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레드문 / 권영유

 

 

개기월식이라는 뉴스에 옥상으로 가본다

붉은 달이 초콜릿 듬뿍 묻힌 초코파이 같다

한 입 베어 문 그때

 

평화동에 산 적 있다 절취선 같은 골목 따라가면 노인이 돋보기안경으로 거스름돈 꺼내주던 구멍가게가 나왔다 초코파이 한 상자 어김없이 한 봉지씩 우물거리는 밤 별들도 그 부스러기였다 네가 갈래? 내가 갈까? 자매끼리 서로 떠넘기다 마지못해 사러갔던 그 가게, 초코파이만큼은 늘 채워져 있었다 날마다 야금야금 갉아먹는 열다섯, 빈 봉지 털어보듯 용돈도 털려갔다 속을 채우고 담아도 늘 고팠던 그때의 정은 오직 초코파이

 

오리온자리를 찾아본다

그 자리 뜯어보면

열두 개의 촉촉한 정이 있다

 

 

 

쿠팡

 

deg.kr

- 에드픽 제휴 사이트로 소정의 수수료를 받습니다.

 

 

 

[당선소감] 움튼 문학의 꿈, 더 크게 펼칠 것

 

어릴 적 노란 꽃만 보면 설렜던 적 있다. 그 느낌을 일기장에 적어가던 어느 날, 국어책에 나오는 시들을 필사하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그때 나만의 시간 속에서 나름대로 끄적이며 막연한 문학의 꿈을 내 안에 심었다. 그러나 그 꿈은 심기만하고 잘 가꾸지를 못해서인지 아득한 세월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여름날, 김포의 아라뱃길을 걷다가 노란꽃들이 하나 둘 피어나더니 내 안으로 확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후로 내가 심었던 꿈을 다시 키우겠다고 김포문예대학을 덜컥 들어갔다. 처음은 뭔가가 될 것만 같아 신선했다. 그러나 배우면 배울수록 왜 이리 잡초 같은 생각이 엉키는지, 포기하려다가도 겨우내 꽁꽁 언 땅에 움트는 싹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되살아나곤 했다. 가끔 이것도 시냐고 핀잔을 주는 남편도 사실은 꿈이 시인이었다며 힘이 돼주었다. 우리 엄마는 언제쯤 등단할까 농담하듯 약 올리던 아들 딸도 그 누구보다 든든하고 다정한 후원자였다. 많은 추억을 공유한 영선 언니와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시꽃 향기로 다가온 문예대학 강사 시인들과, 세세하고 섬세하게 지도해주신 윤성택 시인께 감사드린다. 더 큰 꿈 틔워보라고 원대한 꿈을 달아준 심사위원님, 경남신문사에 깊이 감사를 드린다. 더 나은 희망의 꽃을 펼쳐야겠다.

 

 

 

 

[심사평] 참된 삶의 의미 발견해내는 성찰적 인식 돋보여

 

한국 문학의 샛별이 될 신진 시인의 산실인 2023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의 응모작품 편수가 지난해보다 늘었다. 시인 지망생이 늘었다는 것은 상상력과 언어미학이 지닌 성찰적 인식을 수용해 삶의 가치를 북돋우려는 의식을 지닌 사람이 우리 사회 저변에 많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학적 열정을 담은 많은 작품을 만나는 일은 고무적인 일임이 분명하다.

 

전체 응모작에서 여덟 편의 작품을 가려낸 후 논의를 거쳐 ‘막판의 자세’, ‘창문 외전’, ‘퍼즐’, ‘레드문’ 등 네 편의 작품으로 축약해 숙고했다. ‘막판의 자세’는 삶의 문제를 바라보는 발상과 서사의 진행이 진지하면서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표현이 평이했고, 의식 깊숙한 곳에 은폐된 문제를 사회성과 결부시켜 의미 있게 밀고 나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창문 외전’은 비유를 통한 언어의 직조가 신선했고 시적 전개가 흥미를 불러일으켰으나, 후반부에서 긴장감이 풀려 있었고 마무리가 미진했다. 좀 더 치밀하게 사유를 갈무리해 나가기를 기대한다. ‘퍼즐’은 사고의 전개가 자연스럽고 감정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주제의식을 잘 살리고 있다는 점이 돋보였다. 그러나 일부 구절에서 드러나고 있는 진부한 표현들이 한계로 지적됐다.

 

‘레드문’은 일상적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있다. 대상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시가 밀도를 더하면서 마침내 삶의 깊숙한 곳에 숨겨진 비의를 끄집어내는 상상력은 이 시를 견인하는 힘이다. 아쉬운 점은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다지 눈에 뜨이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다소 거칠더라도 당대의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첨예한 문제의식을 보여주었다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논의와 숙고 끝에 심사위원들은 ‘레드문’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합의했다. 개기월식을 보면서 이를 숙련된 솜씨로 형상화해내는 자연스러운 시적 시선, 그리고 참된 삶의 의미를 발견해내는 성찰적 인식을 보여준 응모자의 시적 잠재력에 신뢰를 걸어보기로 했다. 더욱 정진해서 한국 문단의 큰 별이 되기를 고대한다.

 

- 심사위원 성선경·배한봉

728x90

 

 

 

엽록체에 대한 기억 / 이경주

 

 

숲을 떠난 푸른빛의 기억이 갇힌 방으로 들어간다

형광등 불에 달궈진 자갈과 모래알들이 바닥에 깔리어

전갈이 지나는 길을 만들고 있다

마른 바람이 눈에 익거나 때로는 낯선 발자국들을 지우는 한낮에는

미세한 먹이사슬들이 잠깐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하얗다

종일 내리쬐는 빛은 벽에 박힌 나무들의 뿌리와

그걸 바라보는 죽은 새들의 밥상과

좁은 틈새를 뚫고 머리를 든 작은 벌레들의

핏줄까지 하얗게 만든다

한번이라도 불빛에 닿은 것들은 제 본래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오후가 저물 때면 변색의 관성은 더욱 강해져

누구도 아침을 기억하지 못한다

방의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나갈 수 없다

아무렇게 발을 들여 놓았다가

깊은 사막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폭풍에 갇히어 돌아설 수 없다

여전히 문은 굳게 닫혀 있고

표정이라고는 창백한 빛뿐인 고요한 방이

암흑 속을 빠르게 날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이상하다 분명 하루가 지난 거 같은데

눈을 뜨면 다시 그 자리에 와 있고

녹색이 사라진 방으로 계속 나비들이 날아 들어온다

 

 

 

 

[당선소감] 내 삶의 단 하나의 길, 시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겠다

 

로맹 가리의 단편소설들은 늘 긴 여운을 남깁니다. 그 여운을 감당할 힘이 없어 한동안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이 두려워질 때도 있었지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꺼냈습니다. 새들은 진짜 비상을 위해 머나 먼 바다의 섬을 떠나 조그만 해변으로 날아와서 자신들의 몸뚱이를 던져 버리는 것일까요. 나에게 떠나야 할 섬은 무엇인지, 그리고 마지막 몸을 던져야 할 곳은 어디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언제부터인지 젊은 시절 굵은 노트에 적어 댔던 시들이 나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추억이 되어버린 것을 알았습니다. 먹고사는 일에 몰입해온 현실을 핑계로 시의 바깥에서 기웃거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갈 수 없는 사막에 갇혀 버렸다는 절망감도 컸습니다. 그러나 시를 쓰면서 운명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을 그 지독한 외로움, 고통, 무엇보다도 지켜내야 할 영혼의 투명함과 순수성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음이 솔직한 고백일 겁니다.

