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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과 돌멩이와 한낮 / 신춘희

 


눈사람 한쪽 눈이 삐뚤게 붙어 있다
돌멩이 하나 머금었다

지금 조금씩 녹고 있는데
눈두덩이가 시릴 만큼 너를 오래 붙잡고 싶어
미안하지만 나는 점점 온기를 갖고
안타깝지만 너는 점점 부피를 줄이고
한동안 우린 밀착된 결빙으로 중력을 버티지
눈송이들 모여 숨겨둔 방
이곳은 해의 꼬리가 닿지 않아 심장을 두기 좋지
두근대는 돌멩이가 감정이라면
겨울은 안전한 밀실이야
사람들은 그저 눈빛을 얹어주거나
손끝으로 훑어볼 뿐
녹아내려야 하는 운명엔 관심이 없지
내가 너를 지키는 방법은
구름을 불러 모으는 일
눈이 자꾸 짓물러지고 있어
눈 속에 갇힌 마음이 죄다 흘러내리고 있어
우리가 견뎌야 했던 것들을 생각해
처음 눈덩이 궁글렸을 때의 설렘 같은 거
아이들 모두 돌아간 뒤 입꼬리를 움직여본 거
별들이 싱싱해서 우리는 하나였던 거야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한낮이야
돌멩이와 눈덩이가 분별되어야 하는 시간이야
마지막 냉기가 사라지면
너는 나를 놓아줄 테지
그때까지 나는 너의 공중이 될 거야
머리가 기울고 있어
몸에 금이 가고 있어
물의 장례가 시작되고 있어

툭, 돌멩이 하나 그렁그렁 쏟아져 내린다


 

 

 

[당선소감] 봄같은 소식…늦게 핀 꽃 늦게 질 것

뜻밖에 봄이 찾아왔다. 당선 소식을 듣고 다리에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겨울과 봄 사이, 차가운 얼음 속에 있던 노란 복수초가 내 가슴에서 활짝 꽃을 피웠다.

눈 녹은 물인지, 눈물인지 몸 밖으로 흘러내렸다.

시의 씨앗을 뿌려놓고 한참을 기다렸다. 얼마 전에 다녀온 설악산 공룡능선의 날카로운 봉우리들, 공룡의 등을 내려올 때도 시를 생각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기록할 힘을 길러준 열정이 내 안에도 있었다.

어느 날은 생의 에너지를 가득 채워주기도 하고, 어느 날은 시가 사라져 눈앞이 캄캄할 때도 있었다.

늘 허기가 졌다. 그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준 마경덕 선생님, 윤성택 선생님, 하린 선생님, 박지웅 선생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시의 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님과 경상일보 관계자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문우들과 친구들 나를 믿어준 가족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

늦게 핀 꽃은 늦게 질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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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예술의 완성 향한 치열성 확인 반가워

위험하고 슬픈 시대, 고립과 폐쇄의 시간을 밀치고 희망처럼 피어날 새로운 언어를 기다리며 예심을 통과한 응모작들을 깊이 읽었다. 언어에 대한 탐색과 예술의 완성을 향한 치열성을 확인할 수 있어 매우 반가웠다.

행과 연을 무시한 산문성의 경향, 여백의 문제에 고민해 본적이 없는 소통 불가의 작품은 줄었지만 외래어에 대한 무자각과 상상력 보다는 사소한 현실과 현상에 대한 묘사에 치우친 경향은 여전했다.

오늘날 지구를 위협하는 생태 문제로서 썩지 않는 플라스틱의 현실을 주제로 한 ‘5초 5분 500년’, 오래된 소나무를 통하여 역사와 인간의 발자국을 읽는 ‘나무 실록’과 함께 응모한 ‘눈사람과 돌멩이와 한낮’, 혼자가 시대의 모습이 된 오늘날의 자화상 같은 ‘고독에 물리지 않는 방법을 따라함’과 감각적인 포착이 돋보이는 ‘가베라에 대한 경배’와 ‘천사를 만나는 날은 오늘’이 선자의 손에 오래 남았다. 숙고 끝에 ‘눈사람과 돌멩이와 한낮’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나무 실록’이 완성도는 높았지만 신인답지 않은 사유와 안정된 진술이 오히려 긴장을 줄이고 있었다.

신춘문예란 새해 아침 가장 신선하고 새로운 언어가 등 푸른 용처럼 뛰어 오르는 것이 아닐까. 등용문(登龍門)이라는 말도 다시 떠올려 보게 된다. 한국 시단의 강한 수압(水壓)을 잘 견디어 부디 좋은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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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 변영현 

 

 

파란 동그라미를 그려요

당신은 호수인 줄 알고 뛰어들어요

 

팔랑팔랑 헤엄쳐요

바다처럼 넓고 깊어요 파란 동그라미

속의 당신이 파랗게 물들고

나를 찾아봐, 하는 목소리에

물이 뚝뚝 떨어져요

안 보여요 안 보인다니까요

여기 있어, 하는 목소리에

숨이 헉헉 차오르네요

 

파란 동그라미 위에 파란색을 더해요

내게는 다른 색이 없거든요

조금 다른 파란색이면 당신을 찾을지도 몰라요

몰랐어요 더 깊어질 뿐이라는 걸

바닥을 찾지 못할 거예요

하늘을 찾지 못할 거예요

파란 지구별에서 나갈 수 없듯

당신은 거기서 허우적거리겠죠

 

파란 동그라미 파란 동그라미

블루칩 같기도 하고 버튼 같기도 해요

속는 셈 치고 한번 눌러 볼까요?

잭팟이 터질까요, 당신이 튀어 오를까요?

하나, 둘, 셋!

