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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의 아침 / 김소연

 

 

나 잠깐만 죽을게

삼각형처럼

 

정지한 사물들의 고요한 그림자를 둘러본다

새장이 뱅글뱅글 움직이기 시작한다

 

안겨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안겨 있는 사람을 더 꼭 끌어안으며 생각한다

 

이것은 기억을 상상하는 일이다

눈알에 기어들어 온 개미를 보는 일이다

살결이되어버린 겨울이라든가, 남쪽 바다의 남십자성이라든가

 

나 잠깐만 죽을게

단정한 선분처럼

 

수학자는 눈을 감는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숨을 세기로 한다

들이쉬고 내쉬는 간격의 이항대립 구조를 세기로 한다

 

숨소리가 고동 소리가 맥박 소리가

수학자의 귓전에 함부로 들락거린다

비천한 육체에 깃든 비천한 기쁨에 대해 생각한다

 

눈물 따위와 한숨 따위를 오래 잊고 살았습니다

잘 살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요

 

잠깐만 죽을게,

어디서도 목격한 적 없는 온전한 원주율을 생각하며

 

사람의 숨결이

수학자의 속눈썹에 닿는다

 

언젠가 반드시 곡선으로 휘어질 직선의 길이를 상상한다

 

 

 

 

 

수학자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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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추모사업회는 제12회 이육사시문학상 수상자로 시집 '수학자의 아침'의 김소연 시인을 선정했다.

 

이육사문학상 심사위원회는 김소연의 시는 때로는 더없이 투명하고 신선한 언어 감각과, 때로는 이해 불가능한 말들의 솟구침으로 앞선 세대의 이유 있는저항과 새로운 세대의 이유 없는좌충우돌 사이에서 자신만의 시어로 두 세대를 연결하고 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 상은 민족시인 이육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숭고한 생애와 문학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TBC2004년 제정했으며, 올해가 열두 번째이다.

 

시상식은 내달 25일 오후 3, 안동민속박물관에서 열리는 이육사문학축전과 함께 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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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신 / 김소연

 

 

달이 붓는다

가지가 휜다

일터에서 돌아온 어머니

발 매만지면

굳은살 갈라진 발바닥에서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 들린다

 

어머니 얼굴에

꽃 지고

단풍마저 떨어져

잔가지들만

힘없이 흘러내린다

새벽녘

새근대는 어머니의

숨소리에서

낙엽 쓸어내는 소리 들린다

 

숨죽이면

눈발이 날린다

어머니가 벗어놓은

구겨진 신발 위로

새순 같은

새하얀 눈꽃이 핀다

눈부신 꽃신이 된다

 

 

 

 

 

 

/ 김소연

 

 

빗방울이 소년의 얼굴을 때린다

 

자전거 바퀴가 천천히 구르고 어깨를 움츠린

 

소년의 등 뒤 비닐 덮인 신문지 위로

 

빗방울이 쌓인다

 

새벽의 푸른 발등을 한 바퀴 돌아

 

소년이 반지하 구들장 위에 신발을 얹으면

 

늘 기침하는 어머니 갈라진 숨소리, 소년을 마중한다

 

살가죽만 늘어진 마른 젖가슴에 얼굴을 묻으면

 

어머니 가슴까지 축축이 멍들이는 시퍼런 빗물

 

소년은 엊저녁 남은 찬밥을 물에 말아

 

후루룩 마신후 다시

 

흥건히 젖은 신발에 발을 담근다

 

우산도 없이 뛰는 소년의 등 뒤에서

 

책가방이 자꾸만 넘어질 듯 소년을 떠민다

 

빗방울은 사정없이 소년의 얼굴을 밟는다

 

 

 

 

 

[당선소감]

 

달이 밝고 자연 경관이 빼어난 곳에서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았다. 처음으로 오래도록 집을 떠나 자연과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 출발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글을 쓰기 위한 것이 되었다. 집을 떠나지 못하고 도심 속에 있을 때는 내 삶의 힘든 것만 보였다. 그래서 시도 힘들었다.

 

하지만 자연은 나에게 삶을 다르게 바라보는 법을 깨우쳐 주었다. 석 달 가까이 자연의 신비한 기운을 받으며 낮에는 산길을 걷고, 밤이면 달빛에 젖으며 밤이 새도록 만물의 창조주께 내 살 속 깊은 곳에서 곪고 부르튼 상처들을 들춰 보였다. 사람에게는 보일 수 없는 은밀한 것들조차도 자연의 침묵과 그 신비로움 앞에서는 아무것도 감출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에게 주어진 형벌 같은 이 삶의 고단함과 쓸쓸함까지 감사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연으로부터 들려오는 시의 소리는 삶이 너무 아프기 때문에 시를 쓸 수밖에 없는 그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나에게 시인의 정신과 삶을 일깨워 준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겨 본다. "눈을 뜬 사람은 반딧불만 보아도 '빛난다'고 할 수 있지만, 눈을 뜨지 못한 자는 태양이 떠도 '어둡다'고 한다. 그러니 너는 눈을 뜨라"고 했다. 눈을 떠야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고, 그 생활 속에서 시가 온다는 것을, 시의 흐름에는 나의 생활의 흐름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깊은 시는 내가 삶 속에서 그물을 깊이 던져 그것을 있는 힘을 다해 건져 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끝까지 열심히 할 것이다. 조금 더 수고를 하고 조금 더 애를 쓰면서. 마지막 최고까지 몸부림을 치며 정말 그만두고 싶은 순간에도 목숨을 내걸고 조금 더 올라가고 올라가면 더 엄청난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끝끝내 내 앞에 쌓아 놓은 종이가 바닥이 날 때까지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까지 그렇게 시를 쓸 것이다.