 

작년에는 참으로 많이 걸었습니다. 끝도 없는 길을 걸으면서 내가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생각했습니다. 결국 시를 쓴다는 것이 나에게는 세상을 사랑하는 강력하고 유일한 방식이자 수단이 되어야 함을 길이 끝날 어느 즈음에야 알게 되었지요. 시는 갈수록 희미해지는 내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되살리고, 내가 살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 멈추어 버렸던 시를 다시 끄집어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시의 바깥에서 기웃거리지 않고, 시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겠습니다. 고립된 섬을 벗어나 내 몸을 던질 마지막 해변을 향해 날아가겠습니다. 긴 망설임의 여정에서 내 안에 생겨 난 상처를 치유하고, 나의 치유로서 사막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작은 위로와 희망이 될 수 있기를 감히 꿈꾸겠습니다.

 

이제까지 혼자 써 왔던 시였기에 세상에 내놓기가 참 부끄러웠습니다. 채 다듬지 못한 나무처럼 거칠고 틀어진 저의 작품을 선정해 주신 심사위원님과 귀한 지면을 허락해주신 경남신문사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저를 응원해 준 아내와 가족들, 그리고 제가 어디를 가든 늘 함께 해 준 친구들에게도 고마운 인사를 전합니다. 아름답고 따뜻한 언어로 부지런히 좋은 시를 씀으로써 저를 사랑해 준 숱한 인연들에 보답하겠습니다.

 

 

 

 

[심사평] 울림 큰 문장들시적 틀 만들어가는 상상력 돋보여

 

코로나19로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단계적 일상회복으로 접어들면서 코로나 19 종식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으나 다시 확진자가 급증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는 등 여러 어려움이 많은 때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 때문인지 예년보다 신춘문예 시부문 투고량이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수백명의 시인 지망생이 경남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해 와 뜨거운 문학적 열기를 느끼게 했다.

 

올해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응모작에는 신춘문예에 응모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시적 역량을 보여준다는 것이 오히려 과도한 수사에 매몰되어 시적인 깊이와 사유의 넓이를 놓치고 있는 작품들이 눈이 많이 띄었다. 한 사물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집중력이나 정서를 짜임새 있게 압축하여 끌고 가는 긴장감이 부족한 경우도 많았다.

 

숙고 끝에 심사위원들은 김난(김향숙), 김휼, 나영채, 노수옥, 이경주, 이동우, 임승환, 최수안 제씨의 작품들을 본심에 올려 논의하였다.

 

몇 분은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현실 등 사회에 대한 인식을 담아내어 보여주기도 했지만 시대 정신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깊은 정서적 울림을 주지 못했다. 또 몇 분은 토속적인 정서에 기대어 서정의 영역을 파고 든 경우도 있었지만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내지 못하고 익숙한 어법에 머물러 있었다. 또 시적 발화가 너무 무성하여 이미지를 응집시키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것이다, 하고 단숨에 손꼽을 작품을 만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런 속에서 노수옥씨와 이경주씨의 작품을 만난 것은 기쁜 일이었다. 노수옥 씨의 응모작 가운데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끈 작품은 입관이다. 언어를 세공하는 솜씨가 우수했다. 주제에 대한 집중도가 높고 문장을 끌고 가는 힘도 좋았다.

 

이경주씨의 엽록체에 대한 기억은 현대인들의 고뇌를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시적인 틀을 만들어나가는 능력과 상상력이 돋보였다. 퇴색되고 변해가는 자아와 만나는 방의 풍경은 흡인력이 있다. “눈을 뜨면 다시 그 자리에 와 있고, 녹색이 사라진 방으로 계속 나비들이 날아 들어온다는 환상성을 보여주는 문장이기도 해서 울림이 크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노수옥씨의 입관과 이경주씨의 엽록체에 대한 기억을 놓고 숙고하고 논의했다. 논의한 끝에 응모작 전편이 편차 없이 고르다고 판단된 이경주씨를 당선자로 합의했다.

 

축하하며, 한국시단을 이끄는 큰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안타깝게 당선을 놓친 노수옥씨에게 심심한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심사위원 이성모·배한봉

 
728x90

 

 

냄비의 귀 / 장이소 

 

 

뜨거운 냄비의 귀를 잡다가 내 귀를 잡았다

 

순간이 순간에 닿는다

 

귀 하나 떨어진 양은냄비를 안고 골목을 지난다 삼삼오오, 얼룩이를 가리킨다 얼룩이는 번쩍번쩍 얼룩덜룩하다

 

고흐는 왼쪽 귀를 자르고 왼쪽으로 들었을까, 어떻게 오른쪽을 들었을까

 

당신은 떨어진 귀를 버리지 못한 사람 뚜껑을 마저 잃고 배가 된 사람

이마는 당신이 키우던 물고기 떨어진 귀는 물고기의 어디쯤일까

 

귀를 기울인다 귀는 기울기 물고기가 지느러미를 자른다 어디나 그런 귀 하나쯤 있다 절반이 절반에 매달려 가운데를 안고 돌면 떨어진 한쪽을 위해 두 배속 태엽을 감는다 꼬리에 풀리는 물무늬 아가미로 쏟아지는 물살 삼킨 것들이 중심을 세운다

멱을 잡고 중심을 도는 것은 붙잡지 못한 것들이 많다는 것

 

밖이 안을 떠받는다

쓸모를 잡는 동안 바닥에는 차고 오르는 온도가 있었다

끓어 넘치던 냄비 뒤집어 보여주지 못한 뚜껑을

버리면 더 가까워서 가볍다

기억을 잃고 바닥을 태우던 사람이 있었다

 

붕대를 푼다

고흐가 별이 빛나는 밤하늘에 은빛 물고기를 그린다

지느러미가 키를 잡는다

풍등이다

붙잡지 못한 것들이 손잡이를 흔든다 떨어진 귀가 어떻게 자신을 부르는지를

 

 

 

 

 

[당선소감] 참된 마음으로 오래 쓰겠다

 

그 냄비는 귀가 떨어지고도 오래도록 손잡이였다. 낡은 양은 냄비에 밥과 김치보시기를 담아 나르던 날들이 있었다. 돌아보니 내가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였는데, 내 발등을 다 가릴 정도로 크고 못생긴 냄비보다 더 버거웠던 건 골목을 지날 때마다 나를 원숭이처럼 구경하던 아이들이었다. 그게 너무 싫어서 하루 종일 엄마를 굶긴 적도 있었다. 사 먹는 밥은 늘 허기진다던 그런 엄마를 이해하기엔 그때 나는 너무 어렸던 것 같다. 이제 당신은 세상에 없고 그런 당신의 마지막을 지켜드리지 못했다는 것이 내게 남은 숙제 같았다. 세상의 모든 당신을 생각한다. 여전히 나는 어린애처럼 살고 있다. 매일의 숙제를 챙기듯이….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행운이 내게도 왔다. 세상의 알곡 같은 시들과 시를 나누던 모든 분들을 떠올려 본다. 나를 둘러싼 매순간이 스승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시는 잘 모른다면서도 늘 이해와 응원을 아끼지 않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자신에게 덜 부끄럽도록 진정성을 가지고 오래 쓰는 시인이 되겠다. 온 마을이 한 아이를 키우듯 감사한 분이 너무 많다.