아, 물감이 덜 말랐네요

파랗게 질린 손바닥 좀 보세요

당신이 묻어 있는 건 아니겠지요

 

파란 동그라미를 그려요

파랑이 파르르 떨고 있어요

 

 

 

 

[당선소감] 나홀로 중얼거림이 시가 되다

‘중얼거리는 사람이다’ 라고 나를 불러본다. 어릴 때 간혹 아버지가 문을 벌컥 열고 “도대체 누구랑 얘기하는 거니?”라며 방을 둘러보셨다.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방에서도 길에서도 중얼거렸다. 그것이 이상하게 보인다는 걸 안 이후 소리 내지 않고 중얼거린다. 이상의 시 ‘꽃나무’에는 한 꽃나무를 위해 그러는 것처럼 달아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사람처럼 길거리에서 싸우는 사람을 위해, 죽은 사람을 위해, 길고양이를 위해, 어쩔 수 없는 것들을 위해 중얼거린다. 아무 쓸모없는 것, 그것이 나를 숨 쉬게 한다. 그 중얼거림이 백지를 채우고, 채워진 백지가 시가 되기까지 몇 년이 지났다.

오늘 당선 전화가 왔다. 기분이 이상하다. 누군가 내 목소리를 똑똑히 들은 것이다. 혼자인 줄 알고 중얼거리던 그 방에 이제 누가 앉아 있다.

중얼거림이 시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장하빈 선생님, 변희수 선생님, 이솔희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친구 진희와 다락헌 시인학교, 낭구동인 문우들께도 고마운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전할 수 있도록, 내 목소리에 응답해 주신 심사위원께도 감사드린다. 내 마음의 시인, 이제는 여기 없는 작은언니에게 이 상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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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말놀이의 능수능란함 뚜렷해

신춘문예 작품들을 심사하면서, 응모작들이 대부분 심리적으로 너무 위축되어 있는 게 아닌가, 그 원인이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가지는 비대면의 우울과 바이러스에 의한 공포의 고통스러운 그늘일지도 모른다. 또는 점점 더 팍팍하게 조여드는 삶과 환경의 압박감 때문일까? 심한 자기류의 언어 방기나 과도한 언어굴절이라는 한동안 유행해온 젊은 세대들의 언어 구사 특징이 많이 가신 가운데, 과거와는 다른 삶의 그늘들이 젊은 문학도들을 사로잡고 있는 게 너무 무거운 듯 여겨져 안타깝다는 생각을 한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20명의 100편 가량. 그 중 마지막까지 남아서 겨뤘던 작품들은 ‘손’ ‘본색’ ‘부초들의 잠’ ‘중심, 중심들’ ‘블루’ 다섯 편. 모두 나름의 독특한 빛깔들을 띠면서 개성적인 언어구사를 능숙한 솜씨로 보여, 그 중 한 편을 뽑는 게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어차피 한 사람 만의 손을 들어줘야 할 수 밖에 없는 것. 마지막으로 집어든 게 ‘블루’였다.

‘블루’는 푸른색의 인식을 통해 사랑을 확인한다. 언어의 반복과 리듬, 그리고 유머감각을 통해 사랑과 자기 인식의 우울과 명랑을 경쾌한 어조로 꿰어나가는 말놀이의 능수능란함이 돋보인다. 구성도 무난하고 주제를 끌고나가는 언어구사의 힘도 예사롭지 않다. 무거운 주제들이 많은 응모작들 가운데서 이 작품이 의외의 경쾌함으로 시선을 끌었다고 여겨진다.

새롭게 출발하는 수상자의 경쾌한 발걸음에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이하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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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름 / 이정희

 

 

늘그막의 아버지

벗어놓은 양말이며 옷가지에서

거름냄새가 났다

그건 아버지가 비로소

아버지를 포기하는 냄새였을까

그 옛날 장화를 벗을 때나

땀에 전 수건을 받아들 때 나던

그 기세등등한 냄새에서

초록을 버린 풀들이 막 거름으로

이름을 바꿀 때의 냄새가 났다

 

아버지가 앙상한 등짝으로 부려놓은 풀 더미에 가축 오줌과 똥을 잘 섞는다 각자의 냄새를 지켜내겠다고 서슬 퍼렇게 날뛰던 것들이 오래 지켜온 습성을 버리기 시작한다 저마다의 냄새로 진동하던 것들이 고집을 버려 삭아지고 토해내며 거름으로 될 때의 냄새가 난다 검은 흙빛 미지근한 열감으로 모든 냄새들이 포기하여 뭉쳐진 거름

 

들녘을 키우며

아낌없이 주는 거름

깜빡 졸고 있는 그 틈에도

아버지의 밭은 성성했다

 

러닝셔츠 구멍 사이로

기력 다 빠져나간 아버지의 밭에

폭 삭은 거름 한 짐 뿌리고 싶은데

지금쯤 아버지는

어떤 냄새로 접어들었을까

 

 

 

 

[당선소감] 러닝셔츠 입고 일하시던 아버지 떠올려

 

객지를 떠돌다 고향 신작로에 올라서면 걸음이 빨라집니다. 푸근한 냄새를 따라가면 외양간 옆에 거름 밭이 있었습니다. 짚과 풀 더미 가축의 배설물, 개숫물까지 섞이고, 썩어서 뭉쳐진 전혀 다른 이름으로 태어나는 거름. 자신을 버려 온전히 썩지 않으면 거름이 될 수 없지요.

나무들은 몸집을 불리기 위해 생살이 툭툭 터지는 아픔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12월 추위에도 개나리가 꽃눈을 터뜨리고 나직한 음악 같은 꽃들은 피어납니다. 아무도 계절을 앞서갔다고 투정 부리지 않습니다. 거름은 꽃을 피우려는 어떤 것도 선별하지 않습니다. 밑거름 웃거름은 새로운 발상을 끊임없이 재촉합니다.

