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의자 / 이재창
가을이 노랗게 떨어진
늙은 은행나무 아래는
휑하니 비어있는 의자 하나
낮은 몸 잔뜩 구푸린 채
낯선 이를 기다리고 있다
얼마나 기다린 것일까
녹슨 다리에 굽은 허리
색 바래 검버섯 피어있고
한쪽 귀퉁이는 이미 썩어
흉하게 내려앉아버렸다
오랜 세월 동안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탕자를 기다리던 아버지처럼
오지도 않는 이를 기다리다
홀로 늙어버린 빈 의자
방황하는 젊은이라도
삶에 지친 가장이라도
짝 잃어 외로운 노인이라도
누구든지 받아주고 싶은 데
언제든지 받아줄 수 있는 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더 늙어 보이는 빈 의자엔
가을햇살만 노랗게 내려와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있다
기다란 그림자만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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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빨간 담쟁이 / 최남규
저 장밋빛 불길! 저것은 생명의 절규다!
안으로 안으로만 타오르는 저 불길은,
카라코람 산맥이 앞을 턱, 가로막아
절망의 벽이 두억시니처럼 일어설 때
동서남북 어디에도 길은 없어
차라리 벽을 향해 눈길을 든다
절망의 벽을
소망의 계단으로 삼는 도전
안간힘 다해 옹벽을 기어오르는
저 오체투지의 피투성이 몸짓!
폭풍 속에도 변치 않는 향일성이
피를 움켜쥔 손가락을 옹벽에 박고 있다
생의 겨울이 오는 종심의 길목에서
마지막 남은 목숨을 사르는 노잔
안으로 안으로만 다진 소망에 불을 댕겨
자신을 밀어 올리는 불길이 된다
발돋움한 일편단심 한 줄기 갈망
천성을 향해 활활 타오르는 저 불길-
손바닥만치 남은 여생 죄다 모두어
절규하듯 하늘 보좌로 불꽃을 올린다
[우수상] 눈 속에 핀 한 달란트 / 임용남
싸락눈이 탱크같이 내리는 날
당신은 극빈을 동구 밖으로 밀어내려고
삼손의 나무꾼이 되셨다
그의 냉가슴은 늘 만선을 꿈꾸었고
호미 끝으로 새벽이 눈을 뜬다
때론 소쩍새 울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의 발가락을 몰아낸 진흙들이 고무신을
점령했을 때 나는,
양떼들이 모여 사는 성경책 속을 걸었다
그의 관자놀이 쪽으로 눈물의 강이 흐른다
그곳에 한 장의 편지가 떠다닌다
그 편지를 읽었다
성자 같은 천개의 은하수를 가슴에 안고
폭풍만이 떼 지어 사는 길을 걸었다
지금, 바람에게 그늘을 내어주고 있다
영혼이 없는 양을 안고,
천상으로 가는 가시밭길을
오르고 또 오르고 있다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푸르게 들려왔다
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우수상] 가을이 눕는 소리 / 허미강
나무의 귓가에는
툰드라* 벌판, 바람의 노래가 들리나보다
살뜰히 수액(樹液) 거두어 지친 철새의
입가를 적셔주고
나날이 수척해가는 가을 나무
땅 속 벌레와 풀씨들 덮어 주려
파리한 낙엽, 기꺼이 바스라진다
국화 향기 훔치는 길고양이 잔등에
어른거리는 감나무 그림자
기우는 노을은 땅거미 지도록
서녘 자락에 온기 펴 바른다
기도를 움켜쥐고 달려 온 손돌바람**
빈 가지 휘감고 위를 향해 차오른다
된서리 엉기는 밤
먼 산 부엉이의 선 울음소리
* 툰드라-늘 강풍이 몰아치는 북극해 연안 동토 지대
** 손돌바람-(순우리말) 11월 말경 부는 매서운 찬바람
[심사평] ‘침묵의 울림’ 가슴에 다가오는 작품들
국민일보와 한국기독교문화예술총연합회가 공동 주최한 신춘문예 신앙시 공모에 대한 호응도와 작품 수준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제7회째인 올해에는 지난해의 배에 이르는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1320명의 응모자가 각자 3편씩 제출한 약 4000편을 10명의 예심위원들이 읽고 30편의 후보작으로 압축하는 큰 수고를 했습니다.
본심으로 올라온 후보 작품들을 놓고 유승우 박이도 김소엽 김후란 시인 등 4명의 심사위원들이 지난 10일 연합회 회의실에서 심사를 했습니다. 2차로 고른 작품들은 소리 내어 낭독하면서 논의를 해 만장일치로 선정하는 신중한 심사과정이 있었습니다.
좋은 시는 그 가장자리에 침묵의 그림자를 드리운다고 했던 봐레리의 표현대로 시의 완성도에는 그 시를 읽으면서 보이지 않는 침묵의 울림이 가슴에 다가와야 합니다. 특히 다른 신춘문예와는 성격이 다르게 시로서도 성취도가 있어야 하지만 그 바탕에는 신앙심이 녹아들어 있어 자연스럽게 기독교 정신이 전해져야함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수상작을 비롯해 응모작 모두 신앙심 위에 아름다운 시의 집을 지었다고 하겠고 국내외에서 작품들을 보내와 이 행사의 뜻과 격을 높여준 점 고맙게 생각합니다.
영예의 대상에는 ‘빈 의자’(이재창)를 선정했습니다. 작품은 읽고나서 어떤 경건함을 느끼게 하는 묘한 여운이 있습니다. 현란한 수사나 과장된 표현 없이 깊은 내면의 성숙도가 배어 있습니다. 낡은 빈 의자는 누군가가, 아니 누구든지 고단한 이가 와서 앉기를 기다려줍니다. 삶의 행보가 바쁘고 고달픈 현대인들에게 이리 와서 내 품에 기대라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려주시는 그분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최우수상의 ‘빨간 담쟁이’(최남규)는 첫 구절부터 읽는 이를 끌어당기어 범상치 않은 작품세계를 연상케 했습니다. ‘안간힘 다 해 옹벽을 기어오르는 저 오체투지의 피투성이 몸짓!’으로 흔한 담쟁이가 이렇듯 도전하는 생의 불길로 살아나면서 뜨거운 신앙심을 일깨워주는 호소력 강한 작품입니다.
우수상의 ‘가을이 눕는 소리’(허미강)는 시적 서정성과 완성도가 돋보인 점이 높이 평가되었고 ‘눈속에 핀 한 달란트’(임용남)는 격조 있는 이야기를 시의 은유법과 반전하는 표현으로 재치 있게 써낸 매력 있는 작품입니다. 위의 작품 모두 주제와 접근방식은 다를지라도 시로서의 완성도와 그 기조에는 기독교 정신의 영험성이 감돌고 있어 올해의 신춘문예 신앙시 수상작으로 선정합니다.
- 심사위원 김후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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