 

단단한 첫걸음을 떼게 해주신 전다형 선생님, 길동무처럼 늘 응원해주시던 많은 분들, 문정완 선생님, 그리고 나보다 나를 더 믿어주시고 마지막까지 용기를 북돋워 주신 신정민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시를 선해주신 심사위원님과 지면을 허락해주신 경남신문사에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현대인의 소외와 고립감 잘 표현

 

올해 시 부문 투고된 1300여 편 중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임승환의 ‘계절이 바뀌기만 기다리고 있어요’, 김석범의 ‘허공의 크레바스’, 홍담휘의 ‘향기의 증거’, 김난의 ‘발화의 경계’, 장이소의 ‘냄비의 귀’ 등이다. 매우 작품성이 높고 사회의식도 있어 그 어느 것이라도 당선작이 될 만했다.

 

우선 ‘계절이 바뀌기만 기다리고 있어요’는 삶의 무상함에 대해 매우 탐미적으로 잘 묘파해내고 있지만 그 삶의 무상함이 자칫 지나친 감상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허공의 크레바스’는 당대 사회현실의 문제의식을 매우 감각적 형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받았으나 일부 구절들에서 너무 교훈적이고 관념적인 내용이 직설적으로 드러나는 점이 한계로 언급되었다.

 

‘향기의 증거’는 ‘커피향’을 두고 매우 참신한 발상과 표현을 하고 있는 점이 높이 평가되었으나 그 주제가 커피를 둘러싼 노동력 착취라는 경직된 내용으로 수렴되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발화의 경계’는 일상 속의 자아가 갖는 허위의식에 대한 반성을 참신하게 잘 표현하고 있으나 너무 기교적이라는 점, 그리고 시제가 달라지는 점 등이 한계로 지적되었다.

‘냄비의 귀’는 현대인의 소외의식과 고립감을 ‘귀’라는 제재를 중심으로 심미적으로 잘 표현해내고 있고, 무엇보다 그것이 갖는 문제의식을 당대의 사회성과 결부지어 의미화하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받았다. 이에 심사위원들은 장이소의 ‘냄비의 귀’를 당선작으로 뽑는 데 동의했다. 당선자는 더욱 정진해 한국 시단의 큰 별이 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성선경·김경복

 

728x90

 

 

고래 해체사 / 박위훈

 

 

만년의 잠영을 끝낸 밍크고래가

구룡포 부둣가에 누워있다

 

바위판화 속 바래어가는 이름이나

호기심으로 부두를 들었다 놓던 칼잡이의 춤사위이거나

잊혀지는 일만큼 쓸쓸한 것은 없다

허연 배를 드러낸 저 바다 한 채,

숨구멍이 표적이 되었거나

날짜변경선의 시차를 오독했을지도 모를 일

고래좌에 오르지 못한 고래의 눈이

칼잡이의 퀭한 눈을 닮았다

피 맛 대신 녹으로 연명하던 칼이

주검의 피비린내를 잘게 토막 낼 때면

동해를 통째로 발라놓을 것 같았다

조문은 한 점 고깃덩이나 원할 뿐

고래의 실직이나 사인(死因)은 외면했다

주검을 주검으로만 해석했기에 버텨온 날들이

상처의 내성처럼 가뭇없다

바다가 고래의 난 자리를 소금기로 채울 동안

고래좌는 내내 환상통을 앓는다

테트라포드의 느린 시간을 낚는다

주검의 공범인 폐그물도 인연이라고

수장된 꿈과 비명 몇 숨 그물에서 떼어내자

반짝, 고래좌에 별 하나 돋는다

 

바다의 정수리

늙은 고래의 흐린 동공에 맺힌 달,

조등이다

 

 

 

 

[당선소감] 절망의 시간 잊게 해 준 밭 경작

 

졸작 몇 편 신춘문예 원고로 보내놓고 십여 일, 조바심에 안달이 난 걸음이 문수산을 향했다. 영하의 기온과 가쁜 숨이 산 중턱을 오를 즈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일시에 가라앉히는 당선소식이 발보다 먼저 정상을 밟았다.

 

모두가 직립의 삶을 꿈꿀 때 가끔 횡보의 날들을 꿈꾼 적 있다. 혼탁한 정치판만큼이나 시답잖던 내 짧은 사유의 공간에라도 무한 갇히고 싶었던 날들, 그 날들이 시와의 동거였지 싶다.

 

부지불식간 찾아온 뇌경색, 후유증이 남긴 편마비 그 숭한 짐승과의 양보 없는 드잡이에 지쳐갈 무렵 마치 구원의 손길인 양 두려움과 절망의 시간을 잊게 해준 또 다른 짐승이 詩였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형체도 없고 끝이라는 말 자체도 모르는 짐승과의 싸움 그것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강을 건너는 것이기도 했고 무저갱에 갇힌 순한 짐승의 두려운 울음 같은 거였다.

 

시의 문외한인 내게 문을 활짝 열어준 ‘김포문예대학’ 그 너른 품에서 수삼년 시구와 부대끼던 날들이 언제인지 싶다. 햇병아리들 몇 모여 시의 숲을 해찰대던 ‘달시’의 김부회 시인과 동인들, 무녀리를 자처 시의 끈을 놓지 말자며 서로 경계하며 이끌어주던 ‘반딧불이’ 동아리 샘들, 당근과 채찍으로 詩라는 과육을 맛깔나고 단단하게 단근질시켜준 문성해 시인께 이 영광을 돌립니다.