구멍 난 러닝셔츠를 입고 바람과 햇살, 비를 끌어다 뒤적이기를 멈추지 않던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미세먼지 가득한 하늘이 도드라지고 마른 가지가 침묵의 기다림으로 들어간 날에 당선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한참이나 부족한 시를 영광의 자리에 올려주신 경상일보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긍정의 에너지로 격려해주던 남편과 열심히 응원해준 사랑하는 딸 지은 지수 지호, 발상의 전환을 일깨워주신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시의 지평을 열어주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교수님들과 문우님들, 이종섶 선생님, 네클 고맙고 사랑합니다.

 

 

 

 

 

#풀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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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詩風 지양한 명징하면서도 깊은 울림의 시

 

응모작의 수준이 아주 높다는데 만족감을 느끼고, 예심에 올라온 30편 중에 기억에 떠오른 두 편을 골랐다. 그리고 나머지 작품들을 두고 어떤 기준과 방침을 내 나름대로 세워 여러번 정독했다. 훌륭한 시인들의 요람인 신춘문예가 오랜 연륜을 거치면서 부지불식간에 신춘문예라는 시풍이 형성되었다. 새롭고 참신하고 실험적이라는 미명 아래 다다이즘(Dadaism)의 시, 시적 변용이 지나쳐 모호하거나 난센스적인 시, 꺾고 비틀어 그로테스크한 시들이 얼굴에 분칠을 하고 나서게 되었다.

숙고 끝에 가려낸 ‘6’과 ‘거름’은 참신하고 실험적인 시와 명징하면서도 울림이 큰 시의 대결이었다.

‘거름’은 이기심과 자기주장이 팽배한 사회상을 표출하여 서로 자신을 포기(버림)함으로써 소통하고 상생하는 이치를 사물에서 깨닫게 하는 깨달음의 시이다. 특히 가족의 유대가 무너져 가고 있는 이 시대에 가족의 거름이 되는 숭고한 아버지상을 잘 부각하였다.

시인은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에 길을 열어주는 언어의 전달자(메신저)가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독창적이고 권위있는 경상일보 신춘문예에 걸맞는 당선자 ‘거름’의 시인을 새해와 함께 시 애호가들 앞에 내 보낸다. 부디 우리 시단의 ‘거름’이 되길 빌어 본다.

심사위원 박종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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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 김길전

 

 

파라킨사스 너는 뼛속까지 시린 밤에도 쇄골을 드러낸 가난한 여인의 입술에 걸린 광고
가진 것이 그저 빨강 밖에 없네요

추운 것들은 늘 번지려는 색 뿐이에요

낡은 예식장이 생각과 모자를 바꿔 장례식장이 되자 눈이 많이 내리고 대기하던 사람들이 죽었어요
간밤
그 신장개업의 담벼락에 어지럽게 나붙은 광고
생고무 신발 재고 정리 새 신발 신고 가세요

추운 것들은 늘 발이 젖어요

몸 전체로 광고인 갈치는
나무 상자 위 값이 치워진 나부처럼 누웠어요
그 은빛 몸을 쓸어 간을 보는 시선에도 동그랗게 뜬 눈

추운 것들은 늘 눈이 커져요

광고는 붉은 과장
광고는 춥고 따스함의 의도적 대비
광고는 움츠리는 불빛의 촉수

추운 것들은 언제나 끝에 있어요

오늘 파라킨사스는 눈 속에서도 드러낸 가슴이 너무 붉고
몇 낱알 쌀을 물고 누운 자는 신발이 없어요

단지 겨울이라는 그 이유만으로 모두 돌아섰네요

타인의 추위를 수긍하지 않는 이들의 등 뒤로
드러냄이 참 스산한데요


 

 

검은머리물떼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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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별은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저명한 문인의 상징주의 시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분에게 물었습니다. “문학의 현실참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글을 쓰십시오. 그 것이 문학을 하는 사람의 가장 큰 현실참여입니다.” 그 분은 신춘문예에 대해 “심의의 가장 큰 관점은 발전성이다. 지금이 아닌, 그 후의 그이를 보는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참 오랫동안 별을 헤이며 살았습니다. 여름에 먼 섬에 가서 밤중에 몽돌 해변에 파도 소리를 들으며 누워있는데 마치 꼬마전구가 터지듯 별 하나가 꽈리처럼 부풀더니 반짝 빛을 발하고는 사라졌습니다. 그것이 별의 탄생인지 종말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제가 그것을 만나기 위해 어떤 불가해한 시공을 거슬러 거기 있다는 생각, 또 별이 그 조우를 위하여 그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에 미치자 등줄기에 쭉 한기가 훑고 내려갔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경험이었습니다. 경상일보의 당선 소식을 들은 순간 다시 그 전율을 느꼈습니다.

별은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데 예순다섯 해를 보냈습니다. 이제 저의 그 별을 놓지 않으렵니다.

 

 

 

 

애인을 만드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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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현대시 갖출 언어의 긴장·유머등 고루 담아


예심을 거친 31명 145편의 시를 읽었다. ‘울거미’는 노동을 잃고 시골로 내려가는 동료에 대한 시큰한 애정을 담은 시이지만 감정이 앞선 나머지 서사가 결을 잃었다. 감정은 감출수록 행간 속에서 울림을 갖는다. ‘길의 방정식’은 언어의 긴장을 유지하다가 결국은 단추 구멍이라는 상식의 확인에 머물고 만 점이 아쉬웠다. 그러나 맨마지막 ‘새 발가락이 따뜻하게 만져졌다’라는 비상이 눈부셨다. 시란 평범한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발상의 대담한 전환이 이루어졌을 때 새로운 단계를 향해 비약한다.

