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 / 류인채
배가 볼록한 돋보기
아버지는 이 확대경으로
빛을 모으셨다
검은 동그라미로 본
그 밝은 약속을
한 획 한 획 정성들여 공책에 적어
자식들에게 주셨다
이 작은 돋보기 하나로
홍해를 건너고
가나안까지 거뜬이 넘어가셨다
우리가 잠들었을 때도
여리고성을 몇 바퀴나 도셨다
어둠 속에서 고요히 빛을 만나고
병상病狀을 들고 걷기 위해
쉬지 않았던 아버지,
치매도 살라 버리셨다
가끔 휜 융으로 유리를 닦으며
가슴에 자리 잡은 우상도
하나씩 깨트리셨다
내게 그 밝은 눈물 물려주신 아버지.
볼록한 중심으로 빛을 모아
아버지가 가신 하늘을 펼쳐본다
미처 가보지 못한 구석구석까지 환하다
[수상소감] "주님 나라 위해 나를 드립니다"
‘돋보기’는 새벽기도 때 불현듯 떠오른 영감을 표현한 시다. 응모하고 금식기도 하는 중에 출애굽기를 묵상했다. 모세의 탄생과 구원 이야기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듯 아버지의 고난 뒤에도 개인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
모세가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고 예배자가 되자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일에 사용됐던 것처럼, 주님 나라를 위해 이제 나를 드리고자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영감으로 환상을 보며 하나님의 일이 사명이 되도록 받은 달란트를 사용하려고 한다. 믿음의 ‘돋보기’를 물려주신 아버지, 딸의 시를 읽고 감동해 목이 메는 어머니, 아내의 성장을 돕는 남편과 사랑하는 자녀들, 부천광림교회 이한배 목사님과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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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기도의 연줄 / 허정진
푸른 영혼의 강가에 기대어
높은 곳 하늘 끝에 오르는 살진 방패연
덜커덩, 낯선 바람이 연줄에 올라타고 있다
구름의 포를 뜬 창호지 하나
한줄기 미풍에도 바르르 몸을 떨던
문풍지 우는 여린 마음
뼈마디 같은 꽁숫달에 몸을 일으키고
오래된 그리움을 풀어쓰기 한 장방형 연서
어둠 뚫고 새벽길 내려앉은 달빛처럼
둥글게 방구멍 낸 하늘걸음이 가뿐하다
햇살의 결과 겹으로 만든 연실은
한설삭풍에도 웅크려들지 않는
믿음의 푸새 먹인 생명줄
말도, 소리도 없는 미세한 떨림만으로
사지를 돌고 돌아 심장에 이르는 실핏줄처럼
이 끝과 저 끝을 연결하는 기도자의 동선
당기고 풀어내며 멈추는 일 없이
성령의 보금자리에 둥지 튼 연을 지탱하며
결코 놓치지 않는 언약의 끈
허공은 그걸 받아주려고
바지랑대 치켜든 빨랫줄처럼
밑줄 친 말씀 한 구절 팽팽히 잡아당긴다
누군가 위에서 당겨주고 있는 느낌
손안에, 짜릿한
그 응답!
[수상소감] “선교문인 사명감 갖고 정진”
40여년 전 고등학교 때 신앙문예지 편집을 맡아 몇 달을 교회 다락방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있다. 그때는 등사기로 책을 만들었다. 교인들이 보낸 원고를 한 자 한 자 철필로 원지에 써서 등사기로 밀면 깨알 같은 글자들이 까맣게 박혀 나왔다. 그때의 보람과 감격이 새롭다. 신앙시는 주님의 시를 받아 적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시어를 다듬느라 시간을 손질했을 뿐, 마음 그대로 떨림 그대로 살아있는 주님의 말씀을 정성껏 담았다. 선교문인의 직분과 사명감으로 묵묵히 정진하겠다.
[우수상] 물 / 권병대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 절망의 이름으로 새겨진
까마득한 첫 번째 심판의 날에
슬픔을 딛고 찬란하게 떠오른 무지개를
온몸으로 품어 안고
담담하게 비춰주던
오색 빛깔 무지개의 집입니다.
저기 한 나그네가 앉아 있네요.