 

詩밭으로 한 발 더 들어서는 것이 끝없는 미로를 걷는 것이며 기약 없는 약속임을 알기에 기쁨보단 두려움이 앞섭니다. 평생 詩밭을 경작할 것이지만 시를 놓는 것이 여반장(如反掌) 같다는 것도 잘 알기에 나를 더 경계할 것입니다. 이 영광은 끝이 아닌 시작입니다. 겸허함을 마음 네 모서리에 친친 두르고 자만이라는 짐승을 가두어 두겠습니다. 사람답게 사람 같은 꼭, 그런 사람으로 살 것입니다. 시와 사랑을 품고…

 

 

 

 

[심사평] 사고의 전개·대상 응시하는 태도 자연스러워

 

심사를 하면서 기본적인 맞춤법을 지키지 않거나 주술관계가 어긋나는 경우에는 논의의 대상에 올려두기가 어려웠다. 또한 한 편의 시를 잘 빚어낸다고 해도 거듭해서 흡사한 사유를 풀어놓거나 작품마다 반복되는 이미지와 어휘로 진행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다섯 분의 작품을 가려낸 후 다시 숙고했다. ‘블랙의 도시’는 신선한 실험정신이 돋보였으나 그 외 두 편의 작품과의 미학적 편차가 컸다. ‘벽’ 등의 시는 삶의 협곡을 더듬으며 긴장감 있게 시를 전개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투고작들이 전체적으로 고른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세 분의 작품을 두고 고민했다. 문나원의 ‘괜찮은 날’ 외 2편은 개인을 둘러싼 삶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진솔하면서도 과도한 감정으로 치우치지 않는 점이 신선했다. 작품을 끌고 가는 방향성, 언어배열이 고르고 안정적이었으나 삶의 깊숙한 곳에 시선을 밀어 넣어 숨겨진 비의나 은폐된 문제들을 끄집어내려는 힘이 부족했다. “유리창들은 늘 쏟아지기 위해 거기 있다” “순간은 그러나 얼마나 성공적인 실패를 부르는가” 등의 문장들은 개성적인 아포리즘과 구별된다. 어떤 사유의 지점에서 단정 지으며 머무르기보다는 남달리 치열하게 밀고나가기를 기대한다.

 

황세아의 ‘징그러운 사과’ 외 4편은 일상화된 생각을 뒤집는 사고의 전복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시적 화자의 직설적 발설에 비해 비유를 통한 서사의 진행이 자의적인 구성에 갇혀 있었다. 시인의 상상력과 잠재력이 탁월하게 드러나는 것은 정제되지 못한 생경한 이미지의 구조가 아니라 핍진하며 익숙한 현실에서 그것을 다르게 인식해 마지막 문장까지 책임지는 태도라 할 것이다. 시의 표면적 새로움에 휘둘리지 말고 천착해나갈 때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믿는다.

 

숙고 끝에 당선작으로 선정한 작품은 박위훈의 ‘고래 해체사’ 외 2편이다. 사고의 전개와 대상을 응시하는 태도가 자연스러웠고 타자와의 접촉에 있어 대범한 기질이 돋보였다. 한 고래의 주검을 통해 “동해를 통째로 발라놓을 것 같았다”는 감정은 귀하다. 버틀러는 ‘애도’는 슬픔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에 잠겨 슬픔이 내가 되게 하는 거라고 했다. 이 세계에서 떠밀려지는 존재들과 접촉하며 상처받고 통제할 수 없이 슬퍼하는 자가 시인이 아닐까? 당선작이 기성의 시들처럼 다소 숙련화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점이 아쉬웠으나 패배감으로 끝내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높이 보았다.

 

심사위원 배한봉·김이듬

 

728x90

 

 

명왕성 유일 전파사 / 김향숙

 

 

모든 가전家電엔 명왕성冥王星 하나 두둥실 들어있다고 했다 목숨 다하면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제 몫을 못하는 것이 제명이라고, 별명이 백과사전인 그 사내는 모르는 게 없다 이 빛나는 지구도 저 없으면 돌지 않는다고 사십년 기름때 묻은 공구함을 가리킨다 공구들의 명칭마다엔 알파벳 하나씩 휘어지고 벗겨진 곳곳에 일본식 표현이 살짝 묻어있다

 

오일마다 망가진 것들이 몰려드는 난전亂廛, 배운 적 없는 어깨너머의 기술로 만지작거리면 고장 난 밥솥이 빨간 눈을 켜고, 커피포트 녹음기 선풍기와 마음 고장 심하게 난 이웃까지 불러 앉혀놓고 막걸리 한 잔 따라주면서 다독다독 고친다

 

십자와 일자, 플러스와 마이너스만 있으면 퇴출당한 명왕성도 거뜬히 고친다고 큰소리치는 명왕성 유일 전파사 그 사내

 

봄날이어서 수리 마친 가전들

 

저러다 파란 이파리들 막 돋아날까 걱정스러운데

 

고친 카세트 들고 집으로 가는 사람들

 

흥겨운 듯 절절한 트로트가 그 뒤를 따라간다

 

 

 

 

 

[당선소감] 시 쓰기는 '나의 색' 찾아가는 길

 

출발이라는 설렘의 빛깔은 기쁨과 두려움이 뒤섞인 색입니다.

 

시 쓰기는 나의 색을 찾아가는 방법이어서 무채색인 나에게 색을 입히는 일이기에 담쟁이가 벽을 타고 오르듯 그렇게 시를 만나며 지냈습니다.

 

희망이라는 말이 너무 낡아서 희망이라는 말을 주저할 때가 있었습니다. 사라지는 직업이 새로 생기는 직업의 배가 넘는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고유한 직업이 사라진다는 것은 숙련의 시간 또한 사라진다는 말이 되겠지요.

 

누가 뭐라고 해도 저의 직업은 희망을 희망하는 일입니다. 그 희망이라는 말이 없었다면 오늘의 이 기쁨이 어디서 생겨났겠습니까. 아직 숙련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시 쓰는 일을 묵묵히 해 나가겠습니다. 시가 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말이죠.

 

지금쯤 곶감에 흰 분粉이 내리고 있을 고향 상주에서는 구순의 낡고 낡은 엄마가 사람들과 정겹게 둘러앉아 은하계에서 퇴출된 명왕성冥王星을 뚝딱뚝딱 고치고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오기까지 격려해 주신 마경덕 선생님 이종섶 선생님 이승하 교수님 윤성택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저를 믿어준 남편과 신영이, 그리고 함께 공부한 문우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기회를 주신 경남신문과 심사위원님께 큰 절 올립니다.

 

첫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심사평] 삶의 애환 건강한 시선으로 그려내

 

올해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작품은 예년에 비해 대폭 늘었다. 시를 쓰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은 문화의 저변 확대라는 차원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다. 시인의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미적 정서와 예술적 영혼으로 맑아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 말이다. 투고된 작품 중에서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5편이다. '다가선다는 것', '활짝 핀 귀', '데칼코마니', '조충도', '명왕성 유일 전파사'가 바로 그것들이다. 5편 모두 당선작으로 하여도 괜찮을 만한 작품성과 시적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중에 한 편을 당선작으로 정해야 하는 만큼 심사위원들은 이것들을 신중히 검토하고 논의하였다.

 

우선, '다가선다는 것'은 그 표현의 아름다움과 참신함이 눈길을 끌었지만 시적 메시지가 모호하고 약하다는 것이 지적되었다. '활짝 핀 귀'는 맹인의 삶을 소재로 하여 역설적 아름다움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주목되었지만 조금 식상한 발상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데칼코마니'는 자연의 형상에서 삶의 지혜를 발견해내는 놀라운 안목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이 현실 인식으로 연계되지 못하고 있는 점이 한계로 언급되었다.