 

‘볼펜 똥’은 발상과 언어의 서술이 재미있으며 간간이 유머도 구사하여 읽는 맛을 주는 것이 장점이나 너무 지루하다. 하고자 하는 얘기를 과감하게 생략할 줄 알아야 시적 발언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기 바란다.

 

당선작 ‘광고’는 현대시가 갖추어야 할 언어의 긴장과 냉담, 유머와 생략과 그로테스크까지 갖추었으며 무엇보다 강렬한 붉은색 꽃인 파라킨사스를 통해 광고로 대변되는 현대의 으스스한 풍경을 매력적인 언어 서술로 이끈 솜씨가 돋보인 작품이다. 이 시인의 언어 감각과 정동(affect)은 ‘추운 것들은 늘 번지려는 색뿐이에요’라는 구절이나 ‘광고는 붉은 과장/…/광고는 움츠리는 불빛의 촉수’라는 날카로운 대비 속에 한껏 빛을 발하고 있다. 뛰어난 신인을 새해 새 아침에 선보이는 선자의 기쁨이 크다.

 

- 심사위원 : 이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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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러코스트 / 이온정

 

 

놀이 공원엔 비명이 꽃핍니다

도대체 어떤 믿음이 저렇게

비명을 질러대는 걸까요

믿음은 힘이 세고

구심력과 원심력에 매달려

아찔한 생을 소진하고 있는 걸까요?

밖으로 튀어 나갈 수 없는 이 놀이는 무섭습니다

현기증을 다독이며 회전하는

공중의 수를 서서히 줄이기로 합니다

훌라후프처럼 돌리고 돌리던

저녁의 둘레를 줄이면

둥근 공포는 야광으로 빛날까요

노랗게 질릴수록 안전 운행을 믿지만

믿어서 더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힘이 센 믿음에서 이탈하고 싶지만

굴곡의 운행은 중도하차를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존재의 끈을 놓지 않고

기어이 튕겨나간 방식으로 지킨 일생이라면

저렇게 즐거워도 됩니다

멀미를 추스르며

현란한 굴레를 휘돌리던 바퀴들의 공중

즐겁던 아비규환이 조용합니다

어떤 절정도 저렇게

가볍게 내려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놀이기구 밑엔 비명들이 즐비하고

비명은 즐거움과 고통의 두 가지 방식입니다

구심력으로 밀고 원심력으로 배신당하는

이 아찔한 일생의 놀이를

아이들은 일찍부터 배우려 합니다

 

 

 

 

[당선소감] 時의 끈 잡고 고마운 이들에게 빚 갚아갈 것

 

고백하자면 시를 쓰면서 알게 된 사물의 의인성이 두려웠다. 실상과 허상이 손잡고 조곤조곤 말을 걸어올 때 나의 오래된 종교는 슬쩍 나를 눈감아주기도 했다. 늘 그랬듯이 신춘으로 보낸 시들의 안부가 틈틈 궁금하긴 했지만 잊은 듯 일상에 바빴다.

그리고 낯선 부재중 번호. 믿은 건 아니었지만 어쩌면 믿음보다 더 힘이 셀 것 같은 시는 강산이 두 번 바뀌고도 남은 굴곡진 날들의 중도하차를 결국 용납하지 않았다. 고맙고 또 고마웠다.

아주 오래 전 딱 이맘 때, 유년의 친구를 만났었다

“나는 돈을 열심히 벌 터이니 너는 시를 열심히 써라.”

산골의 차가운 눈밭에서 내민 하얀 봉투엔 볼펜 사서 쓰라는 따뜻한 정이 몇 장 겹쳐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참 많은 이들에게 빚을 졌다. 목적지에 이르려면 어지럽고 멀미나는 롤러코스트를 얼마나 더 타야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일생 시의 끈을 잡고 즐겁게 빚을 갚아 나가리라.

일일이 호명할 수 없이 많은 정겨운 이름들과 시를 쓰면서 왜 시인이라 부르지 말라 하냐고 묻던 나의 보물 1호 열이, 늦었단 생각 들지 않도록 축제의 장 앞자리로 당겨주신 경상일보와 김재홍, 이영주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홈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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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로 말하기 방법 체득해 보여준 작품

예심을 거친 74편의 시를 공들여 읽었다. 단단한 구조를 이뤄내고 있는 작품들도 있었지만 아직 시의 어법을 찾지 못한 작품들도 많았다. 시는 독창적인 말하기 방법의 하나다. 그냥 떠오르는 심회를 글로 쓰는 말하기가 아니라 지극히 절실한 직관이나 영감을 잘 짜여진 언어로 구조화해내는 특이한 말하기의 방법이다. 응모작들을 읽으면서 느낀 소회 중 다음의 두 가지를 지적해 두고자 한다.

우선, 시는 절실한 표현 의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사무치는 긴장을 지닌 시적 제재를 찾았을 때를 기다려 글을 써야 한다. 시의 표현 의도가 중층적 암유나 의도적 모호성을 추구한 것일 때에도, 독자가 깊은 혜안으로 접근해 갔을 때 금강석처럼 견고하면서도 빛나는 광휘의 표현 의도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시가 좋은 시다.

그리고 응모작들이 너무 헤프게 말들을 쓰고 있었다. 정제되지 않은 말을 쓰다 보니 시의 길이가 지나치게 길어진 작품들이 많았다. 시의 길이가 길어질 수도 있지만 꼭 필요한 말들의 결집이어야 하는 것이다. 시는 무잡한 상념의 나열이나 욕구불만의 배설물이어서도 안 된다.

