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설안雪眼 / 김상백
 
1.
눈 내리지 않았고
하여 당신도 오지 않았다
매서운 추위 탓인가
두꺼운 얼음장에도 금이 간다


마음바닥을 찍을 때마다
장대 휘청인다
조각얼음을 타고 건너가는
발 시린 자정

2.
익어 가는 꽁치의 雪眼
하얀 접시에 꼬리지느러미
그리고 또 머리
삐죽이 내민다
끝으로 밀려 가면
저처럼 발과 머리
허공에 내놓고 살아야 하나
곽시쌍부
달이 진 눈 속
어둠이 깊다






서해 / 김상백


저무는 바다

반달 걸리면

떨어지는 단두대

자비의 칼날

온몸으로 물고

우우우-

번지는 속죄의 노을

 

 




가벼운 장례 / 김상백


선풍기
저 홀로 돈다
연옥에서 부는 바람

울먹이던 세간들
비닐 수의를 마련했다

활짝 핀 꽃불 속
놀러나 갈까

가벼운 외짝 날개
나비를 타고

뒤바뀐 자전축
거꾸로 돈다

 





그리운 성혈사 / 김상백


원 안에 들어가도 죽고 나와도 죽는데 어떡하면 살 수 있겠느냐

삭정이 하나 주워 큰 원을 그리면서 하시던 물음. 언젠가 다시 들르리라 생각했지만
먼 길이라 마음에 담고 살았습니다 처음 무심코 찾아가던 산길은 풀섶만큼 어렴풋했
지만 산사의 불빛은 법문 총총한 별밭이었습니다 연못에 발이 빠진 다정은 아직 차
향기 그득한가요 차 시봉을 들려고 곱디곱게 머리 빗던 처녀 버드나무도 저처럼 이젠
두 아이의 부모가 되었겠지요 산신각 잿빛 기와를 닮아 가는 희끗한 새치 몇 가닥이
소백산 계곡물을 길게 길게 흘려보냈군요

토굴 같던 보살님 두꺼비 같던 상좌승 마을 아래로 하냥 구름을 띄워 보내던 행자스님
봉철 큰스님 보고 싶습니다 비 오는 날이면 동당과 서당 고시생들 불러 모아 날궂이
윷을 놀고 해맑은 다음 날 늙은 호박만 한 가슴을 한복에 감추고 올라온 서울 보살이
놓고 간 수박, 씨 뱉듯 던지신 화두는 유언처럼 남아 시창是窓이라 지어 주신 법명,
마음에 큰 구멍을 뚫고 작은 암자 성혈사 한 채 지으라는 뜻 이제사 알았습니다

달콤한 수박이 수박 맛에 있더냐 입맛에 있더냐

자꾸 성혈사가 그리운 까닭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