눈앞에 다가오는 환란이 두려워
선뜻 강을 건너지 못하고
쪼그라든 가슴만 후벼 파고 있네요.
나는 그에게로 다가갑니다.
그의 끊어진 환도뼈를 어루만지며
잔잔하게 흐르고 또 흘러내립니다.
어디에서 왔을까요.
지치고 곤한 인생길에서
눈물마저 말라붙은 사람이 있네요.
큰 짐을 지고 먼 길을 향해 걸어가다가
광야 끝 막다른 길에 다다른 사람입니다.
나는 그의 얼룩진 발을 품에 안고
먼지 한 올까지 씻고 또 씻겨주었습니다.
세월의 강을 따라 흐르고 또 흘러가다가
굴곡진 삶에 정수리까지 딱지가 앉아
사슬에 묶여 끌려가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울어울어 서러운 눈물이 강을 이루고
바다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데
상처를 치료할 눈물 한 방울이
절실해 보였습니다.
이제 나는
온 세상으로 흐르는 물이 되려 합니다.
언덕을 흘러 골짝을 덮고
메마른 산천에 새 움을 틔우며
가난한 마음에 꽃을 피우게 하는
갈보리 산꼭대기의 눈물 한 방울을
이 한 몸에 가득 품어 안고
갈급한 영혼들을 향해
흐르고 또 흐르는 물이 되려 합니다.
[수상소감‘ “시로 선한 영향력 끼치고파”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해 지금까지 40여년을 시를 쓰고 있다. 작품성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습관적으로 썼다. 최소한의 시적 요건이 갖춰지면 SNS를 통해 지인들과 나눴다. 모두 좋아해줬다. 그래서 가볍고 쉽게 시를 썼다. 그러다 더 좋은 시를 써보고 싶다는 갈증이 생겼고 신춘문예의 문을 두드렸지만 탈락했다. 그래도 계속 두드리니 이렇게 좋은 상을 받게 됐다. 앞으로도 좋은 시로 소통하고 시를 통해 선한 영향력도 끼치고 싶다.
[최우수상] 아버지의 장갑 / 전아름
노트를 살 때마다
아버지의 손 때 묻은 장갑 냄새가 난다.
새벽 여물을 주러가는
아버지의 발걸음.
그 몰래 따라 들어온 서늘한 냄새,
잠결에 이마를 때렸지만
언제나 나보다 먼저 부스럭거리는
저 어린 것들이 있어 분주하게 아침을 쫓고있었다.
서투른 대학 생활만큼
봉투는 얇았고 교재는 두꺼웠고 걸음은 무거웠다.
그러나 저녁 우리 집엔
여물지 않은 생명들이 땅바닥을 비비고 있고
닭똥마저 귀한 양식처럼 든든하게 쌓여있으리라.
가난한 바람 벽 그 무거운 짐 진 우리 아버지
굽은 고목과 같은 그 나이테 보듬어주시는 하늘 아버지
해진 장갑 사이 씻어도 지울 수 없는
축축한 그 냄새 한 올갱이,
멀리 너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수화기 느린 목소리가
서울 학교 가는 길목마다 살짝 걸쳐져 있어
지하 자췻방 눅눅함마저 서늘하게 감싸버렸다.
젊음만큼 어두운 새벽
그 분주함을 가르는 어린 공기들은
귀에 익은 말씀처럼 내 방문을 두드렸고
시골집 감나무에는 감이 떨어졌다.
소 여물 흥얼거리는 아버지의 찬송 소리가
도서관 가는 길,
작은 별처럼 피어나 내 앞을 비추고 있었다.
[수상소감] “말씀으로 삶의 위로받으며…”
화려하지 않아도 매일 하루의 바람을 견디고, 햇볕을 온전히 감당하며, 새벽마다 이슬을 상쾌하게 머금고 있는 길가에 핀 백합화를 보면서 나를 보는 듯했다.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을 암송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공부했다. 힘들 때 기도하고 기쁠 때는 찬송을 불렀다. 말씀은 고단한 청년의 삶에 위로가 됐다. 매일 기도해주시는 한철동 목사님과 새벽기도를 하시는 부모님, 시 세계로 인도해준 정현우 시인에게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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