‘롤러코스트’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롤러코스트’의 작자는 시로 말하기의 방법을 성실히 체득해 보여줬다.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이 당면한 위난의 상황을 ‘롤러코스트’의 ‘원심력’과 ‘구심력’의 논리를 차용해 보여줬다. ‘롤러코스트’는 궤도열차라고 부르는 놀이 기구다. ‘청룡열차’나 ‘은하열차’라고도 부르는 그것이다. 고속으로 달리는 열차가 휘돌면서도, 거꾸로 매달린 사람이 떨어지거나 튕겨나가지 않는 것은 밖으로 튕겨나가려는 ‘원심력’이나 중심으로 빨려 들어오려는 ‘구심력’ 때문이다. ‘롤러코스트’에 탑승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없이 궤도열차의 운행 방식에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다. ‘롤러코스트’의 시인은 놀이기구에 탑승한 채 자신의 자유의지를 던져버리고 살아야하는 현대인의 난망한 상황을 보여주었다. 쉼 없이 노력해서 훌륭한 시인으로 대성하기를 바란다.

마지막까지 심사자의 눈길을 끌었던 응모작 중 ‘얼룩말 미싱’ ‘밑돌’ 등이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얼룩말 미싱’은 경쾌하고 선연한 이미지를 구사할 수 있었지만 불필요한 부연이 눈에 띄었으며, ‘밑돌’은 착상의 새로움이 돋보였으나 공감을 불러내는 힘이 약했다.

심사위원 이건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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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를 격려하며 / 김예진

 

 

외벽에 녹슨 고래 몇 마리

물 바깥으로 나와 숨을 쉰 흔적

그 숨을 찾는 심장 소리가 손끝에서 떨렸다

 

혼신을 다해 호기롭게 살았을

먼 우주를 되짚어도 더 이상의 숨은 없다

 

때때로 바람이었다가 절벽이었다가

수세기의 흔적이

수 천 년 거리에서

천변 반구대를 서성였을

 

내세의 염원과 사랑을 갈구하는 수단이 손아귀 힘이었다면

 

피눈물로 쪼아서 새긴 그 기원이

울음에 갇혀 해답을 기다리는 동안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지는 늙은 고래가 볼모로 잡혀있다

녹슨 세월이 한데 엉겨 붙어서

 

아직 물을 건너지 못한 배고픔과 서러움

매질과 학대와 손가락질

슬픈 작살에 핏물이 번지고

뼈와 살이 바람으로 흩어지고

 

다른 행성에 잘못 온 것처럼

가압류 딱지가 붙어버린

고래의 적막은 한겨울처럼 쓸쓸하고

세상의 기억은 겨울 끝에 머물러 있다

 

 

 

 

 

[당선소감] 멈추지 않고 나의 시를 위해 새 길을 내겠다

 

고래를 만나러 가던 날은 햇살이 눈부셨다. 이르게 핀 꽃들은 이미 지고 있는데 느리게 피는 꽃들은 이파리들 속에서 작은 입술을 벙긋거렸다.

 

어디로 가든 길은 가고 싶은 곳으로 향해 있는 걸까. 선사시대는 대곡천을 열어 나를 받아들였고 바위 속에서 나온 고래는 한참을 나와 어울렸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불을 지피는 사람들은 언제나 치열하고, 뜨거운 꿈을 꾸는 자들이다. 멈추지 않는 사람들만이 바다를 만나고 풍랑에도 거뜬한 고래를 만날 수 있다. 몇 번이나 서로 다른 꽃들이 피고 지고 바람이 싸늘하던 날, 환청처럼 당선소식을 받았다. 먹먹했다. 다시 고래를 만나러 가야지. 이젠 더 이상 서럽거나 외롭지 않게 나와 내 고래와 내 시를 위해 암벽에도 새 길을 만들어야지.

 

부족한 제 시에 힘을 실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경상일보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한결같은 응원으로 곁을 지켜준 사랑하는 가족과 부산시 문학 식구들과 기쁨을 같이합니다.

 

내 시의 시작이며 바다인 현대문예 창작교실에서 한 곳을 바라보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밀어주고 끌어주는 믿음직한 도반들, 그 중심에서 고래와의 소통을 가르쳐 주신 권애숙 선생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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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세상을 보는 따스한 안목이 마음을 울려

 

예심을 통과한 다섯 분의 작품 20편을 읽었습니다. 모두가 짱짱한 필력으로 쓰여진 역작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읽는 내내 조마조마하고 불편한 마음이 없지 않았고 자꾸만 뒤가 돌아보아 졌습니다. 이 작품들보다 더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을까 싶어서였습니다. 결국은 바로 이 작품이다, 하고 눈에 썩 들어오는 작품이 없었다는 이야깁니다.

 

모든 작품들의 길이가 너무 길고 요설이 많은 것이 우선 불만이었습니다. 그리고 도무지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 작가의 의도가 잘 잡히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동인데 이쪽에서 억지로 감동을 좀 해보려고 그래도 감동이란 것이 잘 되지 않는 것은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선자의 손에 끝까지 남은 작품은 142번의 넙치의 잠이란 작품과 51번의 고래를 격려하며란 두 작품이었습니다. 두 작품 역시 길이가 만만치 않게 길었고 요설이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두 작품을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고래를 격려하며란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기로 했습니다.

 

두 작품 모두 해양 세계가 배경이고 자연사적 내용을 담고 있어 이미지가 신선하고, 매우 흥미로웠지만 그래도 마음의 울림이 가는 쪽은 고래를 격려하며였습니다. 사물과 세상을 보는 안목이 안정되어 있고 따스하다는 점도 선자의 마음을 얻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좋은 시를 많이 남겨 민족의 언어에 큰 유산을 보태시기 바랍니다.

