는 것 / 문보영

 

 

후박나무 가지의 이파리는 막판까지 매달린다. 그늘을 막다른 골목까지 끌고 갔다. 막판 직전까지. 그 직전의 직전까지. 밑천이 다 드러난 그늘을 보고서야 기어이

 

후박나무는 그늘을 털어놓는다. 막판의 세계에는 짬만 나면 밤이 나타나고 짬만 나면 낭떠러지가 다가와서. 막판까지 추억하다 잎사귀를 떨어뜨렸다. 추억하느라 파산한 모든 것

 

붙잡을 무언가가 필요해 손이 생겼다. 손아귀의 힘을 기르다가 이파리가 되었다. 가지 끝에서 종일 손아귀의 힘을 기르고 있다. 그러나 양손이 모두 익숙지 않은 것들은 양손잡이일까 무손잡이일까. 그늘을 탈탈 털어도 가벼워지지 않는

 

애면글면 매달려 있는. 한 잎의 막판이 떨어지면 한 잎의 막판이 자라고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어서 손이 손바닥을 말아 쥐었다. 손을 꽉 쥐면 막판까지 끌고 갔던 것들이 떠오른다. 막판들이 닥지닥지 매달려 있다. 막판 뒤에 막판을 숨긴다.

 

 

 

 

2016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후배와 밥을 먹었다. 그는 내게 시가 좋으냐고 물었다. 시를 좋아하는지 증오하는지는 분간이 잘 안 선다고 대답했다. 상처난 부위에 거즈를 붙일 때, 거즈를 사랑하는 것도 증오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에는 기호랄 것이 없지 않으냐, 하지만 피를 멈추려면 거즈를 대야 한다고.

 

시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묻길래 시는,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인 것 같다고 했다. 꼭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문학을 하는 거냐고 물어서, 지나치게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었다고 풀어 설명하고 좀 후회했다. 누나는 애인이 있느냐고 물어서 애인은 있어도 없는 것이고 없어도 없는 거라서 가져본 적이 없다고 했다. 시집을 낼 수 있다면 제목을 모태솔로라고 할 것이며 첫 시는 각자애인이라고 말해주었다.

 

아버지 문경식의 갈색 일기장에 평온이 깃들길 빈다. 오형엽 선생님께 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오태환 시인께는 별이 잔뜩 박힌 모자를 선물할 것이다. 소식을 들은 그는 말했다. “천둥벌거숭이 같던 네가 나를 웃게 만드는 날도 있구나!”

 

 

 

 

책기둥

 

nefing.com

 

 

[심사평] 능숙한 언어구사, 단단한 사유의 힘 갖춰

 

본심에 올라온 15명의 응모 작품을 읽고 난 뒤 우리 두 사람은 기쁘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했다. 기쁜 건 응모작의 수준이 비슷하게 높아서였고 난감한 건 그 동일한 높음이 언어 기교 면에서만 그렇다는 점, 그 높은 기교를 감당할 만한 깊은 시적 내면이 잘 안 보여 시들이 대체로 공허하다는 점, 그리고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응모한 것 같을 정도로 응모 시들이 거의 다 비슷했다는 점 등이었다.

 

최종까지 남은 작품은 그런 난감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이지윤의 과 문보영의 막판이 된다는 것두 편이었다. ‘은 거울의 이미지를 현란하거나 난삽한 언어 구사 없이 신선하고 능숙하게 구멍 이미지로 환치해낸 뛰어난 작품이었다. 하지만 시에서는 주석까지도 시여야 한다는 점을 간과한 설명 이상도 이하도 아닌 주석이 결국 치명적이었다. 그에 비해 문보영의 막판이 된다는 것은 산문시가 갖기 쉬운 상투적 서술의 위험을 아슬아슬한 정도에서 조절해내는 자유롭고도 능숙한 언어 구사와 그에 걸맞은 단단한 사유의 힘을 함께 갖춘 데다 나머지 작품 수준도 고르게 높아서 최종 당선작으로 합의하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선까지의 정진이 시의 막판에까지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축하와 기대를 함께 보낸다.

 

본심 심사위원=김기택·김경미(대표집필) 예심 정끝별·문태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