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보행차 / 오정순
앉고 싶을 때 앉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만은
저 노인은 서고 싶을 때 설 수 있는 날들이 많지 않다
풀썩, 직립의 보행을 주저앉히는 것은 아득한 역진화의 기억이다
노인의 외출과 동행하는 은빛 보행차,
생의 마지막 공궤를 받들 듯
의자가 달린 보행기를 모시고 간다
비어있는 의자에 경적과 깜빡거리는 푸른 보행시간이 앉아 있다
걸음의 거리가 지리멸렬할수록
보행기가 굴리는 바퀴의 공회전이 많아진다
의자는 다리를 받치는 부속물
수시로 찾아오는 퇴행의 증세들이다
그럴 때마다 휘청거리는 걸음과 날카로운 통증을 모셔 들인다
가까운 거리를 몇 겹 덧대면 보이는 먼 곳
언제부터인가 가야 할 길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골목 어느 한 귀퉁이가 한 생처럼 휘어져 있고
처마 밑 그늘에 햇살 걸음도 잠시 쉬어 간다
앉을 수 있는 날들은 다 서서 걸어왔거나 걸어간 후에 있다
이제 마지막 의자에 통증과 나란히 앉아 있다
두 다리 위에 아이를 올려놓듯
의자를 묘지로 삼고 싶다는 듯 잔뜩 웅크리고 있다
노인이 다시 일어서고
남아 있는 길의 거리를 경배하듯 저 굽어진 몸으로 휘어진 골목을
돈다
네 개의 바퀴와 굽은 허리 하나
더 이상 수리할 곳 없는 오후의 한때가
은빛 바퀴를 굴리며 가고 있다
[당선소감] 늦은 시작이지만 열정은 영원히
은빛 보행차를 밀고 가는 노인의 구부정한 허리와 절뚝거리는 다리는 가슴이 먹먹한 시였다. 하지만 나는 생의 마지막 공궤가 될지도 모르는 의자 주인의 푸르렀던 보행의 시간과 두꺼운 통증을 표현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내 왼쪽 무릎에 긴 흔적을 갖게 되면서 비로소 빈 의자에 다리를 올려놓은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골목처럼 휘어진 삶의 굴곡과 통증으로 굳어진 시간들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한 편 한 편의 시가 통증을 새긴 후에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체험의 부재에서 캐내야 할 시적인 발상과 상상과 비유의 작업이 멀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겠다. 늦은 시작이지만 시를 향한 열정은 시들지 않을 것이고 사유는 진화할 것을 믿기 때문이다. 비워있는 나의 의자에 긴 울림이 있는 시를 모시겠다.
딸을 위해 기도의 끈을 놓지 않으시는 아버지 엄마, 남편 호걸씨, 두 아들 대식 윤식, 감사드린다. 사물에게 부지런히 말을 걸라고 하시던 손광성 선생님, 시의 발자국 떼는 법을 가르쳐주신 이재무 선생님, 큰 절로 감사드린다. 두목회 글 동지들, 덕희 수정 미자 그리고 선희 언니, 김주. 그대들의 거침없지만 끝은 아프지 않은 회초리, 사랑한다.
감당하기 두려운 '시인'이란 이름을 주신 평화신문사와 심사위원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나를 일으켜 세워주신 하느님께 모든 영광 드린다.
[심사평] 사물에 대한 관찰력, 묘사 돋보여
시를 쓰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니라 시심이다. 마음의 바탕이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는 데 있지 않으면, 인생의 희로애락과 인간 생로병사의 비의를 탐색하는 데 있지 않으면, 그 시인은 시를 쓰는 기술자이지 시인이 아닌 것이다.
평화신문에 투고한다고 해서 반드시 신자일 필요는 없다. 또한 주제가 신앙심이나 영성이어야만 하지도 않고, 성경에서 모티브를 가져와야만 하지도 않다. 우선 좋은 시여야 한다. 그리고 그 시가 좋으려면 진실한 마음(흔히 '진정성'이라 한다)으로 써야 한다. 바로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오정순의 '은빛 보행차'를 당선작으로 뽑기로 했다.
지팡이를 대신해 노인의 보행을 도와주는 유모차 비슷한 것이 있다. 이 시는 바로 그 보행차가 시의 초점이 된다. 몸이 불편한 노인에 대한 과도한 동정심이나 부자연스런 행동에 대한 과장된 표현 대신 사물에 대한 꼼꼼한 관찰과 세심한 기록이 이 시의 덕목이다.
그런데 사물에 대한 관찰기록 속에는 한 존재의 말년이 참으로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보행차는 은빛을 띠고 있고, 그 빛나는 사물이 바로 노인이다. '햇살 걸음'의 발견도 놀랍지만 '네 개의 바퀴와 굽은 허리 하나'가, '더 이상 수리할 곳 없는 오후의 한때'와 함께 은빛 바퀴를 굴리며 가고 있는 광경에 대한 치밀한 묘사는 미상불, 눈부시다.
'피에타'(김형미)는 병실에서 늙어버린 어머니와의 나날을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수놓은 작품인데 받쳐주는 시들이 약했다. '책의 장례'(김은호)는 전반부의 견고함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다락방에서 본 풍경'(정순)은 추억담을 들려주는 입담이 여간 활달하지 않은데, 그 이야기를 하나의 주제의식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있었다. '압록 매운탕'(조송이)은 참 좋은 소재인데 소품에 가까워 좀 더 의욕을 갖고 퇴고했으면 한다.
"백부가 인절미 담긴 칠기를 던졌다 학이 날던 다완도 함께 날아갔다"로 시작되는 시와 "누군가 걷어내는 걸 잊어버린 물그림자"로 시작되는 시를 쓴 두 응모자는 기성시인임이 심사과정에서 밝혀졌다. 전자는 오랫동안 활동하지 않았다 하고, 후자는 유명하지 않은 출판사를 통해 등단한 뒤 시집을 2권 냈다고 했다. 이런 분이 구태여 신춘문예를 다시 두드릴 필요가 있을까? 공자가 시를 '사무사'(思無邪)라고 한 이유를 가슴에 새겼으면 한다.
- 심사위원 정호승, 이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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