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감는 고양이 / 박윤근
늦은 밤, 고양이 한 마리 빗물 속에 비친 달빛을 핥고 있네
저 몸짓은
둥근 털실을 잃어버린 고양이가
아침을 부르는
의식,
한때 따뜻한 저 실을 따라
크리스마스트리 반짝이는 불빛과 웃음이 감기는 사이
꾸벅 졸며 길을 잃은 고양이,
거리에
나오자 굴릴 것이 많아졌네
이제는 둥근 자동차 불빛에 뛰어들거나
달빛을 감으며
북~ 찢긴 비릿한 밤의 다른 표정을 감아 올리지
한 올 한 올 감아 올린 실타래 안으로
어둠에 몰린 사람들의 몸짓
팽팽히 당겨 올 때면
달빛 속 검게 번식한 고양이족을
볼 수 있네
그것은 백 묘가 흑 묘로 가는 양식,
달의 정수리까지 그믐달처럼 검게 변해 가는,
세상의 모든 저녁과 식탁의 둥근 틈 사이는
모두 비릿한 생선 냄새를 가지고 있어
길을 잃은 한 무리 고양이들
또 달빛에
뛰어드네
저 먼 달 속으로
순한 눈빛들이 하나둘씩 가로등처럼 켜져 가네
쇄빙선 / 박윤근
병실 한구석, 쇄빙선 한 척 길게 정박해 있다
커튼에 가려져 물 한 방울 빠져나가지 못하는
담수호 창문 위로 어족이
넘나든다
검게 번진 버짐은 결빙을 예감하지 못한 이들이
몸속 긴 해안을 걸어온 흔적,
빙벽을 헤치고 오는 동안
얼음처럼
굳었던 손마디가 풀리는지
오늘은 오줌주머니가 일찍 부풀어 출어가 빨라졌다
탈수된 몸은 이제 닻을 내린 듯
낱낱의 어종을 기억할
만큼 촘촘하지 않아
경색된 후륜의 기억 사이로
물오른 잡어 떼 한 무리가 끼었다
저인망 그물에도 닿지 않는 저 항적을
분리해 내는 작업은 힘든 일
욕망의 장식을 버리면 이제 편해질 것 같다는 생각,
링거를 타고 내려온다
뒤축처럼 닳은
흉추의 통증이 풀리자
선단에 몸을 가누던 눈빛, 천장에 떠 있다
기울었던 몸의 균형이 병실 안으로 출렁인다
늘 모났지만
안으로 둥글던 사내의 속내가
오랜만에 따뜻해진다
또 몸으로 바다가 오는지 먼 곳 발끝부터 저리다
책 속 시조새 / 박윤근
책을 읽다가
새를 닮은 문장을 발견했다
사막 한가운데 볼록한 낙타 등처럼 묻혀 있다
허기를 막 채우고 왔는지
포만
가득한 미동이 꼬리 끝까지 물려 있다
손이 자주 닿아 무뎌진 종이 끝은
새들이 이동하던 통로,
곤충을 쫓아 떠난 짐승들의 야성의
냄새가 아직 짙다
쥐라기 시대, 모두 사라져 버렸다는 중략 구에서도
뒷발 화살 모양의 활자는
여전히 앞 문장의 목덜미를 겨누고
있다
책 속 문장들의 수런거림에
검은 발자국들이 콩알처럼 흩어지며
행갈이를 이어 간다
파르르 하늘을 자욱이 날면서도 저
날개들이 겹치지 않는 이유는
먼저 책등 위로 날아간 몇몇 새들의 근황을 풀어 읽는 까닭일 것이다
날개와 뼈대가 접혀 매몰된 대목의
암각을 해독하는 시간은 길어지고 있지만
지금은 우기,
여백을 지나는 날것들의 몸에서
털갈이하듯
깃털이 빠지는 것을 보면
새들은 아마 저 책등을 넘어
옹기종기 반딧불처럼 깜빡이며 무리를 지어 살고 있을
것이다
새벽녘까지 까맣게 긋고 날아간 새들의 항적은
차곡이 쌓여 별책의 새 목차로 추가된다
얇던 책장이 차츰 두꺼운 밀림지대가 된다
지문指紋 / 박윤근
레일을 깔기 전
이곳이 영토였던 회색 곰 무리들은
시베리아 수림 어디쯤을 걷고 있을까
투명한 내실이 보이는 열차 안
붉은 시트 식탁 위에 찻잔이 흔들리고 있다
보료에 깔린 3시 안으로
객차의 묵은 번호판과
막장에 날아든 새들이 각질처럼 일렬로 쌓인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삼백 마일
비늘 하나 벗기지 않은 연속의 물결은
동토의 땅
어느 짐승들이 무심히 땅에 긋고 간
잔가지
빗금을 따라갔는지
멀리 간헐적인 총성이 들렸다
객실 안으로 회색 울음이 번졌다
열차는 사과 안으로 떨어지는 중력처럼
레일 위를 구르다 깊은 음각의 골짜기
여러 무리와 만날 것이다
간이역이 없는 긴 시간을 지났지만
곡선의 굴절에서는
아직 연소하지 않은 경유 냄새가 났다
자궁 같은, 절벽 같은
찻잔의 떨림이 굉음이 지난 어둠 속에 남아 있다
붉은 총성이 또 로켓처럼 달빛을 통과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물길 / 박윤근
수영장 속, 한쪽 팔이 틀어진 사내
혼자서 물장구를 치고 있다
헤엄치는 모습, 삐걱대는 마루다
저 남자,
생선 토막처럼 잘린 짧은 팔 하나로
물살을 가르며 무슨 길을 내고 싶은 것일까?