 

'조충도''명왕성 유일 전파사'는 마지막까지 우열을 가리지 못할 만큼 심각한 논의를 거치게 한 작품들이다. '조충도'는 매우 섬세한 감각과 참신한 표현으로 아름다운 시적 세계를 구축했지만 당대적 삶에 대한 인식이 보이지 않는 점이 아쉬운 점으로 지적되었다. 이에 비해 '명왕성 유일 전파사'는 무엇보다 당대적 삶의 애환을 건강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을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의 행동과 사물에다 해학적이고도 물활적인 특성을 부여함으로써 기운생동한 시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점이 놀라운 점으로 주목받았다. 이에 '명왕성 유일 전파사'를 당선작으로 선정하기로 합의하였다. 선자는 더욱 정진하여 한국 문단의 별이 되기를 기원한다.

 

- 심사위원 : 성선경·김경복

 

728x90

 

 

등대 / 유하문

 

 

지붕 낮은 집들이 송이버섯처럼 엎드려 있는 작은 마을 앞 바다에 방파제가 두 팔 벌려 마을을 넘보는 거센 파도 막아 줍니다. 근심 끝에 파수병 하나 하얀 총 들고 서 있습니다.

 

멀리 부레옥잠처럼 떠 있는 형제 섬들 너머로 아침나절 조업나간 배들이 돌아오고, 서녘 하늘 피조개 속살 같은 노을이 만선한 어부들 얼굴에 단풍으로 피어났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면 보초선 이등병이 아직 귀환하지 않은 전우들을 위해 반딧불처럼 기별을 보내고, 육지에선 촛불이 활화산 마그마처럼 흘러 바다까지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마을 초입에 서서 어두워진 바다를 바라보며 소매 끝 눈으로 가져가는 노모와 먼저 간 아내를 위해 우리들의 아버지는 작은 촛불 켜고 착착착 잘도 돌아옵니다.

 

아침에야 걱정 거두고 잠이 든 등대 안쪽 부두엔 옆구리 맞대고 늘어선 배들이 잠시 낮잠을 잡니다. 수협 앞에서 파시가 펼쳐지고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등 푸른 지갑을 엽니다. 돈 좀 챙긴 아버지들 소주 몇 잔 나누며 서울 간 자식 걱정에 한숨 자다가 또 바다로 나갑니다.

 

위문편지처럼 마지막 여객선이 부두로 들어오면 도시로 가는 마분지 박스마다 바글바글 병아리 사랑이 실립니다. 수협 뒤 여관 창에 불빛이 들어오고 홀로 된 숙모가 파도가 들려주는 자장가에 잠을 잡니다. 등대 너머 하얀 부표들 밑으로 김이 자라고 미역이 자라고 전복이 자랍니다.

 

 

 

 

[당선소감] 그 겨울 촛불들의 염원처럼

 

격정의 80년대 초반,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시인이 되겠다고 다시 국문과에 진학해 겨우 졸업했으나, 공부하는 시간보다 밖으로 나가 민주화 투쟁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꿈이던 시인은 되지 못하고 자비 출판으로 소설집을 먼저 몇 권 냈다.

내 나이 올해 60, 시인의 꿈을 찾아 응모했는데, 덜컥 당선 소식이 왔다. 섬을 지키며 길 잃은 배들을 인도하는 등대의 모습에서 문득 그 겨울 광화문 광장을 떠올리고 쓴 시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광장에 등대처럼 불을 밝힌 촛불들…. 그 촛불들의 염원대로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가 되길 바란다. 내 아들, 딸들이 희망을 갖고 노인들이 외롭지 않은 나라가 되길 간절하게 빈다.

그동안 모아둔 시가 백여 편 되니 이제 첫 시집을 내야겠다. 나이 60에 내는 첫 시집이라니! 그런데 누가 이 무명 시인의 시집을 내줄지 걱정이다. 소설집도 그러했지만 또 형제간, 친인척, 동문, 친구들에게 강매(?)라도 해야지, 하고 생각하니 늦은 나이에 문학을 버리지 못한 내 운명이 조금 가소롭다.

도대체 무얼 위해 이 나이에 불멸의 밤을 보내야 했던가. 글쓰기란 실패한 삶의 서정적 미화하기란 말에 동의한다. 못난 작품 선해 주신 심사위원님과 경남신문에 감사드린다. 앞으로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다.

 

 

 

[심사평] 상징화된 등대의 의미 집요하게 잘 살려

올해 시 부문에는 경남신문 신춘문예의 역사를 대변하듯 응모작품의 양이 많았다. 서정적·전원적 상상력을 보여주거나 삶을 성찰하는 작품이 많았고, 사회적 문제나 문명 비판적 의식을 담은 작품, 실험적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은 적었다. 풍성한 응모작품의 양에 비해 작품 수준은 기대에 미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신인의 시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개성과 패기가 있는 참신한 상상력이다. 자기만의 언어로 고유한 자기 세계를 힘차게 밀고나갈 때 다소 거칠고 모자라는 점이 있을지라도 그 가능성에 큰 신뢰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응모작의 상당수가 신인다운 참신한 특징을 보여주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관념과 감정의 과잉이었다. 묘사가 산만하고, 시적 긴장감이 느슨한 시, 주제 의식이 치밀하지 못해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가운데 본심에 오른 작품은 ‘소슬 모란’ 외, ‘옷핀, 먼 길을 꿰어 오다’ 외, ‘태풍의 눈’ 외, ‘가새’ 외, ‘등대’ 외, 5명의 시였다. 이 시들을 다시 정독하고 심사숙고한 끝에 배종영씨(경기)의 ‘가새’ 외 3편, 유하문씨(경북)의 ‘등대’ 외 8편을 최종 논의하기로 했다.

배종영씨의 ‘가새’는 ‘가위’의 지역말인 ‘가새’를 모티브로 상상력을 차분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말놀이와 의미의 적절한 거리가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마무리가 성급해 아쉬움을 남겼다. 단절과 봉합의 상상력 역시 조금 더 활달하게 전개됐으면 좋았을 것이다.

유하문씨의 ‘등대’는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사람들의 일상을 ‘등대’라는 상징을 통해 보여주었다. 부분적으로 이미지의 낯익음이 지적되기도 했지만, 상상력의 전개가 자연스럽고, 체험에서 우러나온 듯한 언어로 시종일관하고 있어 신뢰감을 주었다. 무엇보다 상징화된 ‘등대’의 의미를 집요하게 실재적이고 객관적인 세계에 진입시키려는 노력이 시적 긴장을 유발시켜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마지막까지 붙잡았다. 유하문씨의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을 축하하며 대성을 바란다. 아울러 당선에 들지 못한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해 드린다.

