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구두 / 송승근
집을 나서야할 이른 아침
차가운 시멘트 바닥 한 구석에서
밤을 지샜을 낡은
구두 한 켤레를 본다
오랜 세월 거친 길을 헤매면
몸 속의 멍도 감출 도리가 없는 듯
푸른색 실밥이 타져 나왔다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쉬어야 하는 것일까
느슨하게 풀린 끈이
고갯길 바위시렁에 주저앉은 듯
그러나 알아야 한다
굽은 닳고 닳았지만
문 밖을 향해 가지런한 것은
걸어야할 길이 아직 남아있기에,
그래서 말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나의 길을 기억하는 낡은 구두여,
오늘도 너의 끈을
단단히 동여맨다
[당선소감]
마치 길을 잃은 기분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한결 가볍기도 합니다.
다시 길을 찾아 나서야 하겠지요.강원도에 가서 머무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강원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아마도 험준한 산세와 조용한 정취 그리고 이북 방언과 비슷한 강원도 사람들의 말본새 등 강원도에 대한 제 나름의 심상이 그 막연함을 더해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곳에 가면 이제껏 살아온 곳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것들을 경험할 수 있겠지요.그리고 제가 가지고 있던 막연한 심상들을 구체적으로 만날 수가 있겠지요. 글쓰기에 필요한 냄새 지독한 거름을 만드는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랫동안 머무를 작정은 아닙니다. 평생 걸어도 다 갈 수 없는 길이 수없이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꾹꾹 눌려있던 역마살을 맘껏 휘두를 계획입니다. 그리고는 국수 가락 뽑듯 글들을 술술 써내고 싶습니다.
무엇을 써야할지를 경험을 통해서 예리하게 알고싶다는 뜻입니다.일년동안 쌀밥 다음으로 많이 먹은 음식이 있습니다. 바로 자장면입니다. 전주대학교에 마치 비밀집단처럼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일명 ‘자장면 모임’이 있습니다. 물론 시를 공부하는 모음입니다. 시 합평을 하기 전에 꼭 칼로리 높은 자장면을 먹는데, 하필 왜 자장면인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 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매서운 회초리질 같은 합평회가 끝나면 자장면으로 채웠던 배에 어느새 찾아온 허기를 이제야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매질을 감당하기에는 그나마 칼로리 높은 자장면이 제격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한해동안 높은 칼로리를 제공해주신 전주대학교 이희중 교수님과, 교수님과 함께 혹독한 매질을 해준 ‘자장면 모임’ 식구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제가 길을 잃고 맘 편히 강원도로 떠날 수 있게 저의 시를 보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그 기회를 마련해준 전북일보에 또한 감사를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이 자리를 빌어 처음 글 길을 열어준 ‘흙방 사람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맘 편히 강원도로 떠나 길을 열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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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응모한 시들의 수준은 고르고 높은 편이었다. 그 동안 여러 대학에서 문예창작 전공이 생겨나고, 창작 강좌를 개설한 사회 교육 기관이 많아져서 문예 창작을 전문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가 활성화된 것이 한 원인으로 보인다.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작품이 많았으나 전반적으로 기교와 수사에 그친 작품, 외양을 깔끔하고 그럴싸하게 꾸미는 데서 벗어나지 못한 작품이 대부분이었음은 아쉬운 대목이었다.
시에 담길 만한 생각을 갈고 다듬어, 기교와 수사의 학습에 더해 정신의 깊이까지 아우른 작품은 아주 드물었다. 시 창작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되씹어 보아야 할 대목이 아닐까. 좋은 시는 아름다운 표현과 곰삭은 생각이 어우러진 곳에서 피어오르는 아주 귀한 꽃인 것이다.
마지막 선에 오른 작품들은 어느 것을 당선작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듯해, 선자들은 이들을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오래 고심하였다. 다들 장점과 단점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는데 거듭 읽으며 단점이 적은 쪽을 고르기로 했다.
최윤옥의 ‘씨앗’은 어머니의 사랑과 고난을 되새기며 삶의 각오를 새롭게 하는 주제를 다룬 깔끔하고 간결한 좋은 작품이었으나 중반의 어수선함이 흠이 되었다.
김인하의 ‘중심의 상처’는 제재를 다루는 정신의 힘과 탄탄한 언어적 기량이 돋보였고, 거의 매 연마다 다르게 제시된 비유의 매개들은 저마다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나, 역시 이들이 하나의 의미로 통합되지는 못하여 아쉬웠다.
유상우의 ‘낙화암’은 꽃피는 봄날과 청춘의 번민을 엮어 빚은 아름다운 서정시인데, 화자의 경험과 정서를 뒷받침하는 요소가 적어 소품에 머물고 말았다.
송승근의 ‘낡은 구두’는 절제된 언어로 대상의 은유적 내막을 추궁하며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패기에 찬 작품이었으나, 동봉한 다른 작품들에서 안정되지 못한 표현들이 더러 있어 미덥지 못했다.
고심 끝에 우리는 ‘낡은 구두’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신춘문예가 사람보다는 작품에 주는 상이라는 사실에 유념할 때 ‘낡은 구두’는 다른 작품들보다 완성도가 높았으며 젊은 힘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선작을 쓴 이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며 더 좋은 시를 더 자주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선에 오르지 못한 다른 분들도 정진하여 좋은 시로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정양, 이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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