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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사방기념공원을 읽다 / 박희정


무방비했던 날에 대한 오랜 기억은 가물댔다

처참한 도벌과 남벌로 능선은 불안했고

민둥산 허허로운 눈빛들이 

초첨을 잃고 쓰러졌다


아득한 슬픔을 토해내는 산맥들

비와 바람과 무너짐

움켜진 것들이 속졸없이 사라지고

그 후에 오는 것들


헐벗고 모자라진 언덕은

자꾸만 바다로 향했다


여기, 영일만을 굽어보는 흥해 오도리

나무 한 그루, 삽 한 자루로

푸른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들

그들이 이고지고 옮긴 흙이 얼마이며

쏟은 땀은 또 얼마일까


파노라마와 디오라마의 찬란한 조화

팽팽한 바람이 부려놓은 곡선 따라

언덕의 어깨가 출렁출렁 춤춘다

초록의 희망이 푸들푸들 일어선다


내 안의 조급함과 네 안의 느슨함에 

친친 감고 엉겨 있던 질문들

상생의 푸른 언저리에 사방사방 내려놓고

더 이상 숲의 미로에 관해 판독하지 않기로 했다


크게 한 번 심호흡 하고 외쳐 본다

아름답다

거침없다

눈부시다







[우수상] 火蛇(화사) 또는 花蛇(화사)’ / 강태승


용광로에서 뱀이 나온다 저승보다

조용했던 쇳덩이 혓바닥 날름거린다

수백 수천 마리의 뱀이

하나의 뱀으로 쏟아지는

단지 철광석 고철이었던 것이

죽은 뱀이었던 쇳덩어리가

혓바닥 싱싱하게 꽃피우며

꽃보다 환하게 웃으며

무너지거나 쏟아지는

그러면서 덥기보다 뜨거운

느끼하기보다 격렬한 피

징그럽거나 서늘한 불꽃 없는 울음을

관에 붓자 까맣게 몸부림친다

희열과 슬픔이 하나의 자세로 식는다

철근으로 누운 뱜을 

두들기자 안으로 몸부림치는 화사火蛇


호미 괭이 삽으로 걸리고

절에서는 종으로 매달렸다

화사火蛇 또는 화사花蛇가 되어

제 것인 양 대담하게 난동부리다가

범종으로 걸린 옆구리를 치자

수만 마리의 뱀이 쏟아져 나와

귓속에 숨은 개구리 쥐를 먹고

알지 못한 짐승을 쫓아내고

다시 종으로 돌아간다

아무 때나 쳐도 뱀은 쏟아지지만

아침저녁 치는 것이

같은 뱀이라도 효험있다는 소문,

용광로에서 뱀이 나온다

한 점 죄 없는 싱싱한 뱀이

기쁨과 슬픔을 하나로 섞어버린

뱀이 다시금 내게 하얗게 웃는다








[우수상] 비단위에 철꽃이 핀 날 / 탁문갑


형체도 분별하지 못할 달뜬

철을 잡쥐고 꿈틀대는 용선길은 이동하는 설화

해처럼 붉은 연오랑 달 처럼 흰 세오녀다


한 주름 잠자던 철의 세포가 깨어나

노을빛 비단을 짠다


철의 척추가 자신의 뼈에다 '슈슈슈쉬쉬쉬쉿'

꽃비문을 새긴다


달이랑 별이 빛을 잃은 그믐

고철을 녹여보면 안다


고로 속의 햇덩이 같은 철의 화신이 비단을 짠다는 걸


쇳물로 흐르는 황금비단

골 따라가보면 안다


뜨거운 열망을 담금질하는

눈이 까만 낙타의 땀방울 속, 연오랑은 마천루같이 우뚝 섰고

세오녀는 진주로 엮은 대교처럼 드러누운

우주로 떠날 꿈이 발견되는 곳


옥빛운하엔 하얀 물길, 뱃고동 소리

사랑체이야기로 울면


동이 트는 영일만 철강굴뚝 끝

증발하는 설화가 가뭇없이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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