 

고기를 몰아야 이미 쳐 놓은 그물망에 고기가 걸리듯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고달픈 인생이 시를 쓰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그물망에 몰았을 때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커다란 기쁨이 걸려들었다. 그리하여 나에게 삶에 대한 위로와 더불어 커다란 용기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어린 감사를 드린다. 또한, 나의 소망되시는 하나님과 내가 시를 쓸 수 있도록 늘 사랑으로 가르쳐 주신 나의 스승께도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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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경제'라는 말의 위력에 비해 '양심'이라는 말의 힘은 너무도 미약해 보이는 것이 오늘날의 상황이다. 경제가 아량을 베풀어 셋방이라도 살게 해줘야 양심이 깃들 곳이 있게 된 세상이다. 하지만 경제는 아무리 먹고 마셔도 배고픈 신화 속의 괴물처럼 만족을 모른다. 그 괴물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미약하나마 양심의 힘이 절실히 필요하다.

 

시다운 시의 징표 가운데 하나는 얼마나 시에 양심이 살아 있느냐이다. 시 쓰기 자체가 살아가는 의미 찾기와 깊이 연관되는 것이라면 그 의미 찾기의 진실성 여부가 양심의 문제로 나타난다. 그것이 돈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돈벌이와 무관하게 시를 읽고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 땅에 시가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고 신춘문예의 수많은 투고작 또한 희망의 한 모습이다.

 

모두 200여 명의 투고자 가운데 마지막까지 검토의 대상이 된 시를 보낸 이는 이문 신지영 심명수 김기훈 김소연씨 등이다. 이문의 '리딩 로드'는 발랄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언어구사가 돋보였는데 시상의 초점이 잘 모이지 않는 것이 흠이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이야?'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주제 구현에 좀더 심혈을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신지영의 '열섬'은 시적 형상을 구축하는 저력이 배어 있는 시이다. 하지만 투고작 세 편만으로는 시인으로서의 역량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심명수의 '내 책상 위의 포도 한 알 구를 때'는 상상 자체가 신선하고 재미있는 시이다. 사소한 소재로도 얼마든지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함께 투고한 시들이 이 시를 받쳐주지 못하였다.

 

김기훈의 '월세방 있습니다'는 가난에 찌들지 않고 그것을 일종의 동화적 상상력으로 날려버리는 시이다. 무거움에 대해 가벼움으로 대응하는 발상이 신선한 시이다. 한편 김소연의 '꽃신'''도 가난한 삶의 체험을 우려낸 시인데 소박한 언어 속에 속 깊은 마음이 녹아들어 있다. 마지막 두 사람의 시에 심사에 임한 두 사람은 오래 눈길을 주었는데 결국 '소박한 언어 속의 속 깊은 마음'으로 저울추가 기울었다. 잔뜩 화장한 시가 유행하는 풍조에 견주어 중요한 미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선을 축하하며 정진을 빈다.

 

- 심사위원 : 장석주 최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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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들 / 김소연

 

 

비가 내려, 비가 내리면 장록 속에 카디건을 꺼내 입어, 카디건을 꺼내 입으면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조개껍데기가 만져져, 아침이야

 

비가 내려, 출처를 알 수 없는 조개껍데기 하나는 지난 계절의 모든 바다들을 불러들이고, 모두가 다른 파도, 모두가 다른 포말, 모두가 다른 햇살이 모두에게 똑같은 그림자를 선물해, 지난 계절의 기억나지 않는 바다야

 

지금은 조금 더 먼 곳을 생각하자

런던의 우산

퀘벡의 눈사람 아이슬란드의 털모자

너무 쓸쓸하다면,

 

봄베이의 담요

몬테비데오 어부의 가슴장화

 

비가 내려, 개구리들이 비가 되어 쏟아져 내려, 언젠가 진짜 비가 내리는 날은 진짜가 되는 날, 진짜 비와 진짜 우산이 만나는 날, 하늘의 위독함이 우리의 위독함으로 바통을 넘기는 날,

비가 내려,

 

비가 내리면 장롱 속 카디건 속 호주머니 속 조개껍데기 속의 바닷속 물고기들이 더 깊은 바닷속으로 헤엄쳐 들어가, 모두가 똑같은 부레를 지녔다면? 비가 내릴 일은 없었겠지,

비가 내려, 다행이야

 

 

 

수학자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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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작문학상 운영위원회가 주관하는 제10회 노작문학상 수상자로 시인 김소연씨(43)가 선정됐다. 수상작은 다행한 일들4편이다.

 

김 시인은 노작문학상운영위원회(정진규 최정례 이문재 이덕규 유성호)로부터 신선한 시적 전개와 선명한 이미지로 새로운 시적 호흡을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작문학상은 동인지 백조(白潮)’를 창간하며 낭만주의 시풍을 주도한 시인이자 극단 토월회를 이끈 노작(露雀) 홍사용(1900~1947)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1년 제정됐다.

 

상금은 1000만원이다. 시상식은 123일 경기 화성 동탄신도시 노작근린공원 노작문학관에서 열린다.

 

한편, 경북 경주 출신인 김씨는 1993현대시사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극에 달하다’(1996)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2006), 산문집 마음사전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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