 

- 심사위원 : 나태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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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가를 어루만지다 / 양진영

 

 

허물어지는 것은 새것을 위한 눈부신 산화

나는 철거될 농가의 마룻바닥에 가만 귀 기울인다

그들이 나눈 말이 옹이구멍에서 바스락대고

안 보았어도 떠오르는 정경이 살포시 열린다

 

문풍지에 꽃핀 청태靑苔는 그들의 회한 혹은 눈물의 자국

뒤틀린 문틀만큼 가족이 부서지는 아픔도 맛보았으리라

거북 등처럼 갈라진 목재에 왜,

산골에서 밭을 일구고 사는 노모의 손등이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인연의 무결이 배어 있을까

 

헐리는 것은 거룩하다 그것은 촛농과 마찬가지

스스로를 태워 주위를 밝히고 남은 잔해이므로

뜨락에 소나무는 송홧가루를 날려 금빛 보료를

까는데

새집을 짓는다는 설렘은 어디 가고 나는

누가 잠든 것 같아서

누가 숨어서 부르는 것 같아서 자꾸만

방바닥을 어루만진다

 

평생 주인을 덥히며 보낸 폐가의 일생은

불이었다

나는 안방에 누워 그들의 온기를 느낀다

코끝을 간질이는, 낯익은 엄마 냄새

햇볕을 모아 따스함을 지피는 구들장

그 열기로 앞뜰에 꽃이 피고 있다

 

 

 

 

수상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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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묵은내 나는 시에 주눅 든 날 어루만져 줘 감사

 

가끔 내 시를 들여다본다. 묵은 냄새가 난다. 수백 년간 궤에 담겨 있던 도자기 같은. 이 골동품의 가치는 아는 분만 알 터. 남들이 낡았다고 외면하는 시에 낙점해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늘 서정빛을 띄는 나의 시심에 한숨 짓는다. 이른바 미래파적인 시, 현란하고 실험적인 산문시를 보면 주눅이 들 때가 많다. 내 시는 고풍스러운 것인가, 촌스러운 것인가? 자주 반문해 본다.

 

당선 소식은 움츠러든 나를, 내 시의 제목처럼 어루만져 준다.

 

나는 시류를 따르지 않고 나만의 시를, 아래 같은 시를 쓰겠다고 다짐한다.

 

한글 맞춤법이 정확한 시, 인문학적 소양이 배어나는 시, 미학과 철학이 겸비 된 시, 당대의 문제를 직시하는 시, 사회적 성찰이 깃든 시, 그래서 사유가 깊은 시.

 

누군가의 삶이 내재된 시, 타인을 배려한 시, 독자와 소통하는 시, 언어를 추구하지 않는 시, 화려함과 속됨에 기대지 않는 시, 무목적적인 시, 그래서 살아 있는 시.

 

 

 

 

제3회 김만중문학상 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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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능숙이 흠일 정도로 시적 구조가 탄탄한 작품

 

예심을 거쳐 심사자에게 우편으로 배달된 시들은 26편이었다. 시적 수준이 모두 만만치 않았다. 다 무엇인가가 있었으나 또 무엇인가, 한 가지 부족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너무 많이 말하고 있다거나, 혹은 반대로 너무 말하지 않아 필연성이 결핍된 작위적인 시를 보여주고 있다거나, 그럼으로써 진정성과 절규성이 결여되었다거나 했다.

 

몇 차례의 독해를 거쳐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다음 네 편이었다. ‘빙폭 외’ ‘물레돌리는 부추밭 외’ ‘낙서를 찾아가는 시간 외’ ‘폐가를 어루만지다 외’.

 

마지막으로 남은 시는 폐가를 어루만지다 외였다. 이 시는 너무 능숙한 것이 흠일 정도로 시적 구조가 탄탄하게 직조돼 있을 뿐 아니라 그 표현의 능숙함, 그에 더불어 진정성도 느껴지게 하며 그 절규도 강하게 전해왔다. 함께 응모한 시들의 수준도 고르다고 생각됐다. 따라서 폐가를 어루만지다 외를 당선작으로 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시인에게 걱정되는 것은 앞에 언급한 시적 재능들 때문에 너무 이른 정형화에 이르지 않을까하는 것이다. 시의 정형화란 상투화이며, 화석화이다. 그점을 염두에 두면서 계속 정진한다면 뛰어난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한국 현대시의 별이 되기를.

 

- 심사위원 : 강은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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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나무 / 정지윤

 

 

그들의 발소리는 너무 조용하여

먼 훗날 겨우 발견될 뿐,

아르볼 께 까미나(arbol que camina)

태양을 찾아가는 나무의 뿌리는

아마존의 고대 지도를 기억한다

끝과 시작이 맞닿은 유랑

기억을 더듬는 긴 촉수의 뿌리들은

수십 개월 느리게 이동한다

걷는 나무에게 숲은 한낮 궤도일 뿐

달과 달 사이로 시간이 흐른 뒤

숲은 파헤쳐졌다

나무들은 뿌리 앞에서 뒤틀림을 멈춘다

태양을 훔치는 뿌리들은

제 뿌리를 등 뒤에 남기며 다시 앞을 향해 걷는다

숲을 향해 숲이 되기 위해 걷는 일

아마존을 느린 걸음으로 가는 아마존의 나무들

언젠가 숲이 초원에 이르는 날

절룩거리며 걸어 나와

제 그림자와 뒤꿈치에 박힌 상처들을 전할 것이다

나는 잠시 멈춰선 채

먼지 같은 시간을 바라다본다

고통은 크기만큼 가벼워지는 것이어서 깔깔거리며

저마다 제 이름을 깊은 곳으로 불러들인다

아르볼 께 까미나(arbol que camina)

 

 

 

 

 

[당선소감] 직관·초월로 빛나는 언어의 집따뜻한 시 쓸 터

 

시가 오는 길을 늘 열어두고 기다릴 겁니다.

