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포 / 유수진
폭포는 순간이 없다.
멈춤이 없다.
멈춤이 없으니
지구의 부속품 중 하나
폭포 아래에는 지구의 명치가 있어서 지구와 같은 시간을 흐르고 지구와 같은 기억을 간직하고 지구와 같은 길이를 짊어지고 지구와 같은 두통을 앓는다. 지구의 이마를 짚는 폭포. 쏟아지는 이유를 들어보자. 움푹하게 패인 곳을 더 움푹하게 파는 낙하가 그곳에 있으니, 움푹하게 패인 곳을 치는 주먹들이 있으니.
그곳에 소란이 있으니.
폭포 위에서 사람이 죽었다. 그건 떨어지는 물보다 더 빠른 죽음이었겠지. 그건 쏟아지는 하늘보다 더 파란 죽음이었겠지. 순간이 있었다면 치솟는 일 같은 건 생각도 않고 아래로 아래로 순응하며 살 수 있었을 텐데. 차라리 바닥을 천명으로 여기고 손안의 주먹밥이 식은 걸 팔자 탓으로 돌릴 수 있었을 텐데. 문득 올려다 본 곳엔 두 손에 묶인 채 위로 위로 끌려 올라가는 폭포가, 파랗게 질려서 밑동까지 덜덜 떠는 폭포의 귀청들이,
폭포를 보고 있으면 계속 흐르는 중인지
계속 치솟는 중인지 모를 때가 있다.
함께 흐르는 듯 함께 치솟는 듯 해 폭포에게
무엇을 봤냐고 물어본다.
귀가 어두워서 모른다고
못 들었다고
못 봤다고 하고
바닥에서 다시 튀어 오르는 물은 마치 무명천이 펄럭이는 것 같다.
흘러간 물을 되돌리려 안간힘을 쓰는 폭포. 이미 흘러간 물줄기는 천 리를 지나고 만 리를 지나고 지금쯤 어느 별에 닿았을 것인데.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낮마다 밤마다
아무도 모르게 폭포는
그 옛날의 물줄기를 계속 끌어올리고 있다네.
[심사평] 폭포와 죽음의 역동적인 대비에 성공해
제주4·3평화문학상은 공모주제를 미리 제시하고 작품을 모집하는 문학상이다. ‘4·3의 진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화와 인권’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창작자들은 제주 4·3의 역사성에 기반을 둔 미래지향적인 가치를 언어로 형상화하려고 궁리를 하게 된다. 사실 창작자의 입장에서 보면 소재를 선택하고 작품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에서부터 사전에 미리 제시된 주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게 사실이다. 주제에 매달리면 문학성을 의심받고 주제로부터 멀어지면 진정성을 의심받게 되므로. 시는 어떤 정답을 그대로 드러내는 양식이 아니라 정답을 숨기면서 정답에 근접하는 양식이다. 그것이 설사 옳다 할지라도 4·3이라는 사건을 도식적으로 표현하는 작품은 읽기가 거북했다. 민간인 희생의 현장을 배경으로 하고 제주 방언을 몇 차용한다고 해서 4·3이 문학적으로 완성되는 건 아니다, 시는 그 매너리즘을 넘어서서 인식의 새 지평을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올해 10회째를 맞은 이 문학상이 더욱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자리 잡으려면 줄곧 희생자의 입장에서 현실을 드러내던 방식을 이제는 좀 수정을 해야 하지 않을까? 희생자의 상처와 고통을 직정적으로 토로하는 방식은 수없이 봐왔다. 가해자의 입장, 가해자의 반성과 자기 극복의 관점을 보여주는 시는 어찌해서 단 한 편도 만날 수 없는가? 역사적 사실과 시적 심미성은 별개가 아니다. 4·3은 상처를 추념하는 예술이 돌파하기 어려운 굴레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4·3이 인류의 보편적인 공감을 획득하는 차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시적 상상력의 전복이 더욱 필요한 때이다. 우리는 31의 「폭포」를 올해의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데 합의했다.
이 작품은 폭포라는 소재를 죽음과 대비하면서 역동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후반부로 가면서 힘찬 긴장감이 더해지는 이 시는 폭포가 “그 옛날의 물줄기를 계속 끌어올리고 있다”는 인식으로 발전한다. 시인의 인식이 독자에게 충분히 전이되어 설득력을 얻는 지점이다. 이분은 제주에 경사가 많다는 점에 착안해 “삼십 도는/ 후회하기 좋은 경사인가”(「경사」) 묻기도 하고, 망자가 누운 관속의 빈 공간을 “허방을 짚는 일”(「발끝의 사례」)로 파악하면서 유보를 통해 고통을 드러내는 방식에 능하다. 구문의 적절한 반복으로 시의 가독성을 높이고 있는 점도 좋게 보았다.
수상작과 함께 오래 검토한 73은 구어체적인 진술이 능숙했으나 4·3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개괄하는 듯한 목소리가 아쉬웠다. 시에 각주를 지나치게 나열하고 있는 점도 거슬렸다. 29는 시적 정황에 대한 실감 어린 묘사가 볼 만했으나 ‘작시(作詩)’의 의도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
다. 본인의 유려한 목소리를 본인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길을 모색해보기 바란다. 2월 말의 제주는 ‘먹쿠슬낭’으로 부르는 멀구슬나무 열매가 가지마다 조롱조롱 매달려 있었다. 소리가 날 것 같았다.
- 심사위원 (시인 김사인, 시인 이문재, 시인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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