 

심사위원 이광석·배한봉

 

728x90

 

 

꽃게 / 최병철

 

 

장손은 섬이었다

할아버지가 펼쳐놓은 바다에 담겨 있던 당신

잠시 뭍에서 맡은 쇠 냄새만

해안선을 따라 옆으로 옆으로 맴돌고 있었다

바다의 모퉁이에 헐렁하게 용접되어 있었지만

기운 기둥을 일으켜 촘촘하게 그물을 걸고

부력으로 집안을 밀어 올렸다

뱃머리가 바다를 가를 때마다

철공소에서 대문을 만들었던 시간들이 솟구쳐 올랐다

가풍의 출입을 철대문으로 막고자 했는지 모르겠다

배를 저어갈 때 방향을 잡아 주던 어머니가

물 밑으로 가라앉고

철의 껍질에서 탈피했다

조금씩 자유로워질 때쯤

딱딱해진 가슴 위로 그물을 펼치고

휑한 구멍을 꿰매고 있었다

물때를 기다렸던 밤

팽팽한 수면을 찢고

그렁그렁 달빛이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

바다가 심심해지면 안부가 궁금해지는 법

기다림만 키우다 통발에 자신을 가두던 당신

절단기로 섬을 해체하고

배를 수평선 바깥으로 몰아 마지막 항해를 시작했지만

집게발이 파도를 물고 놓지 않는다

 

 

 

 

 

[당선소감] 九旬 아버지께 바치는 노래

 

세상이라는 바다에 우리는 누구나 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꿈은 집념으로 뚤뚤 뭉친 꽃게의 집게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루지 못한 빈자리는 결국 뭔가로 채워지죠. 40대 어느 날 나는 심한 공복을 느낍니다. 허기진 나의 배를 채워 줄 양식인 시가 내 앞에 나타났지요. 그래서 마구마구 시를 주워 먹었습니다. 그렇게 시에 미쳐 내가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정신 차리지 않았습니다.

 

시인이 되고 싶은 열망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시를 쓰고 갈무리하고 만족하고 묻어두고 며칠 후 다시 열어보고 실망하고 아직 습작 시인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를 질책하고 그러다 이번에 등단의 꿈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저를 선택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경남신문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 습작의 솜털을 지우고 자신의 세계를 열어가라는 당부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같이 꿈을 키우며 열심히 공부한 시우리 샘시 가족들과 이 영광을 나누고 싶습니다. 저의 시에 인격을 불어넣어 주신 존경하는 이병관 선생님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고운이 강한이랑도 함께하고 싶습니다.  꽃게는 올해 구순(九旬)을 맞이하는 저희 아버지의 일생입니다. 거동은 조금 불편하지만 정신은 아직 견고하신 아버지께 무병장수를 바라며 이 시를 바칩니다. 나는 아버지라는 바다 위의 영원한 무인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심사평] 삶의 경험에 녹여낸 시적 절실함 뛰어나

 

올해 응모된 작품은 1000여 편이 되었다. 심사위원들은 큰 기대와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심사에 임했다. 이번 응모작들은 실험시 계열보다 대체로 서정적 경향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서정적 상상력을 통해 팍팍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흐름이 감지되었다. 그러나 참신한 개성과 강렬한 상상력의 촉수를 내뻗어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여 보여준 작품이 많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새로운 자기만의 세계 창조는 언어와 형식의 실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물에 대한 인식이나 세계에 대한 이해를 자기만의 언어로 패기 있게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예심을 통과한 작품은 편두통, ‘꽃게, ‘쾌종시계, ‘네모난 집, ‘편강, ‘롤러코스트, ‘은행, ‘주방론, ‘음각의 시간, ‘장마, ‘자일리톨외 등의 작품이었다. 이 가운데서 이수미의 편두통3, 최병철의 꽃게2편이 마지막까지 심사위원의 손에 남았다.

 

이 가운데 당선작으로 결정된 최병철의 꽃게는 제목이 갖는 상징성과 장손의 삶을 바다와 연계한 구성력이 뛰어나며 뭍과 물의 관계를 쇠를 통해 형상화한 새로운 인식이 뛰어났다. 특히 자기 생각과 세계를 삶의 경험에 녹여내면서 끌고 나가는 힘은 시적 절실함에 충분히 값하고 있다. 다소 거친 표현도 있지만 상상력의 질감이 잘 살아 있고, 시에 나타나는 삶에 대한 진지성은 자기만의 세계를 꾸준히 구축해 나가겠다는 의지로 보여 신뢰감을 갖게 했다.

 

치열하게 마지막까지 논의됐던 이수미의 편두통은 이명(耳鳴)에 의한 편두통 증상을 객관적 상관물인 딱따구리를 통해 표현해냈다. 팍팍한 현실 앞에서 현대인들이 겪는 무력감이나 괴로움은 편향(偏向)을 버리지 못한화자의 통증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섬세한 시선과 차분한 어조로 문장을 자연스럽게 이끌어가는 기량이 돋보였지만, 동시에 신인으로서의 강렬한 패기 구축이라는 부분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해 드리고, 당선에 들지 못한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해 드린다.

 

- 심사위원 : 성선경·배한봉

 

728x90

 

 

앵두나무 상영관 / 진혜진

 

 

신호등은 봄을 켠다

길 하나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두 그루

이 도시에 앵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은 길목마다 앵두나무를 심었다

 

우듬지에 앵두가 켜지는 순간, 몇 갈래의 속도가 생긴다

몇 분 간격으로 익어 터지는 앵두

비와 졸음 사이에 짓무른 앵두

붉은 앵두는 금지된 몸에서만 터져 나온다

한 쪽 눈을 질끈 감는 사이

길바닥에 누운 흰 사다리를 오른다

아이가 손을 들고 소나기 그친 사이를 뛰어간다

할머니는 한 칸 한 칸 신호음 사이를 건너고 있다

사람들이 마중과 배웅으로

사다리를 건너면 앵두의 색깔이 바뀐다

 

빨강을 물고 순식간에 달려가는 계절이 다른 계절의 입술에 물리듯

앵두나무 뿌리는 발설되지 않은 소문까지 뻗어있다

 

앵두가 지고 나면 초록 이파리

여름 정원에 비비새 울음으로 남아

그 울음 끝으로 떨어질 이파리로 남아

세를 불리는 앵두나무

공중으로 발을 들어 올린다

언제라도 짧은 치마를 입듯 가벼운 신호음

떠나갈 사람과 돌아올 사람의 안부가 위태로워

처음 같은 얼굴로

막을 내리지 못하는 봄이 있다

 

 

 

 

포도에서 만납시다

 

nefing.com

 

 

 

[당선소감] 아픔마저 아름답도록 시 그릴 것

 

나의 사거리에도 앵두가 켜집니다. 자주 정체되고 시도 때도 없이 클랙슨을 눌러 댔습니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빈손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올해도 그냥 넘어가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가로수 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봄이지만 우리 도시, 신호등의 봄은 봄이 아니었습니다. 눈이 아프도록 세상을 들여다보면 이미지가 펼쳐진다고 했습니다. 몇 개의 방향을 가진 사거리입니다. 저마다의 역할로 떠나가고 돌아와도 아무도 안부를 묻지 않는 횡단보도 앞에서 나는 그들의 안부를 묻는 배역을 담당하고자 합니다. 누군가의 발걸음에 젖어 있는 불안, 아픔, 무서움, 그리고 절규까지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될 수 있도록 시를 그리겠습니다. 비록 멈칫거리는 붓질일지라도.

