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하학적인 삶 / 김언
미안하지만 우리는 점이고 부피를 가진 존재다.
우리는 구이고 한 점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있지 않다. 우리는 서로에게 멀어지면서 사라지고
사라지면서 변함없는 크기를 가진다.
대칭을 이루고 양쪽의 얼굴이 서로 다른 인격을 좋아한다.
피부가 만들어 내는 대지는 넓고 멀고 알 수 없는
담배 연기에 휘둘린다. 감각만큼 미지의 세계도 없지만
3차원만큼 명확한 근육도 없다. 우리는 객간적인 세계와
명백하게 다른 객관적인 세계를 보고 듣고 만지는 공간으로
서로를 구별한다. 성장하는 별과 사라지는 먼지를
똑같이 애석해하고 창조한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나왔지만
우리가 만들어 낸 자연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완결된 집이며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우리는 주변의 세계와 내부 세계를 한꺼번에 보면서 작도한다.
우리의 지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고향에 있는
내 방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간다. 거기
누가 있는 것처럼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한 점을 찾는다.
[심사평] 반갑다, 현실 성찰이 있는 시세계
본심에서 김행숙·김경주·송재학 등이 마지막까지 거론됐다.
당선자인 김언의 시는 매우 흥미로운 발상법으로 우리의 삶과 현실의 문제점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의 시에는 현실이 있고, 그 현실에 대한 사유와 성찰이 있고, 또 환상도 섞여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김언은 리얼리스트일 것이다. 많은 젊은 시인들이 주로 감각의 세계에 탐닉하고 있는 요즘, 김언이 지닌 현실에 대한 성찰적 지성은 반길만한 것이다.
‘기하학적 삶’은, 기하학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 우리의 모순된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한 시이다. 점이란 부피를 가질 수 없는 것이지만, 이 작품은 “우리는 점이고 부피를 가진 존재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모순을 암시하면서 시작된다. 이어서 우리의 삶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명제화한다. 그 명제들은 다른 어떤 익숙한 잠언들보다 흥미로운 잠언이 되어 독자의 사유를 자극한다.
가령 “우리는 서로에게 멀어지면서 사라지고 사라지면서 변함없는 크기를 가진다”라는 구절은 만남과 이별 그리고 이별 후의 덤덤한 삶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또 “감각만큼 미지의 세계도 없지만 3차원만큼 명확한 근육도 없다”라는 구절은 우리의 감각이 느끼는 세상은 늘 미심쩍지만 그러나 그것이 관여하는 3차원의 이 현실은 너무나 확실하다는 인식을 산뜻하게 밝혀놓는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지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 체 고향에 있는 내 방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간다”에서는 사소한 일상적 삶의 의미에 갇혀 살면서 보다 큰 삶의 근원적 의미가 있음을 망각하고 있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김언의 시에는 현실과 환상 그리고 직관과 이성이 행복하게 결합되어 있다.
심사위원 오생근·이시영·김혜순·이남호·송찬호
“아는 길에서 길 잃게 만드는 그런 시를 쓰고 싶습니다”
올해 미당문학상 최종심 심사는 어느 해보다 격렬했다. 심사위원들의 시론(詩論)과 시론이 격돌했다. 거칠게 구분하면, 대상(세계)과 시적 자아의 일치를 꾀하는 전통 서정시와 둘 사이의 균열에 주목하는 모더니즘으로 진영이 나뉘었다. 어느 한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팽팽한 대립이었지만 젊은 시인 김언(36)씨가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뜻밖이다. 그가 두 달 전 펴낸 세 번째 시집 『소설을 쓰자』에 대한 평론가 신형철의 다소 과장된 해설, 즉 “(그의 시를) 하루 세 편 이상 읽을 경우 머리가 폭발할 위험이 있다”는 ‘경고’처럼 김씨의 시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김씨 앞에서 시가 어렵다는 내색을 하면 안 된다. 김씨는 1998년 부산의 시 계간지 ‘시와 사상’을 통해 등단했다. 이달 초 당선 인터뷰에서 김씨는 대뜸 “뜻밖이다. 한동안 무척 외로웠다. (인정받기를)체념했었다”고 말했다. “지방 출신 시인이 겪는 차별은 상상 이상이어서 미당문학상을 받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로 여겼다”는 것이다.
김씨는 아무도 자신의 시 세계를 알아주지 않는 울분을 산문을 통해 풀어왔나 보다. 그의 시는 감정의 물기 없이 담담하지만 산문은 과격하다. 계간 문예지 ‘문학동네’ 가을호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난해시는 비평가가 제 안목을 벗어나는 시에 가하는 가장 손쉬운 복수”라고 일갈했다. 비평가들, 잘 모르면 난해시란 딱지 붙이고 품위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려운 기색 없이 잠자코 그의 시 설명을 듣는 게 맞다.
김씨는 “시는 뭔가 변화시켜 후대에 물려줘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미술사학자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열심히 읽은 탓이다. 그 책에서 김씨가 건진 한 문장은 “예술사란 결국 예술이 아니었던 것이 예술이 되어가고, 예술이었던 것이 예술이 아닌 것이 되어가는 역사”라는 것이다.
김씨는 예술 대신 시를 집어넣었다. 그 결과 “부모님 공경이나 자연보호처럼 자명한 내용을 얘기하는데 굳이 시가 나설 필요 있나. 당연하고 잘 아는 길에서 새삼 길 잃게 만드는, 그런 시를 쓰고 싶다”는 입장을 얻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 김씨가 채택한 전략은 스스로 개발한 일종의 생각 틀인 ‘사고모형’을 활용하는 것이다.
미당문학상을 안긴 후보작 29편과 시집 『소설을 쓰자』를 관통하는 사고모형은, 인간의 시선에 오류가 없다는 전제 하에 사건을 관찰하는 상식을 뒤집는 것이다. 오히려 사건이 고정돼 있고 인간이 종잡을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다. 그런 인간의 불완전성을 김씨는 추상적 진실을 추구하는 기하학에서도 읽는다. 기하학적 진실 중 하나는, 중심에서 똑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로 표면이 이루어진 이상적인 구(球)는 이론적으로만 존재할 뿐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서 두 번째 행의 “우리(인간)는 구”라는 구절이 나왔다.
마찬가지로 당선작의 나머지 행들도 곱씹어 봐야 하는 성찰을 담고 있다.
김씨는 그러나 “나에게 시는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반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이들의 의미 없는 말놀이처럼, 단어의 이상한 조합과 배열이 연출하는 생경한 세계를 즐겨보라는 당부다.
심사위원들은 김씨를 “언어 탐구라는 시적 모험에 나선 개성적 시인”이라고 평했다. 그러니 말놀이를 대하는 약간의 가벼움과 앞서 언급한 팁을 참고 삼아 김씨의 시편을 더듬어 보시라. 요즘 한국시의 가장 이상한 골짜기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런 독자가 하나 둘 생겨날 때 김씨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김씨는 미당문학상 수상으로 이미 상당한 위안을 얻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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