보내고 싶은 것일까?
하지만 나는 째깍거리는 수면 위 시간에 익숙한 사람,
저 팔 안에 갇힌 적막한 시간을 읽을 줄 모른다
물결에 한 획 한 획을 그리며 무얼 타전하는지
힘겹게 이어지는 사내의 발끝 피돌기를 따라
물방울이 화르르 풀려
간다
태엽 감은 로봇처럼
불규칙한 동작이 반복되며 물살에 가속도가 붙는다
이윽고 뽀얀 포말들이 말굽처럼 사내를 따른다
물의 신 포세이돈처럼, 나사못처럼
떨어져 나간 호흡이 적막했던 사내의 시간 속으로 끌고 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그가 보낸 까마득한 수신지가 나였던 것처럼
잠시 내 눈이 깜박였다
한 무리의 어족들이 떠난 수면의 파문이 가라앉자
옷을 추스려 입고 수영장을 벗어나는 사내가 짚고 가는 바닥이
맹 획을 얻은 듯
다시 삐걱거린다
물살을 가르던 뭉툭하던 팔 하나가
제법 날카로워져 있다
[심사평]
시 부문 심사 과정은 다소 곤혹스러웠다. 심사의원들 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심사위원들도 눈치를 본다. 가능한 한 원만하게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문예바다』에서는 왕왕 있는 일이지만, 심사위원들이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예심을 거쳐 심사위원에게 넘어온 작품은 모두 100편이었다. 10명의 응모자 분이었다. 심사위원들이 쉽게 합의를 본 것은 박윤근 당선자였다. 무엇보다 대상을 보는 시각이 범상치 않았다. 반려동물에서 길고양이로 버려지는 과정을, 문명의 해체와 야생의 복원(“백 묘에서 흑 묘로 가는 양식”)으로 달의 이지러짐과 대비시킨 「달빛 감는 고양이」를 비롯하여 「쇄빙선」 등은 어디 내놔도 흠잡을 데 없는 수작이었다. 게다가 오랜 습작을 거친 듯 대부분의 작품이 안정돼 있었다. 재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당선자를 정하고 나니 김부회의 시가 아깝다는 의견이 계속 나왔다. 그러니까 두 명의 당선자를 내자는 것이었다. 즉각 반발에 부딪혔다. 작품의 수준이 고르지 못하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서해에서」처럼 빼어난 작품성, 「스마트 파종」의 해학성, 그리고 「암연의 계보」처럼 솔직하고 넉넉한 삶의 여운을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다는 주장이 끝내 설득을 얻었다. 선을 통과했으니 무엇이 두려우랴!
차강석, 허유미의 시는 여러 번 되읽게 만들었으나 아쉽게도 선에는 들지 못했다. 차강석의 「RHWJDSHKSSUA」외 9편의 경우 비선형성과 우연성을 특징으로 하는 디지털 세계에 대한 문제의식은 좋았으나 감정(성)의 진폭이 다소 좁아 보였다. 앙상한 디지털에 반응하는 시적 언어의 풍부한 묘미를 계발하면 좋겠다. 허유미의 「내셔널 지오그래픽」외 9편은 발상은 참신했으나 형상화에 공들인 흔적이 왠지 좀 헐하게 느껴졌다. 「삿디」 같은 작품이 더 받쳐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문예바다』에 입항한 두 분 시인께는 큰 축하를, 다른 분들께는 정진의 격려를 드린다.
- 심사위원 안영희 문정영 김점용(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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