 

어둠 속에서 촛불을 밝혀주신 김영남 선생님, 늘 독특한 상상력을 갈구하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막막한 가로수 길에서 제 시의 원근법을 쥐여주신 심사위원님들과 경남신문사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당선을 기원하며 마음을 모아주신 분들에게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신비디움 꽃대의 행운을 전송해준 친구 김분홍 시인, 시를 사모하는 김유진 시인에게 하루 9할의 시간이 어서 시와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늘 격려와 충고 아끼지 않은 스터디 선배님들 고맙습니다. 내가 시로 좌절하고 시로 서러워할 때 단 한 번도 시를 탓하지 않고 격려해주며 내 편이 돼준 남편 신용찬씨, 아들 채훈, 그리고 언니들, 오빠, 저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모든 분들을 사랑합니다. 그럼 제 배역에 어울리는 막을 올리렵니다.

 

 

 

 

 

[심사평] 활물의 비유 개성있게 선보여

 

 

우리 선자들에게 넘어온 시는 총 786편이었다. 올해는 태작들도 많았던 반면 일정한 수준으로 고른 기량을 가진 분들도 골고루 응모해 와 문학의 위기와 위축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식지 않는 문학에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응모작들의 주된 주조는 경기부진과 어려운 세태, 사회 혼란 탓인지, 거시세계보다는 미시세계에 가까웠다. 자영업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는 시편들도 여럿 있었고, 일상의 소품들과 거리 풍경, 자연, 가족간의 관계에 대한 해석들이 많았다.

 

마지막까지 선자들에 남겨진 작품들은 열 분이다. 열 분의 작품들 중 우리 선자들의 의견이 쉽게 일치한 시 당선작은 진혜진의 ‘앵두나무 상영관’이었다. 진혜진은 당선작 외에 함께 투고한 시편들에서도 당선작에 버금가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미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시집 한 권 정도 분량의 작품을 가졌음직한 자유로움과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신춘문예 출신 시인들이 당선 후 일 년 만에 대부분 사라지는 상황에서 시를 오래 쓸 것만 같은 신인을 만나 기뻤다. ‘앵두나무 상영관’은 앵두를 거리의 빛에 대비해 사람의 내면과 일치시키는 활물의 비유를 개성있게 선보인 작품이다. 앞으로 쓰는 자로서의 강건한 정신의 높이를 획득해가는 큰 시인으로 대성하기를 바란다.

 

당선작은 되지 못했지만, ‘버클’의 이희라, ‘삼각김밥’의 장시은, ‘온순한 짐승을 따라가다’의 이규정, ‘현호색 풀밭’의 김신유 등이 신선하고 재기발랄한 시적 세계를 선보였으나, 편차를 보여 끝까지 선자들을 아쉽게 했으며, ‘악성바이러스 치료하기’의 김혜강, ‘사막의 저녁’의 이선유, ‘이대 팔’의 정연희, ‘잡초의 발견’의 최수안, ‘합석’의 채선정 등도 풍부한 시적 기량을 갖추고 있으나, 뒷심이 부족해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분들도 꾸준히 정진하면, 머지않아 지면에 등장해 좋은 시인으로서의 기량을 충분히 선보일 자질을 갖추고 있으므로 다음을 기약한다.

 

- 심사위원 : 김언희·성윤석

 

728x90

 

 

물수리 그림자, 지나간다 / 김진백

 

 

나를 흠뻑 적시고 흘러간 붉은 저 강물 폐륜(廢倫)이라 해도

나는 연어의 힘센 자식 아니기에 돌이킬 수 없다

 

목마른 내 우물 모래바닥에 거친 예감 물살 치는 날

 

청춘이 할퀴어 쓰린 상처 위로 물수리 그림자 휙 지나간다

하늬바람 시작되는 곳, 너는 눈먼 꽃으로 돌아온다

 

얼음 부딪히는 북해에서 내 이물까지 오만 리 길

그곳에서 다시 고물까지 십만 팔천 리 길

 

너는 함포처럼 요란하게 쏟아진다, 날아와 펑펑펑 터진다

 

강물은 이른 새벽부터 몸 비틀어 나를 껴 앉는데

너를 따라온 달이 눈동자에 월식으로 지워진다

 

내 가난한 땅에 새겨진 풍성한 강물의 위로는

돌아오고 떠나는 사이 제 몸 넉넉히 내어주는 일뿐

 

험한 물길 찾아오다 세찬 숨결 아찔한 순간, 그 순간

너는 가끔 튀어 오르며 돌아온다 가슴 부푼 비린 꽃으로.

 

 

 

 

[당선소감] 내 시가 누군가에 위안 되길

 

휴가를 나가 부대로 복귀 전 후보작에 올랐다는 경남신문사의 전화를 받았다. 뜬금없었지만 그 후 매일 나를 위해 울리는 전화를 기다리며 잠들지 못했다.

 

지난해 어느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낙방했던 기억에, 또 이렇게 시인의 주소에 닿지 못하는구나, 단념할 때쯤 최종 당선 통보를 받았다. 친구들은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자신의 세상으로 나가는데 내 젊음이 다른 청춘에 비해 피지 못하고 시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때까지 내게 용기를 주는 것이 시였다. 시가 내 친구였다. 혼자 펜을 집어 몰두하는 시간이 좋았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달란트가 만들어지는 것이 즐거웠다. 그렇게 시를 품에 안고 지냈다. 자대 배치를 받고 밀양으로 출동 나가 기동버스 속에서 새벽까지 혼자 시를 읽었다. 행복했다. 그때 내게는 욕심이었던 시가 누군가에게 위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시가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길 바란다.

 

조간 경남신문의 첫 시인으로 꾸준히 시를 쓰고, 절대 문학을 놓지 않을 것을 약속드린다. 내가 필사한 모든 시집들에게 감사드린다. 내 시를 읽고 응원해준 친구들과 청년작가아카데미 식구들에게, 중대장님을 비롯한 모든 분께, 늘 함께하는 본부소대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무엇보다도 젊은 시인의 영광을 주신 경남신문사와, 심사위원 선생님께 큰절을 올린다. 제대하면 시집 바깥쪽 먼 이국으로 떠나 다른 언어의 풍경을 직접 만나고 싶다. 지금은 꿈에 열망하고 있다.

 

 

 

 

[심사평] 시 행간마다 생기와 상상력 넘쳐

 

신춘문예 당선작은 하늘이 내리는 선물일지도 모른다. 단 한 편을 새해 신문에 내보내는 작품을 골라야 하는 심사위원들의 취향은 다르다. 그리고 뽑는 이유도 제각각이고 탈락시키는 이유도 제각각 다르다. 최종심에서 논의된 시는 우물우물 맛있나요’, ‘우중 건축’, ‘물수리 그림자, 지나간다이다.