 

알 수 없는 이끌림의 자리에 시가 있었습니다.

 

앎으로 가득한 세계를 넘어 직관과 초월로 빛나는 언어의 집으로 이끌어 준 수많은 질문과 질문 끝의 닫힌 문들, 그러나 그 닫힌 문이 곧 열린 공간의 시작임을 이제 압니다.

 

이미지와 의미들과 숱한 상황들을 붙잡고 표현하기보다 그것들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일은 아직 멀지만 이제 조급해하지 않겠습니다.

 

춥고 힘든 계절을 견디고 있는 이들에게 미약하나마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삶의 온기가 느껴지는, 이 산과 저 산의 봉우리를 깊게 울고 가는 시를 쓰겠습니다.

 

넓고 깊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나침반이 되어 주신 이영진 선생님 고맙습니다.

 

귀한 자리에 설 수 있게 손을 잡아주신 심사위원님과 경상일보에 깊이 감사드리며 정진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참치캔 의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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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명징한 이미지로 내면세계 깊이있게 투시

 

응모된 작품 수준이 비슷하여 우열을 가려내기가 힘들었다. 대부분 산문적 요소가 많고, 시가 지녀야 할 함축성이 없으며, 문장이 장황하게 길었다.

 

최종적으로 선자의 관심을 끈 작품은 3편이었다. ‘물의 부스러기’ ‘사파리동네’ ‘걸어가는 나무였다. ‘물의 부스러기는 물을 꽃으로 인식하는 대상에 대한 시선은 돋보였으나, 사유의 깊이가 부족하고 평이한 점이 흠이 되었다. ‘사파리동네는 인간의 삶을, 초원에서 먹이를 찾는 동물에 비유한 추상력이 좋았으나, 의인화와 서술적 표현이 지나쳐 산만했다.

 

이에 비하여 걸어가는 나무는 산만하지 않고 간결하며, 내면적 깊이도 있었다. 식물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태양을 찾아가는 나무의 뿌리가 수 십 개월 느리게 이동하는 일월의 섭리나, 숲이 되기까지의 상처와 고통을 감내하는 과정을 무리 없이 전개하고 있다. 특히 대상과 내면의 등가적 유추가 섬세하며, 이미지가 청신하여 신뢰감이 갔다. 신인에게는 자기만의 화법과 개성적 표현력이 있어야 한다. 이해하기 힘들며 장황하고 모호한 시가 많아진 요즈음 한국시단 풍토에, 명징한 이미지로 내면세계를 깊이 있게 투시한 작품은 아주 드물다. ‘걸어가는 나무는 언어가 간결하고, 투명한 이미지가 환기해내는 전이적 상상력을 부여하는 능력을, 중요한 가능성으로 인정하여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당선을 축하한다.

 

- 심사위원 : 권달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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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몽은 서정적이다 / 이원복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린 금붕어를 닮은

항아리를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 잠을 잔다

성대를 다친 소녀들, 더 이상 노래하지 못하는 금붕어들

잠을 잔다

항아리의 주둥이를 배회하는 16분 음표의 음색은

표현할수록 거친 것이어서 누구라도 성대를 다치게 된다

냉정해지자, 탁할수록 냉정해지는 게 필요하다

모두들 잠을 자는 시간, 바람의 음역대는 위험하다

저녁에 지배하는 고요의 폭력성이 고음역대 바람의 성대를 찢고

항아리의 주둥이 부위부터 깨고 있다

물 위를 부유하는 기름의 무지갯빛 닮은 금붕어의 지느러미가

스멀스멀 헤엄치는 항아리 속

성대를 다친 소녀들 입을 벌린 항아리처럼 앉아있다

시간이 필요하다

누구나 시간의 어깨에 기대어 울고 싶어 한다

소녀들이 잃어버린 것은 목소리가 아니라 저항할 수 없는 시간의 암보(暗譜)

소녀들의 등에 지느러미가 생길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항아리 속에서 소녀들이 다친 성대를 회복하고 다시 항아리 밖

거친 바람의 음표를 따를 수 있을 때 까지

누군가 깨져 허물어지는 항아리를 부둥켜안고 울고 있다 거기

거대한 항아리 모습의 외로움 하나 앉아 있다

 

 

 

 

 

[당선소감] 재미삼아 했던 단어놀이, 문 하나를 얻다

 

문득,  문득이라는 단어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중이었다.

 

나는 이른 아침 하릴없이 이 문득이라는 단어를 둘로 쪼개 재미삼아 문()과 득()이라 뜻을 부여하며 나만의 단어놀이로 얼어붙은 머리를 예열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겨울 아침 아직 시린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곧 손바닥이 따뜻해졌다. 들고 있던 휴대전화기의 배터리가 따뜻해졌기 때문이겠지만, 괜찮다.

 

나는 당선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심장에서 뻗어 나온 뜨거운 피가 온몸을 돌아 이 손바닥까지 당도하여 내 손바닥이 금방 따뜻해졌다고 믿으면 그만이니까! 그게 삶이니까! 귓속에서 심장소리가 들렸다.