 

우물우물 맛있나요는 노모의 잇몸이 소재다. 의태어와 의성어를 적절히 버무려 세 편 중에서 가장 따뜻하고 감칠맛이 나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노모의 잇몸이라는 평범한 소재에서 뭔가 새로운 표현이나 사유를 읽어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우중 건축은 표현이 아름답고 섬세한 작품이다. 묘사와 진술의 적절한 조화가 시의 완성된 건축물을 보는 듯했다. 그것은 아마도 오래 연마하고 다듬고 사유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우중 건축물수리 그림자, 지나간다를 두고 오래 고민해야 했다. 처음부터 물수리 그림자, 지나간다는 앞에 언급한 두 작품에 가려져 심사위원의 눈길을 끌지 못한 작품이다. 그런데 자꾸 읽다 보니 행간마다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막막한 청춘을 이상한 활기와 비약으로 성큼성큼 건너 뛰어가고 있었다. “얼음 부딪히는 북해에서 내 이물까지 오만 리 길/그곳에서 다시 고물까지 십만 팔천 리 길이라는 표현의 진폭은 넓다. 배의 앞부분인 이물과 뒷부분인 고물까지의 거리를 북해에서 시작하고 있는 투고자의 상상력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시에서 우리는 울퉁불퉁 몸을 비틀며 지나가는 강물처럼 격렬한 청춘이 지나간 흔적을 읽었다. 한 마리 물수리가 강물 위를 날아갈 때 모래바닥에 거친 예감이 그림자처럼 생긴다는 시적 사유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는 결국 섬세하고 아름다운 표현이 아니라 막막하지만 거친 청춘을 노래한 쪽에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당선자가 앞으로 어디로 흘러갈지, 독자를 놀라게 할 그 아찔한 순간이 언제 올지 기대하며, 축하의 말을 전한다.

 

- 심사위원 : 유홍준, 박서영

 

728x90

 

 

체면 / 오정순

 


막, 죽음을 넘어선 지점을 감추려
서둘러 흰 천으로 덮어놓고 있던 익사자
최초의 조문이 빙 둘러서 있다

발을 덮지 않는 것은 죽은 자의 상징일까
얼굴은 다 덮고 발을 내놓고 있다
다 끌어올려도 꼭 모자라는 내력이 있다

태어날 때 가장 늦게 나온 발
저 맨발은 결국 물을 밟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복사기처럼 훑던 흰 천
끝내 남은 미련을 뚝 끊듯 발목에 걸쳐져 있는 체면
가시밭길을 걷고 있거나
아니면 용케 빠져나와 눈밭을 지났거나
물길을 걷다가 수습되어 왔을 것이다

발은 죽어서도 끊임없이 걷고 있어 덮지 않는 것일까
만약에 발까지 덮어놓았다면
자루이거나 작은 목선 한 척이었을 것이다
경계는 저 물 속이 아닌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둔 곳인지 모른다

발이 나와 있으므로 익사자다
고통도 화장도 다 지워진 얼굴은
체면이 없다
누군가 흰 천을 끌어당겨 체면을 덮어준 것이다

 

 

 

 

우주가 들어있는 작은 공을 찾는다

 

nefing.com

 

 

 

[당선소감]  "시는 벅찬 동행이자 선물"

 

친구와 며칠 전에 본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결코 거창하거나 화려하지 않은 세계관이 던진 메시지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상이 마법이 되는 순간을 부러워하고 있을 즈음, 마법처럼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당선 통보였습니다. 삶의 단면에 몇 번은 마법과도 같은 기적이 끼어드는가 봅니다.


제게 아주 오래된 시간의 흔적이 있습니다. 이십대에 칠 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썼던 일곱 권의 일기장입니다. 누군가 그랬지요. 뭔가 해낼 거라고. 그러나 특별하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문학이라는 마법에 걸렸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3학년 때 당선된 대학 문학상은 영원히 마법에서 헤어나지 못할 거라는 더 강한 주문이었습니다. 오히려 나태해져가는 일상을 깨운 것은 바닥에 납죽 엎드려 무릎을 꿇은 채로 시를 썼던 백일장이었습니다. 시를 향한 저의 최초의 경배이자 초심이기도 하지요.


시는 벅찬 동행이었고 선물이었습니다. 또 나를 기다리는 시, 통증의 두께와 깊이밖에 내세울 게 없지만 더 세게 끌어안겠습니다.


작년에 경남신문 최종심에 올랐습니다. 올해, 제게 주신 당선의 영광이 누군가에게 용기와 도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모님과 남편과 두 아들, 두목회 동인, 이재무 선생님과 손광성 선생님, 선희 언니와 김주, 신공나라 문우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작품을 선해주신 심사위원님과 경남신문에 허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겸허와 초심을 잊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 드립니다.

 

 

 

 

[심사평] "인식의 힘 보여준 세심한 관찰"

 

응모작들은 대부분 일상성에 주목하고 있었다. 생활에 밀착하면서도 소통과 공감에 주력하는 시들이 많았다. 일상의 소소한 문제들을 내면화하여 구체적인 실감을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겠으나 타인의 삶과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점은 아쉬웠다는 것이 심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다양한 분야와 계층의 사람들이 투고하는 것이 신춘문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 응모작들을 통해 우리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성도와 신인으로서의 새로움, 진지하면서도 노력의 흔적이 엿보이는 작품을 선택하자는 합의를 거쳐 이서빈, 문민철, 오서윤 씨의 작품을 최종심에 올렸다.

이서빈 씨의 뒤집기는 유비적인 상상력을 사용하여 아이의 첫 뒤집기와 노모의 화투패 뒤집기를 겹쳐 놓음으로써 탄생과 소멸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비적 상상력이 주는 단순함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문민철 씨 작품의 경우 거침 없는 화법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시간과 기억의 문제를 자신만의 문체로 이끌어가는 힘도 좋았다. 신인다운 패기가 큰 장점이었지만 전체적인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 흠이었다.

심사자들은 어떤 이견도 없이 오서윤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택하였다. 오서윤 씨는 세심한 관찰력을 통해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인식의 힘을 보여주었다. 간결한 문체를 사용하고 시의 호흡을 잘 조절하고 있다는 점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당선작 ‘체면’은 익사자를 덮은 흰 천에서 삐져나온 발을 통해 삶과 죽음, 인간의 문제를 존재론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태어날 때 가장 늦게 나온 발’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가고 있으며, 발의 드러냄과 감춤이 인간의 근본적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통해 몸과 삶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시이다. 고통스럽지만 기쁜, 이중적이고 역설적인 시의 길에 들어선 것을 축하드리며 한국 시단을 빛낼 소중한 시인이 되시길 바란다.

 

 

- 심사위원 : 최영철 배한봉 장만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