 

그날 아침 재미삼아 했던 단어놀이. 정말 문() 하나를 얻었다.() 막상 덩그러니 문 앞에 서있으니 낯설고 긴장된다. 그러나 낯설고 긴장된 이 마음으로 다시 시를 쓰기로 다짐해본다.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문득 이렇게 하나의 거대한 문 앞으로 이끌어주신 심사위원 정진규 선생님, 그리고 경상일보사에 감사를 전한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사랑하는 아내 혜원씨, 그리고 소중한 딸 로운이, 아들 루신이, 기도해주시는 모든 분들과 이 기쁨을 나누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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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적 공간속 질서화하는 이미지의 끈 탄력있게 조정

 

30명의 예심 통과 작품 114편을 즐겁게 읽었다. 상당한 수준에 오른 작품들로 수련의 흔적이 역연했다.

 

신춘작품을 읽다 보면 대체로 두 개의 폐해에 직면하기 마련인데 이번 경상일보의 작품들을 읽으면서는 그러한 점들이 깨끗하게 극복되고 있는 징후들을 만날 수 있어 매우 다행스러웠다. 그 두 개의 흐름이란 신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교실 지도의 냄새가 나는 작위적 유형의 흐름과 요즈음 젊은 시인들의 편향된 흐름인 관능적 환상의 자폐적인 몸짓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점들이 극복되어가고 있는 자율적인 모색의 투명한 시편들이 상당수 눈에 뜨이고 있음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의식과 표현의 균형과 질서에 대한 점이다. 사유적인 면과 지적 성찰이 너무 앞서 작위와 경직에 머무르거나 헤픈 정서의 노출로 불필요한 반복과 난삽을 일삼고 있음이 그것이다.

 

이런 면에서 나의 악몽은 서정적이다가 표제가 좀 작위적인 인상이 있었으나, 앞의 작품들보다 투명하고 탄력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금붕어와 항아리와 성대를 다친 소녀들을 하나의 시적 공간 속에 질서화하는 이미지의 을 탄력 있게 조정하고 있었다. 소녀들의 성대를 다치게 한 시간의 상처에 대한 사유와 인식, 그 치유를 향해가는 건강한 포즈도 잃지 않고 있어 믿을 만했다. ‘저녁을 지배하는 고요의 폭력성’ ‘거대한 항아리 모습의 외로움 하나 앉아 있다들의 표현에서는 시인이 지녀야 될 비의적(秘儀的) 시력(視力)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선작으로 선정함에 모자람이 없었다. 축하한다.

 

- 심사위원 : 정진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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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쟁이, 날아오르다 / 최정희

 

 

그녀가 오늘 한쪽 유방을 들어냈어 무거워진 한쪽이 사면처럼 기울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어 기울기를 가진다는 건 양팔저울 한쪽에 슬픔을 더하거나 덜어내는 것

 

가끔 또는 자주 비가 내렸어 그녀의 눈 속에 살고 있는 소금쟁이는 언제나 눈물의 표면을 단단히 움켜쥐었어 그렁그렁한 표면장력, 그 힘으로 소금쟁이는 침몰하지도 날아오르지도 못했어

 

오늘 그녀는 기울기를 가졌어 x축과 y축 사이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 걸음을 걸을 때마다 가슴에서 눈물이 호수처럼 출렁였어 그녀는 비로소 너무 오래 울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어 남은 한쪽의 젖꼭지가 짓무를 때까지 오늘 울기로 했어

 

소금쟁이가 떠났다는 걸 그제야 알았어

 

 

 

 

[당선소감] 훈풍같은 시로 따뜻한 위로가 되길

 

불혹을 꿈꾸었다. 그때쯤이면 세상 그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마흔. 바람은 내 안에서 일었고, 그 어느 때보다 나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2월의 끝자락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보았다. 겨울의 햇살과는 다른, 맑고 따뜻함이 아련하게 묻어나던 햇살을.

나는 그 햇살 속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서점으로 가 시집 한 권을 샀다. 그것이 내 시의 출발이었다.

흔들린다는 건 내가 살아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나는 흔들리며 바람의 족적을 기록하고 싶다.

미풍, 혹은 훈풍의 바람 같은 시를 쓰고 싶다. 내 시가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과 경상일보에 감사드립니다. 남편과 아들 지산, 딸 지인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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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생애의 비의가 배어있는 사랑스러운 작품

 

최종까지 남은 네 분의 작품은 그야말로 난형난제, 막상막하였다. 그만큼 응모작의 수준이 기성의 수준을 뺨칠 만큼 높았다. 깊은 생각 없이 그냥 유행의 물살을 타고 있거나 또 현란하게 변해가는 시대의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하고 고색창연한 시의 습관에 무심코 젖어있지는 않은지 자세히 살펴보았다.

 

S, He takes a taxi는 새로운 기법의 멋을 부린 작품으로 맨 먼저 눈에 확 띄었으나 사변적인 말놀이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아쉬운 감을 지울 수 없었다. 하현달 소묘는 시적 은유의 모범답안 같이 안정된 구성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어딘지 도식적이고 작위적인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죽방렴은 단순명료하게 세계와 자아를 A-B로 치환하는 솜씨가 돋보였지만 신춘문예 당선은 곧 한 시인으로의 탄생을 자리매김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시적 형상화의 중층적인 깊이가 좀 얕아 보였다.

 

당선작으로 뽑힌 소금쟁이, 날아오르다는 아주 세밀하게 직조된 작품이다. 도드라지거나 으스대지 않으면서 나직한 어조로 세계와 통화하는 태도가 무엇보다도 인상적이다. 참신한 시적 상상력으로 형상화한 시 속의 그녀는 지금 이 혼탁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우리의 영혼 속에는 표면장력을 잡아주는 소금쟁이 한 마리가 늘 있는 법이다. 곰곰 읽어볼수록 우리들 생애의 비의가 함초롬히 배어있는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 심사위원 : 오탁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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